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켜켜이 쌓인 삶의 순간 한우물 파듯 화폭에…

② '기억-세월의 흔적' 연작 서양화가 김영란 씨

▲ 김영란 作 '休 II'.
 

첫 사랑을 처음 본 순간 머릿속이 하얗게 변한 기억, 연인과 이별하고 바라 본 하늘, 군대에서 보초근무 중 쏟아지던 별들.

 

이런 모습들은 말이나 글로 표현할 수 없는 어떤 감각으로 머릿속에 자리한다. 이 모두가 '찰나의 순간'이기 때문이다. 이런 순간들을 온전히 재구성하기란 불가능에 가깝고 다만 하나의 감각으로 뭉뚱그려져 남아 있을 뿐이다. 서양화가 김영란(52)씨는 이처럼 감각으로 기억된 과거의 흔적을 찾아 화폭에 새기는 작업을 이어가고 있다.

 

이런 그의 노력은 작업실 입구에 있는 사진과 여러가지 오브제를 붙여 만든 설치작품에서부터 두드러졌다. 돌아가신 어머니를 추억하며 그와 형제들이 함께 만든 이 작품에는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 병원 진료 기록들과 예전 사진들이 함께 뒤섞여 있었다. "비록 어머니의 실체는 없지만 병원에서 사용했던 물건을 보면 아련한 감각으로 남아 있는 그 순간들이 떠오른다"는 그는 과거로 시간을 돌려 자신의 이야기를 하나씩 풀어갔다.

 

이화여대 서양화과를 졸업한 그는 고등학교에서 미술교사로 재직하다 딱 3년을 채우고 그만뒀다. 다른 사람들은 "왜 좋은 직장을 그만두냐"고 만류했지만 그는 이때가 아니면 자신이 하고 싶은 작업을 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곧바로 고향인 전주로 내려온 뒤 당시 지역에서 보기드물게 전위적인 작업을 선보였던'쿼터그룹'맴버로 합류했다. 그에게 쿼터그룹은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는 등 작업에 대한 열정이 흔들릴때마다 그를 잡아주는 든든한 버팀목이었다. 최근 '화기애애'라는 그룹을 만들어 후배들에게 작업 열정을 불어넣어 주는 역할을 도맡아 한 것도 이때의 기억 때문이다.

 

그러던 중 지난 2001년 그는 전북대 일반대학원 미술학과에 진학하며 첫 번째 개인전을 열었다. 나무, 꽃 등을 숯을 이용해 추상적으로 표현한 작품은 당시 그의 작업실이 노인정 바로 옆에 있어서 탄생한 것. 그는 캔버스에 물감을 바르고 그 위에 숯을 덧칠한 뒤 칼과 칫솔 등을 이용해 수백번 긁어내기를 반복했다. "작업실에 가면 매일 같이 어르신들을 관찰했고 그들이 나이가 들면서 생기가 빠져나간 자리에 세월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라며 작업 동기를 설명했다. 이때 전시는 그가 감각으로 기억된 세월의 흔적을 화폭에 담아낸 첫 번째 시도였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두번째 개인전 '생명-그 겨울나기'에서는 다른 형태로 '기억'을 담아냈다. 고려청자를 만들때 사용되던 상감기법을 활용한 것. 낙엽, 나뭇가지의 형태를 점토를 이용해 캔버스에 새긴 뒤 이를 긁어내고 그 위에 다시 점토를 덧대는 과정을 수십차례 반복한다. "겹겹이 쌓아올린 무수한 색들은 오랜시간 퇴적과 생성을 반복한 이미지들의 깊이이며 지난 삶의 흔적과 시간의 흔적들을 기억해 내기 위한 것"이라고 말한 그는 애써 기억해낸 흔적들을 반투명의 색으로 다시 덮는 작업을 반복하며 하나의 감각으로 남아있는 기억을 되새겼다.

 

기억에 대한 그의 집착은 '일상 위를 걸어보다'시리즈에서도 계속된다. 그는 밖에서 안을 들여다보는 관능적 관조가 아닌 자신의 공간에서 밖을 들여다보는 호기심 어린 관조로 세상을 조명한다. 이는 그의 어릴적 기억과 맞닿아 있다. 유치원에 가고 싶었지만 집안의 반대로 가지 못해 당시 방안에서 바라봤던 바깥세상을 재구성한 것. 전작에서는 볼 수 없었던 사람, 자동차, 건물 등이 그의 화폭에 등장하는 이유다.

 

오는 6월과 7월에 개인전을 준비하고 있는 그는 '일상 위를 걸어보다'시리즈를 올해까지만 이어나갈 생각이다. 그에겐 아직 꺼내야할 기억이 아직도 많이 남아있기 때문.

 

"미술작업은 오랜 친구(기억)와의 만남을 이어주는 매개체"라고 말한 그는 덧댐 작업으로 갈라진 손을 바라보며 다시 친구들이 그의 화폭으로 새겨지길 기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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