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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환경운동연합 이정현 사무처장 "사회는 서서히 변화하는 것, 건강한 변화를 위해 파장을 일으키는 것이 활동가의 역할"

전북환경운동연합 이정현 사무처장이 전주시 다가동에 위치한 사무실에 업무를 보고 있다. /박형민 기자
전북환경운동연합 이정현 사무처장이 전주시 다가동에 위치한 사무실에 업무를 보고 있다. /박형민 기자

 우리나라 환경운동의 역사를 만들어온 1세대 환경운동가 최열 환경재단 이사장의 인터뷰를 읽었다. 이런 대목이 있었다. “환경운동을 하겠다고 들어온 똘똘한 젊은이가 3년이 지나면 머리가 빈다. 5년이 지나면 파김치가 된다. 7년이 지나면 무감각해진다. 그렇게 지쳐서 나가고 새로운 사람이 들어오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활동가들이 안정적으로 활동할 수 있기 위해 창립한 환경재단의 취지를 설명하는 인터뷰였다.

한 사람이 떠올랐다. 3년이 지나면 머리가 비고 5년이 지나면 파김치가 되고 7년이 지나면 무감각해져 조금 거칠게 표현하자면 ‘지쳐 나가떨어진다’는데, 50대를 눈앞에 둔 지금도 여전히 ‘똘똘한 젊은이’로 현장을 누비고 다니는 활동가.

전북환경운동연합 이정현 사무처장(49)이다.

20대 후반, 환경운동을 돕다가 아예 직업으로 환경운동 활동가를 선택해 20년 한길을 걸어온 그의 ‘도무지’ 지치지 않는 열정이 궁금했다.

예상대로 일주일 내내 환경 관련 행사와 세미나와 민원현장과 출장까지 촘촘히 엮어져 있는 그의 일상을 비집고 들어가는 일은 쉽지 않았다. 오후 한나절 시간을 얻었다.

검게 그을린 얼굴이 올 여름도 만만치 않았을 민원 현장의 면면을 짐작하게 했지만 그는 지치지도 무감각해 보이지도 않았다. 오히려 ‘환경운동의 생명은 현장성에 있다’는 것을 그대로 보여주는 열정이 더 새로웠다.

-어제까지 에너지의 날 행사가 있었죠. 태풍 솔릭 때문에 준비과정에 어려움이 있었겠습니다.

“해마다 해오는 일이어서 특별히 어려움을 겪지는 않았는데 아무래도 태풍으로 행사장이 야외에서 실내로 바뀌면서 역동성이 떨어지긴 했습니다. 어제는 환경 다큐영화 ‘알바트로스’ 상영회가 있었는데, 눈물겨운 영화였어요. 과소비사회의 이면을 그대로 고발하는 이 영화를 보면서 많은 분들이 생태위기 상황의 심각성을 절감하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알바트로스라면 전설의 새로 불리죠. 해양 생태계 문제가 워낙 심각한 때여서 관객들의 관심이 컸을 것 같습니다.

“바다 위를 날면서 3~5년 동안 땅을 딛지 않는다는 새죠. 영화는 새들의 천국이라고 알려진 태평양의 미드웨이 섬에 서식하고 있는 알바트로스가 주인공입니다. 이 섬은 알바트로스의 최대 번식지이기도 하죠. 영상을 찍은 크리스 조던은 논리적으로 해결책을 모색하는 환경운동의 과제를 다른 관점으로 제시하더군요. 보여지는 것만으로도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힘이 워낙 컸습니다.”

-환경운동을 오랫동안 해오셨죠.

“저보다 오래 활동해 오신 분들이 더 많습니다. 제가 전북환경운동연합 운영위원으로 참여한 것이 99년이고, 상근한 것이 2002년부터니까 20년이 채 안됩니다.”

-20년도 짧지는 않지만 그보다 훨씬 더 길게 일해오신 것처럼 느껴지는데요.

“제가 1년차 되었을 때 주위에서 ‘10년은 된 줄 알았다’고 했어요. 멋모르고 뛰어다니니 그렇게 보였나봐요.(웃음) 그때가 사실 지역의 민감한 환경 이슈가 불거질 때였거든요. 새만금, 부안 핵폐기장 등 굵직한 현안들이 몰려오니 저도 그때는 시간이 어떻게 가는 줄도 모르고 현장에서 일했던 것 같아요.”

- ‘똘똘한 젊은이’의 열정이 ‘때’를 만났던 것이군요. 운영위원 시절에도 거의 활동가처럼 일하셨다고 들었습니다. 당초 환경운동에 뜻이 있었습니까.

“그렇진 않습니다. ‘환경운동가가 되어야겠다’는 것보다 학생운동으로 보낸 대학시절의 경험과 인식이 자연스럽게 시민운동으로 이어졌어요. 사실 저는 군대 다녀온 직후 취직을 해서 어느 정도 생활 기반을 다져놓고 싶었어요. 그때 함께 학생운동을 했던 친구들 중 시민운동, 노동운동에 투신하는 친구들이 꽤 많았는데 오래 버티지 못하더라고요. 아무래도 경제적 문제나 결혼 등 맞부딪쳐야 하는 현실적 문제 때문이었겠죠. 그것을 보면서 저는 어느 정도 사회경험도 쌓고 경제적으로 좀 자유로워진 이후 그 친구들이 그만둔 빈자리를 채우는 역할을 하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결과는 달라졌지만요.”

-2002년이던가요. 지방선거에 환경연합 녹색 후보로 출마 했었지요.

“그때 환경운동 쪽에서 녹색정치 실현을 내세웠을 때인데 전국적으로 33명이 출마했어요. 15명이 당선되었는데 주로 수도권이었죠. 녹색운동의 성과가 컸습니다. 저는 서신동 시의원에 도전했다가 꼴찌로 낙선했지만 두 달 채 안 되는 선거운동으로 2000표 가깝게 얻었습니다. 비록 떨어졌지만 녹색운동의 희망을 그때 만났어요.”

-정치 쪽에 뜻이 있었습니까.

“대학시절 민중당 청년학생위원회 활동을 했었어요. 돌아가신 노회찬의원이 중심이 됐던 진보정당 추진위원회 학생 대의원으로도 활동했고요. 진보정당 출신이니 정치가 얼마나 중요한지는 잘 알죠. 그런 경험이 2002년 지방선거에 나서는 동력이 되었습니다.”

-지금은 어떻습니까.

“늘 뭔가 바꿔볼 생각도 있었지만 제 역량은 아니라는 판단을 했습니다. 정치선거는 아니지만 이런 저런 선거 경험이 있고, 선거도 재미있게 경험하는 편이긴 한데 쓰이는 역량이 따로 있다는 생각을 하거든요. 가끔 주위에서 출마 권유를 받기도 하지만 이 길은 제가 갈 길은 아닌 것 같아요.”

-시점으로 보자면 활동가가 된 직후부터 지역의 환경이슈가 부상했습니다. 아까 말씀하신대로 제대로 시기를 만난 셈이었겠습니다. 당시 여건은 어땠습니까.

“외부적으로는 환경운동 영향력이 커 보였었어요. 환경연합이 꽤 일찍 만들어졌는데 그만큼 역할과 의미가 컸었죠. 전교조 해직교사와 인권변호사, 시민운동 활동가들이 탄탄하게 조직을 다지고 있어서 영향력은 지금 못지않았는데 막상 상근 활동가로 들어가 보니 회원이 너무 적은 거예요. 총선 시민연대 등을 꾸려 능동적인 시민운동을 보여주기도 했었지만 ‘시민 없는 시민운동’ 이라는 이야기가 그래서 나왔구나 싶더군요.”

-과제가 생겼겠군요.

“그래서 우선 과제로 삼은 것이 시민들과 소통을 넓히는 일이었어요. 회원도 늘려야했고요. 소식지부터 만들었죠. 정기 간행물을 만들어 우리 활동을 알리기 시작했어요. 저도 지역사회를 구체적으로 이해하는 일이 필요했고, 환경 분야에 대한 전문성을 키우기 위해 공부를 해야 했습니다. 그즈음 고창 핵폐기장 문제가 불거졌어요. 부안 핵폐기장 문제 이전에 2003년 2월 4일, 핵폐기장 예비후보 4개 부지 발표를 했거든요. 초짜 활동가였지만 학생운동 시절부터 연대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경험으로 시민사회네트워크가 있어서 자연스럽게 그 일을 맡게 되었는데 환경운동연합이라는 단체의 연관성과 비중이 있어서인지 도 단위 연대기구 집행위원장을 맡게 되었습니다.”

-새만금, 핵폐기장 문제는 지금 돌아봐도 정말 뜨거운 이슈였습니다. 그때 중심에서 반대를 주도했던 입장으로 후회 없는 선택이었습니까.

“2006년, 핵폐기장이 경주로 가면서 일단락이 되었지만, 고창에서 시작해 부안 그리고 군산까지 이어진 핵폐기장 유치 갈등은 우리 지역의 긍정적 에너지를 엄청나게 소진시켰습니다. 마치 그것이 지역경제 낙후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의 모든 것인 것처럼 개발담론을 확산시고 언론도 그것을 주도하는 사람들이 여론에서 우위에 설 수 있도록 이끌었던 분위기는 지역사회의 발전을 후퇴시키는 계기가 되었죠.”

-현재의 여건으로 보더라도 그런 판단이 옳았다고 보시는 거죠.

“이번에 발표된 통계청 자료를 보니 핵폐기장을 유치한 경주도 지방소멸도시군에 들어가 있더군요. 그때 정부가 3000억 원을 지원하고 한수원 본사 이전 같은 혜택이 주어졌지만 실제 경주 주민들에게 경제적 이익이나 효과가 얼마나 있었는지 밝혀지거나 확인된 것은 없지 않습니까. 여전히 방폐장 문제는 지속되고 있고, 그래서 주민들의 불안은 커지고……. 게다가 국민들의 환경의식이 지금은 얼마나 높아졌습니까.”

-이미 지난 일이지만 당시 정부나 자치단체에 맞설 수 있었던 가장 큰 힘은 무엇이었습니까.

“지역 주민들이었죠. 지역 주민들이 동의하지 않았는데 그 결정권을 무시하고 자치단제장이나 의회 의원들의 일방적 결정으로 주민들의 의사가 무시된다면 그것은 잘못된 일이잖아요. 우리가 정부의 원자력 정책을 반대하는 것은 핵폐기물의 안전한 처리를 위해서는 안전한 지점에 설치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정부가 일방적으로 결정한다던지 어떤 정당한 절차 없이 선호도 투표로만 결정할 사안이 아니기 때문에 반대한 것이지 대한민국 어디에도 핵폐기장 시설을 설치해서는 안 된다는 논리를 편 것은 아니거든요.”

-화제를 좀 바꾸겠습니다. 말씀하셨던 것처럼 국민들의 환경의식이 높아졌습니다. 과잉소비사회에 살면서 저희가 맞닥뜨리게 되는 환경문제가 생존을 위협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는데 그만큼 운동의 영역도 넓어지고 있겠죠.

“일이 너무 많아집니다. 저희에게 들어오는 민원은 가능한 해결해보려고 노력하는데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넓은 영역에서 많은 문제들이 불거집니다. 사실 저희는 수달을 지키고 보호하는 일이라든지 숲을 지키고 보호하는 일 같은 전통적인 자연생태계 보존운동이 중심이고 본령입니다. 가장 의미 있고 보람 있는 일이기도 하죠. 그러나 최근에는 환경보건분야 영역이 급속도로 넓어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미세먼지나 생활화학제품 문제 같은 것들이죠.”

-듣다보니 환경문제의 심각성과 구조적 문제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제는 도시계획의 영역도 무관하지 않을 듯싶은데요.

“도시계획 영역도 중요해졌지요. 개발과 건설은 여전한 환경파괴의 대척점에 있으니까요. 도시환경 영역에서 천변의 바람 길을 막는 고층건축물 같은 것도 저희가 일정한 역할을 해야 하는 거죠.”

-영역이 넓어지면 그 못지않게 지식과 전문성도 요구될 텐데요.

“그것이 늘 과제입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전문가들과의 네트워크 구축이예요. 전문가들의 의견을 구하고 그 내용을 정리해 합당한 논리를 만들어 설득하고 해결하는 역할, 이를테면 건강한 코디네이터가 저희가 해야 할 일입니다. 우선은 활동가 스스로가 전문성을 쌓아야하는 것이 필요하고요.”

-돌아보니 지난 20년 동안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환경운동연합도 많이 변화했겠습니다. 회원도 많이 늘었죠.

“처음 1-2년은 주어진 일을 정신없이 했어요. 핵폐기장이나 새만금이나 결국은 시민들을 설득해야하는 문제이고, 시민들의 동의를 얻어야 하는 문제거든요. 시민들의 인식이 변하지 않으면 지역 정치권도 움직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막상 시민들을 우리가 어떻게 만나고 있는가 들여다보니 통로도 별로 없고 시민들은 시민운동에 대한 편견이 있었어요. 두 가지 문제를 해결할 방법으로 생각해낸 것이 회원확대였어요. 환경과 관련한 행사를 늘려 회원들을 직접 만나는 통로를 넓혔습니다. 회원 확보를 위한 릴레이 운동도 했고요. 환경 분야 뿐 아니라 인문학까지 아우르는 초록시민강좌 개설도 그 연상이었어요.”

-성과는 있었습니까.

“54개 환경연합 지역조직 중에서는 저희 회원 수가 가장 많습니다. 전북의 사례가 전국으로 확장되었어요.”

-환경운동연합의 이슈가 궁금합니다.

“전국적으로는 사대강 문제예요. 자연성을 회복할 수 있게 하는 방안을 실천하는 일이고 최근에는 탈핵 원자력발전소 문제가 부상하면서 에너지 전환문제도 집중하고 있습니다. 지역에서는 마이산케이블카 문제가 있고, 곧 창립되는 새만금도민회의를 통해 ‘새만금 해수유통을 통한 부분 조기 집중개발’을 이뤄내는 일이 있습니다.”

-지금까지 지치지 않고 일 해온 동력이 놀랍습니다. 늘 즐겁게 일하지만 갈등이나 고민도 물론 있겠지요.

“성실한 직업인으로서 정년퇴임하는 활동가가 되고 싶다는 꿈을 어떻게 실현할까 고민하고 있습니다. 노동안식년을 얻어 공부도 하고 싶고요. 제 장점이 넓고 얕은 지식이었는데(웃음) 이제 그것마저도 잘 충전이 안 되거든요. 현장 경험을 통해 축적된 지식으로 버텨 왔는데 한계가 분명하니까요. 그동안 절집으로 이야기 하자면 행정스님처럼 조직을 운영하는 것에 방점을 두어왔다면 이제는 오래 제대로 집중해 성과를 내는 일에 전념하고 싶습니다.” /김은정 선임기자

■ 전북환경운동연합 이정현 사무처장은

전북환경운동연합 이정현 사무처장
전북환경운동연합 이정현 사무처장

정읍 태인에서 태어났다. 초등학교 때부터 신문읽기와 책읽기를 즐겨해 성장과정에서 현실정치나 사회문제에 관심이 컸다. 고등학교 때 이미 진보학자들의 저서를 섭렵했고 한국사회의 민주화 여정에 남다른 인식을 갖게 됐다. 삼수에 전기 후기 대학 시험을 다섯 번이나 실패하고 전주대 국문과를 들어갔으나 학생운동 현장에서 대학시절을 보냈다. 학생운동의 동력을 준 사람은 사촌누나였다. 사회를 바꾸어야 한다는 인식은 그를 투사로 만들었다. 민중당 청년위원회에서 활동하면서 전국적인 조직체를 만들어 활동했던 진보정당 추진위원회 학생대의원에 참여했다. 주변의 조력까지 받고서야 5년 만에 계절 학기까지 거쳐 겨우 졸업장을 땄다. 군대에 다녀와서는 시민운동이나 노동운동에 투신하는 대신 취업을 했다. 사회 경험도 쌓고 경제적으로도 기반을 닦은 다음 사회운동 현장으로 돌아가겠다는 계획이 있었다. 첫 직장은 마을금고, 두 번째 직장은 골프장이었다. 전북환경운동연합에 운영위원으로 참여하면서 삶의 길이 바뀌었다. 그즈음 시민운동가로 사회에 기여하고 싶다는 의지가 더 확고해졌다. 한때는 영화에 관심을 두어 전주시민영화제 사무국장을 맡아 두 번의 영화제를 치루기도 했다. 2002년, 아예 직장을 그만두고 환경운동연합 상근직 활동가로 자리를 옮겼다. 그해 환경운동연합의 녹색운동에 참여, 시의원에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2002년부터 본격적으로 환경운동의 실질적인 활동을 엮고 실천하는 일에 나섰다. 운동의 대중화를 가장 큰 과제로 안고 있었던 그는 회원을 늘리고 소통하는 일에 역량을 몰두했다. 소식지를 만들고 지역사회를 읽어내는 일에 대부분의 시간을 썼다. 활동가로 현장에 섰던 초반, 핵폐기장 유치와 새만금 개발이 지역사회의 최대 이슈로 떠올랐다. 자연스럽게 핵폐기장 반대 도 단위 연대기구 집행위원장(부안방사성폐기물처리장 백지화 및 에너지전환운동)을 맡게 됐다. 2~3년 지속됐던 핵폐기장 문제가 일단락되는 즈음 환경운동연합의 역할은 더 커지기 시작했다. 환경에 대한 관심이 커지면서 쏟아지는 민원과 곳곳에서 터지는 환경문제가 그를 현장으로 이끌었다. 책과 전문가들의 자문에만 의지해서는 안 되는 일들이 늘어났다. 대학원에 들어가 도시계획을 전공한 것도 지식에 대한 갈증 때문이었다. 환경운동의 지평이 보이기 시작했다. 안으로는 회원 참여 사업을 늘려나가면서 만경강생태하천가꾸기민관학협의회, 전북지속가능발전협의회 전라북도강살리기추진단, 전북환경교육네트워크 등 거버넌스를 구축하는 일을 꾸렸다. 덕분에 전북 지역 환경운동의 지형은 새롭게 바뀌었다. 도심의 생태복원운동을 주도해 멸종위기종인 맹꽁이 서식지 복원에 성공했고 환경관련 전문성을 살려 지역의 환경이슈나 생태자원을 소개하는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만경강과 동진강을 비롯해 전북의 생태보고 현장을 탐사해 널리 알리는 기고 활동에도 남다른 역량을 쏟았다.

20여년 전북지역의 환경운동을 주도해온 그는 현재 전북시민사회연대회의 운영위원장, 전북환경교육네트워크 운영위원장을 거쳐 에너지시민연대 운영위원과 환경운동연합사무부총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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