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이 환자들의 행동에 나타나는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거의 하루 종일 투덜대고 불평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가시철망이 희망을 빼앗아갔다고 생각해서 계속 불평만 했습니다. 그러나 같은 수용소에 살면서도 끝까지 견디어내고 살아난 사람들이 있습니다. 철망을 넘어서서 푸른 하늘을 보고, 철망 밑에 핀 작은 들국화를 보며, 고향도 그려보고, 사랑하던 사람들을 생각하며 내일을 꿈꾸던 사람들이 바로 그들입니다. 그들에게는 ‘가시철망 병’이 없었고 마침내 살아서 나왔다는 것입니다.
절망은 가장 치명적인 병입니다. 인간의 의지를 꺾습니다. 기력을 잃게 만듭니다. 주위 사람까지 쓰러지게 만드는 전염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철학자 키에르케고르는 ‘절망’을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고 했습니다. 절망의 마지막은 죽음이요, 패배입니다.
그러나 내일에 대한 소망은 오늘의 고난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을 줍니다. 가진 능력을 한없이 증가시킵니다. 모든 일에 승리를 가져다 줍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빌라도의 법정에 섰을 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다.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다면 내 종들이 싸워 나를 유대인들에게 넘기우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요18:36). 예수님은 영원한 천국을 바라보며 내일에 대한 소망을 가지셨고, 그 소망으로 고난을 이기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자들은 절망하지 않습니다. 어느 자리에서든 절망 대신에 소망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소망이 있는 한 실패는 없기 때문입니다. 단 환난을 이길 수 있는 소망은 오직 주님께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세상에서 온 낙심거리를 세상의 소망으로 해결하기는 어렵습니다. 오직 주님 주시는 지혜와 주님을 바라보는 소망으로 해결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나는 항상 소망을 품고 주를 더욱더욱 찬송하리이다”(시71:14).
소망은 단순히 지혜로운 생각이 아니라 신앙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믿음과 소망은 하나입니다. 영원한 하나님을 믿는 자들은 삶이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소망을 버리지 않습니다.
기독교인 환자를 치료하고 있던 어떤 의사가 그 환자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어떻게 그러한 확신과 기쁨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습니까?” 그때 환자의 대답이 이러했습니다. “의사 선생님, 나는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내 상태를 당신의 손에 맡겼습니다. 나는 지금 당신을 신뢰하고 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인 신뢰를 통해서 오늘도 평안을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소망의 삶을 통해 얻어지는 축복입니다.
삼중고에 시달렸던 불구자 ‘헬렌 켈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소망은 성공에 이르는 신앙이다.” 한 생을 성공적으로 살아가기 위해서 가슴 깊이 새겨놓아야 할 말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렘2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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