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가 밥상을 차리기 위해 반찬들을 그릇에 담아 놓으면 나는 그 반찬들을 가져다가 밥상에 차려 놓는다. 어쩔 때는 밥을 푸라고도 하는데 밥을 푸려고 밥솥을 열 때 김이 확 솟아오르는 밥통을 바라보는 것을 좋아 한다. 하얀 김이 솟아나는 것도 좋지만 김이 걷힌 후 밥솥 속을 바라보는 일이 더 즐겁다. 김이 솟아나면 밥 밖으로 나와 있던 물기가 스며드는 피시시하는 소리도 좋고 하얀 밥 티들이 이리저리 누워 있는 모습은 정말 눈부시다. 쌀이 불과 물을 만나 밥이 되는 그 신비함이라니. 지금 밥통은 웬 일인지 밥에 구멍이 송송송 뚫리지 않지만 시골에서 불을 때서 한 밥들은 밥솥을 여는 순간 밥에 송송송 뚫린 까만 구멍을 바라보는 일은 늘 즐거운 일이었다. 아무튼 주걱으로 밥을 뒤적여 흰 쌀밥을 밥그릇에 퍼 담을 때 밥그릇에 담긴 밥을 보면 그 또한 아름답고 신비롭다. 흰 그릇에 담긴 흰 쌀밥을 밥상에 올려놓고 가만히 보면 이렇게 밥이 되기까지의 밥의 여정이 생각난다. 하얀 쌀밥 속에 푸른 완두콩이라도 드문드문 섞여 있으면 "우와! 예술이다 예술!"이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밥뿐이 아니다. 하얀 접시에 가지런히 썰어 살며시 얹어 놓은 붉은 김치는 또 어떤가. 콩나물 국, 상추 속에 가만히 놓여 있는 풋고추, 부글부글 끓고 있는 된장국, 가닥 채 넣고 끓인 김치찌개, 나란히 놓인 젓가락과 수저, 밥상 위에 차려진 모든 반찬과 밥을 한 눈으로 들여다보고 있으면 이렇게 사물들이(반찬들이) 조화롭게 배치된 그림이나 사진이 없을 것 같고, 마음을 풍요롭고도 아름답게 해 주는 이만한 산문 한편이 세상에 또 어디에 있을까, 싶다.
저녁밥을 하기 위해 아내랑 시장에 따라갈 때가 있다. 나는 재래시장에 가는 것을 좋아 한다. 재래시장에 가면 상점 주인들이 대개 나이 드신 분들이다. 물건을 사고 팔 때 그 판을 즐겁고 재미있고 신나게 살려내는 신명을 아내는 가지고 있어서 상점 할머니는 늘 더 주려고 하고 아내는 늘 적게 받으려고 한다. 그 실강이의 몸짓 손짓 얼굴 표정, 마음 씀씀이를 읽는 게 나는 좋다. 이런 저런 반찬거리가 담긴 비닐봉지를 들고 걷는 발걸음은 늘 즐겁다. 때로는 시장 모퉁이에 있는 오뎅집에 들려 오뎅을 사먹다가 오뎅집에서 만든 호떡을 사먹는 바람에 저녁을 그 걸로 그냥 대신 할 때도 있다. 그 일도 아내와 나에게 하루를 홀가분하게 해 주는 일이어서 하루가 가뿐할 때가 있다. 재래시장은 내게 늘 큰 그림이다. 나는 늘 그 그림 속을 돌아다닌다.
그렇게 사 온 반찬거리로 반찬을 만들고 밥을 하는 아내는 늘 신바람이 나 있다. 부엌을 오가는 몸짓이 늘 가뿐해 보인다. 어쩔 때는 흥얼거리는 콧소리가 들린다. 밥을 하는 게 그렇게 즐거운가 보다. 아니 즐거워한다. 밥을 하는 일이야 말로 새로운 세계를 창조 하는 예술이라는 것을 아내는 알고 있는 것이다. 아니, 밥을 하는 일을 스스로 예술 행위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얀 쌀이 밥이 되고, 푸른 배추가 국이 되어 새로운 세계를 보여 주고, 할머니들에게서 신나고 재미있게 사 온 콩나물 한 주먹이, 콩나물무침이 되어 접시위에 차려진 그 모양들이 예술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밥 하는 일과 시 쓰는 일이 뭐가 다른가. 밥 하는 일이 그림 그리는 일과 무슨 차이가 나는가. 밥 하는 일과 영화감독을 하는 일이 다르다고 생각하며 차려진 밥상은 그 맛이 다르다. 예술의 가장 기본은 죽어가는 것들을 살려내는 생명력이다. 밥 티 한 알 놓여 있는 모양에서 전 우주의 이치와 질서, 그리고 그 엄연한 존재들의 팽팽한 기운과 긴장, 그들의 아름다운 조화를 읽는다. 하루 삼시 세끼 밥상은 장엄하다. 그러니 밥을 때운다고 하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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