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흡기감염증인 메르스가 전국을 강타하고 있었다. 이름도 낯설기 만한 이 감염병의 존재가 우리의 일상을 얼마나 큰 폭으로 변화시켜놓을지 앞날에 대한 전망은 불투명하고, 현실은 그만큼 불안해졌다. 사람들의 일상이 낯설어지면 도시는 질서를 잃는다. 한적해지거나 번잡해지거나 일상의 불편한 변화를 마주하는 일은 마뜩치 않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대한민국이 맞닥뜨린 이 불안한 현실은 거의 생중계하다시피하는 언론매체와 SNS의 전파력으로 피해갈 수 없는 일상이 되었다.
고속도로를 달려 도착한 서울 여의도의 국회의사당. 대한민국의 질서를 이끌어야 하는 이곳에 들어서면서 한숨이 나왔다. 이 공간에서 행해져야 할 질서는 잘 행해지고 있는가, 그 가치는 존중받고 있는가. 심하게 굴곡진 시대, 그래도 희망을 보고 싶었다.
새정치민주연합의 진선미 의원(48)을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진의원은 비례대표로 국회에 입성한 초선의원이다. 민변에서 활동한 변호사 경력을 가진 그는 14년 동안 법조인으로 살아오면서 우리 현대사의 현장을 지켰다. 호주제 위헌소송, 양심적 병역 거부자, 성소수자, 여성 인권까지……. 우연히 마주친 그 길에서 그의 30대와 40대의 삶은 치열하고 격렬했으며 의미 있고 아름다웠다.
사실 그는 호주제 폐지에 앞장섰던 민변의 변호사 중 한사람이지만 그의 이름이 우리에게 더 넓게 알려진 것은 정치인이 되고나서다.
그가 막 국회의원이 되었을 때 지난 대선에 나섰던 문재인 후보는 개인적인 친분도 정치적 경험도 없는 그를 대변인으로 불러들였다. 노심초사, 모든 열정을 바쳐 뛰었지만 그의 앞에 놓였던 절체절명의 꿈 ‘정권교체’는 결국 이뤄지지 않았다. 더 단단해지고 치열해져야 했다. 변호사 ‘진선미’는 그 과정에서 그렇게 정치인이 되었다.
그의 입법 활동은 유난히 주목을 끈다. 분명히 이유가 있을 터다. 인간의 기본적인 권리에 맞닿아 있는 입법의 취지나 목표도 그렇지만 법안 발의에 이르기까지 그가 행하는 과정은 치열하고 엄정하다. 그를 만난 이유다.
인터뷰를 하면서 그로부터 유난히 많이 듣게 된 단어가 있다. ‘왜냐면’. 그런데 이 단어가 주는 감흥이 특별했다. 남다른 신뢰와 희망을 그에게서 보게 되었다.
-국회 들어와 보시니 어떻습니까.
“죽을 것 같죠 뭐. 짐작은 했었지만 이 정도인줄은 몰랐죠.(웃음)”
-초선의원 답지않게 사회적 이슈를 몰고 다닌 탓 아닐까요.
“그래서 직접 경험이 정말 무서운 것이라는 걸 절감하고 있습니다. 주변에 많은 분들이 같은 길을 앞서 가셨는데도 나 스스로 경험해보니 괴리가 참 크더라고요. 공부를 톡톡히 하고 있는 셈이지요.”
-오랫동안 국회 입성을 준비하고도 실패하는 많은 입지자들에 비해 진의원님은 수월하게 입성하신 셈이죠.
“사법연수원 다닐 때 선배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어요. 10년 후 쯤에는 정치 분야도 여성들의 진출이 훨씬 많아질 것이라고요. 돌아보니 그 시점이에요. 여성에 대한 역차별로 얻은 결실이랄까요.”
-그런 차별이라면 많아질수록 좋을 것 같습니다.(웃음) 입법 활동을 활발히 해오셨는데, 국회의원의 중요한 역할이 입법 활동이니 당연한 일이기도 하지만 그동안 발의한 법안 대부분이 인권을 비롯한 우리 삶의 기본적인 문제를 담은 것들이어서 특히 활동이 주목을 모으는 것 같습니다. 최근에는 ‘주민등록법 일부개정법률안’을 내셨더군요.
“국회에 들어오고부터 지금까지 개인정보 유출 관련 사건이 지속되고 있어서 줄곧 그 해법을 고민해왔습니다. 전문가 시민단체들과 머리를 맞대어 왔지만 근원적인 해결방법을 찾아내기 쉽지 않았죠. 이 법안은 지난 3년 동안 고민하며 연구해온 결과물입니다.”
-의안 발의까지 준비기간이 꽤 오래 걸리는군요.
“제가 법조인이어서인지 법이 가지는 엄중함이나 의미를 특별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한 가지 주제가 정해지면 전문가들과 지속적으로 소규모 간담회를 갖고 같은 문제를 고민해온 단체들과 행정 부서 담당자가 함께 만나 문제를 제기하거나 토론을 통해서 검증하고 또 검증하면서 집적된 결과를 법안으로 마련하죠. 그래서 많은 시간이 걸리는 편입니다.”
-발의한 법안이 많은데, 성과는 어떻습니까.
“실제로 성과를 얻은 것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시작할 때는 그렇게 까다로운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결과는 늘 그런 기대를 무너뜨리거든요.”
-진행되고 있는 것 중에서 가장 절실한 법안은 어떤 것인가요.
“여러 가지가 있지만 형제복지원 진상조사 관련법이 현재로서는 가장 절실한 법안입니다.”
-그 법은 지난 4월에 통과될 것으로 기대했는데, 불발되었더군요. 국민들의 공분이 그렇게 큰데도 안 되는 이유가 있습니까.
“전 정부에 대해 책임을 묻는 일이어서 그렇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이해가 잘 안 되는 상황이죠. 이 문제는 개인적으로도 12년 전부터 관여를 했고, 법안은 햇수로 3-4년 되는데 결과는 늘 답답합니다. 동료 의원들의 합리적인 판단에 기대를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국회의원 첫해부터 준비하신 ‘생활동반자 관계에 관한 법률’은 어떻습니까.
“그 법은 국회 들어 올 때부터 고민했던 문제입니다. 어떻게 보면 제가 국회에 들어오게 된 배경일 수도 있습니다. 변호사를 하면서 여성으로서 사명감을 갖고 접한 것이 가사사건인데 그 사건들이 이 법안을 마련하는 바탕이 되었어요. 3년째 다양한 방식으로 여론을 수렴하며 법안을 다듬고 있습니다.”
- 그만큼 법안 통과에 강한 의지를 갖고 있겠군요.
“호주제의 경우, 제도적 변화까지 끌어내는 데는 실질적인 작업만도 10년 이상 걸렸습니다. 그 과정을 이어오면서 우리사회가 ‘가족’에 대해 좀 더 유연한 자세를 가져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어요. 이법은 누구에게나 ‘특별한 한 사람을 가질 권리’를 부여하는 법률입니다. 삶을 누구와, 어떤 방식으로 함께 살아갈 것인가 그것을 선택할 권리는 헌법이 보장하고 있는 행복추구권에 해당하죠. 두 사람이 삶을 공유할 수 있도록 뒷받침해주고 지원해주는 일련의 제도에 접근할 권리를 의미하는데, 이것은 더 이상 사적인 것이 아니라 공적인 권리의 문제거든요.”
-구체적으로 어떤 권리들이 있습니까.
“국민건강보험·국민연금·보험수혜, 임대주택에 입주할 권리, 위급할 때 의료적 결정을 할 수 있는 권한, 가정폭력으로부터 공적인 보호를 받을 권리, 정책적 대상으로 고려되고 연구될 권리 등 무수한 제도들이 있죠.”
-이 법안에 대해 적지 않은 반발과 비판이 있던데요. 법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맞습니다. 사실 이 법은 가족을 해체하거나 혼인을 대체하는 제도가 아니거든요. 오히려 늘어나고 있는 혼인, 혈연 외 관계에 법적인 보호를 제공해 사람들이 함께 잘살아가도록 장려하고, 이를 통해서 사회적 안정을 이루도록 하는 법률이죠. 친족 중심의 가족제도로는 포함할 수 없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는 상황에서 제도의 지체는 정상가족 밖의 사람들을 사회 밖으로 밀어내고 있는 형국입니다. 누군가가 겪게 되는 고독감을 극복하고 서로가 서로를 돌볼 수 있도록 믿고 의지하는 사람과 생을 나눌 수 있도록 하는 법이라고 저는 확신하는데, 사회적으로 고독과 우울의 증가를 막는다면 사회복지비용을 줄이면서도 사회적 통합이 가능해지지 않을까요. 이 법의 실제 내용이 널리 알려졌으면 좋겠어요. 반대의견을 갖고 있었던 분들도 막상 이 문제로 토론을 하면 굉장히 좋은 법이라고 생각이 바뀝니다.”
-화제를 좀 돌려보겠습니다. 사법연수원을 마치고 검사나 판사가 되는 과정을 생략하셨더군요. 특별한 이유가 있었습니까.
“고민은 했었죠. 그 당시만 해도 곧바로 여성이 변호사를 하는 경우는 특히 드물었어요. 소위 ‘영업’을 해야 하니까……. 환경적으로는 어려운 일이었죠. 사건을 수임해야 하는데 사법연수원 경력만으로는 차별성을 갖기도 어렵고요. 그래서 주위에서는 반대가 많았어요. 그런데 어느 한쪽에 서서 싸워주는 일이 무엇인가를 판단하는 일보다 제가 좀 더 잘할 수 있고 맞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다행히 혼자 개업 하는 상황이었으면 부담스러웠을 텐데 좋은 선배들이 있는 법무법인에 들어갈 수 있어서 다행이었죠.”
-법무법인 ‘덕수’가 첫 직장이었군요.
“사법연수원을 마치고 99년 ‘덕수’에 들어갔는데, 당시에는 그 곳이 인권과 사회변화를 고민하는 젊은 법조인들이 일하고 싶어 하는 곳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어요. 덕수에서 일하시던 이석태변호사님을 알게 되었는데 마침 여성 변호사를 찾고 있었던 차에 저와 인연이 닿았던 것이거든요. 저로서는 행운이었어요.”
-운동권 출신 변호사들이 주축이 된 법무법인에 합류하게 된 이후 더 새로운 길이 열린 셈이겠군요.
“그렇죠. 선배들 덕분에 사회적 이슈를 공부하며 공론의 중심에 서기도 했고, 그러면서 우리 사회의 면면을 읽을 수 있는 기회가 되었어요. 변호사가 되면서 바로 시작한 호주제 연구는 제 삶에 아주 상징적인 사건이 되었고요. 덕수에서 일했던 10년이 제 삶을 바꾸고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길을 열어주었습니다.”
-많은 사건을 접하셨을 텐데, 그 사건들을 변론하면서 개인의 삶 뿐 아니라 한국사회의 많은 부분을 변화시킨 보람도 크겠습니다.
“개인적으로는 행복한 일이죠. 그런 중요한 현장에 함께 있을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제게는 큰 의미니까요. 생각해보면 송두율 교수님 사건과 같은 이념의 문제부터 하리수씨 사건 같은 소수자의 인권, 고 최진실씨 친권문제 같은 가사분쟁 등의 사회적 이슈를 경험하면서 정치적 실험에 도전할 수 있는 의지를 갖게 된 것 같아요.”
-시위현장에 직접 나가게 되는 일도 많았겠군요.
“잘 단련이 되었죠.(웃음) 특히 변호사 초기에는 재건축 재개발과 관련해 철거민들을 오랫동안 도와주신 김형태 변호사님을 열심히 따라다녔어요. 그때 많이 경험했죠.”
-그러면서 현실적인 문제를 더 긴밀하게 이해하게 되었겠습니다.
“그때 그분들이 당하는 것을 보면서 우리 사회에서 억울한 일을 당하는 사람들이 정말 많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 저는 지금도 집을 소유하지 않고 임대로 살고 있는데, 그 때 철거민을 보면서 결심했거든요. 왜 재개발로 인한 이익을 소유주만 향유해야 하는지 이해가 안가더라고요. 정의가 뒤바뀌었다는 생각에 정말 열심히 싸웠죠.”
-소수자의 입장에 서는 일이 쉽지는 않았을 텐데요.
“사회적인 환경도 그렇지만 저는 특히 정서적으로도 힘든 일들이 많았어요. 눈물이 많은데다 다른 선배들처럼 논리적이고 이성적이지 못하거든요. 지금도 돌아보면 부끄러운 일이 많은데, 그래도 치열한 현장에 함께 있었던 10년이 오늘을 있게 해준 중요한 시간이라는 것에 감사하고 있습니다.”
-정치에 입문하게 된 배경이 짐작이 갑니다. 최근에 지역구를 맡으셨더군요.
“강동구를 맡게 되었는데 사실 잘 할 수 있을지 걱정이 되지만 ‘그래도 할 수 있다’는 확신과 해야만 하는 과제가 주어져있으니 용기를 냈어요.”
-좀 더 강한 정치적 실험이 시작되는 셈인데요. 지역구에 대한 관심은 자연스럽게 생긴 건가요.
“지역위원장인 이부영의장님이 손을 내밀어주셨을 때 많이 망설였어요. 고민이 많았습니다. 사실 쉬운 지역이 아니거든요. 이부영의장님께서 3선을 한 곳이긴 하지만 우리 당 소속이 아니셨잖아요. 그러나 아직 저의 정치적 실험이 마무리 되지 않았고, 더구나 정권교체라는 꿈이 아직 남아 있는 상황에서 어떤 역할이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이 용기를 갖게 했어요.”
-대학을 가면서 고향을 떠나셨고 이제 강동에서 두 번째 정치인생을 시작하시는데 밖에서 보는 전북은 어떻습니까.
“전북은 갖고 있는 장점, 자산이 참 많죠. 한편으로는 소외되고 배척당한 역사가 있지만 그런 문화적 가치가 보호되고 있다는 것은 감사한 일이라고 봅니다. 다만 우리가 오늘에 이르러 그런 장점을 진정한 가치로 받아들이고 있느냐의 문제가 있는데, 현실은 그렇지 못하죠. 획일화된 관점에서 벗어나는 일이 쉽지 않으니까요. 가치관을 변화시키고 방향을 조금만 달리 보면 전북만큼 소중한 동력을 가진 곳도 많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동력의 가치를 재대로 보려하지 않거든요. 제가 만약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다면 그런 의식을 바꿀 수 있는 정책의 실현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싶습니다.”
인터뷰는 당초 정해진 시간을 훌쩍 넘어서야 끝이 났다. 그는 자신이 왜 정치인의 길을 가는가를 묻고 또 묻는 정치인이었다. 현실에 대한 명쾌한 분석과 풍부한 현장 경험으로 다져진 그의 논리는 눈물과 감정을 앞세우던 새내기 변호사의 진정성을 뛰어넘는 설득력으로 답과 질문을 넘나들었다.
그가 궁극적으로 정치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다시 한 번 확인해보고 싶었다. 이런 답이 돌아왔다.
“2012년 정치에 뛰어들 때 지금까지 살아온 방향을 바꾸는 것에 대한 전면적인 고민을 해야 하는 지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지금도 그 생각은 변하지 않았죠. 우리가 제대로 가고 있는가에 대한 확신이 필요한 지점. 우리가 소중하게 생각해야할 가치, 지켜야할 가치를 위해 국가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를 고민하고 그 크고 작은 답을 구체적인 현장에서 찾아내는 일, 그것이 제가 정치적 실험을 이어가는 이유입니다.”
가뜩이나 웃음 많은 그의 얼굴이 더 환해졌다.
● [진선미 의원은] 순창출신 법조인…새정연 비례대표로 정치 입문
진선미의원은 순창에서 나고 자랐다. 위로 아들 넷을 얻은 후 막내로 얻은 딸을 어머니는 ‘여자는 조신하게 커야 한다’는 엄격한 교육관으로 키웠다. 이산가족인 아버지는 초대 순창문화원장을 지낼 정도로 문화적 감성이 특별한 분이었다. 중학교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가계는 고스란히 어머니 몫으로 안겨졌다. 어머니는 순창읍내에서 탁구장을 운영하며 아들 넷과 딸을 교육시켰다.
중고등학교 시절은 수업료를 독촉받을 만큼 가난했으나 지금 돌아보면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었다고 생각한다. 큰 오빠는 공부 잘하는 동생에게 법대 진학을 권유했다. 성균관대 법학과에 들어갔으나 법조인이 되겠다는 뚜렷한 목표는 없었다. 대학 1학년 때 과 선배를 만나 큰 굴곡 없이 대학생활을 했다. 그는 사회적 문제나 현실인식에 눈을 돌리지 않았다. 학생운동으로 블랙리스트에 올라 사시를 두 번 합격고서야 법조인이 된 큰오빠(진봉헌변호사)와 역시 운동권이었던 넷째 오빠로부터 얻은 일종의 자기 검열(?)이었다.
대학 4학년 때 고시공부를 시작했다. 공부하는 동안 인생의 가장 큰 시련을 겪었다. 그때마다 가장 큰 힘이 되어주었던 사람은 10대에 만나 14년 연애하고 결혼한 남편이다. 이들 부부는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렸지만 아직 혼인신고를 하지 않은 동거부부다. 호주제가 철폐되면 그때 혼인신고를 하자는 부탁을 흔쾌히 들어주었던 남편은 정작 호주제가 해결되자 제도에 얽매여 인생의 틀을 결정하는 것에 마음 내켜하지 않는 아내의 변심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8전 9기로 사시에 합격한 그는 사법연수원 시절 생태와 마음공부 등에 관심을 갖고 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의 인생을 바꾼 책 <조화로운 삶> (스콧 니어링 부부 지음)을 만난 것도 이때다. 법조인으로서의 길을 이끌어준 사람이 그 책을 번역한 이석태 변호사였다. 그 인연으로 검사나 판사 생활을 거치지 않고 ‘덕수’에서 변호사 생활을 시작했다. 이곳에서 10년, 우리 사회의 뜨거운 갈등의 현장을 선배 동료 변호사들과 함께 지키며 건강한 나라를 꿈꾸었다. 덕분에 우리 현대사의 굵직한 지점에서 호흡할 수 있었던 그는 수많은 변론으로 사회적 이슈를 선점하며 제도적 변화를 이끌어냈다. 그중에서도 호주제 폐지는 그의 열정이 온전히 배인 결실이다. 조화로운>
19대 총선에 새정연 비례대표로 신청해 당선, 정치인의 길로 들어섰다. 지난 대선에서 문재인후보 대변인을 맡아 활약했으며 지난 지방선거 때는 최문순 강원도지사 후보 캠프 수석대변인을 맡았다. 2월부터 서울시 강동구에서 지역민들과 소통을 시작한 그는 본격적인 활동을 위해 지난 5월 말 사무실을 열었다. 강동구는 아직 완성하지 못한 그의 정치적 실험을 더 강한 의지로 실현해갈 지역이 됐다. 각 분야의 전문가들과 교류하며 쌓은 인맥이 워낙 두터워 곳곳에 지원군이 많다. 이들은 그의 정신을 늘 다잡게 하는 인생의 스승이자 버팀목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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