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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가담항설](5) 전북경찰 75명 vs 빨치산 2500명 '격전'

1951년 6·25전쟁 때 정읍 칠보발전소 탈환 전투
차일혁 경무관 기만전술로 압도적 수적 열세 극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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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보발전소 뒷산에 위치한 충혼탑. 1954년 6.25전쟁 당시 희생한 69명의 혼을 기리고자 건립됐다. 

호국‧보훈의 달인 6월 1일, 낮 12시쯤 정읍시에 있는 칠보수력발전소를 찾았다. 뜨거운 햇살이 발전소의 면면을 화사하게 내리쬐고 있었다. 흔히 칠보발전소라고 불리는 이곳은 1945년 첫 발전을 시작한 남한 최초의 ‘유역 변경식 수력발전소’다. 

이날 발전소 뒷산에 오르자 15m에 육박하는 거대한 탑이 그 위용을 뽐냈다. 인근 정자에서 휴식을 취하던 마을 노인들에게 탑의 유래를 물었다. 탑의 정체는 오래전, 발전소를 지키다 전사한 사람들의 넋을 기리는 충혼탑이었다.

칠보면의 역사와 함께한 이들에게 칠보발전소는 단순 송전 시설을 넘어 그 이상의 의미를 간직한 장소였다. 한적한 시골에 고즈넉이 자리한 이 오래된 발전소가 과거 6.25전쟁 당시 전황의 운명이 걸린 결정적인 전투의 중심에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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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보발전소 1호기 전경. 왼쪽은 1951년 당시, 오른쪽은 오늘날의 모습이다.

△ 남한 전력 끊고자 칠보발전소 포위한 빨치산

북한의 남침으로 개전한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1월, 대한민국은 최대 위기에 놓여 있었다.

전방의 국군과 유엔군은 100만 중공군에 밀려 수도 서울을 다시 내주는 등 후퇴를 거듭했고, 후방에선 공산주의 비정규군인 일명 '빨치산'이 군경을 교란하며 주요 국가 시설을 탈취하려고 했다.

그 중에서도 빨치산이 우선적으로 노렸던 것은 정읍 칠보발전소였다. 당시 칠보발전소는 전라도뿐만 아니라 충청도와 경상도 일대의 전력 공급을 책임지는 국가 1급 시설이었다. 이곳이 마비되면, 남한 지역은 전력 공급이 완전히 끊긴 채 어둠 속에서 적군에 맞서야 할 형국이었다.

1951년 1월 10일, 빨치산 전북도당은 2500여 명의 대부대를 총동원, 칠보발전소를 겹겹이 포위하기 시작했다. 당시 칠보발전소를 지키는 병력은 45명의 경비부대가 전부였다. 신속한 병력 지원이 없으면 칠보발전소가 빨치산의 수중으로 넘어갈 위급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전방의 국군은 물밑 듯이 쏟아지는 중공군을 막느라 지원 병력을 차출할 여력이 없었다. 위기에 처한 칠보발전소를 구할 부대는 전북 경찰뿐이었다.

결국 차일혁 경무관(당시 총경)이 지휘하는 제18전투경찰대대 105명만이 급히 소집돼 칠보발전소 탈환 작전에 나서게 됐다. 이마저도 피난민을 지원하느라 이동 차량이 없어 30명의 대원을 두고 갈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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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 9월15일 촬영한 제18전투경찰대대 간부기념 사진./사진제공=차일혁기념사업회

△ “1대 30” 극적인 칠보발전소 탈환

이제 2500명에 달하는 빨치산과 맞서 싸울 경찰 병력은 75명으로 줄어들었다. 칠보발전소를 구하기 위해선 1명의 경찰이 30명의 적군을 상대해야 했다. 최악의 상황에서도 차일혁 경무관은 기지를 발휘했다. 발전소로 향하는 경사진 모퉁이 길을 이용해 일종의 기만전술을 쓰기로 한 것이다.

차 경무관은 4대의 차량을 빨치산들이 잘 보이지 않는 구부러진 곳에 세운 뒤, 1대씩 전조등을 켠 채 출발시켜 수십 차례 순회했다. 이를 본 빨치산은 경찰이 많은 병력을 동원한 것으로 오인해 포위를 풀고 발전소 내부로 후퇴했다. 이 틈을 노린 차 경무관은 부대를 이끌고 인근 칠보지서에 진입, 고립된 칠보면민을 구출했다.

차 경무관의 기만전술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구출한 면민들을 나뭇가지와 풀로 위장한 채 칠보초교로 모이게 했고, 그 방면으로 적이 병력을 분산시키도록 유도했다. 그리곤 박격포를 앞세워 발전소 정문으로 기습 돌격, 칠보발전소와 인근 9개 능선 고지를 모두 탈환하는데 성공했다.

기쁨도 잠시, 대병력이 온 줄 알았던 빨치산은 경찰 병력이 극소수라는 점을 알게 되자, 발전소를 향해 총공세를 감행했다. 이때 차일혁 부대는 탄환이 떨어져 전멸 직전에 몰렸지만, 죽음을 각오한 몇몇 대원이 적진 한가운데를 돌파해 실탄을 보급하는 등 분전 끝에 발전소를 사수해냈다. 

이날 전투로 사살한 빨치산이 68명에 노획한 군수 물자는 셀 수 없을 정도였다. 반면 아군은 12명이 희생됐다. 75명이 2500명을 격퇴한 역사적으로 보기 드문 승리였다.   

그러나 빨치산은 엄연히 정규군이 아닌 비정규군이므로, 이들에 맞선 전북 경찰의 노력은 전방에서의 굵직한 전투에 밀려 오늘날 세간의 관심을 끌지 못하고 있다.

이에 대해 전북 군경전몰유족회 관계자는 "전방의 국군을 대신해 수많은 지역 경찰과 학도병이 후방의 빨치산에 맞서 지역 사회를 지켰다"며 "이들의 숭고한 정신에 대해 정부와 지자체가 각별한 관심을 기울여 사람들에게 널리 알릴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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