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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공감 2020 시민기자가 뛴다] 부채를 찾아서 - 유백영의 ‘아주 특별한’ 선물부채

사진작가 유백영의 수장고 모습.
사진작가 유백영의 수장고 모습.

부채, 어디에 쓰는 물건인고?

공연 사진을 찍다가 어느 순간부터 외교사절이 된 작가가 있다. 자비를 들여 구매한 고가의 합죽선에 해외 아티스트의 친필 서명을 받아 선물로 주는 작가의 비밀스러운 수장고를 찾아갔다. 공연 포스터부터 팸플릿 그리고 시디(compact disk) 음반이 차곡차곡 쌓여 있고 한편에 합죽선이 모아져 있다. 이 합죽선들은 도대체 어디에 쓰는 물건일까? 그리고 사진작가는 왜 합죽선에 꽂힌 것일까?

다양한 사람들과 만나는 생활 속 부채 이야기 그 두 번째로 사진작가 유백영의 수장고에 있는 ‘아주 특별한’ 선물부채를 만나보자.

 

△아주 특별한 선물, 독특한 교환 의식을 거친 합죽선 이야기

유백영이 소장한 부채의 선면에는 흔히 있는 문인화나 사군자가 없다. 그의 부채 선면에는 삐뚤빼뚤 지렁이 기어가는 글씨부터 유려한 글씨까지 매우 다양한 서명들이 있다.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아는 유명한 예술가의 서명도 있고, 이제 막 커가기 시작한 신진 예술가의 서명도 있다. 시인, 가수, 화가, 소리꾼, 무용수, 연극인, 지휘자까지 매우 다양한 장르의 예술가들이 직접 서명한 것들이다. 도대체 유백영은 왜 부채에 서명을 받기 시작했을까?

‘무대 위의 사람’이 사진작가 유백영의 뮤즈이자 피사체다. 초기엔 다른 사진작가처럼 예쁜 꽃이나 일출을 표현하고자 산과 바다를 다녔다. 그러다가 무대 위 사람이 행하는 행위 자체에 매료되어 근 이십여 년간을 공연 사진에 집중했다. 공연 사진을 찍다 보니 소리도 들을 줄 알아야 했고 대사도 이해해야 했다. 그래서 팸플릿을 사서 읽기 시작했고, 미리 시디 음반을 사서 듣기도 했다. 리허설부터 시작된 촬영은 본 공연을 거쳐 팬 사인회까지 이어졌다. 감명받은 작품들을 기억하기 위해 팸플릿, 포스터, 시디 음반에 예술가의 서명을 받아 보관하기 시작했다. 기획사와 예술가들은 이런 사진작가에게 더 성의껏 서명을 해주기 시작했다.

평생 한 번 만날까 말까 하는 외국 아티스트나 고령의 예술가를 만나면서 팬 사인회 만으로는 무언가 아쉽고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열정적인 예술가들에게 전통문화도시 전주를 오랫동안 기억할 만한 ‘특별한 선물’을 하고 싶어졌다. 유백영은 전주를 방문한 예술가들에게 ‘아주 특별한 선물, 전주부채’를 준비했고, 그것을 그냥 증정하지 않고 ‘친필 서명’을 받아 하나는 예술가에게 주고, 하나는 유백영이 보관하기 위해 독특한 교환 의식을 거쳤다. 즉 전 세계에 단 두 개밖에 없는 ‘친필 서명’ 부채가 만들어져 하나는 예술가가 보관하고 다른 하나는 유백영의 수장고에 보관되기 시작했다. 이런 친필 서명 부채가 벌써 100여 개가 훌쩍 넘었고 2014년에는 전주부채문화관에서 전시회가 열리기도 하였다.

 

사진작가 유백영
사진작가 유백영

△선자장의 부채와 유백영의 인연

“형님하고 유백영 작가하고 친구였어요. 그래서 아주 옛날부터 알고 지낸 사이입니다. 처음엔 사모님이 부채에 그림을 그린다고 사 가셨는데 언제부터인가는 선물용으로 내 부채를 많이 팔아주셨어요. 그분이 법무사잖아요. 그래서 아는 양반도 많고 선물도 고급지게 한다고 해서. 백선을 주로 사가셨는데 30cm 백선에 문인화도 그리고 선물도 하고, 뭐 공연하는 사람들에게 서명도 받고 그랬다고. 나야 고맙죠.”(부채 장인 박상기와 사진작가 유백영의 인연)

“짐승은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고 하잖아요. 내 이름이 박힌 내 부채에 훌륭한 사람들이 서명을 하고 오래오래 보관한다면 그것처럼 좋은 일이 없죠. 내가 소리전당에 작업장이 있잖아요. 사진 찍으러 오실 때마다 선물용으로 부채를 많이 사가셨어요. 부채에 서명을 받은 줄은 몰랐죠.”(전라북도무형문화재 방화선 선자장이 만난 유백영)

“어느 날 김남곤 시인이 일출을 보자 하셨어요. 그래서 벽경 송계일 화백, 고하 최승범 시인, 김영채 사진작가 이렇게 다섯이서 지리산에 갔지요. 부채 한 자루 들고 산에 올라 일출을 보며 벽경 선생이 스케치를 하고 최승범 시인이 한 구절 쓰고 나머지 우리들은 서명을 했지요. 내가 숱하게 일출을 보러 다니고 그 장면을 사진으로 남겼지만, 일출을 보러 가 부채에 서명을 한 적은 처음이었지요. 남자들 다섯이서 이런 이벤트를 하고 내려오니 그날의 기억이 매우 강렬하게 남았지요.”(사진작가 유백영, 지리산에서의 기억)

“유백영 작가님이 요청을 해서 저희가 기획사와 의견 조율을 합니다. 모두들 너무 바쁘니까 리허설을 시작하기 전, 혹은 공연 후 예술가에게 부채 두 자루를 주고 서명을 부탁해요. 전주부채 합죽선에 대해 설명을 하고 부탁을 하면 대부분의 예술가들이 흔쾌히 응해줍니다. 특히 외국 아티스트들은 굉장한 선물이라고 즐거워하고, 자신의 집에 걸어 놓겠다고도 합니다. 그럴 때마다 전주의 특별한 문화사절단이 된 것 같아 매우 기뻤어요.”(한국소리문화의전당 홍보과장 김형주 인터뷰)

 

오동나무 부채 상자.
오동나무 부채 상자.

△문헌에 나오는 부채의 용도, 연애편지와 선물 기능이 탑재된 부채

莫怪隆冬贈扇枝 엄동에 부채를 선사하는 이 마음을

爾今年少豈能知 너는 아직 나이 어려 그 뜻을 모르겠지.

相思半夜胸生火 그리워 깊은 밤에 가슴에 불이 일거든

獨勝炎蒸六月時 오뉴월 복더위 같은 불길을 이 부채로 식히려무나.

부채는 기본적으로 더위를 쫓고 햇볕을 가리는 기능, 시와 그림을 그려 넣어 자신의 인문·예술적 소양을 표현하는 예술품으로서의 기능, 멋스러운 선추를 달거나 선면에 예쁜 색을 넣는 멋쟁이의 필수품으로서의 기능, 소리꾼의 가장 중요한 소품으로 활용되는 기능, 마지막으로 친한 사람에게 주는 정중한 선물로서의 기능이 있다.

위 시는 조선 중기 문인 임제(1549~1587)가 좋아하는 기생에게 보낸 것으로, 그 당시 대표적인 낭만 시인이자 풍류가의 연애 감성이 30cm 합죽선 선면에 그대로 실려 있다. 이처럼 선면에 시·서화를 표현해 자신의 예술적 소양을 표현한 것 이외에도 선물이나 심지어 뇌물로도 광범위하게 부채가 사용되었다는 기록을 찾아볼 수 있다. “중국 칙사의 행차가 이르는 곳마다 부채를 요구하여 순안 현령 이공권이 정묘하게 부채를 만들어 그 요구에 응하였으니 파직하라.”라는 상소와 “창녕 현감 홍치기가 대모로 부채를 만들어 윤유에게 선사하였다.”라는 기록들을 보면 조선 중기 이후 접선이 좀 더 화려해지고 특별한 선물로 작동하였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에 사대부는 성리학뿐 아니라 육예, 즉 예용·음악·궁술·마술·서도·수학에도 능숙해야 했는데 이를 증명할 수단으로써 부채가 사용되었다. 사군자와 시 한 구절 적힌 고급스러운 부채 한 자루만 쓱 들어도 ‘나 배울 만큼 배웠고 먹고살 만큼 산다.’라는 뜻을 나타낼 만큼 당시의 부채는 신분 과시의 척도였다.

선물과 뇌물, 사치에 대한 규제까지 거론될 만큼 그 수요가 폭발적이었던 조선시대 부채와 달리 현대에 이르러서는 부채 자체가 소멸 위기에 직면해 있다. 에어컨과 팬시상품에 밀려 부채 본연의 쓰임새는 물론 선물로의 자리도 잃어가고 있는 이런 시기에, ‘아주 특별한 선물’로서 전주부채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고 있는 사진작가 유백영의 작업은 큰 의미가 있다. 초코파이도 좋고 비빔밥도 좋지만 전주를 방문한 사람들에게 전주 고유의 멋이 깃들어 있는 합죽선, 이 얼마나 아름답고 의미 있는 선물인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나만의 서명 부채, 지금 당장 선물해보자

우리 생활 속 깊숙이 부채가 자리 잡고 있다. 다양한 사람들과 만나는 생활 속 부채 이야기, 오늘은 사진작가 유백영의 ‘아주 특별한 선물’로서의 부채를 소개했다. 앞으로도 우리 삶에 깊게 녹아 있는 부채에 대한 여러 가지 이야기를 만나보고자 한다. 여름이 다가오고 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나만의 친필 서명을 한 부채를 선물해보자.  /이향미 전주부채문화관 관장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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