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골 출신 견훤, 해양에 입문하며 후백제를 건국하다
견훤은 원래 바다와는 거리가 먼 지금의 문경시 가은읍의 산골 출신이다. 그가 바다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889년(진성여왕 3)에 신라가 파견한 ‘서남해방수군’의 일원으로 참여한 것에서 비롯하였다. 국내외 해양의 핵심 거점에 해당하는 서남해지역을 방수(防戍)하는 것이 ‘서남해방수군’의 임무였다. 견훤은 그 일원으로서 진군하는 과정에서 큰 공을 세워 소부대를 지휘하는 ‘비장(裨將)의 지위에 올랐다.
비장 견훤은 연전연승을 거두며 강주(康州, 지금의 진주)에 당도할 즈음에 5,000여 명을 헤아리는 무리가 자신을 따르는 것을 보고서 신라에 대한 반심(叛心)을 품기 시작하였다. 강주, 즉 진주는 낙동강의 지류인 남강이 흐르고 남으로는 사천 및 남해도로 통하는 남해안 해양의 요충지이기도 하였으니, 산골 출신 견훤이 이곳에서 처음 바다를 대면한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 이어 순천을 접수하고 순천만과 광양만의 바다를 무대로 세력을 떨치던 박영규와 김총 등의 해양세력을 확보함으로써 견훤의 군대는 해륙(海陸)을 아우르는 대세력으로 급성장하였다.
순천에서 견훤은 잠시 숨고르기에 나섰다. 원래의 목적지인 서남해지역은 다도해를 기반으로 한 능창이나 영산강의 나주를 중심으로 한 오다련과 같은 강력한 해양세력이 버티고 있었던 반면, 광주는 유력 호족인 지훤 등이 자진 투항을 전해왔기 때문이다. 결국 견훤은 광주를 먼저 접수하여 전열을 가다듬은 뒤에 서남해지역을 진출하는 것으로 방침을 정하고, 892년에 광주에 입성하였다. 경주에서 진군을 시작한 지 3년 만의 일이었다. 그러나 견훤은 8년여 동안이나 광주에 머물며 서남해지역 진출을 시도하였으나 끝내 이루지 못하고, 900년에 우선 전주로 옮겨가 도읍을 정하고 후백제 건국을 선언한 다음에 후일을 도모하기로 하였다.
△후백제 견훤, ‘영산강대전’에서 궁예의 해군장군 왕건에게 패하다
전주에서 후백제를 건국한 견훤의 서남해지역 공략은 더욱 격렬해졌다. 이에 심각한 위협을 느낀 영산강유역 나주의 유력세력 오다련 등은 마침 궁예가 901년 후고구려(후에 태봉)를 건국하자 그와 전략적 연대를 모색했다. 연대의 실행은 궁예의 해군장군 왕건에게 맡겨졌다. 왕건은 903년 궁예의 수군을 이끌고 서해안을 따라 영산강유역에 당도하였고, 첫 출전에서 오다련 등의 협조를 받아 나주 인근 10여 군을 접수하는 놀라운 전과를 거두었다.
왕건은 그 여세를 몰아 909년에는 중국 오월에 파견한 견훤의 사신선을 무안 앞바다에서 나포하였고, 912년에는 목포와 덕진포 사이의 영산강(‘몽탄강’)에서 견훤이 직접 인솔한 후백제의 수군과 결전(‘영산강대전’)을 벌여 대승을 거두었으며, 다도해를 기반으로 비타협적 저항을 지속해오던 압해도의 수달장군 능창마저 생포하였다. 결국 918년 왕건은 서남해지역 장악의 성과를 배경으로 삼아 실정을 거듭하던 궁예를 몰아내고 고려를 건국하기에 이르렀다. 이제 후백제 견훤은 최고의 해양 거점인 서남해 나주지역을 선점한 고려의 왕건을 상대로 힘겨운 해양 쟁투를 전개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후백제, 고려와의 대결에서 해양 주도권을 잡다
당시 영산강유역의 중심 도시 나주가 서해와 남해를 잇는 해양의 핵심 거점이었다고 한다면, 서해안의 해양 중심 거점은 운주이고 남해안의 해양 중심 거점은 강주였다. 운주는 오늘날 충남 홍성을 중심으로, 서북으로 태안·서산·당진 등과, 동북으로 예산·아산 등과, 남으로 보령 등과 통하고, 안성천·삽교천·곡교천·무한천 등의 숫한 하천들이 거미줄처럼 얽혀 서해 바다와 이어주고 있는 곳으로, 일찍부터 ‘내포(內浦)’지역이라 불리는 서해안의 최고 해양 요충지였다. 이곳은 일찍이 왕건이 서해안을 통해 영산강유역으로 진군할 때 해로의 중간 거점으로 활용했던 곳이기도 하였다. 강주, 즉 오늘날의 진주는 동으로 김해와, 남으로 남해도와, 서로 순천과 통하는 남해안의 최고 해양 요충지로서, 일찍이 견훤이 해양과 첫 인연을 맺은 곳이기도 하였다.
후백제 견훤은 나주와 운주와 강주를 중심으로 고려 왕건을 상대로 한 치열한 해양쟁패전에 나섰다. 나주를 선점한 왕건의 우세가 점쳐졌으나 실제로는 양자 간에 해양 거점을 둘러싼 일진일퇴의 공방이 이어졌다. 먼저 왕건이 선점했던 운주의 경우 918년에 견훤이 빼앗았고 927년 3월에는 왕건이 탈환했으며, 928년 하반기에는 견훤에게 다시 넘어갔다. 또한 견훤이 선점했던 강주의 경우 920년 왕건에게 넘어갔다가 924년경에 견훤이 탈환했으며, 927년 4월경에 다시 왕건에게 돌아가더니 928년 5월에는 견훤에게 다시 넘어왔다. 결국 강주와 운주 지역의 전황을 종합해 보면 927년에는 주도권이 왕건에게 잠시 넘어가는가 싶더니 928년 후반부터는 견훤에게로 넘어가는 형국이었다.
거기에 929년경에는 나주마저 견훤이 장악하였으니, 이제 서해와 남해와 서남해의 해양 주도권은 견훤에게 넘어온 셈이 되었다. 후백제는 그 여세를 몰아 해양 총공세를 펼쳤다. 929년 9월에 고려의 앞마당이라 할 예상강에까지 진출하여 고려의 배 100여 척을 불태우고 저산도(지금의 황해남도 소재 저도)에서 고려의 말 300필을 약취하였으며, 10월에는 대우도(지금의 충남 서산시 소재)를 공략하기도 하였다. 이제 해양 주도권의 대세는 후백제 견훤에게 완전히 돌아가는 추세였고, 고려 왕건은 막다른 골목으로 내몰려 특단의 대책을 강구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었다.
△후백제 해양의 꿈, 아쉽게도 해양으로 지다
왕건은 935년 4월 어느 날 여러 장수들을 모아놓고 나주 탈환의 대책을 논의하였다. 결국 나주 탈환의 중차대한 과업은 유금필에게 맡겨졌고, 유금필은 왕건의 기대에 부응하여 나주 탈환에 성공하고 개선하였다. 왕건은 친히 예성강에 나아가 자신의 전용선까지 내주며 출전하는 유금필을 배웅하였고, 개선해 돌아온 유금필을 예성강에 행차하여 맞이하였으니, 나주 탈환에 걸었던 왕건의 관심이 어느 정도였던가를 가히 짐작해 볼 수 있다.
그런데 후백제가 나주를 고려에게 다시 빼앗길 수밖에 없었던 배경에는 1개월 전에 일어난 심각한 적전분열의 사건이 있었다는 점에서 아쉬움이 남는다. 935년 3월 견훤은 넷째 아들 금강을 후계자로 삼고자 하였고, 장남 신검이 난을 일으켜 견훤을 금산사에 유폐시켰던 것이다. 결국 4월에 결행된 유금필의 나주 탈환은 이러한 후백제의 내분에 편승한 면이 컸다. 견훤은 그해 6월 금산사를 탈출하여 나주로 달아나 고려에 투항하였고, 유금필은 다시 군선 40여 척을 거느리고 불과 2개월 전에 자신이 탈환한 나주로 나아가 견훤을 정중히 모셨으니, 이로써 후백제의 역사는 사실상 종지부를 찍었다.
928년 후반 이후 해양 주도권을 잡아 확실한 우위를 확보해가던 후백제가 결국 내분으로 인해 해양의 최고 거점인 나주를 고려에게 내주더니, 그 나주를 통해 역사의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니, 후백제의 입장에서는 심히 아쉽고도 통탄할 일이 아닐 수 없다.
/강봉룡 (목포대 사학과 교수)
해양개방정책의 노선을 추구한 후백제의 해양국가 지향성
견훤은 900년 후백제를 건국하자마자 중국 항저우(杭州)를 중심으로 해양강국의 위세를 떨쳐가고 있던 오월에 사신을 파견하여 해양개방정책의 노선을 분명히 하였다. 왕건이 909년 오월에 파견한 후백제의 사신선을 무안 앞바다에서 나포하였고, 918년 고려 건국 직후에는 그 역시도 오월에 사신을 파견하기도 하였으니, 이는 고려가 차후 후백제와 치열한 해양쟁패전을 벌일 것을 예고한 거나 마찬가지였다.
후백제는 고려에 대한 해양 우위를 선점하기 위한 전략으로 국제 해양교류의 다각화를 시도하였다. 먼저 925년 산둥반도를 중심으로 또 하나의 해양강국으로 발전해가고 있던 후당에 사신을 파견하여 교류를 본격화하였으니, 이는 이미 후당과의 교섭을 통해 성장해 가고 있던 강주(지금의 진주)의 해양세력 왕봉규 등을 포섭하는 것으로 가능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이어 일본의 해양세력과의 교섭에도 나섰던 것으로 보인다. 일본 조정이 929년에 검비위사(檢非違使) 진자경(秦滋景) 등을 후백제에 파견한 적이 있었다. ‘검비위사’란 ‘비위(잘못)를 따지기 위해 파견한 사신’이라는 의미를 내포하므로, ‘검비위사’ 파견은 당시 일본 해역에서 독자 세력으로 성장해가고 있던 해양세력의 동향에 예의주시하고 우려하고 있던 일본 조정이 그 해양세력과 모종의 교섭을 시도하고 있던 후백제에게 엄중 경고하기 위함이었다고 생각된다.
후백제가 928년 이후에 고려와의 해양경쟁에서 확실한 우위를 점한 것은, 이렇듯 당시 해양개방정책을 견지하고 국제적 해양교류의 다각화를 시도해갔던 해양국가 후백제의 지향성이 만들어낸 산물이었다 할 것이다. 그런 만큼 후백제 실패의 역사는 아쉬움이 더욱 클 수밖에 없다.
/강봉룡 (목포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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