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사회에서 문화는 제품의 중요한 요소가 되고 있다. 특히 고급의 전통문화는 명품을 만드는 필수적인 요소다. 19세기 전까지만 해도 대부분의 제품은 수공예제품으로 주로 왕족이나 귀족을 위한 소량생산이 대부분이었다.
18세기 중엽 영국에서 시작된 기술혁신을 기점으로 산업혁명이 일어나면서 기계를 이용한 대량생산이 가능해지고 산업디자인이 시작됐다. 그로인해 질 좋은 제품을 일반대중에게도 보급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20세기 중반을 지나면서 지역에 갇혀있던 거점시장이 세계시장으로 확대되면서 대량생산이 더욱 극대화됐다. 장식적인 것들은 배제되고 기능적인 것이 부각되면서 대량생산이 용이한 단순한 형태로 디자인이 발전하게 되었다.
그러나 21세기로 진입하면서 기능적인 제품이 포화상태가 되면서 기능보다도 제품에 담겨있는 스토리로 차별화하려는 노력이 커져 가고 있다. 슈퍼에서 쉽게 살 수 있는 달걀을 보더라도 과거에는 크기에 따른 분류만 있었으나 요즘에는 다양한 스토리로 차별화된 달걀을 발견할 수 있다. ‘풀어 키운 닭이 낳은 달걀’, ‘젊은 닭이 새벽부터 낳은 달걀’, ‘청국장을 먹고 자란 건강한 닭이 낳은 달걀’, ‘유황을 먹고 자란 닭이 낳은 달걀’ 등등 소비자는 달걀에 담겨있는 이야기를 구입하게 된다. 물론 맛에서 차이를 발견하기 어렵지만 소비자는 맛보다 스토리가 전해주는 메시지 안에서 만족함을 느끼게 되기 때문이다.
과거 일본은 1980년대 말까지 세계 최고의 생산기술 수준을 바탕으로 대량생산 제품의 세계 시장을 석권하다시피 하였으나 현재는 한국에도 밀리는 사양의 길을 걷는 것을 볼 수 있다. 일본제품은 대표적인 기능 위주의 대량생산 제품으로 매장에서 볼 때에는 새로워 구매의 욕구가 발생하지만, 일단 구입 이후에는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같은 제품을 가지고 있을 것 같은 느낌을 받게 되면서 쉽게 식상함을 준다. 반면에 유럽 제품은 구매 시점에서는 어딘가 어색한 듯하지만 소유하고 있는 시간이 길면 길수록 깊은 맛을 느낄 수 있다. 대량생산된 제품임에도 나만 가지고 있는 듯한 기분을 느끼게 되는 것이 유럽 제품이 가지는 힘 이다.
우리나라는 한창 세력을 뻗치던 일본 디자인에서 일찍 시야를 돌려 유럽으로부터 디자인의 영향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1970년대 중반부터 현대자동차는 포니를 시작으로 유럽디자이너들과 함께 작업을 시작했다. 1980년대 말부터는 삼성전자를 시작으로 전자회사도 유럽 디자이너들과 협력을 시작하면서 기능 위주의 일본 스타일에서 탈피해 유럽 스타일로 문화 기반인 디자인 고급화가 추진됐다.
오늘날 우리나라는 디자인 강국으로 부상했다. 일본은 세계 최고 수준의 디자인이라는 자만심으로 한국 디자인의 유럽 선회를 통한 문화기반의 디자인 추구를 지켜보고만 있었다.
1990년대 중반에 필자가 운영하던 디자인회사에 일본자동차회사로부터 자동차디자인 의뢰를 받은 적이 있었다. 현재는 세계무대에서 중요한 자동차디자인프로젝트에 많은 한국디자이너가 참여하고 있지만 당시만 해도 외국회사가 우리나라 디자인회사에 자동차디자인을 의뢰하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었으나 미국으로 수출될 일본 회사의 자동차디자인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다. 디자인이 끝나고 무슨 연유로 일본 회사에서 한국 회사에 디자인을 의뢰하게 되었냐고 물어보았더니 아주 흥미로운 대답을 들을 수 있었다. 한국이 일본과의 디자인협력을 중단하고 유럽과 디자인을 진행하면서 한국 디자인이 크게 변하고 있는 것을 느꼈고 실제로 그 변화를 직접 확인하기 위해 한국디자인회사에 디자인을 의뢰하게 되었다고 한다.
비슷한 시기에 미국의 메이저 가전회사와 디자인작업을 수년 동안 진행하고 있었다. 하루는 미국 회사에서 파견된 디자이너가 고민하고 있기에 물어본 적이 있다. 그 디자이너는 우리가 새로 디자인한 세탁기에 적용된 아름다운 고전문양이 보기에는 좋은데 본사에 어떻게 설명할지 난감하다고 했다. 미국은 철저하게 기능 위주의 디자인을 하고 있었는데 한국적인 디자인이 장식적이었으나 보기가 매우 좋아 고민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제품은 어느 수준까지는 기능이 중요한 요소가 되지만 이후 고급 수준의 제품으로 올라가기 위해서는 그에 걸맞은 스토리가 필수적으로 담겨 있어야 한다. 따라서 한국산 명품을 만들기 위해서는 한국의 고급전통문화가 적용되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 기술개발 못지않게 우리의 전통문화 속에서 스토리를 발굴하는 노력이 중요한 작업으로 인식돼야 한다.
전주대 산업디자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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