한국 상고사에 조예…현장 중심 지식 쌓아
강후진은 18세기 전반에 활동한 사람으로 전라도 무장현(茂長縣) 출신이다. 그는 상고사를 비롯해서 우리나라 역사에 관한 특이한 관점과 식견을 지녔으며, 유적을 직접 답사해 기록한 저술가이자 고고학자다.
본관은 신천(信川)이며, 자는 순보(順甫), 호는 스스로를 태평산인(太平散人)이라 칭하였다. 1685년(숙종11)에 태어나 1756년(영조32) 5월 2일에 72세의 나이로 죽었다. 그는 경학과 역사에 밝았으며,'와유록(臥遊錄)','감영록(鑑影錄)','화이잡록(華夷雜錄)','역대회령(歷代會靈)','송사록(松沙誌)' 등 많은 저술을 남겼다. 또한 집안 세보에 보면 그는 전국을 두루 유람하면서 자신의 성씨 족보와 유적을 살펴서 '초보(草譜)'(3권)도 만들었다고 한다.
'신천강씨세보'에 강후진는 무장 갈마곡파(渴馬谷派), 용장파(龍庄派)에 속한다. 신천강씨는 14세 고려조 지연(之淵)를 중시조로 황해도 신천·곡산·재령 일대을 본관으로 하고 있다. 19세손인 류(旒)가 1453년(단종1) 계유정난(癸酉靖亂)에 벼슬을 받지 않고 영광 홍농으로 숨어 들어 스스로 둔암(遯庵)이라 했다. 류의 아들 윤석(允碩)이 무장 갈마곡(현 고창군 대산면)으로 이주하였고, 24세손이고 덕민(德民)이 정유재란 때 출전하여 남원 운봉에서 순절하였다. 후진의 증조인 귀생(貴生)은 용장(현 고창군 아산면 남산리)으로 이주한 것으로 보여지며, 후진은 아버지 유태(有泰)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강후진은 위로 이형(以亨), 후범(候範)의 형이 있고, 아래로 서자인 동생 후준(候寯)이 있었다. 하지만 그는 족보상 어머니인 나주정씨가 별세하고 2년후에 태어났기에 정실이 아닌 계실 소생으로 추정된다.
그의 저서인 감영록에 의하면 그는 많은 제자를 두었고, 친지가 곳곳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1859년(철종 10)에 증조 귀생을 기리기 위해 용장마을에 영모재(永慕齋)가 건립되었고, 이 곳에 조선말기 호남 의병장인 송사(松沙) 기우만이 글 썼다는 것, 조부 지수(智水)가 사호(沙湖) 오창익(吳昌益)과 사예(司藝) 이담(李譚)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문장과 덕망이 높았다 것 등을 통해 학문적 단면들을 찾아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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