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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호 전북도립국악원 학예실장의 전통문화 바라보기] “소리만 생각해라”

1975년 전주대사습대회 때의 이일주 열창 모습.
1975년 전주대사습대회 때의 이일주 열창 모습.

전라북도무형문화재 제2호 판소리 심청가 보유자 이일주는 세습예인 출신으로 이날치 명창의 증손녀이자 이기중 명창의 딸이다. 8세(1943년)무렵 소리에 입문하여 14세부터 아버지에게 춘향가, 심청가의 대목소리와 숙영낭자전 한바탕을 공부했다. 28세 무렵 박초월 명창에게 흥보가를, 34세에 김소희 명창에게 심청가를, 38세엔 오정숙 명창에게 동초제 춘향가, 심청가, 흥보가, 수궁가를 배웠다. 이후 우리나라 판소리 등용문인 전주대사습놀이 명창부에 출전하여 1979년 영애의 대상인 대통령상을 받고 명창 반열에 오른다. 그녀가 조선후기 명맥이 끊긴 이후 부활한 전주대사습놀이에 네 번째로 최고의 상을 받았다는 것은 우리나라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갈 만큼 실력이 출중하다는 의미로 그녀의 타고난 목구성과 심금을 울리는 소리의 서슬은 익히 만인이 인정한 사실이었다.

대부분의 사람은 주어진 환경에서 출세하면 대도시로 상경하여 자신의 의지를 펼친다. 혹은 출세를 위해 현재 있는 곳보다 더 큰 도시로 거처를 옮겨 기세를 자랑한다. 국악뿐이겠냐마는 모든 업계 삶의 방식이 대부분 그렇다. 그 당시에도 시대를 대표하는 저명한 명창들은 서울로 상경하여 활동을 했다. 하지만 이일주 명창은 아니었다. 그녀는 1979년 전주대사습놀이에 대통령상을 수상한 이후 한 번도 전주를 떠난 적이 없다.

이일주 명창을 처음 뵌 것은 35년 전인 1986년 진북동 어느 낡은 빌딩 선생님의 생활터이자 연습실인 작은 공간에서였다. 판소리가 좋아 무작정 서울에서 전주로 낙향한 필자는 이일주 명창을 찾았고, 집이자 전수소에서 3년간 함께 생활하며 소리공부를 했다. 선생님은 항상 새벽에 소리공부를 하셨는데 이른 5시가 되면 선생님의 목소리가 통성으로 먼저 울렸고 6시가 되면 제자를 깨워 가르치셨다. 제자의 가라앉은 목소리가 날작시면 선생님은 호통을 치시며 북채를 드셨다. 매서운 스승님의 소리는 그렇게 어느 전주의 새벽을 함께 깨웠다.

우리나라의 이름난 명창 중 스승 존함에 이일주란 성함이 들어가는 명창은 참으로 많다. 그렇듯 이일주 명창은 전라북도에서 많은 제자를 가르치며 꿋꿋이 전통예술의 본향을 지켰다. 이일주 명창은 제자에게 항상 하신 말씀이 있다. “노력한 만큼 나온다. 게으르지 마라”, “소리만 생각해라” 그러한 선생님의 말씀은 35년이란 세월이 지나서야 필자에게 마음 한구석 아쉬움과 미련으로 남았다.

소리를 공부하는 후학들이여, 현시대의 주어진 환경이 어렵고 힘들겠지만 “소리만 생각해라”라는 이일주 명창의 말씀을 되새겨 다시 한번 가슴속 깊이 각인해 보자. 대중음악인 트로트도 좋지만 그래도 여러분이 배우는 판소리가 이 세상을 웃고 울리는 시절이 더 많았으므로 다시금 그런 판을 우리 함께 만들어 가보자. 대도시의 거창하고 큰 무대는 아니지만, 우리 삶이 녹아난 현장에서 아름다운 소리판을 만들자. 그리고 우리 전라북도 전통예술을 소중히 지키며 소리의 본향임을 자랑스럽게 이어나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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