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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나무 4

감나무는 나이가 들수록 점점 검어진다검은 가지에 쌓인 흰 눈의 대비도 고상한 느낌을 갖게 해 준다감나무가 흔하다고 해서 하찮게 보이진 않는다. 마을 근처 어디서나 볼 수 있지만 자세히 보면 귀티가 나고 함부로 범접할 수 없는 품격과 격조가 있는 나무가 감나무다. 오래 된 감나무는 오래 된 나무대로, 어린 감나무면 어린나무대로 다 자기의 품위를 갖추고 서 있는 모습이 품격이 느껴진다. 오래된 감나무에 몇 개 달린 붉은 감과 그 감나무에 앉아 있는 까치의 모습은 고졸하다 못해 문기가 넘치는 한국화를 연상케 한다. '근원 수필'을 쓴 김용준 선생의 감나무와 까치에 대한 글은 오래 된 고전이다.감나무 모습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모습은 뭐니 뭐니 해도 감나무가지에 눈이 쌓인 모습일 것이다. 다른 나무에 비해 가지가 굵고 검은 감나무는 눈을 많이 받는다. 뭉툭하게 꺾인 마디, 굵고 투박한 검은 가지에 가만가만 내려 소복하게 쌓인 눈은 눈이 부시다 못해 어지러울 정도다. 감나무 가지에 쌓인 눈이 여기저기서 천천히 허물어져 땅으로 떨어지는 모습은 적막을 깨운 것이 아니라 적막을 삼키는 것처럼 보인다. 감나무는 나이가 들수록 점점 검어진다. 검은 가지에 쌓인 흰 눈의 대비도 다른 나무에 비해 고상한 느낌을 더 갖게 해 준다.감도 잎도 다 떨어진 겨울이면 서산을 넘어 온 햇살을 받은 감나무가지들을 눈이 부시게 바라보는 것을 나는 좋아 한다. 뭉툭한 감가지에 떨어진 겨울 햇살은 눈부시다. 유리창에 턱을 괴고 내가 제일 많이 바라보는 것은 봄여름가을겨울의 감나무와 아이들이 노는 모습이었다. 모든 나무들이 다 그렇듯이 감나무도 나이가 들고 고목이 되어 이 가자 저 가지가 죽어간다. 뿌리에서 먼 곳으로부터 자기를 버리는 나무들의 자연사는 사람을 닮았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할머니는 강을 건너지 못하셨다. 강가에 이르러 강 건너 밭을 보다가 강가까지도 못 가신다. 회관에서 노시다가 회관도 못 가신다. 그러다가 집 마당으로 마당에서 마루로 마루에서 방으로 들어오셔서 돌아가셨다. 나무도 그와 같다. 감나무의 꾸밈새 없는 모습은, 오래오래 한 마을에 살면서 품성을 곱게 쓰고 자연으로 살아 온 동네 어른처럼 믿음이 간다. 사람도 저렇게 나이가 들면 자기 생각을 죽이고 버리고 가다듬어 살아 온 세월을 말해주면 좋겠다. 나는 그런 감나무를 닮은 시를 쓰고 싶다. 빈 나무로 서 있으면 또 그런대로 그 모습과 자태가 품격이 있는 감나무는 그러나 이제 사람들의 뒷전으로 물러났다. 토종감이 사람들로부터 외면을 받으면서 한 그루 두 그루 사라지고 이제 산이 되어 버린 옛 밭 터 숲속에 몇 그루 초라하게 서 있다가 가을이 되면 붉은 감의 얼굴을 보여주다가 만다. 사람들로부터 버림받아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은 토종 감들이 눈을 하얗게 뒤집어쓰고 꽁꽁 얼어 있는 모습을 보면 우리나라 농부들의 일평생 같아, 꽁꽁 언 감보다도 내 마음은 더 춥다. 자기 나라에서 자라는 과일 하나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고 내 팽개쳐 놓은 나라가 원망스럽기도 하다.감나무가 있는 가을 풍경은 아름답다. 감을 다 따고 까치 밥 몇 개가 달린 감나무 아래에서 보리를 갈다가 쉴 참이면 우리들은 돌멩이를 던져 감을 따 먹었다. 서리를 맞은 감은 아! 얼마나 달고 맛이 있었던가. 감나무가 있는 풍경 중에서 선운사 감나무도 아름답다. 키가 큰 감나무에 달린 붉은 감들은 우아한 검은 기와지붕과 어울려 그 풍경이 고즈넉하고, 그 감나무 아래 서서 감을 올려다보는 아이의 모습도 그림이다. 산길을 가다 보면 잡목들이 우거진 까칠한 야산의 초겨울 풍경 중에 붉은 감빛도 우리의 산야를 아름답게 그려준다. 감은 가난한 농촌 사람들에게 그리 큰 힘을 들이지 않고 얻을 수 있는 큰 소득원이었고, 농촌의 풍경을 끝까지 소박하고도 조촐하게 그려주던 나무였다. 감나무는 순박한 삶을 가꾸어 온 우리네 저 유구한 농부들과 그 운명을 같이 해 온 셈이다. 〈끝〉※ 그동안 제 글을 읽어준 독자 여러분들 고맙습니다. 저의 글 연재는 여기서 끝을 맺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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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12.18 23:02

감나무 3

곶감을 만들 때꼬챙이에 감을 열 개씩 꽂았는데아버지는 어쩌다가열한 개씩을 꽂기도 했다아이들을 위한 배려였다곶감을 깎고도 감이 남으면 병아리를 키우는 덧 가리나 커다란 소쿠리에 감을 담아 짚으로 따듯하게 덮어 높은 감나무 위나, 지붕위에 얹어 둔다. 그렇게 보관한 감을 눈 속에 파묻어 두었다가 감이 돌멩이처럼 단단하게 얼면 먹기도 했다. 감을 깎을 때 나오는 감 껍질은 실타래처럼 묶어 햇볕에 잘 말려 깨끗한 짚더미 속에 넣어두면 촉촉하게 젖고 껍질에 쌀가루 같은 것이 뽀얗게 생겨났다. 곶감에도 그렇게 뽀얀 가루가 저절로 생겨났는데 사람들은 그 걸 '옻 났다'고 했다. 옻이 떡가루를 뿌려 놓은 것처럼 뿌연 곶감이 좋은 상품이어서 사람들은 곶감을 팔러 가기 전에 쌀가루를 뿌리기도 했다. 감 껍질은 그냥 군것질로 먹기도 하고 호박떡을 할 때 호박과 같이 넣으면 여간 달작 지근한 게 아니었다. 농촌의 겨울밤은 정말 길기도 하다. 길고 긴 겨울밤은 군것질이 없는 농촌 마을의 밤을 더욱 더 길게 한다. 긴긴 겨울밤을 보내며 망태를 만들기도 하고 가마니를 짜기도 하고 덕석을 만들기도 해도 달은 중천이어서, 배가 출출해지면 사람들은 닭서리를 하기도 하고, 텃밭에 묻어 둔 무를 꺼내다가 깎아먹기도 하고 고구마를 삶아먹기도 하고 감을 내려다 먹기도 한다. 우리 동네 누님들이 우리 집에서 모여 놀았는데, 밤이면 온갖 서리들을 다 했다. 이것저것 하다하다 할 게 없으면 누님들은 남의 집 김장 김치를 꺼내다가 하얀 쌀밥을 해 먹기도 했다. 농촌 마을의 닭서리나 감 서리는 그래서 다 용서가 되었다. 감을 다 깎아 처마 밑이나 헛간에 매달아 놓으면 곶감은 가을 햇살과 건조한 날씨로 꼬독꼬독하게 마른다. 감이 다 말랐다 싶으면 아버지는 마른 곶감 꼬챙이를 거두어 방에 쌓아 놓고 접는다. 꼬챙이에 꿰어진 감을 접는다는 것은 곶감을 상품으로 완성시키는 일이다. 요새는 꼬챙이를 잘 사용하지 않지만 시장에 나가 있는 곶감을 보면 더러 꼬챙이에 열 개씩 꿰어져 있는 곶감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완성품을 만들기 위해 아버지가 곶감을 동글동글 예쁘게 접고 있으면 우리들은 옆에서 꼬챙이의 감 숫자를 센다. 꼬챙이에 감을 열 개씩 꽂아두는데, 어쩌다가 아버지는 열한개씩을 꽂아 둔 꼬챙이도 있다. 곶감을 접을 때 우리들에게 한 개씩 빼먹게 하려는 배려였고, 그 보다는 곶감을 말리는 과정에서 동네 사람들이나 아이들이 지나가며 한 개씩 빼먹는 수가 종종 있기 때문에 미리 예방을 한 셈이고, 곶감이 한두 개씩 썩을 수도 있기 때문에 대비를 해 두는 것이다. 감 한 꼬챙이가 열 개씩이고, 열 꼬챙이가 한 접이다. 감은 '접'이라고 하는데, 곶감 한 접은 백 개를 말한다. 그렇게 감을 고이 접는 다음 다시 한 접씩 묶어 또 말린다. 완성 된 곶감을 말릴 때는 가을 일이 다 끝나고 한가할 때여서 아이들의 서리 대상이 됨으로 아버지들은 감을 마루 끝 처마에 매달아 둔다. 아이들이 쉽게 접근을 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다. 가을 달이 높이 뜨고 서리가 하얗게 깔리면 우리들은 초저녁을 어영부영 보내다가 열두시가 넘으면 슬슬 밖으로 나가 낮에 보아두었던 곶감서리를 한다. 곶감 서리를 한 우리들은 곶감을 한 꼬챙이씩 나누어 들고, 곶감을 한개 씩 한 개 씩 빼먹으며 이웃마을로 천천히 걸어간다. 물론 곶감 씨를 여기 저기 띄엄띄엄 떨어뜨려 이 곶감 서리를 한 놈들이 이웃마을 사람들이라는 것을 표시 하면서 말이다. 그렇게 곶감을 쏙쏙 빼 먹으며 걷다 보면 이웃마을에 도달한다. 이렇게 겨울이 깊어 가면 감나무는 까치밥도 낙엽도 하나 없이 빈가지로 겨울을 지내게 된다. 동무들이 다 도시로 떠나고 홀로지내는 겨울 밤 내가 제일 견디기 어려웠던 것은 마른 감잎과 마른 지푸라기가 밤바람에 끌려가는 소리였다. 마른 마당에 이는 바람에 감잎이 끌려가는 소리는 홀로 사는 사람의 애간장을 긁기에 충분했다. 강 건너 앞 산 상수리나무에 달린 마른 잎이 바람에 수런거리는 소리와 감잎 뒹구는 소리를 견디기 위해 나는 시를 썼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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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12.11 23:02

감나무 2

나무도 한 해는 쉬고 싶은 것이다올라 갈 때가 있으면 내려 갈 때가 있고한 달이 크면 한 달이 작은 것은 자연의 이치요 순리다선지 빛 감잎이 장광에 떨어지는 것을 보고, 영랑은 '어매, 단풍 들것 네.'하며 놀랐다. 감잎이 다 진 감나무는 가을의 또 다른 풍경이다. 가난하고 누추한 마을의 여기 저기 붉은 감을 단 감나무는 우리나라만이 가지고 있는 가을 서정이다. 우리 동네의 감은 거의가 다 먹감이다. 먹감은 자생적인 토종감이다. 우리 동네에서는 다른 감나무는 자라지 않는다. 내가 단감나무를 한 그루 집에다가 심었더니, 감이 안 열리고 몇 해만에 죽고 말았다. 접시 같이 납작한 접시감나무가 몇 그루가 앞산에 있기도 하고, 요즘 구례 하동에서 많이 나는 어른 주먹만 한 끝이 뾰쪽한, 우리들이 '장두 감' 이라고 부르는 감이 찬수네 앞산 감나무 밭에 한그루 있었고, 수수감이 정수네 집 샘 머리에 한그루 있을 뿐이었다. 정수네 집에 있는 수수감은 어찌나 달던지, 우리들이 늘 욕심을 내는 감이었다. 그 감은 달고, 물기가 많았다. 그 감으로 동네 아이들 설사를 멈추게 하기도 했는데, 그 감은 오래 간수 하거나 저장 할 수가 없는 게 흠이다. 마을 곳곳에 있는 먹감은 열리기도 많이도 열린다. 주로 곶감을 깎는다. 붉게 읽어 갈수록 감 한쪽이 먹빛이 들어가는데, 그래서 그 감을 먹감이라고 불렀을 것이다. 감 중에는 똘 감이 있다. 똘 감은 곶감으로 깍지도 않는다. 떫기가 지독해서 잘 먹지도 않는다. 똘 감은 살보다 씨가 많다. 서리 맞은 똘 감은 지붕 위에 보관 해두었다가 추운 겨울날 내려다 먹었다. 감나무가 돈이 될 때에는 고욤나무에다 감나무를 접 붙였다. 고욤나무는 감나무 과다. 잘 자라고 강해서 사람들은 고욤나무를 가꾸어 적당하게 크면 고욤나무에다가 질이 좋은 감나무를 접붙여 가꾸었다. 고욤을 먹기도 하는데, 고욤을 따다가 작은 단지에 가득 넣어 두었다가 겨울에 수저로 퍼 먹기도 했다. 감을 딸 때는 감 망을 만들어 땄다. 감 망은 모자 같은 자루를 만들어 긴 장대 끝에 달아 높이 달린 감을 땄다. 감을 딸 때는 감나무 가지가 툭툭 잘 부러졌는데, 오히려 그것이 다음해에 감을 많이 열 개 하는 전지 구실을 했다. 감은 그 해에 새로 길어 난 새 가지에서 감이 열리는데, 감을 딸 때 감가지가 부러짐으로써 많은 가지가 새로 돋아난다. 감나무가 잘 부러진다고 해서 단단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동네에서 빨래방망이나 다듬이나 떡살도 감나무로 많이 만든다. 잘 부러지지만 의외로 단단하다. 감나무로 가구를 만들었는데, 여자 속살처럼 흰 바탕에 먹물 자국 같은 무늬가 그림 같아 감나무 장롱이나 가구는 비싼 값이 나갔다. 가을 일이 끝나 가면 감을 딴다. 하루 종일 딴 감을 방에다가 쏟아놓으면, 방안이 환했다. 감이 그렇게 방 가득 쌓이면 동네 어머니들은 품앗이로 감을 깎았다. 밤을 새워 감을 깎을 때 우리는 곶감을 깎을 수 없는 물렁물렁한 감을 가려 소쿠리에 담는 일을 했다. 물렁물렁한 감은 먹기도 하고, 썰어 강가 바위위에 말려 겨울에 먹었다. 그 것을 감 쪼가리라고 했다. 방 가득 쌓인 감을 밤새워 깎아 놓으면 아버지는 아침 소죽을 끓이며 그동안 다듬어 놓은 싸리나무 꼬챙이에 감을 꿰어 헛간이나 비가 잘 들이치지 않은 처마 끝에 매 달았다. 붉은 감이 굴비모양으로 엮어져 처마 끝에 매달려 있는 모습은 참으로 고즈넉한 농촌의 서정이 아닐 수 없었다. 그렇게 며칠 씩 감을 깎아 건조를 시키고 나면 감을 할머니 젖가슴처럼 쪼글쪼글 말라 갔다. 감은 자연으로 자라는 우리나라 많은 과일들이 그렇듯이 해 갈이를 정확하게 하는 편이다. 나무들도 해갈이로 잎을 피운다. 우리 동네 앞에 커다란 정자나무가 있는데 정자나무는 씨가 열리는 해는 잎이 그리 좋지 않다. 나무를 잘 모르는 사람들이 그런 나무들을 보고 나무가 죽어 간다고 오해를 하는 것이다. 나무도 한 해는 쉬고 싶은 것이다. 올라 갈 때가 있으면 내려 갈 때가 있고, 한 달이 크면 한 달이 작은 것은 자연의 이치요 순리다. 감이 많이 열린 해는 감이 작고, 감이 적게 열린 해는 감이 컸다. 그 또한 자연의 순리와 이치다. /본보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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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12.04 23:02

감나무

나는 감나무를 좋아 한다. 낯선 길을 가다가 감나무를 보면 정답고 반갑다. 감나무가 보이기 시작하면 마을이 그리 멀지 않기 때문이었다. 지금이니까 그렇지 옛날에는 곶감이 집안에서 큰 소득원이 되어주기도 했다. 우리 동네에서 조금 강을 따라 내려가면 천담 마을이 있는데, 순창 장날이 되면 수 십 명의 장정들이 곶감을 짊어지고 장으로 가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었다. 새잎이 피는 봄이 되면 나는 모양이 아름다운 감나무를 찾아다니기도 한다. 전주에서 시골집까지 가는 길 어디쯤에 모양이 좋은 감나무가 있는지를 다 알고 있다. 길가에 있는 모든 감나무를 나는 다 외우고 있다. 어디 쯤 가면 이만큼 큰 이런 감나무가 있고, 또 어는 밭가에는 저런 모양의 오래된 감나무가 있고, 또 어느 마을 어느 산길에는 이렇게 생긴 감나무가 있는지를 다 알고 있다. 그 감나무들이 떠오를 때마다 나는 우리나라의 아름다운 봄여름가을겨울을 생각한다. 까만 감나무 가지에 아기들의 젖니 같은 새잎이 돋아나는 감나무는 정말 눈이 부시게 아름답다. 그 젖니 같은 잎이 점점 커져 강에 사는 임실납자루 만하게 잎이 커지면, 아! 그 잎에 아침 햇빛이 찾아들면, 감나무는 찬란하고 황홀하다. 봄꽃은 지는 햇살로 보아야 서늘하고 가을꽃들은 아침 햇살로 보아야 영롱하다. 지는 햇살 뜨는 햇살은 모든 사물들을 입체적으로 뚜렷하게 보여준다. 산그늘이 내린 봄날의 풀밭을 보라. 얼마나 가슴이 서늘한가. 가을 아침 산길 강 길을 걸어보라. 작은 풀꽃들에 맺힌 이슬방울들은 그 얼마나 영롱한가. 감잎이 이제 떡잎 만하게 커지면 그 아름답고 찬란하던 연두색에서 진녹색으로 건너간다. 초록이 동색이 되어 갈 때 감나무는 그 보습이 가장 성숙해 보인다. 마치 첫 아기를 낳은 여인처럼 평화로워 보이고, 득도한 스님 같은 깊은 얼굴이 되어 있다. 그러면 감잎은 더 두꺼워지고 감꽃이 핀다. 감꽃은 또 얼마나 수수하고 그 색이 우아 한가. 감꽃이 필 때 감나무아래에 가보면 녹두 색보다 옅은 감꽃들이 많이도 떨어져 있다. 그 감꽃을 주워 실에 꿰어 목걸이를 만들어 걸고 다니기도 했다. 감꽃이 그렇게 지고 나면 감이 열린다. 서양 아이들이 잠잘 때 쓴 모자 같은 꽃받침에 싸인 작은 감은 짙은 녹색을 띈다. 감이 조금씩 커지며 감은 서서히 얼굴을 드러내기 시작하는데, 그 새파랗게 탱탱한 감을 땡감이라고 부른다. 느닷없이 젊은 사람이 죽으면 사람들은 땡감도 떨어지고 익은 감도 떨어진다고 하며 인생의 무상함과 덧없음을 떨어지는 감에 비유하기도 한다. 넓고 두터운 감잎에 청개구리들이 앉아 울기도 하고, 느닷없이 내리는 소낙비를 후두두둑 맞으며 땡감을 떨어뜨리며 여름이 서서히 끝나 가면 감의 얼굴이 하나 둘 붉게 드러난다. 감꼭지에 감을 파먹는 벌레가 생기면 붉은 감빛이 드러난다. 병들어 익은 감이 붉게 익기 시작하면 가을이 시작 된다. 하나 둘 그렇게 서서히 감들이 붉은 얼굴을 내 밀면 감 잎 속의 붉은 감색은 감잎 색이 어울려 아름답다. 아직 단풍물이 들기 전 기름 끼 자르르한 감잎은 그야말로 약이 오를 대로 올라 그 색깔이 겁이 날 정도로 짙푸르러진다. 많은 나무들 중에서 일찍 단풍물이 드는 나무는 벚나무와 감나무다. 활엽수들 중에서 잎이 가장 두꺼운 것이 아마 감나무 일 것이다. 그 두꺼운 감잎에 단풍이 들면 붉다 못해 선지 피 같아서 떨어진 감잎을 주어 들면 섬뜩할 정도다. 독 오른 사랑 같은 감잎이 땅에 떨어져 붉은 색깔이 다 사그라질 무렵이면 감나무에 달린 모든 잎들은 다 떨어진다. 감잎이 다 떨어져 버린 감나무는 그 전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마을 곳곳에 시정 넘치는 모습들을 뽐내고 서 있다. 붉은 감은 오래 된 우리나라 파란 가을 하늘을 완성하는 낙관이다. /본보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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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11.20 23:02

내 발소리가 들리는 길

초등학교 다닐 때 나는 강 길을 걸어 다녔다. 6·25전쟁 직후 산판이라는 게 있었다. 산에 있는 소나무를 다 벌목해 갔다. 지에무시라는 전쟁 용 트럭이 비탈지고 험한 산들을 올라 다니며 베어진 소나무를 실어 갔다. 힘이 센 지에무시는 웬만한 곳을 어디든 다 갔다. 나무를 실은 지에무시는 우리가 다니던 강 길에 새로운 길을 내며 지나다녔다. 그러나 그 길은 금방 큰 비로 무너지고 패여 작은 방죽이 되어버렸다. 우리들은 여전히 우리가 우리 발길로 낸 길을 걸었다. 우리가 다니는 길에 구장 네 솔밭이라는 넓은 강변이 있었다. 솔밭에는 어른들 팔뚝보다 조금 큰 앙당앙당 한 소나무들이 자라고 있었다. 키도 작았다. 큰 돌과 자갈과 모래로 된 그 길에는 우리 키보다 조금 작은 풀들이 자라고 있었다. 그 곳으로 우리가 다니는 길을 나 있었다. 오솔길이었다. 작년 풀들이 쓰러지고 새 풀이 자라면 그 밑에 키 작은 가랑나무 잎이 피어나고 가랑나무 잎 뒤에 물새들이 마른 풀로 집을 짓고 알을 까 새끼를 길러갔다. 작은 소나무, 검은 바위와 작은 자갈들, 그리고 모래와 풀들 사이로 난 좁은 길은 그림이었다. 바람이 불고 풀들이 흔들리는 사이로 아이들의 까만 머리통이 보였다. 내가 기억한 가장 아름다운 길이다. 전주로 와서 살면서 나는 친구 한명과 함께 화산 공원을 다니기 시작했다. 서신동 롯데 아파트에서 예수병원까지 걷는 길은 흙길이다. 오르고 내리고 평평하게 걷는 길이 아주 적당하다. 숨이 차는가 싶으면 내려가고 내려가는가 싶으면 또 작은 비탈길을 오른다. 반듯한가 싶으면 구부러지고 구부러지는가 싶으면 금세 또 반듯하다. 오르고 내리고 구부러지고 휘돌고 반듯하고 평평한 그 길에 참나무 잎이라도 떨어져 있는 가을이면 길은 그냥 그대로 그림이고 사진이고 시고 노래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 길을 걸어다녔다고 생각하면 길은 역사가 된다. 꿩이 살더니, 꿩은 보이지 않는다. 다람쥐가 살더니, 다람쥐도 보이지 않는다. 청설모가 이 쪽 가지에서 저쪽 가지로 뛰어 건넌다. 청설모와 다람쥐는 공생하지 못하는 모양이다. 도둑고양이들 때문에 꿩이 살지 못하는 모양이다. 생태계는 그렇게 변해 간다. 봄이면 그 길에 꽃이 피기 시작한다. 생강나무 꽃이 피고, 진달래도 피고, 조팝나무 꽃도 피고 똘배 꽃도 피고, 이팝나무 꽃도 피고, 때죽나무 꽃도 핀다. 국수나무 꽃도 피고 자귀나무 꽃도 피고, 산벚 꽃도 피고, 개복숭아나무 꽃도 피고, 아카시아 꽃도 핀다. 그 길이 지난 여름 큰 태풍으로 풍비박산이 났다. 오래 된 참나무 아키시아나무들이 이리저리 쓰러지고, 넘어지고 찢어지고, 꺾이고, 부러졌다. 아름드리 참나무들이 쓰러져 엄청난 뿌리를 하늘로 쳐들고 있는 모습은 나에게 경악을 금치 못하게 했다. 전쟁 영화 세트장 같은 참혹함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 길에 가을이 왔다. 참나무 잎이 지고 하얗게 찢어진 상처는 아물어가고 숲은 오랜 후에 다시 상처 받은 몸과 영혼을 추스르고 가다듬고 정리해 갈 것이다. 인생도 그러하다. 나는 그 길에서 새벽길이라는 산문시를 썼다.'까만 오디가 떨어져 있습니다. 툭, 떨어진 모양 그대로입니다. 흰 새똥이 떨어져 있습니다. 똥 부근 흙이 젖었습니다. 거미줄이 얼굴에 걸립니다. 미안하게도 오늘 제가 이 길에 처음 인가 봐요. 때죽나무 흰 꽃잎이 그림자도 없이 가만히 떨어져 있습니다. 바람이 없었나 봐요. 새가 걸어갔습니다. 왼쪽 가운데 발톱하나가 빠졌나 봅니다. 새가 마른 낙엽을 밟고 지나가는 바스락 소리, 배가 고픕니다. 가만 가만 걷는 내 발소리가 들립니다. 다 버리고 내 발소리만 데리고 어디만큼을 갑니다.' · /본보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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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10.30 23:02

음악이 들릴까?

소희야 가을이다. 우리 학교에 가을이 오면 좋지. 학교 뒤 밭 감은 해와 바람을 따라다니며 얼마나 붉게 익니? 그래, 덕치초등학교는 영원한 '우리 학교'지. 너희들을 떠난 후 어느 날 학교에 가 보았더니, 살구나무가 없어졌더구나. 다 산 거지. 서운했지만, 어쩌겠니. 내가 평생 보고 산 나무였다. 살구꽃이 피면 나는 늘 살구꽃잎이 내리는 꽃 잎 속에 앉아 글을 썼지. 살구나무는 내 지붕이었고, 내 책상이었고, 내 연필, 내 공책이었단다. 소희야 할머니는, 언니는 어떻게 지내시느냐. 궁금하구나. 현아야, 할아버지 할머니는 잘 계시느냐. 네가 처음 전학 온 날을 난 기억한다. 다리가 아픈 너를 업고 점심을 먹으러 다녔지. 네 얼굴에서 네 아버지의 얼굴을 떠올리며 나는 놀랐단다. 네가 처음 쓴 글'바스락 소리/ 뭘까?' 는 내 삶의 기억 속에 또렷이 남았단다. 세상을 향해 처음 귀를 번쩍 뜨던 사랑의 소리를 너는 잡아냈지. 승진아, 지금도 그림을 그리는지 모르겠구나. 도화지에 코를 박고 그림을 그리던 기억이 새롭다. 어머니는 언니는 잘 있고, 아버지는 지금도 그림을 그리러 다니시느냐. 승진아 네 옆에 앉아 네가 그려내는 세상을 바라보며 나는 행복했단다. 두환아, 새로 얻은 세 번째 동생은 잘 크느냐. 큰 형인 네가 동생들을 잘 돌보는 너른 마음을 나는 좋아했지. 형다움을 키워가는 너는 착했지. 잘 울었잖아. 잘 운 사람은 착한 사람이란다. 동생의 쉬아 소리를 비오는 소리로 생각한 네 글을 보며 우리 웃었지. 강산아, 지금은 어느 공사장에 있는지? 네 머리통을 보며 나는 강호동을 생각하며 웃곤 했다. 어쩌면 그렇게 강호동을 닮았는지, 성민아 할머니, 아버지는 잘 계시지. 어느 날 할머니를 만났더니, 성민이가 요즘은 집에 와서 생각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놀랐다. 자연을 보고 네가 하는 일에 대해, 마을과 산과 들과 곡식을 보며 생각하는 힘을 키우도록 너희들을 돕고 싶었단다. 날아가는 새를 보면, 내리는 눈을 보면 어찌 생각이 일어나지 않겠니? 생각은 세상을 바꾸고 가꾸는 힘이지. 머리통이 돌 같던 체환아, 어느 날 머리로 유리창을 받아 깼지. 참 내, 유리창이 깨지는지 안 깨지는지 머리로 받아보는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겠니? 그게 너였다. 잘생긴 민성아, 어느 날 너의 집 앞을 지나는데, 네가 나를 보고 달려와 나를 크게 껴안았지. 그 때 나를 올려다보며 환하게 웃던 네 모습과 그런 모습을 바라보며 환하게 웃던 네 어머니기 생각나는구나. 연희야, 아버지는 지금도 포클레인을 가지고 일 다니시느냐. 언젠가 밥집에서 보았다. 순하고 예쁜 연희야, 나는 네 아버지와 고모들과 작은 아버지들을 가르쳤지. 얼굴들이 다 동그란 모양인데, 너만 갸름한 얼굴이었지. 희진아, 머리를 깎고 선생님과 친구들과 학원 선생님과 엄마가 다 다르게 너의 모습을 이야기하는 글을 쓴 일이 생각나니? 내가 학교를 그만 두었을 때 너는 이런 글을 썼다. '김용택 선생님, 저 희진이예요. 항상 같이 지냈는데 헤어질 생각을 하니 벌써 보고 싶어집니다.' 그래 그렇구나. 희진아 보고 싶구나. 재영아, 나는 너에게 많은 잘못을 했다. 내가 어른인데 왜 내가 너를 더 이해해주지 못했는지 모르겠구나. 재영아, 네가 커서 우리가 어디에서 만난다면 나는 너에게 용서를 빌겠다. 나의 잘못은 어쩌면 너와 나만 아는 일인지도 모른다. 너를 생각하면 나는 늘 이렇게 속으로 말한단다. 재영아 나를 용서해다오. 너는 어느 날 이런 시를 썼다.'거미줄에/이슬이/동글동글/바람에 흔들린다.//가만히/들어보면/음악이 들릴까?'샛노란 가을 들녘을 바라보고 있자니, 너희들이 보고 싶어 이렇게 편지를 썼다. 모두 건강하게 잘 있거라. 방황이 있을 것이고, 슬픔이 있을 것이고, 고통이 있을 것이니, 그 걸 알 나이에 이르면 아이들아 그 것이 삶이니, 네 마음이 시키는 말을 따라가며 잘 다스리고 가다듬는 법을 터득하길 바란다./본보 편집위원

  • 문화일반
  • 기고
  • 2012.10.09 23:02

정치에서도 예술적 향기가 나길

6,7,80년대를 거치면서 가난에서 벗어나고 싶은 산업화와 억압된 독재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민주화운동을 우리는 동시에 겪었다. 실로 눈물겨운 시절이었다. 산업화를 등에 업은 독재와 그에 맞선 민주화라는 거대한 현대화의 행진은 우리들에게 그늘과 빛을 동시에 가져다주었다. 민주주의와 통일을 갈망하는 민주화운동세력의 희생과 아픔은 길고 그 고통은 컸으나, 그러나, 우리국민은 다행스럽게도 그 상처를 딛고 그들에게도 권력을 가질 기회를 준 위대한 국민이다. 그 아름답고 고귀한 희생정신은 오직 국민의 것이었기에 더 눈물겹다. 그 고난의 시대를 뛰어 넘어 그 고난으로부터 자유로운 정치세력이 등장했다. '고통이 꽃처럼 천천히 피어 난 것이다.' 다행스럽고도 다행스럽다. 새로운 정치세력의 등장은 민주화 세력과 산업화 세력에게도 위기가 아니라 기쁨이며 기회다. 민주화 세력과 산업화 세력을 가지고는 이제 변화된 세상에 대처할 수 없다는 우리 국민들의 당연한 요구가 아닐 수 없다. 그 세력을 대표하는 사람이 인용한 말을 재인용하자면 '미래는 이미 와 있다. 다만 퍼지지 않았을 뿐이다.' 미래를 불러 오는 국민들의 눈부신 열망의 손짓들을 보며 나는 목이 메인다. 산업화가 시작되면서 새로운 물건들이 나타났을 때는 모든 것들이 다 새로운 것들이었다. 그러나 8,90년대를 지나면서 새로운 것에 대한 관심은 공감을 주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제 관심과 공감을 넘어서 감동의 시대가 되었다. 드디어, 마침내, 비로소 우리는 전근대적인 감성에서 벗어나 세련된 현대성을 획득하고 자유로운 하늘을 비상할 기회가 온 것이다. 고착된 사회적 갈등과 분단이라는 장애가 우리들의 상상력을 구속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러나, 이 자유로운 감성이 오히려 그것들을 쉽게 녹일 수 있는 힘이 될 것을 나는 믿는다. 시대적인 필연과 요구가 피할 수 없는 현실이 되었다. 현실이란 피할 수 없으니 받아들이라는 말 아닌가. 그동안 흑백의 서정에 갇혀, 그것이 때로 틀리고 때로 또 맞는 일이었기에, 그 후에도 우리는 시대착오적인 이념 속에 갇혀 살았다. 이제야 우린 그 오래된 정치적인 억압의 굴레로부터 해방을 맞이하고 있다. 새로운 가치가 때지난 낡은 가치의 이쪽과 저쪽 벽을 때리고 울리는 새로운 경쟁의 출발점에 선 것이다. 해방과 분단 이후 한반도에 새롭게 펼쳐지는 이 세 갈래 풍경은 우리 국민이 그리는 찬란한 그림이다. 다시 정권을 차지하려는 세력과 정권을 교체하려는 세력, 그리고 세상을 바꿔 나라를 혁신하려는 시대정신의 충돌은 이기고 지는 싸움이 아니다. 지금 단일화를 논하는 것은 새로운 시대를 이끌어가고 있는 국민들에게 낡은 굴레를 씌우려는 정치적인 모욕이다. 정치 집단이 권력을 향할 때 역한 냄새가 나고 국민을 향할 때 향기가 난다. 정직과 진실이 통할 때 정치에서 높고 높은 도덕의 향기가 나는 것이다. 정직과 진실이 통하고 나의 진심이 다른 사람의 마음에 진정으로 가 닿을 그 때 그 진심이 일으키는 파문이, 파장이, 그 파란은 크고 아름답게 세상을 해방시킨다. '내가 으스러지게 설움에 몸을 태우는 것은/ 내가 바라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그 으스러진 설움의 풍경마저 싫어진다. /나는 너무나 자주 설움과 입을 맞추었기 때문에/ 가을바람에 늙어가는 거미처럼 몸이 까맣게 타버렸다.' 정치와 시가 한 몸이 되어 세상을 온몸으로 밀고 가자던 시인 김수영의 '거미'라는 시다. 새로운 시대정신은 정직과 진실이 통하는 진심을 만나는 일이다. 국민들은 정권을 바꾸자는 것이 아니라 나라를 바꾸자는 진정성을 보고 싶다. 국민은 이제 어느 한쪽의 편이 아닌 국민의 편을 원한다. 이제 드디어 우리 국민이 자유롭게 권력을 선택하고 나라를 이끌어 갈 시대가 되었다. 그러니 모든 것을 국민에게 물어보라. · /본보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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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원용
  • 2012.09.25 23:02

꽃을 주세요

오래 가뭄과 폭염 그리고 거센 태풍이 산천을 훑고 지나갔지만 가을꽃들이 피어난다. 문득 한 소식 전해 오는 선선한 바람이 나의 세상을 새롭게 한다. 새로 보이면 그게 사랑이다. 아니면 이별이거나. 달라진 세상으로 우리의 발걸음을 옮긴다. 그 곳에 구절초 꽃이 피어나더니, 쑥부쟁이 꽃도 피어난다. 마타리 꽃도 피었다 이르고 물봉선 꽃도 피었다 일러라. 고마리 꽃이 피었구나. 억새도 피었다고 이르고 깊은 골자기에 싸리 꽃도 피었다고 일러라. 가을이구나! 가을! 이 세상 모든 풀과 나무가 다 초록의 잎을 피우고 꽃을 피우던 봄여름이 지나 이제 이 세상 모든 풀과 나무가 열매를 맺는 가을이다. 어느 봄날 나는 차 안에서 바람에 날리는 벚꽃을 보며 하루라는 시를 썼었다. '이렇게 또 하루가 간다./이러다 보면 이틀이 사흘이 되겠지./너의 하루는 어떤 꽃이 지고/또 어떤 꽃이 피어나더냐.//꽃피는 일이 얼마나 힘 드는 일인지./꽃 지는 일은 또 얼마나 힘든 일인지.//하필이면,/이 봄날이/왜 내 일이 되었는지.//오동 꽃은 지고/이러다가 이레하고 여드레/그러다가 아흐레 열흘 그리고 또/하루' 그러다가 달라진 계절의 문턱을 넘으며 나는 '일자소식'이라는 시를 썼다. '선선해 졌어요./좋아요. 새벽이면/귀뚜라미들이/ 내 홑이불을 밑으로 발을 디밀고/운답니다./그 곁에, 가는 비가 서서/부슬거려요/부슬대는 소리를/잡아 다녀 덮습니다./한 소식 받아, 한세월 건너 디딜/끝이/따스한 그대 발 밑 온기를/찾아가네요./문득 일어나, 그립다고/ 일자 소식/ 받아씀'나는 오랜 세월 시골에 살며 초등학교를 6년 동안 강 길을 걸어 다녔다. 차가 낸 길이 아니고 사람의 발길이 낸 길은 좁은 오솔길이었다. 강변 풀밭으로 난 길은 구불구불 휘어지고 굽이가 많았다. 길은 끝이 보이지 않았다. 걸으면 쉼 없이 나타나는 길을 걸어 가다보면 호수가 나타나고 징검다리가 나타났다. 봄부터 가을 끝까지 길에는 풀꽃들이 피어났다. 그 길은 나의 학교였다. 선생이 되어 결혼을 하고도 나는 그 길을 걸어 다녔다. 길은 변했지만 그 꽃들은 변함없이 피어났다. 붓꽃! 나는 붓꽃을 좋아했다. 반쯤 핀 붓꽃과 활짝 핀 붓꽃을 꺾어 들고 집으로 갔다. 집 가까이에 이르면 아이들이 나를 보고 달려왔다. 아이들에게 꽃을 주면 아이들은 꽃을 받아 들고 집으로 뛰어가 부엌문을 열고 나오는 엄마를 부르며 엄마에게 꽃을 내밀었다. 꽃을 받아 들고 엄마를 바라보며 환하게 웃던 아이들과 아내의 환한 얼굴은 생생한 폭의 그림이었다. 가을이면 나는 구절초 꽃을 그렇게 꺾어 들고 집으로 갔다. 우리 방에는 봄부터 가을 끝까지 꽃들이 꽃병을 떠나지 않았다. 겨울이면 찔레열매나 장구 밥 열매가 꽂혀 있었다.아파트에 살면서 나는 시골에서 꽃을 꺾어 왔다. 어느 날은 내 머리 위에 벚꽃 잎이 몇 잎 얹혀 있었다. 꽃을 꺾어 들고 집으로 오거나 그렇게 꽃잎을 머리에 이고 오는 나를 보고 동네 아주머니들은 "역시 시인을 달라." 라고들 했다. 아이들이 자랐다. 어느 봄 날 집으로 돌아 온 큰 아이가 꽃송이가 서너 개 달린 개나리 꽃가지를 가방 속에서 꺼내어 아내를 주는 것을 보았다. 아내는 환하게 웃으며 그 꽃가지를 유리컵에 꽂아 싱크대 위에 놓아두었다. 직장을 그만 둔 뒤로는 꽃을 꺾어올 수 없어 베고니아를 기른다. 학교에 근무할 때도 나는 일 년 내내 그렇게 꽃병에 꽃을 꽂아놓거나 겨울이면 베고니아 꽃을 키웠다. 내가 꽃을 꽂지 못하면 아이들이 얼른 학교 뒤안에 가서 개망초 꽃을 꺾어 꽂아 두곤 했다. 예술은 극장엘 가거나 전시실에 가거나 날을 받거나 시간을 내어 따로 하는 것이 아니다. 사는 일 지금 당신이 바라보고 하고 있는 모든 삶의 행위가 다 예술이다. 삶의 예술, 그 작은 풀꽃 한 송이의 감동이 나를 바꾸고 세상을 바꾼다. 문득, 그렇게 세상이 달라 보이는 힘이 예술이다. 삶의 힘을 주세요. 꽃을 주세요. /본보 편집위원

  • 문화일반
  • 김원용
  • 2012.09.04 23:02

고민, 고뇌 그리고 그림

고민, 고뇌는 삶의 질서를 재탄생 시키고 삶의 질서를 새로 세우게 하는 철학을 탄생 시킨다. 고민은 개인 적인 것에 가깝고 고뇌는 사회에 눈뜨는 고통의 시작이다. 아니다. 두 개의 낱말이 입장과 해석이 바뀌어도 상관이 없을 것이다. 개념은 역사적이고 사회적이고 시대적인 논리이기도 하지만 엄밀하게 따져 보자면 지극히 사적 경험의 소산이다. 고민과 고뇌의 두 낱말의 개념이든 그 어떤 논리든 내가 없으면 세상이 없으니까. 모든 말의 개념은 실은 나로부터 시작된다. 개인적인 논리가 사회적인 해석의 논리로 전이 되고 확대 되는 것이 건강한 자기 확인과 확신 그리고 신념이니까. 존재란 어디에서 뚝 떨어진 세상의 점 하나 같은 내가 아닌가. 세상과 처음 대면하고 세상과 처음 직면하는 시초란, 시작이란 그래서 탄생이고 그리하여 절정이고 장엄이다. 고뇌, 고민, 번민이야 말로 모든 것들로부터 가해지는 아픔이고 기쁨이며 환희요 동시에 절망이다. 새벽이며 동시에 저물녘이고 삶과 죽음의 경계를 지우는 영원의 시작이다. 정치도 예술도 사랑도 결혼도 아니, 그 모든 시작은 고민이다. 고민은 상대가 있음으로 정직함에서 출발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정직함이란 삿됨이 없는 맑은 자기 투혼과 갱생의 소산이다. 정직함에는 나를 위한 이해타산적인 계산이 들어 갈 틈이 없음으로 두려움이 없는 막강한 존재의 의미다. 고민, 고뇌, 번민은 결국 해결될 사안임을 전재로 모든 존재의 두려움으로부터의 해방과 자유를 꿈꾼다. 존재의 고통으로부터 벗어 날수 없는 인간의 고민 고뇌 번민은 그래서 예술을 꿈꾼다. 모든 삶이 그렇듯 '고통이 아름다울'때 예술이다. 존재란 내가 있다는 말이고 동시에 상대가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상대를 부정하는 것은 고민을 포기 하는 것이다. 고민의 근거인 내가 기대고 있는 저 쪽을 부정하는 공허함을 나는 우리 사회 곳곳에서 확인한다. 한국사회의 경직된 흑백논리와 돌아 앉아 외면하는 이분법적 사고는 식민지적 유산과 분단. 그리고 상식에서 벗어난 뒤틀린 정치권력에서 기인한 것이지만 모든 사회 구석구석에 지금도 부지런히 뿌리를 뻗는 중이다. 작금의 보수와 진보적 개념은 모두 보수다. 보수는 나만 상대하고 다른 것은 대상으로 간주한다. 더울 때 나의 정신은 강화되고 긴장한다. 몇 곳의 그림전시장을 찾아다녔다. 화가가 불러들인 그림 속의 사물들이 아무 긴장 없이 서로 무덤덤하게 외면하고 있는 고민 없는 그림들이 눈에 뜨였다. 그림에서 고민이 없다는 고민만큼 큰 고민은 없다. 고민 없으면 조화를 꿈꾸는 갈등이 없으니, 감동의 근원인 생명력이 없다. 시가 그러하듯이 그림이 말이 되면 안 된다. 그림이 말이 될 때 물감들이 만들어낸 사물들이 서로 무관하다. 즉 내용이 없다는 말이다. 손끝에서 놀아 난 고민 없는 유희는 반성 없는 일방적 통증을 준다. 세계적인 보편성과 객관성을 얻는다는 것은, 진정한 자기 얼굴을 찾아 헤매는 일이다. 철학의 빈곤이 가져온 너무나 빈한한 그림들이, 자연을 베낀 영혼 없는 그림들이 벽에 맥없이 걸려 있다. 오랜 가뭄 끝에 쏟아지는 빗줄기들은 만물을 소생시킨다. 마른 땅에 떨어져 튀어 오르는 저 활기찬 빗줄기들의 하얀 발 뒷굼치들, 다만 숨이 차다. 긴장의 숨찬 아름다움, 숨을 몰아서 쉬게 하는 소낙비 같은 그림은 어디서 탄생 하는가. 도립 미술관에서 장호의 그림을 만났다. 살이 없는 뼈아픈 지리산을 처음 보았다. 뼈를 깎고 피를 말린다는 예술가들의 말은 자기도 믿지 않은 자기 엄살이 절반이고 나머지는 독자를 향한 엄포가 대부분이다. 뼈는, 피는 현실에서의 고통이지, 말이 아니다. 말로 그림을 그리고 말로 시를 쓰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살 땅기는 긴장에 몰입하라. 덥다는 말은 맞는 말이지만, 이 폭염은 당연한 자연 현상이다. 현실에 응하라. 현실은 피할 수 없으니, 받아들이라는 말이다. 무섭지 아니한가?/본보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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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08.21 23:02

자기 발소리를 듣다

징검다리를 건너며 물소리를 들어 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징검돌이 작고 물의 양이 적은 물가의 물소리는 작게 들리다가 강 가운데로 가면서 점점 징검돌도 커지고 점점 물의 양도 많아져서 물소리가 점점 크게 들리다가는 강 건너 가까이 이르면 징검돌도 점점 작아지고 물소리가 점점 작아지다가 잦아지다가 등 뒤로 돌아가 등을 적십니다. 징검다리를 멀리 벗어나면 그냥 강물소리로 아득해지지만 물소리가 일정한 장소에서 매번 같은 소리를 내는 것은 아닙니다. 들을 때마다 그 소리가 다릅니다. 물소리를 가만히 듣고 앉아 있으면 실 꾸러미에서 실마리를 찾아 실을 풀어내듯 내 몸과 마음을 물소리가 풀어가기도 합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소리는 물소리 같아요. 물소리를 따라가면 마음이 한없어지지요. 가을 산길을 걷다 보면 많은 소리들이 들립니다. 새들이 우는 소리가 들리지요. 다 익은 알밤이나 도토리가 나뭇잎을 때리며 투두둑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지요. 찬 이슬이 풀잎이나 거미줄에서 떨어지며 흐드득 울기도 합니다. 다람쥐나 족제비나 청설모나 들쥐의 발길에 차인 작은 자갈들이 구르는 소리도 들립니다. 새들이 마른 낙엽을 밟고 걸어가는 소리도 들립니다. 고라닌지 너구린지 후다닥 튀는 소리도 들리고, 풀벌레도 울고, 꿩이 울기도 하고, 논을 만나면 찰랑찰랑 벼 이삭들이 부딪치는 소리나, 메뚜기가 폴짝 뛰는 소리가 들리고 때로는 마른 풀잎들 뒤척이는 소리나, 밭에서 빈 옥수수 대 쓰러지는 소리도 들립니다. 많은 자연의 소리 중에서 늦가을 밤에 마당을 지나가는 바람을 따라 구르거나 끌려가는 감잎 소리나 마른 지푸라기 소리는 정말 환장하게 사람을 스산하게 합니다. 장광에 감잎 지는 소리는 또 어떻고요. 뜬 눈이 말짱 해지고 모로 누운 몸을 잔뜩 웅크리게 하지요. 부엉새가 우는 겨울 밤 앞산 마른 상수리나무 잎 부딪치는 밤바람 소리도 밤잠을 설치게 합니다. 겨울 밤 사그락 거리는 소리에 눈을 뚝 떠서 무슨 소린가 하고 가만히 귀를 기울이면 눈 위에 눈이 내리는 소리입니다. 정말 눈 위에 눈이 내리는 소리를 듣고는 잠 못 잡니다. 울고 싶을 때가 다 있지요. 마음의 눈이 뚝 떠지지요. 눈 소복이 쌓이는 밤은 창호지 문까지 환합니다. 어느 해 나는 마을 앞에 있는 징검다리를 건너며 징검다리 밤 물소리를 녹음한 적이 있었지요. 가만가만 발걸음을 옮겨 디디며 물 가까이 녹음기를 대고 물소리를 녹음하고는 강 건너 길을 걸으며 풀벌레, 소쩍새, 쪽쪽 새, 개구리 울음 소리들을 녹음했지요. 그리고 집에 와서 녹음기를 틀었는데 아! 그 많은 소리들 속에 자박거리는 내 발소리가 있었습니다. 나는 놀랐습니다. 수없이 길을 걸었는데도 내 발소리를 내가 듣지 못했거든요. 내 발소리를 찾는 날이었습니다. 정말 신기 했지요. 그 뒤로 길을 걸으며 나는 때로 내 발소리에 귀를 기울이곤 했습니다. 길을 걸으며 내 발소리를 가만가만 따르다 보면 다른 소리들은 사라집니다. 내 발소리가 점점 내 마음속으로 걸어 들어와 자박거립니다. 내 안의 소리가 되지요. 나를 들여다보는 것이겠지요. 그렇게 자박거리는 내 발소리를 따르다 보면 어쩔 때는 정말 한가하고 태평하고 마음이 무심해져서 세상만사가 무덤덤해지기도 해서 깜짝 놀라기도 합니다. 덥다는 말은 맞는 말이지만 더운 것은 자연의 이치입니다. 이치는 순리를 부르고 순리는 순환을 따릅니다. 자연에 자기를 맡기고 자연이 하는 대로 한번 따라 걸어보는 것도 지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본보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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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08.07 23:02

음악이 된 새벽 빗소리

서재는 북향이 좋고 풍경은 등 뒤에 두어야 한다. 글을 쓰고 책을 보는 방은 반 폐쇄적이고 조금 어두워야 안정적이고 친구들과 담소를 나눌 장소는 바람과 햇살이 풍부한 곳이어야 한다. 생각이 오고 머물면 생각을 풍경과 바람에게 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마음을 비우는 일은 세상을 다 담은 힘의 원천이다. 다듬어지지 않은 생각과 잘못된 내 생각은 사심 없이 버리고 상대의 의견을 따라가는 허심탄회함은 맑은 선비들의 토론 문화는 사랑방과 정자문화의 꽃이었다. 해맑다는 말은 세상이 바로 보인다는 다른 말이다. 한국의 정자들이 다 그렇게 사방으로 널리 열려있다. 정자들이 생각을 바람에 날리고 자기를 비우는 곳이라면 서재는 책을 보다가 답답하면 뒷짐 지고 걸어가 어딘가를 내다보며 생각을 다듬어야 할 곳이다. 생각에 지치고 글에 지친 마음을 고를 그 곳에 자연을 두면 좋다. 넓은 정원이나 산이나 강이나 바다가 아니어도 좋다. 마음이 열려 있는 사람은 한 송이 꽃을 보고도 세상의 이치를 끌어내고 세상에 대한 사랑이 싹틈을 눈치 챈다. 모두 본다고 모두 얻는 것은 아니다. 깨달음을 주는 것들은 크기가 아니다. 맑고 깨끗한 정신을 가진 사람들은 깨달음이 순간에 온다. 나뭇가지 하나에 찾아 든 바람을 보라! 햇살을 보라!가늘고 굵은 빗줄기를 보라! 그것들을 다 받아 든 나뭇가지의 사랑을 눈치 채는 일은 일상에서 시 몇 편을 얻는 일보다 크다. 자연은 나를 다스리고 가다듬게 하는 순간의 거울이다. 한 치의 거짓 없는 냉혹한 자기 거울을 갖고 살던 옛 선비들의 세상을 향한 애정이 그립다. 흘러오는 물과 잠시 머문 물과 흘러가버리는 물, 저기 마른 풀잎에 이는 한 줄기 소슬 바람 결 곁에 서 있는 그런 무심함이 그리운 시절이다. 아파트에 산지 오래 되었다. 높은 층에 살 때는 눈이나 비가 오는 게 아니라 눈비가 내려갔다. 나는 내 아이들에게 "애들아 눈 내려간다"고 하며 웃곤 했다. 낮은 2층에 산지도 2년 쯤 지났다. 어느 날 새벽에 나는 저절로 눈이 떠졌다. 생전 듣지 못한 소리들이 창가에 자고 있는 나를 깨웠던 것이다. 소란스러웠다. 그 소란스러운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빗소리였다. 마음이 조용한 새벽이라 나는 그 빗소리들을 따라 갈 수가 있었다. 그래, 저 빗소리는 아마 마로니에 넓은 잎에 떨어지는 빗소리다. 지금 저쪽에서 들리는 저 빗소리는 단풍잎에 떨어지는 빗소리지. 가까이 들리는 저 빗소리는 풀잎 위에 떨어지는 빗소리지. 그래, 저 빗소리를 물 고인 웅덩이에 떨어지는 빗소리지. 저 소리는, 저 소리는, 하며 나는 세상에 떨어지는 빗소리를 따라다니다가 귀를 기울여 그 빗소리들을 다 모아 함께 들었다. 빗소리는 내 마음 바다 위에 떨어졌다. 수도 없이 많은 동그라미들이 일어났다 사라졌다. 파문이었다. 내 마음에 이는 파문의 물무늬는 아름다웠다. 나는 파도를 타는 조각배처럼 바다 위에 떠돌아 다녔다. 몸은 가볍고 마음은 한없이 평화로웠다. 빗소리들은 아름답고도 감미로운 음악이 되어 나는 행복의 바다 위에 띄웠던 것이다. 눈을 뚝 떴다. 음악이 따로 없다. 빗줄기들이 아파트 정원 나뭇잎 위에 수도 없이 떨어진다. 음악은 세상의 소리를 골라 곡을 붙이는 일 다름 아니다.나는 내 책방 창가에 앉아 그렇게 빗소리를 듣거나 나뭇잎에 수도 없이 쏟아지는 햇살들을 바라보며, 그것들의 속도를 따르고 그것들이 하는 일을 따르며 마음을 고른다. 순환과 순리를 따르면 세상의 이치를 터득한다. 농부들이 씨들이 너무 깊거나 얕게 묻히지 않고 적당하게 묻히게 하려고 밭을 고르는 것처럼, 이른 새벽 나를 찾아 온 시어들을 골라 평평한 종이 위에 한편의 시를 써 내려가듯 그렇게 말이다. 벌써 풀벌레가 운다. /본보 편집위원

  • 문화일반
  • 김원용
  • 2012.07.24 23:02

나무가 써준 시

내 나이 스물일곱 살 무렵, 때는 봄날이었다. 마을 뒷산으로 올라가 500년 쯤 되는 당산나무 밑으로 갔다. 오래 전부터 당산제를 지내지 않고 있기 때문에 당산나무 밑에는 사람이 쉽게 들어갈 수 없을 정도로 이런 저런 나무들이 자라 있었다. 내 아름으로 서너 아름은 족히 될 나무를 올려다보다가 나무 밑을 보았다. 넓적한 바위 위에 예쁘게 생긴 어린 나무 하나가 눈에 띄었다. 다가가 자세히 보았더니, 2년 쯤 되는 어린 느티나무였다. 나는 무심코 살며시 잡아당겨 보았다. 어? 그런데 나무가 쑥 뽑혀버렸다. 나는 당황했다. 이걸 어떻게 하지? 나무를 그 자리에 놓아두고 집으로 돌아왔다. 잊고 지내다가 해가 질 무렵 갑자기 나무가 생각났다. 나는 산으로 뛰어 올라가 나무를 집으로 가져와 내 방문 앞 마당가에 심었다. 나무가 잎을 피우기는 했지만 시들거렸다. 나는 물도 주고 나무가 움직이지 못하도록 작은 막대기로 지주도 세워주었다. 걱정을 하며 나무를 돌봐 주었더니, 나무는 자리를 잡았는지 잘 자라주었다. 정말 잘도 자랐다. 방문을 열면 나무는 늘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새봄을 알아차린 어린 나무가 새잎을 피워내는 모습은 내게 늘 경이였다. 가늘디가는 실가지로 어떻게 추운 겨울을 지내는지 봄이 되면 틀림없이 새잎이 돋아나 아침 햇살을 받았다. 나무가 내 키위로 자랐다. 어느 해 연두색에서 초록으로 건너 간 나무를 바라보고 있는데. 아니? 세상에 나뭇잎에 바람이 불자 나뭇잎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나뭇잎 부딪치는 그 부드럽고도 감미로운 박수소리를 나는 잊을 수 없다. 어느 때는 딱새가 빈 나무 가지에 날아와 앉아 울기도 했다. 나무가 지붕 가까이 자라자 달빛 받은 나무 그림자가 내 창호지 문에 어른거리기도 했다. 바람 없이 눈이 내린 아침이면 그 나무 가지에 눈이 소복소복 쌓여 있다가 내가 문을 열면 눈들이 허물어지기도 했다. 서리꽃이 피기도 하고 소낙비가 내리면 세상에! 나뭇잎에 소낙비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나무가 내 팔뚝 만하게 자랐다. 우리 집 지붕 높이만큼 자란 것이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걱정을 했다. 집안에 저렇게 큰 나무가 있으면 집이 치인다고 했다. 그랬다. 정말 큰 느티나무에 집이 치인 것을 나는 보았다. 이웃마을에 커다란 느티나무가 있었는데, 비바람이 몹시 불던 어느 해 느티나무 가지가 찢어져 느티나무 아래 있는 집이 폭삭 무너지는 것을 보았던 것이다. 어느 해 봄 퇴근 해 보니, 강가 언덕 조금 넓은 빈 터에 나무가 누워있었다. 태환이 형과 함께 나무를 그 곳에 심었다. 자리를 옮긴 나무는 잘 자랐다. 내가 나무를 귀하게 생각하며 보살피자 동네 사람들도 나무를 귀하게 대해 주었다. 우리 집 나무가 동네 나무가 되었다. 내 방문을 열면 바로 보이는 곳이었기 때문에 나는 우리 집 마당에서처럼 그 나무를 늘 보고 살았다. 그 나무에서 일어나는 봄여름 가을 겨울의 풍경이 아름다웠다. 아침저녁 밤 낮, 해 뜨고 달 지고, 새잎 피고, 단풍들고 잎 날리고, 눈 오고, 비오고, 바람 불고, 소쩍새가 날아 와 울며 그렇게 세월이 갔다. 나무에 동네 아이들이 올라가 놀고 어느 날부터 동네 사람들이 나무 아래로 들어와 쉬게 되었다. 여름이면 나도 나무 밑에 앉아 흘러가고 흘러가는 강물을 바라보았고, 달이 뜨면 내 그림자를 나무아래 숨기고 나무 밑을 서성이며 생각을 골랐다. 집을 떠나 어디 가서 잘 때도 그 나무는 늘 내 머리맡에 강물을 배경으로 서 있다. 나는 지금도 그 나무 아래에서 잠들고 잠을 깬다. 내 아름으로 한 아름으로 넘게 자라면서 나무가 말해주는 것을 받아 적은 글들이 많다. 내가 죽을 때까지 그 나무는 내게 시와 삶이 하나임을 가르쳐 줄 것이다. 바람 부는 날 그 나무아래 지날 때 마다 수많은 나뭇잎들이 치는 그 찬란하고도 아름다운 박수 소리. 내 인생. 나의 시. /본보 편집위원

  • 문화일반
  • 김원용
  • 2012.07.03 23:02

창문을 열어다오

백화점 점포와 미술관 전시실은 창문이 없다. 백화점은 구매력의 은근한 강요를, 미술관은 햇볕을 차단하여 그림을 보호하고 시력의 분산을 막아 집중력을 조성하기 위해서다. 문은 집에서 사람이 드나들거나 여닫도록 된 시설이고, 창문은 채광이나 통풍을 위해 벽에 낸다. 한옥의 문은 열어야 밖이 안으로 들어오고 양옥의 문은 열지 않고도 밖을 볼 수 있다. 한옥이나 초옥이나 우리가 살던 집은 자연을 보는 대상이 아니라 온몸으로 맞이하는 구조를 갖고 있다. 햇빛과 달빛, 그리고 바람을 한 겹 창호지 문으로 걸러 받아들이고, 보고 싶으면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창호지를 바른 문이나 창문은 여닫이, 미닫이, 봉창, 뙤창이 있다. 봉창은 열지 못하는 문이다. 봉창을 방의 어두운 뒤쪽에 있어서 채광의 역할을 하기도 하고 한편이 막힌 방의 답답함을 풀어주었다. '저놈 자다가 봉창 뜯는다'는 말은 잠결에 나갈 문이 아닌 열리지 않은 봉창을 뜯는다는 말이니, 상황을 전혀 모르고 엉뚱한 짓을 하는 사람을 이르는 말이다. 봉창은 잔 돌멩이를 던져 애인을 불러내기기도 하는 낭만의 달콤한 창구이기도 했다. 밖을 내다보기 위해 손바닥만 한 유리를 문에 붙인 공간을 뙤창이라고 한다. 뙤창은 사시사철 시시때때로 밖의 상황을 관찰하고 참여하는'환한 소통의 창구'였다. 봉창이나 뙤창이나 창문이나 문은 안에서는 밖을 향한 소통의 창구지만 밖에서 보면 건축의 외벽을 지루하지 않게 꾸며주는 미적인 장치이기도 했다. 건축에서 창문과 문은 세상과의 소통과 그리고 적절한 단절을 생각하기 때문에 건축의 핵심 중의 핵심이다. 창문과 문을 어디로 내느냐에 따라 생활의 내용과 생각이 달라진다. 한옥은 주로 앉아서 지내기 때문에 문턱이 낮고, 양옥은 의자에 앉아 지내는 시간이 많기 때문에 창틀이 높다. 그러나 지금은 양옥들도 창문을 방바닥에서부터 시작되어 천장에 까지 닿는 통유리로 만들어지고 있다. 현대건축에서 창문과 벽의 개념이 지워지고 있다. 어떻게 하든 자연을 안으로 끌어들이려는 노력이 거의 필사적이다. 통유리 벽으로 밖을 안으로 최대한 끌어들이고 어떤 건축물은 통유리를 열어 젖혀 밖과 안의 경계를 지워버리기도 한다. 자연에 목마른 현대인들의 삶의 반영이다. 도시근교의 카페나 레스토랑들은 보면 한눈에 모든 풍광을 보려는 욕심으로 시선을 어수선하게 만들어버리기도 하고 다시 더 볼 수 없는 신비로움을 없애 풍경을 무심하게 해 버리기도 한다. 신비함이 사라진 사랑이 죽은 사랑이듯, 새로움이 없이 습관이 된 풍경은 죽은 풍경이다. 절정을 아껴두고 수고를 통해 경치를 감상했던 옛날의 정자들을 생각해 볼 일이다. 단 한 번의 시선으로 모든 경치를 보지 말고 절정을 비껴 창문을 내고, 보기 좋은 나무나 호수나 산이 있는 쪽으로 다양한 크기와 모양의 액자창문으로 밖의 풍경을 담아야 한다. 집에서 가족들이 가장 오래 머무는 곳에서 바라보는 창밖 풍경이 그 집의 중심이다. 창문은 풍경을 담는 액자다. 창문은 밖의 경치를 고정시켜놓은 틀이 아니라 다가가고 들여다보고 내다보고 고개 돌려 볼 때마다 달라 보이는 액자 역할을 한다. 보는 각도에 따라 거리에 따라 시선에 따라 변화무쌍한 풍경을, 아니 살아 있는 그림을 그려 주도록 해야 한다. 모든 것들이 다 그렇듯이, 아름다움을 보고 곁에 두고 싶은 욕심과 자연에 대한 두 손 모은 겸손, 의도와 무심이 격을 높이고 품격을 갖추게 한다. 창문이 마음의 문을 열어 세상을 맞이하고 세상으로 나를 내 보내는 문이다. 건축은, 건축주가 세상을 어떻게 살아왔고 어떻게 살고 있고 어떻게 살아갈지를 보여주는 건축주의 철학이 고스란히 담긴다. 창문을 열어다오. 햇빛과 바람, 그 일기가 만들어 낸 창문의 1년과 하루는 길고도 길다. 수 없이 많은 세월과 일들이 그 창문에서 일어나고 소멸한다. 문득, 눈 안으로 들어선 풍경이 경이로워야 나의 창문이다./본보 편집위원

  • 문화일반
  • 김원용
  • 2012.06.19 23:02

농사는 예술이다

봄이 되면 산에는 진달래가 피고 소쩍새가 운다. 소쩍새가 처음 운 날 밤 어머니는 우리에게 아침 화장실에 앉아 '어제 저녁에 소쩍새가 처음 울었지?'라고 소쩍새 울음소리를 기억해내면 그 사람은 아주 영리한 사람이라고 했다. 잠들기 전에 내일 아침에는 틀림없이 소쩍새 울던 기억을 떠올릴 것을 굳게 다짐하며 잠이 들지만 나는 평생 한 번도 '어제 밤 처음 울던 소쩍새 소리'를 기억해 내지 못했다. 늘 화장실 문을 나서며 아차! 하고 말았다. 어머니는 자연 속에서 일하는 것을 말하고 나는 어머니의 말을 받아쓰면 시가 되기도 했다. 눈 코 뜰 새 없이 바쁜 농사 철 어머니는 그 바쁜 와중에도 이런 말씀을 하셨다. "소낙비는 오지요/소는 뛰지요/바작에 풀은 넘어지지요/ 설사는 났지요./허리띠는 안 풀어지지요./들판에 사람들은 많지요." 이 이야기가 충청도에서도 있었는지 장사익이 노래로 만들어 불렀다. 힘든 노동을 이기고 잊기 위해 농사꾼들은 그렇게 일을 놀이로 만들었다. 배를 짜면서 배틀 노래를 불렀고, 논을 매면서 남정네들은 핏대를 세우며 농부가를 불러 재꼈다. 밤송이를 겨드랑이에 넣어 아프지 않을 때, 대추가 콧구멍으로 들어갈 때 모내기를 하면 쌀밥을 먹는다고 했다. 자연에서 찾아 가져온 이 아름다운 '예술적인 과학' 이야기들은 농부들의 일상을 아름답고 풍요롭게 가꾸어 주었다. 가을이 되면 어머니는 애호박을 따서 하얀 낮달처럼 동글납작하게 잘라 강변 바위 위에 널거나 돌담 위에 널었다. 동글납작하게 잘린 애호박들은 몸을 뒤틀며 낮달처럼 말라갔다. 어머니는 때로 애호박을 잘라 시멘트 담장 위에 지푸라기로 레일을 깔고 그 위에 간격과 줄을 맞추어 널었다. 애 호박을 널고 있는 오래 된 농부인 어머니의 모습, 오래 된 우리나라 가을 하늘에 오래 된 낮달, 밤송이를 겨드랑이에 집어넣어도 안 아플 때 심어 거둔 햇 지푸라기 위에 하얗게 널린 애 호박은 그림이요 시요 사진이요 음악이요 과학이요 철학이다. 어머니는 가을 햇살이 하는 일과 가을바람이 하는 일을 알고 있는 것이다. 어머니는 참나무 잎이 하얗게 뒤집어지면 사흘 뒤에 비가 온다고 알려준 참나무 잎들을 믿는 것이다. 다람쥐가 참나무 잎을 믿고 허공의 두려움을 떨치며 이 가지에서 저 가지로 건너뛰는 것과 같은 이치요, 그 이치를 몸과 마음에 익힌 놀라운 삶에 대한 낙천과 믿음의 소산이다. 어린 모들이 땅심을 믿고 땅 맛을 알아가며 돌아앉는 초여름의 들판만큼 아름다운 생명의 현재 진행형이 어디 있는가. 나이든 농부가 저문 들판 길을 홀로 걷는 저들만큼 외로움이, 그리움이, 아픔이, 기다림이 담긴 아름다운 사진이, 그림이, 시가, 노래가, 어디 있는가. 그 보다 더 세상을 정리 해 내는 정치가 철학이 과학이 그 모든 것들의 가치인 상생의 가치를 어디에서 또 찾을까. 물과 바람과 햇살을 이해하고 그 것들이 섞인 땅을 믿고 씨를 뿌려 기다리고 견디며 마침내 곡식을 거두어 너도 먹고 나도 먹고 나누어 먹어 너도 살고 나도 살고 우리가 같이 함께 살아야 하는 공동체의 일원이라는 것을 교육하는 그만한 예술이 또 어디 있는가. 아무리 세상이 변하고 변해도 변하지 않은 영원불변의 가치인 물과 바람과 햇살이 하는 일을 알고 그것들을 믿으며 살아가는 농사꾼들의 하루는 오랜 세월 우리들에게 삶과 예술이 하나였을 확인시켜 왔다. 어머니는 참나무 잎이 하얗게 뒤집어지는 산 아래 앉아 삶은 고사리를 뒤적여 말린다. 자연과 하나가 된 그 노동의 몸짓은 바람 타는 한그루 참나무다. 액자와 무대에 갇히기를 거부하는 해방의 몸짓이다. /본보 편집위원

  • 문화일반
  • 김원용
  • 2012.06.05 23:02

한그루의 나무가 가르쳐준 것들

아이들과 글쓰기를 할 때 나는 자기 주위에서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자기 나무를 정하고 1년 내내 자기 나무에서 일어나는 일을 쓰게 했다. 글쓰기는 아이들에게 작가나 시인이 되게 하는 공부가 아니다. 모든 공부는, 우리가 살아왔던 세상과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을 들여다보고 살아 갈 세상을 스스로 창조하게 하는 것이 아닌가. 자기 나무를 정하면 쉬는 시간 나와 마주치는 아이들에게 나무를 보았느냐고 물어 본다. 그렇게 지내다 보면 아이가 집에서 문득 자기 나무를 보고 '내일 학교에 가면 선생님이 나무를 보았느냐고 물어보지 않을까?' 하며 나무를 보게 된다. 내가 다시 나무를 보았느냐고 물어보면 아이는 보았다고 대답한다. 그러면 나는 또 네 나무가 어떻게 하고 있더냐? 라고 묻는다. 아이가 나무를 보긴 보았는데 어떻게 하고 있는 것을 보지 않았기 때문에 대답을 하지 못하게 된다. 나는 또 다시 아이들에게 나무가 어떻게 하고 있는지를 묻는다. 그러면 아이들은 이제 자기나무를 '다시' '자세히' '보게' 된다. 나무를 다시 자세히 보는 순간 놀랍게도 세상은 달라진다. 이 세상의 수많은 남자와 여자들 중에 어떤 여자를, 어떤 남자를, 다시 보는 순간 당신의 인생이 달라졌지 않은가. 부정적으로 달라졌는지 긍정적으로 달라졌는지는 다 자기 판단이겠지만. 아무튼 아이는 자기 나무를 다시 새로 자세히 보게 된다. 세상의 모든 시작은 보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그것을 우린 철학적인 용어로 '이데아'라고 한다. 본다는 뜻이다. 아무튼 아이들이 자기 나무를 다시 자세히 보다 보면 나무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알게 된다. 어느 날 경수에게 물어 보았다. 경수야 네 나무 보았니? 하고 물었더니, 경수는 "내 나무는요. 마을 앞에 있는 커다란 느티나문데요 아침에 학교에 오면서 보니까요 느티나무 밑에 할아버지들이 놀고 있었어요. 그리고 그 나무 앞에는 시냇물이 흐르고 있었고, 시냇물 건너에는 들판이 있었는데요, 들판에서는 사람들이 모내기를 하고 있었어요." 오! 그래 그럼 지금 네가 한말을 글로 써봐라. 그게 글이 된다. 한그루의 나무를 자세히 보면 주위의 사물도 다시 보게 되는 것이다. 교육이란 정답을 가르치고 외워서 하나뿐인 정답을 쓰게 하는 공부기계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하나를 알게 해서 열을 알게 하는 게 교육이고 공부가 아닌가. 한그루의 나무를 통해서 새로운 세계를 그리게 하는 그게 종합이고 통합이고 통섭이고 융합이다. 융합이란 물리적이고 화학적인 작용을 통해서 전혀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는 것이다. 이제 그런 물리적이고 화학적인 융합 위에 예술적인 융합을 더해야 하는 시대가 되었다. 아무튼 그렇게 한그루의 나무를 자세히 보게 해야 그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고, 무엇인지 알게 되면 이해가 되고, 이해가 되어야 그것이 내 것이 된다. 지식이 내 것이 될 때 비로소 인간을 귀하게 가꾸는 인격이 되는 것이다. 아는 것이 인격이 될 때 비로소 나와 세상과 관계가 맺어진다. 관계는 갈등을 불러 온다. 사람들은 갈등을 조정하고 조절하여 조화로운 세상을 만들어 가려고 노력한다. 그러다가 보면 생각이 일어나는데 그 생각을 정리 하는 게 삶이고 예술이고 정치고 교육이다. 이런 철학적인 태도를 갖는 사람은 늘 새로운 것을 찾아 간다. 새로운 것들은 사람들의 시선을 끌게 되고 공감을 불러일으키는데 그 새로움이 예술적일 때 사람들은 감동한다. 감동은 생각을 바꾸고 행동을 바꾸고 나아가 삶을 바꾸고 세상을 바꾼다. 교육의 힘이다. 감동하는 것들은 생명력이 있다. 생명력이 있는 것들은 자연에 있다. 한그루의 나무를 언제 보아도 완성되어 있고, 언제 보아도 새롭다. 수 천 년이 흘러도 오늘 새로워 보이는 그림, 시, 음악 그게 명품이다. 왜 한그루의 나무는 언제 보아도 완성되어 있고 언제 보아도 새로울까. 그것은 나무가 세상의 모든 것들을 받아들기 때문이다. 예술은 딴 데 있지 않다. 그대 곁에 있는 나무 한그루에서 일어나는 일을 알고 그 나무에서 새로 일어나는 일에 감동하는 일상, 그게 삶이 곧 예술인 '삶의 예술'이다. /본보 편집위원

  • 문화일반
  • 김원용
  • 2012.05.22 23:02

풀잎

어머님이 늙으셔서 시골 집 뒤 집터 밭에 고추, 호박, 상추, 옥수수, 콩, 가지, 오이를 심을 수 없게 되었다. 아내와 딸이 시골로 가서 그 집터 밭에 채소를 심겠단다. 나는 말렸다. 두서너 평이지만 밭일을 시작하면 이웃에 사는 큰집 형님이나 형수님이 손을 안보아줄 수 없기 때문에 애초에 시작을 하지 말라고 했다. 말려도 둘은 기필코 시골로 갔다. 괭이와 삽이 어디 있는지 조차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농사를 짓겠다니, 어이가 없었다. 나는 큰집에 가서 만조형님과 형수님, 그리고 서울에서 내려와 있는 용조 형에게, 지금 아내와 딸이 고추를 심겠다고 밭을 일군다고 하니 절대 눈길도 주지 말고 어떤 경우라도 들여다보지 말 것이며 절대 말도 걸지 말 것을 신신당부했다. 아내와 딸이 괭이질을 했다. 먼지가 풀풀 일었지만 제대로 땅이 파질리 없다. 딸이 언제 괭이자루를 손에 잡고 땅에 허리를 굽혀봤어야 말이지. 아내는 그래도 제법 땅을 판다. 그들을 놀리다가 하도 답답하여 내가 땅을 몇 삽 질러보았다. 내가 땅을 파는 것을 보고 아내와 딸이 "오! 농분데, 농부" 한다. 그렇게 채소를 심을 땅을 다 팠다. 그런데, 정말 그런데 이 두 인간들이 어떻게 고추이랑과 고랑을 만들 것이며, 어떻게 이랑 위에 비닐을 씌운단 말인가. 그들의 막막한 얼굴을 보며 즐거워하고 있는데, 만조형님과 용조형이 나타나 내 옆에 서서 둘이 하는 꼴을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절대 간섭하지 말라고 했는데도, 답답해하던 용조형이 드디어 괭이를 손에 들고 만다. 한때는 우리들이 뛰어 놀던 작은 집 마당에 바람과 햇살이 가득하다. 산천은 연두색에서 초록으로 건너가는 중이다. 나와 아내와 딸과 만조형은 고랑을 타 가는 용조형을 바라보고 있었다. 봄 햇살이 반백이 된 형의 머리와 허리와 팔 굽에서 빛났다. 앞 산 참나무 잎이 뿌옇게 뒤집어진다. 마을 뒤에 있는 오래 된 귀목나무는 바람이 불 때마다 햇살을 쏟아내고 어디선가 쑥국새가 운다. 곧 오동 꽃이 피고 꾀꼬리가 울고 감자 싹이 나리라. 용조 형이 가만 가만 천천히 몸을 움직인다. 어쩌면 저렇게 힘을 하나도 안 들이고 어쩌면 저렇게 자연스럽게 천천히 차근차근 느리고 부드럽게 유연한 몸짓으로 흙을 다룬단 말인가. 손에 잡힌 괭이자루에서부터 흙을 파 올리는 괭이 끝과 산천이 형의 지휘를 따른다. 형의 지휘에 따라 한고랑 두 고랑 이랑과 고랑이 생겨난다. 아니 그려진다. 잡초가 자라던 맨땅에 놀랍게도 금세 비닐을 씌운 두어 평 채소밭이 창조(?)되었다. 우리 주위의 풍경이 달라졌다. "어쩌면, 어쩌면 세상에 어쩌면……"아내와 딸의 입에서는 그냥 "예술이다 예술. 어쩌면, 어쩌면…… 저렇게 힘 하나 안 들이고"를 연발한다. 그렇다 힘이다. 옛날 내가 괭이질을 하고 호미질을 할 때 아버님은 늘 힘을 빼야 한다. 힘이 너무 들어갔다. 모를 심을 때도 지게를 지고 비탈길을 오르내릴 때도 거름을 뿌릴 때도 늘 힘을 빼라. 힘이 너무 들어갔다고 했다. 모든 일에 힘을 빼라. 힘이란 또 다른 욕심이다. 사심이다. 힘이 들어간 모든 인간 행위는 새로운 생명력을 창조할 수 없다. 보라. 새 잎 핀 저 버드나무실가지에 쏟아진 햇살과 바람을. 힘을 빼라. 바람을 거스르지 말라. 예술이, 교육이, 정치가 저기 저 세상에 따로 있지 않다. 봄바람에 몸을 맡긴 풀잎과 괭이자루를 들고 땅을 파는 농부들의 저 몸짓을 보라. 자연의 질서와 순리와 순환을 따르는 농부들이 창조해 내는 새로운 생명의 질서와 연대와 조화를 이룬 논과 밭을 보라. 작품이다. 당신의 몸과 마음이 당신의 봄을 그려가는 붓이다. 그러니 힘 빼라. /본보 편집위원

  • 문화일반
  • 김원용
  • 2012.05.08 23:02

전북은행 본점 로비의 그림

어느 날 예술회관 앞을 지나다가 무심코 전시장으로 들어갔다. 그림을 둘러보다 나는 한 장의 작은 그림 앞에 섰다. 꽉 짜인 구도와 색채, 그림 속에 쏟아진 빛들의 부딪침이 풍기는 긴장과 화해가 일으킨 묘한 조화가 나를 그림 앞에 오래 머물게 했다. 고민을 가다듬은 작가의 욕심 없는 붓질과 붓 길이 텅 비운 맑은 영혼처럼 투명해보였다. 집으로 돌아와 아내에게 도록을 주며 이 그림들 속에서 내가 사고 싶은 그림이 있으니. 내일 아침까지 찾아보라고 했다. 출근 전에 아내가 도록을 가지고 와서 두 장의 그림을 가리켰다. 내가 하나만 고르라고 말했다. 아내는 망설이더니 내가 고른 그림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우리는 그 화가의 전시가 끝날 때까지 날마다 전시장을 찾아가 그 그림에 대한 확신을 키웠다. 그 그림이 내 집으로 들어 올 것이므로, 그 그림은 우리 식구가 되어 평생을 함께 해야 하는 중차대한 일이므로, 첫 며느리를 맞이하듯 신중에 신중을 거듭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나는 그 그림을 지금까지 걸지 못하고 있다. 우리 집 아파트 어느 공간에 그 그림을 걸어도 어울리지 않았다. 아내는 그 그림을 걸려면 그 그림에 맞는 집을 새로 지어야겠다고 푸념을 한다. 나는 그림 속의 낙관과 사인을 중요하게 본다. 요즘 작가들이 그림을 그리고 사인을 하거나 글귀를 써 넣은 것을 보면 그림과 글씨가 조화를 이루지 못해 다 된 밥에 코를 빠뜨리고만 경우들이 너무 많다. 사인도 그림의 일부분이지만 그림의 '집'인 액자야 말로 그림을 완성시킨다. 사인이나 액자와 함께 중요한 것은 '전시'다. 한 폭의 그림을 어디다가 거느냐에 따라 그림이 완성되느냐 버려지느냐를 결정한다. 물론 세계적인 명화들은 어디다 걸어두어도 그 그림이 걸려 있는 부근의 공간을 압도하며 자기 자리를 확보할 것이다. 그러나 말이다, 피카소의 게르니카를 우리 시골 집 벽에 걸면 그 그림과 집과 우리 마을 공간에 새로운 세계가 나타날까. 천경자의 '길례 언니'라면 모를까. 어느 사무실이나, 어느 집에 갔을 때 그림이 어디에 걸려 있는가를 보고 그 집안에 사는 식구들의 예술에 대한 교양이나 미적 감각을 짐작한다. 그러나 나는 집이든 사무실이든 로비든 텅 비워둔 공간이 어디에 있느냐를 더 중요하게 본다. 자칫 잘못 전시하면 그림이 걸린 주위의 벽과 공간을 죽이고 그림을 죽인다. 정확하게 자로 잰 정중앙에 걸린 그림은 양쪽 공간이 답답해서 숨을 고를 수가 없다. 그림의 높이와 벽의 넓이, 남은 공간을 고려해야 그림이 숨을 쉬며 산다. 벽 색깔과 공간에 대해 더 고민을 해 보아야겠지만 전북은행본점 로비에 걸린 민경갑 선생의 그림과 나상목 선생의 그림은 공간운용을 잘 한 셈이다. 그림을 전시함으로 의미 없는 벽의 의미가 살아나는 그런 공간 앞에 들어서면 숲속에 든 것처럼 숨소리가 고르게 골라진다. 몸과 마음에게 평화를 주는 공간의 구성만이 숨을 들이쉬고 내 쉴 생명력이 유지된다. 전주MBC 로비의 송수남 선생의 꽃 그림이 지금도 그 자리에 걸려 있는지 몰라도 그 그림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 왼쪽에 찻집이 생긴 바람에 고민이 가닥을 잡지 못하게 로비가 헝클어졌다. 엠비시 사장도 바뀐다 하니, 이참에 로비 그림에 대해 고민해 보면 어떨까? 전북대, 우석대, 전주대, 도청, 새로 지은 KBS. 도교육청 로비는 도대체 주인이 없는 썰렁한 공간이다. 아내의 따스한 손길이 떠나버린 밥상 앞에 앉은 남정네만큼이나 애정결핍증으로 초라하고 처량하다 못해 불쌍하다. 그 곳에 근무하는 사람들 모두 공간에 대한 아무런 애정도 개념도 없는 무관심의 증거다. 안착된 그림 한 장이 그 공간과 그 건물과 그 집에 사는 사람들과 세상을 동시에 안정시키고 생생하게 되살려낸다. 예술은 죽어가는 것들을 살려내는 일이다./본보 편집위원

  • 문화일반
  • 김원용
  • 2012.04.24 23:02

밥 티

아내가 밥상을 차리기 위해 반찬들을 그릇에 담아 놓으면 나는 그 반찬들을 가져다가 밥상에 차려 놓는다. 어쩔 때는 밥을 푸라고도 하는데 밥을 푸려고 밥솥을 열 때 김이 확 솟아오르는 밥통을 바라보는 것을 좋아 한다. 하얀 김이 솟아나는 것도 좋지만 김이 걷힌 후 밥솥 속을 바라보는 일이 더 즐겁다. 김이 솟아나면 밥 밖으로 나와 있던 물기가 스며드는 피시시하는 소리도 좋고 하얀 밥 티들이 이리저리 누워 있는 모습은 정말 눈부시다. 쌀이 불과 물을 만나 밥이 되는 그 신비함이라니. 지금 밥통은 웬 일인지 밥에 구멍이 송송송 뚫리지 않지만 시골에서 불을 때서 한 밥들은 밥솥을 여는 순간 밥에 송송송 뚫린 까만 구멍을 바라보는 일은 늘 즐거운 일이었다. 아무튼 주걱으로 밥을 뒤적여 흰 쌀밥을 밥그릇에 퍼 담을 때 밥그릇에 담긴 밥을 보면 그 또한 아름답고 신비롭다. 흰 그릇에 담긴 흰 쌀밥을 밥상에 올려놓고 가만히 보면 이렇게 밥이 되기까지의 밥의 여정이 생각난다. 하얀 쌀밥 속에 푸른 완두콩이라도 드문드문 섞여 있으면 "우와! 예술이다 예술!"이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밥뿐이 아니다. 하얀 접시에 가지런히 썰어 살며시 얹어 놓은 붉은 김치는 또 어떤가. 콩나물 국, 상추 속에 가만히 놓여 있는 풋고추, 부글부글 끓고 있는 된장국, 가닥 채 넣고 끓인 김치찌개, 나란히 놓인 젓가락과 수저, 밥상 위에 차려진 모든 반찬과 밥을 한 눈으로 들여다보고 있으면 이렇게 사물들이(반찬들이) 조화롭게 배치된 그림이나 사진이 없을 것 같고, 마음을 풍요롭고도 아름답게 해 주는 이만한 산문 한편이 세상에 또 어디에 있을까, 싶다. 저녁밥을 하기 위해 아내랑 시장에 따라갈 때가 있다. 나는 재래시장에 가는 것을 좋아 한다. 재래시장에 가면 상점 주인들이 대개 나이 드신 분들이다. 물건을 사고 팔 때 그 판을 즐겁고 재미있고 신나게 살려내는 신명을 아내는 가지고 있어서 상점 할머니는 늘 더 주려고 하고 아내는 늘 적게 받으려고 한다. 그 실강이의 몸짓 손짓 얼굴 표정, 마음 씀씀이를 읽는 게 나는 좋다. 이런 저런 반찬거리가 담긴 비닐봉지를 들고 걷는 발걸음은 늘 즐겁다. 때로는 시장 모퉁이에 있는 오뎅집에 들려 오뎅을 사먹다가 오뎅집에서 만든 호떡을 사먹는 바람에 저녁을 그 걸로 그냥 대신 할 때도 있다. 그 일도 아내와 나에게 하루를 홀가분하게 해 주는 일이어서 하루가 가뿐할 때가 있다. 재래시장은 내게 늘 큰 그림이다. 나는 늘 그 그림 속을 돌아다닌다. 그렇게 사 온 반찬거리로 반찬을 만들고 밥을 하는 아내는 늘 신바람이 나 있다. 부엌을 오가는 몸짓이 늘 가뿐해 보인다. 어쩔 때는 흥얼거리는 콧소리가 들린다. 밥을 하는 게 그렇게 즐거운가 보다. 아니 즐거워한다. 밥을 하는 일이야 말로 새로운 세계를 창조 하는 예술이라는 것을 아내는 알고 있는 것이다. 아니, 밥을 하는 일을 스스로 예술 행위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얀 쌀이 밥이 되고, 푸른 배추가 국이 되어 새로운 세계를 보여 주고, 할머니들에게서 신나고 재미있게 사 온 콩나물 한 주먹이, 콩나물무침이 되어 접시위에 차려진 그 모양들이 예술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밥 하는 일과 시 쓰는 일이 뭐가 다른가. 밥 하는 일이 그림 그리는 일과 무슨 차이가 나는가. 밥 하는 일과 영화감독을 하는 일이 다르다고 생각하며 차려진 밥상은 그 맛이 다르다. 예술의 가장 기본은 죽어가는 것들을 살려내는 생명력이다. 밥 티 한 알 놓여 있는 모양에서 전 우주의 이치와 질서, 그리고 그 엄연한 존재들의 팽팽한 기운과 긴장, 그들의 아름다운 조화를 읽는다. 하루 삼시 세끼 밥상은 장엄하다. 그러니 밥을 때운다고 하지 말라.

  • 문화일반
  • 김원용
  • 2012.04.10 23:02

삶이 예술이다

본보 편집위원인 김용택 시인이 '문화예술, 일상에서 만나다'로 독자들을 찾아갑니다. 격주 화요일 문화면에 연재될 김 시인의 칼럼은 전문 영역으로 어렵게만 여겨온 문화예술에 대한 벽을 낮춰 일반의 이해를 넓히는 소통의 장이 될 것입니다.비가 오고 있다. 봄비답게 부슬거린다. 소리 없는 발걸음 같다. 방안에서 보면 비가 오는지 안 오는지 잘 모르다가도 우산을 쓰고 가는 사람들이나, 나뭇가지에 매달린 물방울을 보고 비가 온 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봄이 더디다. 꽃들도 세상을 더듬고 멈춰 쉬고 움츠렸다가 꽃망울을 터트린다. 더디고 느려도 정도를 걷는 모든 진행은 아름답다. 같은 가지에서도 어떤 꽃은 피고 어떤 꽃은 필 생각이 없는 모양이고 또 어떤 꽃은 피려고 생각중이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사람 사는 일이나 자연에서 일어나는 일이 다 그 일이 그 일로 보인다. 더 깊이 들여다보면 그러한 모든 것들이 다 서로 깊이 관계를 맺고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비와 풀잎이 그렇고 바람과 나무가 그렇고 해와 달이 그렇고 하늘과 새가 그렇다. 이 세상에 관계가 맺어져 있지 않은 것은 없다. 봄바람이 하는 일과 봄비가 하는 일이 다 서로 도와서 하나의 새로운 세계를 그린다. 그 더디고 느리고 터덕거리는 현실이 묘하다.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는데 갈등이 없을 리 없다. 사람들은 갈등을 조절하고 조정해서 조화로운 세상을 만들어 낸다. 조화로운 삶을 향한 인류의 의지는 불멸의 가치들을 창조해 냈다. 종교가 그렇고 철학과 과학이 그랬고, 사상과 교육이, 정치가 그랬다. 그 모든 것들 중에 세월이 갈수록 떼를 타지 않고 그 빛을 더욱 찬란하게 발하는 것이 있으니, 문학과 예술이다. 예술이 모든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것들로부터 홀로 꽃 피울 수 없음은 다 아는 사실이다. 예술은 역사를 이끌기도 했고, 역사를 정리하기도 했다. 그런 큰 힘을 발휘하는 예술이 사람들의 일상적이고 구체적인 삶속에서 나왔다는 사실이다. 예술이 사람들의 일상과 한 몸이 될 때 그 힘을 강하게 발휘했다. 쉽게 말하면 예술은 사람들의 일상적인 삶에서 나와 일상으로 새로운 얼굴이 되어 스며든다. 두 개의 작은 웅덩이가 한 몸처럼 서로 사심 없이 물을 주고받아 물을 맑게 하는 것 같은 공생과 상생의 가치가 일으킨 놀라운 질서가 곧 삶과 예술이다. 아주 구체적이고도 직접적이고 역동적이면서도 섬세한 일상의 정서들이 예술로 승화 되어 삶을 기름지게 추동한다. 일상을 바꾸고 사회를 흔들어 역사를 바꾸는 힘을 발휘한 이런 일과 놀이 즉 예술과 삶의 일치된 힘은 분산되지 않고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며 잘못된 지배 구조를 바꾸는 힘으로 작용한다. 그러나 자본과 권력의 힘이 강화되면서 예술은 일상으로부터 격리되고 분리되었다. 예술이 전문직이 되어 권력에 예속되어 무대로 올라간 것이다. 예술과 사회의 긴밀한 관계와 갈등 고리를 차단한 것이다. 일종의 타락이다. 그러면서 예술이 또 다른 권력이 되고 자본이 되었다. 현대 예술의 힘이 약화 된 것은 이런 모순을 의도적으로 조장한 권력 집단들의 관리에 있다고 보아야 한다.우리가 사는 세상은 우리 인간들과 자연들 스스로도 다 들여다보지 못하고 눈치 채지 못하는 작용과 반작용의 갈등의 연속 속에서 낡은 질서는 파괴하고 새로운 질서가 탄생한다. 그러므로 예술은 적체된 일상의 구태를 과감히 고발하고 통렬하게 비판한다. 예술과 삶이 따로일 때, 예술은 일시적인 위안으로 끝나고 다시 일상은 팍팍하다. 보고 듣고 생각하고 표현하는 모든 것들이 다 예술이다. 이제 우리가 사는 세상은 모든 것이 디자인이다. 낡은 정치, 낡은 경제, 낡은 교육제도를 새로 디자인(?) 할 때다. 종합적으로 사고하고 서로 통섭하고 융합해서 일상을 실질적인 행복으로 바꾸는 일대 혁명이 필요하다. 말 그대로 실사구시 정신이다. 예술은 삶을 자세히 들여다보는 눈을 갖게 하고, 그것을 또 예술로 표현하게 한다. 예술은 감동을 가져 온다. 감동은 살아 있는 것들이다. 느끼고 스며드는 감동은 생각과 행동을 바꾸어 운명을 바꾸는 가장 큰 교육이다. 봄비를 맞으며 매화가지 끝에 흰 눈이 트듯 삶에 눈 뜨라. 구차함에서 벗어나 나의 일상을 한 음계 높이거나 낮추어 아름다운 음으로 다듬고 고르는 품위와 격, 그게 예술의 힘이다.

  • 문화일반
  • 김원용
  • 2012.03.27 23:02
문화섹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