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비가 오락가락하는 4월 중순, 아침 일찍 설레는 가슴을 안고 문경으로 향했다. 경북 문경은 1100년 전 천하를 호령했던 풍운아 견훤(진훤)왕이 태어난 곳. 그의 파란만장한 생애만큼이나 다양한 유적과 전설이 깃들어 있는 곳이다. 견훤왕은 이곳 문경과 상주 일대에서 15세 무렵까지 활동하다 신라군에 입대해 출세의 길을 걷게 된다. 일행은 9시30분 문경버스터미널에서 이도학 교수(한국전통문화대)를 만나 동행키로 했다. 이 교수는 문경 출신으로 우리나라 백제사의 최고 권위자다. 문경에서의 일정은 아채(아차)마을- 말바우(말바위)- 궁터마을- 가은역·아자개 장터 코스. 그리고 오후에는 상주에서 견훤산성- 견훤사당- 사벌국왕릉·병풍산성-상주박물관- 경천대를 답사키로 했다.
△ 아채마을 금하굴과 숭위전
가장 먼저 들른 곳은 문경시 가은읍 갈전2리 아채마을. 견훤왕 출생지 전설이 서려 있는 이곳은 마치 뭇오리가 호수에 내려앉은 형상(群鴨投湖形)이나 금비녀가 땅에 떨어진 형상(金釵落地形)이라는 명당으로 알려져 있다. 너른 ‘속개들’ 옆으로 옥녀봉이 솟아 있고 연접한 산봉우리들이 출렁거리며 펼쳐진 모습이 범상치 않아 보인다. 마을 초입에 놓인 자그마한 다리를 건너면 오른편에 금하굴이 나타난다. 그 뒤편 언덕에는 숭위전(崇威殿)이라는 현판이 걸린 사당이 있다. 금하굴은 <삼국유사>에서 광주북촌(光州北村) 지렁이(蚯蚓)설화의 현장이다.
“옛날에 부자 한 사람이 광주 북촌에 살았다. 딸 하나가 있었는데 자태와 용모가 단정했다. 딸이 아버지께 말하기를, ‘매번 자줏빛 옷을 입은 남자가 침실에 와서 관계하고 갑니다’라고 하자 아버지가 말하기를 ‘너는 긴 실을 바늘에 꿰어 그 남자의 옷에 꽂아 두거라’라고 하니 그대로 따랐다. 날이 밝아 실을 따라 북쪽 담 밑에 이르니 바늘이 큰 지렁이의 허리에 꽂혀 있었다. 이로 말미암아 잉태하여 한 사내아이를 낳았는데 나이 15세가 되자 스스로 견훤이라 일컬었다.”(<삼국유사> 후백제 견훤 조)
바위 사이로 보이는 금하굴은 꽤 깊어 보였다. 여기서 광주 북촌을 이 교수는 글자 형태가 비슷한 상주(尙州)의 오기(誤記)로 보고 있다. 금하굴 뒤편 언덕에는 2002년 세워진 견훤사당이 자리잡고 있다. 사당 안에는 ‘후백제시왕(後百濟始王)’이라는 위패가 모셔져 있다. 이곳에서는 매년 문경향교 주관으로 향사가 봉행되며 초헌관은 문경시장이, 종헌관은 견훤왕의 후손인 견씨종친회장이 맡는다고 한다.
△ 용마 낚아챘다는 말바우
일행은 인근 청동기시대 유물인 4형제 바위와 순천김씨 고택을 둘러보고 농암면 연천리 개천가에 있는 말바우로 향했다. 말바우는 소년시절 견훤왕이 용마를 낚아챘다는 전설이 전해오는 곳이다. 얘기는 이렇다.
“이곳 큰 바위에 용마가 나타나자 견훤왕은 허수아비 뒤에 숨어있다 용마를 낚아챘다. 이 용마를 타고 용마가 화살보다 빠른지를 시험해보기로 했다. 말에 탄 견훤왕은 화살을 쏨과 동시에 말을 몰았다. 하지만 용마는 가은산에 도달했으나 화살이 보이지 않았다. 용마가 화살보다 늦었다고 생각한 견훤왕은 용마의 목을 베어버렸는데 그때야 날아온 화살이 땅에 떨어졌다. 견훤왕은 ‘아차’하고 슬퍼했다. 이때부터 용마가 나타난 바위를 용(말)바우, 목을 벤 가은산을 아차산, 마을을 아차마을이라 불렀다고 한다.”
이어 견훤왕이 궁궐을 짓고 군사를 훈련시켰다는 궁기1리 궁터마을을 둘러봤다. 그리고 가은역 부근의 아자개장터에서 골뱅이(다슬기) 국으로 점심식사를 했다. 가은역은 전국의 폐역사(廢驛舍) 중 유일하게 카페로 모습을 바꾼 곳이다.
△ 문경·상주·원주에 산재하는 견훤산성
오후에는 상주로 이동해 견훤산성을 찾을 예정이었다. 하지만 봄비가 슬쩍 비치며 길을 막았다. 오랜 가뭄 끝에 오는 봄비는 축복이긴 하나 답사에는 훼방꾼이었다. 고심 끝에 올라가지 못하고 드론을 띄워 사진만 찍기로 했다.
우리나라에 견훤(산)성이라 불리는 곳이 서너 군데 있다. 견훤왕이 태어나거나 격전지였던 곳이다. 그중 문경의 견훤산성은 농암면과 가은읍 경계에 있는 356m의 성재산에 소재한다. 지금은 무너진 돌무더기가 산 정상 둘레에 군데군데 남아 있을 뿐이다. 이곳에는 견훤왕이 누이와 성쌓기 내기를 했다는 구전이 내려온다.
이웃 상주 견훤산성은 경상북도기념물 제53호로 지정돼 있다. 상주 시내에서 속리산국립공원 문장대로 가는 길목인 화북면 장암리 산봉우리(해발 545m)에 위치하는 테뫼식 석축산성이다. 둘레는 650m, 높이 7∼15m 협축식으로 치성 4개소에 바른층쌓기를 했다. 성 안에 건물지와 우물 1개소, 저수시설 2개소가 자리한다. 5세기말∼6세기초에 쌓은 견고한 성으로 인근 보은의 삼년산성과 비슷한 시기에 축성한 것으로 보인다. 상주 견훤산성으로 가는 길은 깊은 산중이어서인지 꽤나 추웠다. 그러나 다른 곳에서는 이미 져버린 벚꽃 군락이 만개해 눈을 즐겁게 했다.
또 상주시 화서면 하송리와 동관리에 위치한 성산산성도 견훤성으로 불리고 있다. 둘레가 3340m에 이르는 토석혼축성으로 견훤왕과 관련된 대궐터 지명이 전해진다. 그리고 강원도 원주시 문막읍 포진리에도 견훤성터가 있다. 이곳은 견훤왕이 전주에 도읍을 정한 뒤 몸소 군대를 이끌고 진출한 곳이다. 궁예 휘하에 있던 왕건과 일전이 벌어져 크게 패했다. 견훤성에서 4km 떨어진 곳에는 왕건 군대가 주둔했다는 건등산(建登山)이 있다.
△ 상주 견훤사당과 병풍산성
다음으로 찾은 곳은 상주시 화서면 하송1리 청계마을에 있는 견훤사당. 산벚꽃과 목련, 진달래가 꽃대궐을 이루는 골짜기를 따라 올라가다 왼편으로 꺾어들면 호젓이 서 있는 견훤사당과 마주할 수 있다. 경상북도 민속문화재 제157호로 지정된 견훤사당은 앞면 1칸, 옆면 2칸의 조촐한 건물로 앞에 판자로 짠 두 짝의 출입문이 있다. 실내는 마룻바닥이며 뒷면 중간에 설치된 선반에는 흐릿하게 ‘후백제대왕신위(後百濟大王神位)’라 쓴 위패가 모셔져 있다. 천장 상량문에 청나라 연호인 도광(道光) 23년이라 쓰여 있어 1843년에 지어진 건물임을 알수 있다. 이곳 주민들은 매년 정월 보름에 수호신인 견훤왕께 정성껏 제사를 지낸다고 한다. 난세의 영웅 사당 치고는 초라한데다 표지판 하나 없어 찾는데 애를 먹었다.
사당을 뒤로하고 일행은 사벌국왕릉에서 병풍산성을 바라보았다. 이 왕릉은 신라 54대 경명왕의 아들인 박언창의 묘소다. 이곳에서 병풍산성이 가까이 보이기 때문이다. 해발 365m의 병풍산 봉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병풍산성은 둘레가 1864m로 수륙의 요충지에 위치하고 있다. 이곳 정상에서 보면 낙동강 수계와 경작지, 산세가 한눈에 보여 적의 동태나 움직임을 쉽게 파악할 수 있다. 견훤왕의 아버지 아자개가 웅거했던 곳이다.
끝으로 일행은 상주박물관에 들러 이 지역의 역사와 유물유적을 훑어보고 경천대로 향했다. 경천대는 낙동강 상류가 한눈에 들어오는 경관이 아주 빼어난 곳이다. 어두워지는 낙동강을 보며 견훤왕의 일생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갔다.
/조상진 논설고문
견훤왕의 가계(家系)와 성씨
견훤왕의 출생과 가계(家系), 성씨는 어떻게 될까. 먼저 <삼국사기>를 보자.
“견훤은 상주 가은현 사람이다. 본래 성은 이(李)였는데 후에 견(甄)을 성으로 삼았다. 아버지 아자개는 농사지으며 자기 힘으로 살아가다가 이후 집안을 일으켜 장군이 되었다. 처음에 견훤이 태어나 젖먹이로 포대기에 있을 때 부(父)가 들에서 농사를 짓자 모(母)가 남편에게 음식을 보내려고 아이를 수풀 밑에 두자 호랑이가 와서 그에게 젖을 먹여주었다. 마을 사람들이 듣고는 기이해하였다.”(<삼국사기> 권50, 견훤전)
견훤왕은 867년 상주 가은현에서 태어났다. 지금의 경북 문경시 가은읍이다. 이와 관련해 광주출신이라는 설이 있는데 광주는 출생지가 아니라 그의 초기 근거지라는데 대부분의 학자들은 동의한다. 아버지인 아자개는 농사짓는 농민이었다.
여기서 <삼국사기>는 견훤왕의 성씨가 본래 이씨였다고 기술하고 있다. 이에 대해 ‘믿어도 좋다’는 주장과 당시 견훤가는 성이 없었고 아버지 아자개가 장군이 된 후 붙인 것이라는 주장으로 나뉜다.
아자개는 신라 헌강왕 11년(885)∼진성여왕 원년(887)에 사불성(沙弗城·경북 상주)을 근거지로 군대를 일으켜 장군을 호칭하는 호족으로 성장했다. 아자개는 부인 2명과 5남 1녀를 두었다. 그중 첫째인 상원부인에게서 난 큰아들이 견훤이며 아자개는 둘째부인 자식들을 총애했다. 견훤왕도 여러 명의 부인과 10명 이상의 자식을 두었다.
“견훤은 아내와 첩이 많아서 자식을 십여 명 두었는데, 넷째아들 금강이 키가 크고 지혜가 많으므로 견훤은 특별히 그를 사랑하여 왕위를 그에게 전하려 했다. 그의 형 신검·양검·용검 등이 그것을 알고 근심하였다.”(<삼국유사> 후백제 견훤 조)
그러면 후백제를 건국한 견훤(甄萱)왕의 성씨에 대해 살펴보자. 이와 관련해 이도학 교수는 ‘견훤’이 아닌 ‘진훤’으로 읽어야 맞다고 주장한다. 견훤의 ‘견(甄)’에 대한 음가는 ‘견’과 ‘진’ 2가지가 있고 현재 교과서 등에서 ‘견훤’으로 표기하고 있지만 근거가 없다는 것이다. <동사강목> <증보문헌비고> <완산견씨세보> 등에도 모두 진훤으로 음가를 달았다고 한다. 이에 대해 반박하는 학자는 아직 나타나지 않고 있다.
/조상진 논설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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