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남도 합천 해인사는 9월 23일부터 45일간 창원 컨벤션센터에서 '2011 대장경 천년 세계문화축전'을 연다고 한다. 우리 국보인 팔만대장경은 고려 현종 2년에 거란의 침입을 계기로 판각되어 1087년에 완성되었다가 1232년 몽골의 침입으로 소실된 것을 1236년에 다시 판각해 1251년에 완성되었다.
팔만대장경은 13세기에 만들어진 세계 최대 규모의 인쇄용 원판이면서 빠진 부분이 없는 완벽한 전질이라는 점에서 그 가치가 높다고 한다. 일찍부터 제대로 된 목판 대장경을 갖지 못했던 일본은 중국과 우리나라의 대장경을 무척 부러워했다.
일본이 우리나라에 대장경 인쇄본을 달라고 처음 요구한 것은 고려말인 1388년, 우왕 14년에 우리나라에서 잡아간 포로 250명을 돌려보내면서 부터였다. 그 이후 조선에 와서도 효종 때까지 80여 차례에 걸쳐 대장경을 요구했다. 임진왜란 때에는 왜군이 해인사와 가까운 성주까지 침입했으나 팔만대장경을 약탈할 수 없었던 이유는 경상도 각지에서 일어났던 의병 때문이었다.
의령의 곽재우, 합천의 손인갑,정인홍, 고령의 김면, 진주의 조종도 등이 의병을 일으켜 가야산에 방어선을 치고 왜군의 해인사 침입을 막아냈던 것이다. 서산대사의 제자인 소암대사도 승병을 이끌고 왜군을 막아냈던 것이다. 그후 한국전쟁 때, 팔만대장경은 다시 위기를 맞이했다.
전쟁이 한창일 때 인천상륙 작전으로 인해 퇴로가 막힌 북한군은 해인사를 기점으로 게릴라전을 벌이고 있었다. 한국군과 유엔군은 대대적인 소탕작전을 벌이게 되었다. 상부로부터 해인사를 폭격하라는 명령을 받은 김영환 대령은 해인사 팔만대장경이라는 국보의 존재를 이미 알고 있었기에 해인사 주변 숲에다가 기관총만을 난사하는 기지를 발휘해 대장경을 구해냈던 것이다.
전쟁 중에 상부 명령을 거부한 것은 명령 불복종죄로 총살감이었지만 그는 죽을 용기와 각오를 했었던 것이다. 2002년, 해인사 성보박물관에서 절로 통하는 길목에 '김영환 장군 팔만대장경 수호 공적비'가 세워졌다. 비문에는 이렇게 쓰여져 있다. "여기 화살같이 흐르는 짧은 생애에 불멸의 위업을 남기고 영원히 살아남은 영웅이 있다. 김영환 장군 만세!"
/ 장세균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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