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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백제 역사, 다시 일으키다-문헌사료로 본 후백제] ⑤견훤의 광주 도읍 실패와 후백제 전주 정도

자왕에서 칭왕으로 끝난 광주 8년의 세월

후백제사에서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가 있다. <삼국사기> 권 제 50 열전 제10 견훤전에 “무진주를 습격한 후에 스스로 왕이 되었으나, 오히려 감히 공공연하게 드러내지 못하고 왕을 칭할 따름이었다(遂襲武珍州自王 猶不敢公然稱王)”는 내용이다. 자왕(自王)과 칭왕(稱王)의 관계다. 자왕은 견훤이 한 달만에 5000명의 무리들을 모아서 892년 무진주를 습격하여 자기 스스로 왕이라 하였는데, 왕으로서 즉위식은 커녕 다른 사람들에게 내놓고 왕으로 행세하지 못하고 자칭 왕으로 그쳤다는 이야기다. 견훤이 광주를 습격하여 ‘내가 왕이로소이다’선언하였는데, 광주 전남지역의 지방세력들은 왜 동조는 커녕 거들떠 보지도 않았던 것일까. 

자왕과 칭왕의 관계를 이해하려면 신라하대 광주 전남지역의 정치적, 종교적인 상황을 살펴보아야 한다. 신라하대에 진골귀족들이 왕권경쟁으로 골육상쟁을 벌일 때, 중앙정부의 권력은 약화되고 상대적으로 지방권력들은 성장하였다. 신라는 고대국가 발전 과정에서 각 지역의 소국의 지배층에게 촌주(村主)라는 관직을 부여하였고, 촌주의 재지권(在地權)을 인정해주는 방식으로 국가통합을 성취하였다. 촌주세력들은 중앙권력의 지방통제가 약화되는 상황을 틈타 호족세력으로 성장하였다. 촌주들은 국가의 말단 행정 관리였지만, 실제 각 지방의 재지유력자들이었다. 신라하대 촌주들은 각 지방의 호족세력으로 성장하고 정치력, 경제력, 군사력을 장악한 성주(城主)와 장군(將軍)으로 등장하였다. 

각 지방의 촌주, 호족들이 토착지배세력으로 성장하면서 종교사상계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신라하대에 당나라 유학승들은 남종선(南宗禪)을 들여왔는데, 신라중대 왕권, 귀족 중심의 화엄종보다는 지방호족들과 결탁하여 선종을 지방에 뿌리를 내리게 한다. 불교계의 활동 무대도 중앙에서 지방으로 중심이동이 이뤄지고, 불사(佛事)의 주체도 왕실과 귀족에서 지방의 촌주, 호족들이 주도하였다. 교종이 선종을 배척한 이유가 있었지만, 선종이 지방독립적인 토착세력들의 정치적 성향과 서로 부합하였다. 선종승려들은 왕실과 거리를 두고 지방호족들과 사상적으로 유착하였지만, 산문에 따라서는 신라 왕실의 지원을 받고 요청에 따르며 중앙정치에 영향을 행사하기도 하였다. 

신라하대에 9산선문이 개창되면서 가지산문, 실상산문, 동리산문이 전라도 지역에 들어섰다. 가지산문의 개산조는 도의선사다. 도의(道義)는 784년에 입당하였다가 40여년 뒤 821년에 귀국하였다. 도의가 장흥 가지산 보림사에서 산문을 열었다. 가지산문은 도의-염거-체징-형미로 법통이 이어졌다. 실상산문의 개산조는 홍척선사이다. 남원 운봉은 남원경이 설치되어 있었던 곳이기에 신라지배층의 성향이 강하였다. 홍척(洪陟)은 신라왕실과 자주 왕래 소통하면서 실상사가 왕실사찰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실상산문은 홍척-수철-편운으로 법통이 이어졌다. 동리산문은 곡성 동리산 태안사에서 혜철선사가 개창하였다. 혜철(慧徹)은 완도 청해진의 장보고 세력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혜철의 법통은 도선-윤다-경보로 이어졌다. 이처럼 신라하대 선종산문과 왕실과 지방세력은 상호호혜적 유착관계를 보여줬다.   

신라말 고려초에 서남해안에는 다음과 같은 선종사찰이 산문을 열었다. 

동리산문, 가지산문, 사자산문 문도들은 개산조 입적 이후에도 서남해안 일대에서 주로 활동하였다. 대표적인 선종사찰은 대안사(태안사:곡성), 연곡사(구례), 쌍봉사(화순), 무위갑사(강진), 송계선원(광주), 보림사(장흥), 옥룡사(광양)가 분포하고 있었다. 의상(義湘:영암 도솔암, 화순 규봉사), 도윤(道允)·체징(體澄:능성 쌍봉사, 장흥 보림사), 영통(靈通:장흥 천관사), 도선(道詵:영암 도갑사, 강진 무위사, 화순 규봉사), 의조(義照:영암 달마산 서굴), 지눌(知訥:화순 규봉사), 진각(眞覺:강진 월남사), 원묘(圓妙:강진 백련사), 혜일(慧日:완도 법화암)을 중심으로 활동을 하였다. 선사들의 활동 무대는 영암, 화순, 능성, 장흥, 강진, 완도 등지였다. 이처럼 신라 진성여왕 때까지 한반도 서남해안의 친신라계 선종 사찰과 승려들은 신라 왕실과 지방호족 사이에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진성여왕 6년(892)에 견훤이 서남해안에서 거병하였다.  

신라하대 서남해안 선종도량과 왕실의 유착관계는 분명하나, 선종을 후원하였던 지방호족의 실체는 명확히 드러나지 않는다. 신라하대 선종산문의 후원자들이 밝혀진 바가 없고, 문헌과 금석문에도 밝혀진 사례가 없다. 9산선문의 후원자들은 각 지방의 토착호족, 즉 토호(土豪)들은 분명한 듯하다. 왜냐하면 신라하대에 촌주세력이 불사(佛事)를 주도했기 때문이다. 신라하대 호족들은 토착호족(토호)과 낙향호족이 있었다. 토착호족은 촌주들이 재지기반으로 성장한 호족이라면, 낙향호족은 왕권쟁탈전에서 패퇴하여 지방에 은거하는 호족들이다. 토호가운데 정치적, 군사적 위상을 가진 성주·장군은 후삼국시대 후백제 견훤과 고려 왕건과 전투 과정에서 투항자 명단이 밝혀졌다. 각 지역의 토호들은 유력한 토성(土姓) 집단을 대표하는 호족이었다. 나말여초 토성집단의 대표 호족이 성주·장군이었다. 나말여초 서남해안 각 지역의 토성집단을 살펴보면, 왜 견훤이 광주에서 칭왕(稱王)으로 끝나고 말았는가를 유추해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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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천 경주정씨 문중서원인 옥계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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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정씨 시조 사로6촌 촌장 지백호 묘.

<신증동국여지승람> 각 군현별 성씨 자료와 전남종가회에서 밝힌 전남지역 성씨 자료를 분석해보면, 나말여초 당시 전남지역 토호집단의 정치적 성향이 엿보인다. 전라남도 장흥, 해남, 강진, 완도, 구례, 곡성, 영암, 화순, 능성 등의 토성집단을 살펴보면, 신라 사로6촌 및 신라왕실의 인물을 시조(始祖)로 두고 있는게 대부분이다. 대표적인 성씨는 경주이씨(나주), 무안박씨(무안), 김해김씨(화순,영암), 함양박씨(영암), 청주김씨(장흥), 밀양박씨(장성,나주), 진주정씨(보성), 양산김씨(강진), 낭주최씨(영암), 동래정씨(영광), 장흥위씨(영암), 경주정씨(순천), 반남박씨(영암), 창녕조씨(영암), 나주김씨(무안) 등이다. 이 성씨들이 나말여초 당시 토호세력이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다. 전남 서남해안 토성가문들은 친신라계 성향을 가졌으며, 궁예-왕건 정권과 유착은 예상되는 일이다. 전남 토성가문의 대표호족들은 반신라적 민중봉기를 일으킨 견훤을 지지하지 않는 것은 당연한 정서였을 것이다. 

견훤과 전남지역 호족의 관계는 승주의 호족 박영규(朴英規:순천박씨 시조)와 김총(金摠:순천김씨 시조)을 사위로 맞이하였으며, 광주의 호족 지훤(池萱)과 강주장군 유문(有文), 오어곡성장군 양지(楊志)·명식(明式) 등 6인, 순주장군 원봉(元奉) 등이 후백제 견훤에 귀부한 호족들이었다. 하지만 정권을 세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견훤은 광주에서 8년동안 호족연합정권을 세우려고 온갖 노력을 기울였지만, 전남지역이 가진 마한시대 전통의 지역적 토착성을 극복하지 못하고 900년에 백제의 땅 전주로 향하였다.  

/송화섭(전 중앙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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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화섭(전 중앙대 교수)

 

후백제 견훤과 선종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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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 실상사 조계암지 편운화상 부도

나말여초기 왕권과 선종과 유착 관계는 견훤의 후백제에서도 그대로 계승되었다. 견훤은 곡성 태안사의 동리산문과 남원 실상사의 실상산문과 호혜 관계를 맺었다. 도당유학승 동진대사 경보(洞眞大師 慶甫)가 921년 사수천 신창진으로 들어왔다. 사수천은 현 만경강의 옛 지명이다. 신창진(新倉津)은 만경강 하구 나루터다. 견훤은 친히 경보를 맞이하여 남복선원(南福禪院)에 모셨다. 남복선원은 전주 남복산에 있었다. 남복산(南福山)은 현재 전주 완산칠봉이다. 경보는 동리산문(桐裏山門)에 속한 선종승려이며, 도선국사의 제자이다. 경보의 임피현 신창진 귀국은 견훤의 배려로 보인다. 경보는 일단 옥룡사로 갔다가 견훤정권의 국사로 남복선원에 돌아와 주석하였다. 924년 당의 유학승이었던 정진대사 긍양(靜眞大師 兢讓)도 희안현 제안포로 귀국하였다. 희안현 제안포는 부안군 보안면 남포 일대다. 

운봉 실상사 조계암지에는 홍척국사의 제자인 편운화상의 부도탑이 있다. 편운화상 부도탑(보물 제2208호)은 원통형 형태인데, 이 부도탑 탑신 상단에 “홍척의 제자로서 인봉사를 개창한 편운화상의 부도이다. 정개십년 경오년에 세웠다(創祖洪陟弟子 安峰創祖 片雲和尙浮圖 政開十年庚午歲建)”이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정개십년 경오년은 견훤이 900년 완산주에 도읍을 정한지 10년이 되는 해다. 이 명문은 후백제가 연호를 사용했다는 유일한 자료다. 나말여초 당시 중국 황제 외에 독자적인 연호를 쓸 수 없었는데, 후백제 정개 연호는 역사적 의미와 사료적 가치가 매우 큰 것이다. 정개(正開) 연호는 후백제가 중국과 신라에 예속된 나라가 아닌 독립국가라는 선언적 의미가 있다. 이 편운화상 부도탑은 후백제 견훤정권과 실상산문의 지원과 지지의 호혜적 관계를 말해준다. 이러한 후백제 견훤정권의 선종 후원은 실상사 약사전 철조여래좌상의 조성이 말해준다. 이 철조여래좌상은 국내 철불의 효시이며, 운봉 일대의 철산지를 운용한 후백제 견훤정권의 상징적 유물이다. 

/송화섭(전 중앙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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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운화상 부도에 음각된 정개10년 연호 탁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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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백제 #견훤 #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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