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안 줄포면사무소 창고에 보관 중인 친일반민족행위자 이완용의‘휼민 선정비’(공덕비) 처리를 놓고 다시 논란이 일고 있는 모양이다. 선정비 흔적조차 남기지 않게 파괴해야 한다고 주장과, 역사의 반면교사로 삼을 수 있도록 박물관에 보전해야 한다는 주장이 맞서고 있단다. 두 주장 모두 일리가 있어 선뜻 결론을 내기가 쉽지 않은 문제다.
원론적으로 보면 매국노의 이런 선정비가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부끄럽다. 이완용이 누구인가. 을사오적, 정미칠적, 경술국적으로서 대한제국을 일본에 강제 합병시킨 장본인이자 친일파의 우두머리였다. 그런 이완용을 기리는 공덕비가 지금껏 남아 있다는 게 국민들의 보편적 정서로 받아들이기 힘들다.
그러나 당시 지역민들이 공덕비를 세운 데는 그만한 배경이 있었다. 이완용의 전북과 인연은 1898년 전라도 관찰사로 부임하면서였다. 그 해 가을 줄포지역이 해일로 큰 피해를 당했을 때 부안군수에게 난민구호와 제방을 중수토록 했다. 이후 서빈들 매립공사가 이어져 오늘의 줄포 시가가 형성됐다. 부안군수와 주민들이 이듬해 이완용의 구호사업을 기리는 비를 세웠다고 전한다. 이 비석은 광복 후 매국노의 비석으로 뽑힌 뒤 개인이 보관하던 것을 1973년 줄포면사무소 뒤에 세웠다가 1994년‘일제 잔재 없애기 운동’이 벌어지면서 철거됐다. 그 후 지금까지 줄포면사무소 지하 창고에 반파된 채로 보관돼 있다.
일제 잔재 청산과 관련해 그간 주요 건축물의 보존과 철거를 둘러싸고 많은 논란이 있었다. 1995년 역사바로세우기 차원에서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사용하던 조선총독부 철거가 상징적 사건이었다. 일본에 의해 개항된 군산의 경우 일제강점기 건물들을 보전해 근대역사도시의 모델로 자리 잡았다. 일제의 잔재로 여겨 주요 건물들을 모두 철거했다면 오늘날 군산이 근대역사도시라는 브랜드를 갖지 못했을 것이다.
물론 일제강점기 주요 건축물과 이완용 공덕비를 동일선상에서 단순 비교할 수는 없다. 이완용이 직접 남긴 것도 아니고, 공덕비가 있다고 해서 이완용의 역사적 평가가 달라질 가치 있는 물건도 아니다. 그러나 적어도 지역사회에서는 지역의 역사를 기억할 수 있는 재료다. 곧바로 폐기 처분하지 않고 20년 넘게 창고에 보관했던 것도 그 역사를 잊지 않기 위함일 터다. 지역사와 함께 민족 반역자를 기억할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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