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에 관심이 있는 독자라면 10세기 초반의 한반도 지도를 보며 한 번쯤 의아하다는 생각을 해봤을지도 모르겠다. 아마 호남지역을 기반으로 성립한 후백제의 배후가 그들 영역으로 표시되어 있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형세는 언제 이루어졌을까?
△후고구려 궁예, 송악의 대호족 왕건을 품다
견훤이 완산주(전주)에서 백제의 부활을 선언한(900) 이듬해, 신라 북변의 거주민들을 향해 잡초로 우거진 평양을 환기하며 고구려의 복국을 외친 이가 있었다. 신라의 왕자 출신인 궁예였다. 어릴 적 신라 왕실에서 벌어진 구구절절한 사연은 차치하고, 894년 명주(강릉)에 입성한 뒤 자립하는데 성공한 궁예는 동해안을 크게 휘돌며 세력을 키워나갔다.
자신을 거두어준 양길과의 대전 준비가 한창이던 896년, 송악(개성)의 호족 왕륭・왕건 부자가 궁예의 대열에 합류하였다. 오랜 시간 바다를 주 무대로 활동하며 여러 해상세력과 폭넓은 호혜 관계를 형성해왔던 그들의 선대였다. 왕건의 증조부인 작제건의 할아버지가 당 7대 황제 숙종이라는 ‘고려세계(高麗世系)’의 설명은, 물론 왕씨 가문의 유구함과 고려 왕실의 차별성을 드러내기 위한 분식이겠지만, 수용 여부와 별개로 그들 선대의 활발한 해상활동을 암시한다.
송악 일대의 확보는 거들뿐, 궁예를 크게 고무시킨 것은 이들이 소유한 ‘해상력’이었을 것이다. 궁예는 곧장 왕륭을 금성(金城, 김화) 태수로, 왕건을 발어참성(勃禦槧城) 축조의 책임자이자 성주로 임명하여 그들의 귀부에 부응하였다. 두 부자를 앞세운 후고구려의 수군은, 적극적인 해양 활동을 통해 웅비를 꿈꾸던 견훤의 후백제에 장차 큰 위협을 예비하고 있었다.
△후백제와 후고구려, 나주에서 최초로 맞붙다
견훤은 무진주(광주)에서 나라를 열었다. 의견이 분분하나, 견훤이 비장에 임명되어 방수 임무를 수행한 ‘서남해’의 위치를 나주나 그 인근으로 보는 견해들도 있다. 그렇다면 이곳은 후백제 건국의 기반이 되는 소중한 지역이라 할 수 있다.
9세기 후반의 나주는 느슨한 형태로나마 견훤이 차지하고 있었으나 곧 궁예에게 귀부한 공간이다. <고려사>의 기록에 따르면, 궁예는 903년에 왕건을 보내 광주 경계의 금성(錦城)을 비롯한 10여 군・현을 빼앗고, 이곳을 나주로 고쳤다고 한다. 이보다 먼저 901년 8월에 대야성(합천) 공략에 실패한 견훤이 군사를 ‘금성 남쪽’으로 옮겨와 그 주변을 약탈하고 돌아간 적이 있다. 제 영토를 ‘노략질’하는 군주가 있을까? 아마도 나주를 비롯한 이 영산강 유역의 호족들은 이 이전부터 후백제의 영향력 밖에 있었던 것 같다.
당연한 말이지만, 육로를 통해 후고구려가 후백제의 지배 영역을 관통하여 나주 일대까지 진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는 후고구려의 수군이 후백제의 뒷공간을 공략한 결과이다. 이렇듯 903년의 나주는 후삼국시대를 열어젖힌 두 신생 국가의 물리력이 충돌한 최초의 시・공간인 셈이다. 강진 무위사에 세워져 있는 선각대사 형미(迥微)의 탑비를 분석한 연구에 따르면, 이 서남부 지방의 경략에 후고구려왕 궁예가 친히 거둥했다고 한다.
△후백제와 후고구려, 바다에서 외교로 맞붙다
탁월한 안목과 적절한 인식을 바탕으로 국제 관계에 민첩하게 대응하여 국익을 취하는 것이야말로 한 나라의 원수가 지녀야 할 중요한 자질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완산주에서 백제 복국을 공식 발표한 견훤이 첫 번째로 선택한 정치적 행보는 중국의 ‘오월(吳越)’에 사신을 보내는 일이었다. 견훤은 정국 운영 과정에서 변수가 발생했을 때마다 오월과의 관계를 적극적으로 활용함으로써 돌파구를 마련하고자 하였다.
후백제가 오월에 손을 뻗치던 즈음, 중국 역시 5대 10국으로 분열된 혼란기였다. 중원의 패권 다툼에 여력이 없었을 오월로부터 후백제가 군사적인 도움을 기대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들로부터 책봉을 받아 국내・외 정치에 활용하고자 하는 의도가 엿보인다. 또한, 후고구려가 자취를 감춘 918년 그해에 견훤은 오월에 ‘말’을 진상하였다. 그는 월주(越州)에서 생산된 ‘도자기’를 적극적으로 수입하기도 했다. 경제적・문화적 목적에서의 교류 맥락을 읽어낼 수 있다.
그런데 909년에 염해현(鹽海縣) 앞바다에서 오월로 들여보내는 선단이 후고구려군에게 붙잡힌 일이 발생하였다. 신안, 무안, 영광 등 위치 비정을 둘러싸고 합의가 여의찮으나, 염해현은 후백제가 오월과의 공세적인 교섭을 위해 거점으로서 중요하게 여기던 곳이었던 것만은 확실하다. 후백제의 해양 활동이 상당히 위축되었을 것임은 불 보듯 뻔하였다. 궁예는 나포의 주역인 왕건을 크게 포상하였다. 이 사건은 후고구려에게 서남해 일대의 장악을 위한 자신감을 심어주었을 것이다.
△압해도의 해상영웅 능창, 궁예에게 욕보이다
외교 선단의 피랍이라는 국가적 위기가 채 가시기도 전에 신안 압해도 인근에서 능창(能昌)이 후고구려에 사로잡혔다. 압해도의 송공산성 일대를 드나들며 인근 해상세력을 규합한 능창은 ‘수달’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수전에 능하였다. 지금 송공산 앞에는 압해도 일대를 주름잡았던 능창을 기리는 기념비가 우뚝 서 있다.
하늘은 주유를 낳았지만, 제갈량도 함께 보냈다. 그를 붙잡은 것은 이번에도 왕건이었다. 능창은 철원으로 압송되었고, 궁예에게 갖은 모욕을 당한 뒤 저잣거리에서 참수되었다. 능창과 견훤이 무슨 관계에 있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다만, 궁예는 능창이 보유한 ‘해상 공격력’을 포기하였다. 왕건에 대한 신뢰를 엿볼 수 있는 동시에, 능창을 욕보임으로써 어떠한 ‘정치적 메시지’를 던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이 메시지의 수신처는 후백제 왕도 전주였을 것이다.
훗날 고려 후기의 관료 조준은 우왕에게 “우리 신성(神聖, 태조)께서 신라와 백제를 평정하지 못하셨을 때, 먼저 수군을 조련하시어 친히 누선을 타고 금성의 항복을 받아 점령하시니, 여러 섬의 이익이 모두 국가에 속하게 되었고 그 재력에 힘입어 마침내 삼한을 통일하시었습니다”라고 한 바 있다. 이처럼 고려인들에게 나주 일대의 공략 성공은 고려의 후삼국 통합을 위한 정초(定礎)로 회자되었다.
반면, 뒷문 단속에 실패한 후백제는 후삼국 쟁탈전의 레이스 도중에 계속해서 뒤를 쳐다봐야만 했다. 앞만 보고 달려도 모자랄 판에 자꾸만 뒤까지 신경 써야 했던 후백제였다. 물론 후고구려나 고려 역시 빼앗은 거점을 지켜내기 위해 인적・물적 투입을 지속해야 했다는 점에서 등가적이다. 그러나 후백제에게 후방 제어 실패의 대가가 뼈아팠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홍창우 (전남대학교 사학과 강사)
후백제 역사를 다시 일으키기 위한 ‘자료’의 문제
궁예와 견훤은 후삼국 쟁패전에서 최종적으로 패배하였다. 이는 고구려・백제 복국 운동의 ‘자초지종’에 대한 자기주도적 설명 기회의 상실을 의미한다. 정작 그 권한은 이들을 패망의 길로 내몰았던 왕건의 고려가 움켜쥐게 되었다. 한 사람은 왕건이 전면에 나서 혁명을 일으켜야 할 빌미를 제공한 자였고, 다른 한 사람은 그에게 끝까지 칼을 겨누며 훼방을 놓은 이였다. 왕건에게 궁예는 ‘창업’, 견훤 은 ‘수성’의 명분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왕건은 궁예의 신하였다. 자신이 섬기던 자를 내몰고 왕이 된 인물인 셈이다. 이신시군(以臣弑君), 즉 신하로서 임금을 죽이는 행위는 유교 국가에서 불인(不仁)의 상징이다. 고려 사람들이 ‘거의(擧義)’라 에둘러 표현한 이 ‘찬탈’에 대해 왕건 본인조차 훗날 여러 사람의 입에 오르고 내릴 것을 염려하였다. 이를 감추고 싶었던 것일까? 궁예는 한 나라의 군주가 아닌 독부(獨夫)로 규정되었고, 견훤은 원악(元惡)으로 지목되어 비난의 포화를 감당해야 했다. 이들은 단지 태조의 창업을 위해 백성들을 잘 갈무리해 준 ‘구민자(歐民者)’에 지나지 않았다.
고려시대가 지속되는 한, 궁예・견훤과 그들의 복국 왕조를 향한 서술이나 평가가 균형 잡힐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고려는 이들의 사적을 철저하게 ‘고려화’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처럼 한계가 명백한 고려시대의 저작물들을 토대로 후백제 역사를 다시 일으키는 작업은 마땅히 ‘불편’할 수밖에 없다. 중요한 것은, 『삼국사기』나 『삼국유사』를 위시한 자료들을 내버려 둔 채 우리가 후백제의 역사로 다가갈 마땅한 대안이 없다는 데 있다.
따라서 우리는 동원할 수 있는 자료의 한계를 받아들인 연후에, 그로부터 후백제 본위의 호흡과 시선을 가려내는 시도를 그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실제로 연구자들은 관련 기록들을 세심하게 분석하여 이른바 ‘후백제사(後百濟史)’와 같은 후백제 계통의 역사서가 존재했음을 밝혀내고 있다. 그렇다면 현재 우리가 처한 자료 환경에 대한 적실한 각성이야말로 후백제의 역사를 다시 세우는 실마리일지도 모른다.
/홍창우 (전남대학교 사학과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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