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가뭄과 폭염 그리고 거센 태풍이 산천을 훑고 지나갔지만 가을꽃들이 피어난다. 문득 한 소식 전해 오는 선선한 바람이 나의 세상을 새롭게 한다. 새로 보이면 그게 사랑이다. 아니면 이별이거나. 달라진 세상으로 우리의 발걸음을 옮긴다. 그 곳에 구절초 꽃이 피어나더니, 쑥부쟁이 꽃도 피어난다. 마타리 꽃도 피었다 이르고 물봉선 꽃도 피었다 일러라. 고마리 꽃이 피었구나. 억새도 피었다고 이르고 깊은 골자기에 싸리 꽃도 피었다고 일러라. 가을이구나! 가을! 이 세상 모든 풀과 나무가 다 초록의 잎을 피우고 꽃을 피우던 봄여름이 지나 이제 이 세상 모든 풀과 나무가 열매를 맺는 가을이다. 어느 봄날 나는 차 안에서 바람에 날리는 벚꽃을 보며 하루라는 시를 썼었다.
'이렇게 또 하루가 간다./이러다 보면 이틀이 사흘이 되겠지./너의 하루는 어떤 꽃이 지고/또 어떤 꽃이 피어나더냐.//꽃피는 일이 얼마나 힘 드는 일인지./꽃 지는 일은 또 얼마나 힘든 일인지.//하필이면,/이 봄날이/왜 내 일이 되었는지.//오동 꽃은 지고/이러다가 이레하고 여드레/그러다가 아흐레 열흘 그리고 또/하루'
그러다가 달라진 계절의 문턱을 넘으며 나는 '일자소식'이라는 시를 썼다. '선선해 졌어요./좋아요. 새벽이면/귀뚜라미들이/ 내 홑이불을 밑으로 발을 디밀고/운답니다./그 곁에, 가는 비가 서서/부슬거려요/부슬대는 소리를/잡아 다녀 덮습니다./한 소식 받아, 한세월 건너 디딜/끝이/따스한 그대 발 밑 온기를/찾아가네요./문득 일어나, 그립다고/ 일자 소식/ 받아씀'
나는 오랜 세월 시골에 살며 초등학교를 6년 동안 강 길을 걸어 다녔다. 차가 낸 길이 아니고 사람의 발길이 낸 길은 좁은 오솔길이었다. 강변 풀밭으로 난 길은 구불구불 휘어지고 굽이가 많았다. 길은 끝이 보이지 않았다. 걸으면 쉼 없이 나타나는 길을 걸어 가다보면 호수가 나타나고 징검다리가 나타났다. 봄부터 가을 끝까지 길에는 풀꽃들이 피어났다. 그 길은 나의 학교였다. 선생이 되어 결혼을 하고도 나는 그 길을 걸어 다녔다. 길은 변했지만 그 꽃들은 변함없이 피어났다. 붓꽃! 나는 붓꽃을 좋아했다. 반쯤 핀 붓꽃과 활짝 핀 붓꽃을 꺾어 들고 집으로 갔다. 집 가까이에 이르면 아이들이 나를 보고 달려왔다. 아이들에게 꽃을 주면 아이들은 꽃을 받아 들고 집으로 뛰어가 부엌문을 열고 나오는 엄마를 부르며 엄마에게 꽃을 내밀었다. 꽃을 받아 들고 엄마를 바라보며 환하게 웃던 아이들과 아내의 환한 얼굴은 생생한 폭의 그림이었다. 가을이면 나는 구절초 꽃을 그렇게 꺾어 들고 집으로 갔다. 우리 방에는 봄부터 가을 끝까지 꽃들이 꽃병을 떠나지 않았다. 겨울이면 찔레열매나 장구 밥 열매가 꽂혀 있었다.
아파트에 살면서 나는 시골에서 꽃을 꺾어 왔다. 어느 날은 내 머리 위에 벚꽃 잎이 몇 잎 얹혀 있었다. 꽃을 꺾어 들고 집으로 오거나 그렇게 꽃잎을 머리에 이고 오는 나를 보고 동네 아주머니들은 "역시 시인을 달라." 라고들 했다. 아이들이 자랐다. 어느 봄 날 집으로 돌아 온 큰 아이가 꽃송이가 서너 개 달린 개나리 꽃가지를 가방 속에서 꺼내어 아내를 주는 것을 보았다. 아내는 환하게 웃으며 그 꽃가지를 유리컵에 꽂아 싱크대 위에 놓아두었다. 직장을 그만 둔 뒤로는 꽃을 꺾어올 수 없어 베고니아를 기른다. 학교에 근무할 때도 나는 일 년 내내 그렇게 꽃병에 꽃을 꽂아놓거나 겨울이면 베고니아 꽃을 키웠다. 내가 꽃을 꽂지 못하면 아이들이 얼른 학교 뒤안에 가서 개망초 꽃을 꺾어 꽂아 두곤 했다. 예술은 극장엘 가거나 전시실에 가거나 날을 받거나 시간을 내어 따로 하는 것이 아니다. 사는 일 지금 당신이 바라보고 하고 있는 모든 삶의 행위가 다 예술이다. 삶의 예술, 그 작은 풀꽃 한 송이의 감동이 나를 바꾸고 세상을 바꾼다. 문득, 그렇게 세상이 달라 보이는 힘이 예술이다. 삶의 힘을 주세요. 꽃을 주세요. /본보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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