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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백제 역사, 다시 일으키다-문헌사료로 본 후백제] ⑦익산지역 마한∙백제∙후백제 역사 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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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산 견훤왕릉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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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한-백제-후백제 중요유적 분포도.

 

△견훤은 왜 익산에 주목했는가

조선 18세기 중반 읍지인 <여지도서(輿地圖書)>에 다음과 같이 전한다. 

"견훤이 까치재 고개에 진을 치고 있을 적에 … 갑자기 기(旗)가 쓰러져 넘어졌다. 이를 보고 견훤은 자신이 반드시 패망할 것을 알고 좌우에 이르기를 내가 죽으면 모악산이 보이는 곳에 묻어 달라고 하였다. … ." <여지도서>.

현재 견훤왕릉은 논산군 연무읍 금곡리 산 17번지에 있다. 견훤의 희망에 따라 그의 릉은 남쪽으로 미륵산이 보이는 언덕에 자리하고 있다. 만경강을 넘어서면 모악산도 보인다. 미륵산은 백제 금마저(金馬渚)의 중심산으로 미륵산, 용화산 등으로 불리었고 정상에는 전라북도의 최대 규모의 기준성 또는 미륵산성으로 알려진 산성이 자리한다. 견훤은 인생을 마감하는 자리에 왜 이곳을 선택했을까? 익산은 견훤 백제의 시작이자 종착역이었다. 견훤은 900년 완산주인 전주를 순행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견훤이 서쪽으로 순행하여 완산주(完山州)에 이르니 … 견훤이 인심을 얻을 것을 기뻐하여 좌우에게 말하기를, '내가 삼국의 시초를 찾아보니, 마한이 먼저 일어나고 후에 혁거세가 일어났다. 그러므로 진한과 변한은 그를 뒤따라 일어난 것이다. 이에 백제는 금마산(金馬山)에서 개국하여 600여 년이 되었는데 총장 연간 당 고종이 신라의 요청으로 … 백제를 공격하여 멸망시켰다. 지금 내가 감히 완산에 도읍하여 의자왕의 오래된 울분을 씻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다. 마침내 후백제왕을 자칭하고 관부를 설치하고 관직을 나누니 이때는 당 광화 3년(900)이며 신라 효공왕 4년이었다. … ." <삼국사기> 견훤전.

백제의 개국왕인 온조를 모를 리 없는 견훤이다. 그럼에도 백제를 금마와 연결하는 견훤의 의향은 무엇인가. 견훤은 삼국의 시초를 마한으로 이를 계승한 백제는 금마산에 후백제는 완산에 세우고자 하였다. 삼국 통일에 외세를 빌린 신라도 비판하고 있으며 시기적으로 마한-백제-후백제를, 지역으로 익산(금마산)-완산을 계승한다는 관념을 보여준 선언이다. 더하여 일통삼한(一統三韓)의 의지도 강하게 나타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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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굴조사된 황등제 제방.

△준왕이 자리잡은 곳, 금마의 마한

견훤이 주목한 후백제의 원류인 마한은 한반도 서남쪽에 자리잡았던 고대의 연맹체 국가이다. 중국사서인 <삼국지(三國志)> 위지 동이전, <후한서(後漢書)> 동이열전, <진서(晉書)> 동이열전에 54개국 또는 56개국으로 소개되고 있다. 특히 익산의 금마는 <제왕운기>와 <고려사>에 고조선 준왕이 기원전 194년에 위만의 난을 피해 남천하여 마한을 세운 곳으로 나타난다. 

"위만이 조선을 공격하자 조선의 준왕은 … 바닷길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와 한의 땅에 이르러 나라를 세우고 국호를 마한이라 하였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

"준왕이 금마군으로 옮겨가 정착하여 도읍을 세우고 군인이 되었다." <제왕운기>.

마한의 고지는 준왕이 남천하기 이전 한지(韓地)로 소개되고 있다. 그 물질문화는 세형동검과 점토대토기문화로 대변된다. 토광묘가 등장하고 유력한 수장들은 적석목관묘를 사용하는데 대략 기원전 3세기 경이다. 금강 유역의 대전 괴정동을 비롯하여 전남의 화순 대곡리, 전북의 익산 다송리, 군산 선제리, 전주 여의동·원만성·효자4, 김제 대동리유적 등에서 이 적석목관묘를 살펴볼 수 있다. 

또 하나 고대국가의 성립에 중요한 한 축은 치수(治水)와 관련된 행위이다. 세계의 고대문명 대부분은 범람하는 강의 물을 조절함으로서 안정적인 국가 체계와 도시 구조, 잉여 생산물을 가능하게 하였다. 여기에서 호남평야의 익산 황등제(黃登堤), 김제 벽골제(碧骨堤), 정읍 눌제(訥堤)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긍익의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에는 김제 벽골제호를 경계로 전라도를 호남이라고 부른다고 하였다. <문헌비고(文獻備考)>에도 나라의 가장 큰 제언으로 호남 3호를 언급한다. 17세기 실학자였던 반계 유형원도 <반계수록(磻溪隧錄)>에 김제의 벽골제와 고부의 눌제, 그리고 황등제를 나라 안에서 가장 큰 제언이자 가장 중요한 조세의 근원으로 밝혔다. 황등제는 2019년의 조사 결과에 의하면 기원전 5세기~3세기에 축조되었다. 벽골제는 330년 축조 기사가 전한다. 눌제도 <정읍군사(井邑郡史)>에 마한~삼국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후 일부 발굴조사에서 황등제나 벽골제와 비슷한 공법이 확인되었다.

위의 고대 수리시설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앞서 고조선 준왕은 위만의 세력에 밀려 새로운 나라를 세우기 위해 남으로 향하였다. 남쪽에는 일찍부터 풍요로운 땅과 바다와 산이 있는 호남평야를 바탕으로 중국 전국이나 전한, 고조선과 교류하는 세력이 있었다. 한 나라를 옮기거나 세우는데 기반이 전혀 없는 곳으로 가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다. 마찬가지로 준왕의 남천에는 불모지 익산이 아니라 농경문화를 기반으로 이미 고도화된 정치체를 고려하지 않았을까.  

 

△마한과 백제·후백제의 땅, 만경강

익산과 완주, 전주는 공간적으로 만경강 중상류를 점유하고 있다. 마한 소국의 정확한 위치와 지명 비정은 사료의 음가에 의하고 있으나 최근의 고고학적 성과는 이러한 작업에 신중을 기하게 한다. 분명한 것은 고고학 자료의 집중도가 소국의 위치를 어느 정도 말해주고, 그렇다면 완주 상운리·봉동 수계리, 전주 여의동·만성동, 익산 사덕유적 등 이 일대가 하나의 소국을 형성할 만큼 동일한 문화권임을 알 수 있다. 특히 완주 상운리 분구묘를 중심으로 마한시기부터 백제 영역화 이후까지 고도의 철기제작 기술을 소유한 유력집단이 그 문화적 전통을 유지하였던 것으로 나타난다. 나아가 백제 한성말기~사비기에 조영된 완주 배매산성·삼례토성·구억리산성 등의 군사시설로 보아 익산 백제 이전에 만경강을 중심으로 고대문화의 맥이 지속적으로 이어졌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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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쪽에서 바라본 익산 미륵사지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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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5년 경 익산미륵사지 석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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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익산 출토 십자일광문 청동기, 익산 미륵사지 석탑출토 사리장엄구 일괄, 익산 왕궁리 석탑 출토 금동제여래입상.

 

△고도 익산 백제와 견훤

백제 무왕은 600년에 즉위하여 금마에 새로운 수도를 기획하였다. 금마에는 백제의 지방군 치소인 금마저(金馬渚)가 있었으며 무왕과 관련된 많은 유적이 남아 있다. 금마를 중심으로 궁성인 왕궁성과 오금산성, 미륵산성, 금마저토성, 낭산산성, 용화산성 등의 성곽 유적, 미륵사지, 제석사지, 사자사, 왕궁사, 석불사, 오금사, 태봉사 등의 사찰 유적, 그리고 무왕의 능으로 알려진 쌍릉과 무왕의 탄생 설화가 있는 용샘이 존재한다. 이 유적들은 고도 익산 백제에 대한 명백한 증거이며 ‘백제가 금마산에서 개국하여 600년이 되었다’는 견훤의 시각은 마한을 이어 백제의 후예임을 자처하고 이를 계승하겠다는 분명한 뜻이었다. 특히 미륵사는 무왕이 어려운 세상을 극복하고 정토인 미륵의 세상을 구현하기 위해 세운 사찰로 이곳에도 견훤의 행적이 담겨있다. 

"6년(920)에 견훤이 보병과 기병 10,000명을 거느리고 대야성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진례성(進禮城)으로 군대를 옮겼다." <삼국사기> 견훤전.

"3년이 지나 금산사 의정(義靜) 율사의 계단에 나아가 구족계를 받았다. … 용덕 2년(922) 여름 특별히 미륵사(彌勒寺) 개탑(開塔)의 은혜를 입어, 이에 선운산의 선불장(選佛場)에 나아가 단에 올라 설법했을 때 천상의 꽃이 이리저리 날렸다. 이로 말미암아 도의 명예가 더욱 빛났다." <갈양사혜거국사비문>.

견훤은 무왕의 노력에도 성공하지 못한 합천의 대야성을 920년에 함락하고 김해의 진례성까지 진격하였다. 이어 922년에는 이곳 미륵사에서 개탑의식을 갖고 고창 선운사에서 승려를 뽑는 과거인 선불장을 열었다. 미륵사 개탑은 백제의 신라 공략에 대한 오랜 한을 풀었다는 상징적인 의미이며 선불장은 신라 쇠락의 가장 핵심 요소인 골품제의 폐단을 극복하고 승과를 통해 공정한 세상을 만들겠다는 통치이념을 나타낸 것이다. 개탑의 행위는 실제 탑의 중수로도 볼 수 있으나 국가의 큰 행사를 맞이하여 부처님의 사리를 대중에 공개하는 영불골(迎佛骨) 의식과 같은 정치적 행사로도 볼 수 있다. 

익산 왕궁리 석탑에서도 후백제와 유사한 시기인 10세기 초 경의 금동불상과 함께 유리병, 금제사리함, 금강경 등의 사리장엄구가 일괄 출토되었다. 최근의 연구에 금강경의 문구와 경판의 사용흔을 바탕으로 백제 제작설이 제기되는데 이 또한 기존의 왕궁탑을 다시 세우는 의식이 있었을 가능성도 유추해본다.

금마저에 위치한 많은 유적에서는 토기, 자기, 기와, 금속공예품 등 수 만점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백제유물보다는 통일신라 이후의 것들이 더 많다. 시기별, 제작 주체별 연구 또한 시작 단계에 불과하다. 미륵사지에서 출토된 550여 편의 중국자기를 2023년에 새롭게 정리하고 있다. 중국자기에는 견훤과 밀접한 오월의 월주요도 포함되어 있는 것은 당연하다. 후백제 문화상을 밝히는 작업은 이제 시작이다.

/최흥선 국립익산박물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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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흥선 국립익산박물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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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백제 #최흥선 #익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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