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0년 전 전주에서 일어난 후백제는 역동적인 국가였다. 하지만 역사는 승자의 기록인지라 왜곡·폄하되었다. 전북일보는 후백제특별법 통과를 계기로 후백제학회와 공동으로 이를 바로잡고자 한다.
△역사읽기를 어떻게 할 것인가.
역사는 소설이 아니라 과학이다. 과학은 보편적인 진실에 과정과 결과가 분명하다. 그런데 역사는 인간의 기록이기에 진실과 거짓, 주관성과 객관성이 공존한다. <삼국사기>열전 견훤전은 사실(史實)과 허구(虛構)가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로 교묘하게 편집되어 있다. <삼국사기>견훤전은 후백제 후대 기록으로 사료적 가치가 떨어질 수 밖에 없다. 견훤전은 사실과 허구가 뒤섞여 있는 역사소설같다. 역사는 실재의 기록이라면, 소설은 상상력으로 쓴 이야기다. 역사와 소설을 구분하고 역사적 진실을 밝히는게 역사학자의 몫이다. 역사학자는 사료(史料)를 맹신하는 고정관념으로 역사해석의 오류를 범해서는 안된다. 역사학자들은 보편적 진실에 입각하여 사료의 취사 선택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삼국사기>견훤전을 객관적으로 올바른 역사읽기를 하려고 한다.
△견훤의 시대정신
<삼국사기>열전 견훤전에 “이 때 신라 진성왕 재위 6년 왕의 총애를 받는 신하들이 정권을 농락하고 탈취하였으며 국가기강이 문란하고 해이해졌다. 게다가 흉년기근이 덮치어 백성들은 유민(流民)으로 떠돌아다니고 배고픔에 지친 백성들이 무리지어 벌떼처럼 일어났다(是 新羅 眞聖王 在位六年 嬖竪在側 竊弄政柄 綱紀紊弛 加之以饑饉 百姓流移 群盜蜂起).”고 밝혔다. 이 사료는 신라하대의 사회상을 사실적으로 묘사하였다. 견훤이 신라 서남해방수군의 비장으로 순천만에서 거병하게 된 배경을 밝혀놓았다. 첫째, 왕실 측근세력이 정권농락하여 권력을 찬탈하고, 둘째, 지배층의 부패타락으로 국가기강이 문란 해이해지고, 셋째, 자연재해로 백성들의 기근(굶주림)이 심화되고, 넷째, 농토잃고 굶주린 백성들이 흩어져 돌아다니고, 다섯째, 굶주린 백성들이 봉기를 일으키는 암울한 시대적 상황이었다. 이러한 말세적인 생활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구제하고자 견훤이 농민봉기를 일으킨 군도들을 이끌고 무진주(광주)를 습격한 것이다.
△삼한정통론을 세우고 전주에 도읍을 정하다.
견훤은 892년 무진고성에서 8년간 노력하였지만 건국의 꿈은 좌절되었다. 광주 전남 지역의 호족세력들은 견훤에 동조를 하지 않았다. 광주 전남의 친신라 호족들은 나주 영암 영산강 등 서남해 일대를 장악하고 있었다. 견훤은 지방호족들과 정치적 연대에 실패하고 고심 끝에 새로운 전략을 구상한다. 마한의 땅 광주 전남 대신에 백제의 땅 완산주(전주)에 도읍을 정하기로 결심한다. 그 결심에는 명분이 필요하였다. 그 명분은 백제의 역사와 정신을 잇겠다는 것이다. 견훤은 두 가지의 명분을 내세웠다. 하나는 백제가 금마산에 개국한지 600년이 되었다(百濟開國金馬山六百餘年)는 것과 내가 어찌 완산주에 도읍을 정하지 않고 의자왕의 숙분을 풀어준다고 할 수 있겠는가(今予敢不立都於完山 以雪義慈宿憤乎)는 두 가지였다. 전자는 견훤의 역사관이다. 견훤은 백제가 금마산에 개국한지 600년이 되었다는 익산백제론을 주창하였다. 견훤은 왜 익산백제론을 구상하였을까. 전남 광주에서 건국 실패가 구상의 동기였을 것이다. 견훤은 나주 영암 마한계 호족세력들과 정치적 연대에 실패한 후 마한의 발상지(吾原三國之始 馬韓先起 後赫世勃興 故辰․卞從之而興)가 익산 금마라는 역사인식을 갖게 된 듯하다.
금마는 고조선의 준왕이 남래하여 마한을 태동시킨 곳이다. 견훤은 금마에서 마한-백제의 정통성을 계승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다. 견훤의 광주 구상은 삼한정통론의 정립이었다. 삼한정통론(三韓正統論)은 고조선→기자조선→한→마한→백제→후백제로 이어지는 한민족의 정통성이다. 백제의 땅 익산 금마에서 마한-백제의 정통성을 잇고 의자왕의 숙분을 풀기 위하여 전주에 후백제를 도읍하겠다는 선언이었다. 우리나라 역대 국왕가운데 삼한정통론을 정립한 국왕은 견훤왕이 유일하다. 삼한정통론과 전주입도론(全州立都論)은 견훤의 투철한 민족자존의 역사관을 보여준다. 견훤왕의 광주선언에서 전주입도론을 밝힌 만큼 후백제천도론은 더 이상 의미가 없어졌다.
△후백제 견훤왕 삼국통합을 꿈꾸다.
삼한정통론은 삼국통합의 꿈으로 이어졌다. 견훤왕은 신라가 당을 끌어들여 황산벌에서 백제를 멸망시킨 것(新羅金庾信卷土 歷黃山至泗沘 與唐兵合攻百濟滅之)에 분개하였었다. 후백제의 건국이념은 민족자존을 지향하는데, 외세의존형 국가통합은 모순이라는 점이다. 견훤의 후백제 미래전략은 삼한정통론에 근거한 고구려, 백제, 신라의 진정한 통합이다. 견훤왕은 900년에서 918년까지 후백제의 영토를 굳건하게 지켰다. 내륙으로 대야성을 공격하고, 서남해 영산강유역 지키기에 힘을 쏟았다.
918년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였지만, 916년에 건국한 거란과 국경 갈등으로 후백제의 견제력이 약해졌다. 견훤왕은 920년경부터 국가운영에 자신감을 갖고 삼국통합을 구상한다. 삼국통합의 의지는 반왕건․친궁예적 성향이 강한 중원(청주 철원)지역으로 진출하면서 기세를 올렸다. 중원지역을 장악한 예천,문경 등 경북 서북부 지역을 공략하면서 합천,창원,김해 지역으로 진격하면서 신라 수도 경주를 향하였다. 견훤왕은 925년 2차 조물성 전투에서 성주까지 진격하여 경주 공략에 한발 더 다가갔다. 마침내 927년 견훤왕은 신라 왕도 경주를 공격하고 경애왕을 단죄한다.
한발 늦게 신라 구원군으로 내려온 고려군은 공산전투에서 후백제군에게 전멸당하였다. 기세등등하던 후백제 군대은 930년 정월 안동전투에서 고려군에게 참패당하였지만, 곧 바로 전열을 재정비하고 고려 왕도 개성 공격에 나섰다. 마침내 932년 9월 고려 왕궁 송악궁을 향하여 예성강 유역으로 진격하였다. 후백제 수군은 예성강 유역 염주, 백주, 정주 지역으로 상륙작전을 펼쳤다. 후백제 수군은 예성강 유역에 상륙하여 군선, 병선 1백여척을 불사르고 저산도 목장의 말 3백필도 빼앗아 돌아갔다(萱遣一吉湌相貴 以舡兵入高麗禮城江 留三日 取鹽․白․貞三州船一百艘焚之 捉猪山島牧馬三百匹而歸). 후백제 수군이 3일간 머물렀다는 뜻은 왕궁을 포위하여 송악궁을 함락시켰다는 것과 다름없다. 왕건은 신하의 도움으로 도망쳐 구사일생으로 살아났지만, 권력욕이 강한 왕건의 체면은 구겨졌고 대단히 모욕적 사건이었다.
△후백제 왕건의 음모로 견훤의 후백제 무너져
고려 태조 왕건은 거란과 국경분쟁에 국력을 소모하면서 후백제의 견제를 방심한 것이 송악궁 함락의 요인이었다. 후백제군은 군사들의 사기가 충천해 있었고, 왕건은 견훤왕에게 군사력으로 대결에 자신이 없어졌다. 932년 9월 송악궁이 함락당한 직후에, 왕건은 후백제멸망 음모를 꾸미기 시작한다. 고려 태조 왕건은 935년(청태2년) 이전에 이찬 능환에게 지시하여 견훤의 아들인 양검, 용검과 후백제 멸망 음모를 꾸미도록 하였다.
음모의 시나리오는 935년(청태2) 3월에 완성되었다. 왕건은 파진찬 신덕과 영순을 견훤왕의 장남 신검에게 보내어 반역의 음모를 권하여 후백제 왕실을 교란시켰다. 그동안 역사학계는 왕건의 음모 사실을 은폐하였다. 오늘날 역사학자들마저 승자의 역사에 동조할 필요는 없다. 후백제사학자 이도학 교수가 <삼국사기> 후삼국사(견훤전,궁예전) 기록은 “영화 대본같은 잘 짜여진 각본에 불과”하다고 평가하고 있다. 역사를 소재로 한 영화, 연극, 소설은 역사성을 띨 뿐이지 역사는 아니다.
/송화섭 전 중앙대 교수
불편한 <삼국사기> 견훤전 읽기
김부식의 견훤과 후백제 왜곡은 <삼국사기>열전 견훤전 편재에서 시작되었다. <삼국사기>는 삼국의 왕조사를 편성하는 방식인데 후백제의 견훤왕을 인물 열전에 편재한 것이 문제의 발단이었다. 이러한 편재는 견훤왕을 국왕으로, 후백제를 왕조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편협성을 드러냈다. 김부식이 견훤의 후백제를 열전에 편재하므로서 한국사 서술에서 후백제가 푸대접당하고, 견훤은 역사의 죄인이 되었다.
<삼국사기> 편찬 책임을 맡은 김부식은 과연 사관(史官)이 맞는가. 사관은 당대의 역사적인 사건을 사실(史實) 그대로 기록하는 관리를 말한다. 사관의 책무는 당대의 역사를 기록하여 문서화하는 일이다. 따라서 사관은 실재의 사건을 편견없이 정확히 객관적으로 기록해야 한다. 역사는 정확한 기록과 객관적인 기술이 생명이다. <삼국사기>견훤전은 사실과 허구가 뒤엉켜있다. 사실은 역사이지만, 허구는 소설이다. 진정한 역사는 소설이 될 수 없다.
김부식은 <삼국사기> 말미에 ‘삼국사기를 올리는 글(進三國史表)’에서 스스로 신하(臣下) 임을 밝혔다. 그리고 <삼국사기>는 “사고에 보관할 내용이 못되지만 휴지로 버리지 말라”고 부탁하고 있다. 이 구절은 <삼국사기>가 관찬서(官撰書)가 아닌 사찬서(私撰書)라는 고백이다. <삼국사기>는 삼국 역사기록이지만 1145년에 편찬되었다. <삼국사기>는 삼국시대 당대의 역사기록이어야 마땅하나 삼국의 역사는 후대 기록이다. 견훤의 후백제는 900년에서 936년까지의 왕조사인데, 200여년 후의 <삼국사기>열전에 실려있다. 당대가 아닌 후대 기록이 어찌 정확할수 있겠는가.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고 말한다. 승자의 기록일지라도 편견없이 정확하게 기록해야 사료적 가치가 있다. 후삼국사를 후대에 기록하면서 왜곡하였다면 사서(史書)로서 가치가 없다. 김부식은 <삼국사기>견훤전에 견훤을 극악한자(其劇者)라고 혹평하였는데, 논왈(論曰)에서 “궁예 견훤같은 흉악한 자가 어찌 감히 우리 태조를 상대로 대항할 수 있겠는가, 다만 태조에게 백성을 몰아다 준 자에 불과할 뿐이다(而況裔․萱之凶人 豈可與我太祖相抗歟 但爲之歐民者也)”라고 붙였다. 이처럼 편견의 역사관을 가진 김부식이 쓴 견훤전을 어떻게 믿을 수가 있겠는가.
△자문교수단(기고 및 동행 취재)
강봉룡(목포대 교수), 강원종(전주문화유산연구원 학예연구실장), 곽장근(군산대 교수·가야문화연구소장), 김재홍(국민대 교수), 노기환(문화재청 백제왕도추진단 학예연구관), 박해현(초당대 교수), 백승호(중국 절강대 교수), 송화섭(전 중앙대 교수·후백제학회장), 유철(전주문화유산연구원장), 이도학(한국전통문화대 명예교수), 전상학(전주문화유산연구원 조사부장), 정상기(국립전주박물관 학예연구실장), 조명일(군산대 초빙교수), 조범환(서강대 교수), 조법종(우석대 교수), 진정환(국립익산박물관 학예연구실장), 최인선(순천대 교수), 최흥선(국립익산박물관장), 홍창우(전남대 강사)
△ 기획취재팀
조상진(논설고문), 김영호(문화교육부), 김태경(사회부), 오세림·조현욱(사진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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