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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주제 그 작가]1. 숲길의 생명력에 10년 넘게 몰입

'길' 시리즈 선보여온 서양화가 류재현 씨 / 자연 그대로 세밀하게…'삶의 과정' 주목

▲ 류재현 作 'ROAD 2011-9'.

진부함의 위기일까, 완성도의 결실일까. 장르 불문하고 어떤 예술가가 한 가지 주제로 계속해서 작품을 내놓는다는 것은 진부함과 신선함의 애매한 경계에 스스로를 기꺼이 내놓겠다는 위험 부담을 감수하는 것이다. 새로운 기획 시리즈 '그 주제, 그 작가'에서는 도내에서 활동하는 작가들이 오랫동안 탐닉해온 주제를 통해 개성있는 작업 세계를 살펴보기로 한다.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기 위한 작가의 방식이 하나의 주제로 일관되게 나타난다고 봤다.

 

첫 번째 주인공은 '길'을 주제로 작업을 해온 서양화가 류재현(51). 완주군 구이면에 있는 그의 작업실로 가는 길은 화폭에 담긴 풍경만큼 평화로웠다. 그래서일까. 마을 어귀에서 늘어진 잠을 자고 있던 고양이들은 도심 속 고양이와는 달리 경계심이 아닌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낯선 이방인을 맞았다.

 

작업실에 들어선 그는 3월 코엑스 화랑미술제와 10월 프랑스 파리 전시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그는 작업에 전념하기 위해 지난달 임실중학교 미술교사를 그만뒀다. 작업과 후학양성 모두를 잘하고 싶지만 이제는 여력이 안 따라준다.

▲ 'ROAD 2012-17'.

인사를 건넨 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재생된 물건'이었다. 벌통을 재활용한 액자, 버려진 폐목재와 벽돌로 만든 침대·책장 등 낡아 못쓰게 된 상태에서 생명력을 갖게 된 물건들은 그가 추구하는 작품세계와도 맞닿아 있었다.

 

전북대 사범대학 미술교육과를 다니던 시절부터 그의 일관된 관심사는 '길'. 그에게 길은 작품의 소재이면서도 작가적 삶을 대변한다.

 

초반 그에게 길은 자연·생명의 파괴 등 부정적 면만 부각됐다. 특히 그의 제자가 도로 위에서 교통사고로 숨지게 되자 이런 부정적인 생각은 극에 달했다. "2000년대 초반까지 나에게 길은 죽음이었다"는 그의 말처럼 당시 작업에서 길은 음영이 뒤집히거나 색감이 과장 돼 표현됐고, 길 위의 공간은 죽어간 생물들로 채워졌다. 역설적이지만 그의 이런 초기작들은 작업실에서 가장 밝은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길에서 그가 기억하는 것들은 죽음, 즉 구체적 사건의 '결과'였다면 10년전부터는 길을 걸어가는 '과정'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자동차를 타고 빠르게 스쳐간 도로가 아닌 숲길을 걸으면서 자연의 생명력에 눈을 뜨게 된 것.

 

그는 숲길에 드리운 빛이 생명력을 극대화시킨다고 보고 이 순간을 놓치지 않기 위해 사진을 활용했다. 특히 5월에 막 새싹이 피어나기 시작할 즈음 아침이나 저녁에 비치는 빛을 사진에 담아둔 뒤 세필을 이용해 최대한 사실과 똑같이 그렸다. 그는 "자연에 존재하는 나뭇가지, 풀 등 모든 것들은 허투루 나지 않고 그 자체가 완벽하기 때문에 이 느낌을 최대한 그대로 그리려는 것" 이라고 설명했다. 그의 그림에 제목이 없는 것도 같은 이유다.

 

이 때문에 그는 한 작품을 완성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린다. 흰 캔버스에 검정색 바탕을 칠하고 점차 숲속의 밝은 부분들을 칠해 마지막에 가장 밝은 부분을 채색한다. 한 땀 한 땀 수놓 듯 일일이 세필로 작업을 하는 그는 "어두운 부분을 칠할 때는 작업을 포기하고 싶은 심정이지만 마지막 덧댐인 가장 밝은 부분을 칠할 때 쾌감을 느낀다"고 작업의 고됨을 에둘러 표현했다.

 

화제를 바꿔 지난해 프랑스 정부가 운영하는 레지던스 '시때 인터내셔널 데 자르(cite international des art)'에 참여했던 경험담을 들어봤다. 그는 "빈 방만 덜렁 있는데 참 막막했다"라고 첫 느낌을 전했다. 할 수 있는 프랑스어는 '봉 주르' 밖에 없던 그에게 이국땅의 첫 인상은 두려움. 하지만 그는 물감과 이젤 구입한 뒤 작업에 몰두했고 파리 시내 갤러리 돌며 "아임 페인터, 스테이 인 시때(I am painter, Stay in cite international des art)" 등 가능한 모든 외국어를 동원해 자신을 알렸다. 그 결과 '라자르 갤러리'에서 그의 가치를 인정해 작품을 구입했고 인근에 있는 '89 갤러리'에서 오는 10월 전시를 할 수 있도록 주선해줬다.

 

유럽과 미국 미술시장에 진출하는 게 목표인 그는 파리에서 경험을 살려 천천히 꿈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오는 15일 코엑스 화랑 미술제 참가를 시작으로 10월 파리 '89 갤러리' 초대전에 이어 KIAF(한국국제아트페어)에 출품할 예정이다.

 

"지역작가가 세계에 진출할 수 있다는 것을 꼭 보여주고 싶다"라고 말한 그는 작업실 곳곳에 있는 '재생된 물건'처럼 그의 작업 또한 치유를 통해 생명력을 얻은 캔버스로 나아가길 바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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