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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백제 역사 다시 일으키다-문헌사료로 본 후백제] ⑩ 고창·정읍 유적과 부안 포구

고창 반암리 초기청자 가마유적지, 후백제와 오월 국제외교의 결실
정읍 고부 눌제, 백제 양식 돋보이는 산성과 석탑, 고분 등 남아 있어
부안 검모포, 후백제의 군사적 전략 요충지이자 해상교통로 확인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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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창 반암리 청자요지 발굴조사 가마 전경 /사진제공=고창군

역사란 어떻게 어디로 흘러가는가. 인류 최고의 철학자 중 한사람인 칼 마르크스가 “역사는 비극과 희극으로 반복된다”는 말을 남겼다. 그의 주장은 일견 타당하다. 과거 후삼국 시대 후백제의 역사를 돌아보면 희극과 비극이 반복되는 영욕의 순간들이었다. 찬란한 건국의 시기와 멸망을 비껴가지 못했던 풍전등화의 위기 속에 후백제는 역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크고 작은 영광과 부침의 세월을 겪어야만 했다.

일행은 과거 후백제의 수도였던 전주에서 송화섭 전 중앙대 교수(후백제학회장)를 만나 고창으로 이동했다. 그 이유는 역대 왕조 중 오월과 가장 돈독한 국제외교를 펼친 나라인 후백제가 자리했던 전북에서 고창군 아산면 반암리 초기청자 가마유적지는 고려시대 이전에 초기청자 생산의 중심지로서 귀중한 보고이자 역사 현장이기 때문이다. 지난 2021년 4월부터 2022년 9월까지 조사기관인 (재)조선문화유산원구원이 고창군 아산면 반암리 산4-1번지 일대에 위치한 반암리 청자요지에 대한 1, 2차 발굴조사를 실시했다. 발굴조사를 통해 고창 반암리 청자요지는 우리나라 초기청자 생산의 중심지 중 하나임이 밝혀졌다. 고창 반암리 청자요지는 계명산(해발 191m)에서 서쪽으로 뻗어 내린 구릉의 말단부에 입지한다. 학계는 우리나라에서 황갈색을 띠는 가장 이른 시기의 청자를 초기청자라 부른다. 천하제일의 상감청자로 유명한 부안청자보다 200여 년이 앞선다. 진안 도통리 벽돌가마에서 구운 초기청자는 최상급으로 진안청자라 이름 지었다. 중국 청자의 본향이 오월이다. 우리나라 역대 왕조 중 오월과 가장 돈독한 국제외교를 펼친 나라가 후백제이다. 고창 반암리에서도 중국식 벽돌가마에서 초기청자가 쏟아져 후백제와 초기청자의 연관성을 더욱 높이고 있다. 고려는 오월과 국제외교가 거의 확인되지 않지만 후백제는 40년 이상 오월과 혈맹적인 국제외교를 펼쳤다고 전해진다. 송 전 교수는 “학계에서 후백제와 오월 국제외교의 결실로 청자문화가 후백제로 곧장 전래된 것은 아닌지 추측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현재 고창 반암리 초기청자 가마유적지에서 서쪽으로 220m 지점에는 용산천이 남서쪽으로 흐르다가 주진천으로 합류해 서해안으로 빠져나간다. 유적과 용산천 사이는 충적지가 형성됐고 현재 경작지로 활용되고 있다. 송 전 교수는 “청자 연구에서 후백제는 문헌이 남아 있지 않다는 이유로 거의 초대 받지 못하는 안타까운 실정이다”며 “국보급 도공들은 비록 떠난 지 오래지만 앞으로 국보급 사적으로서 전북에서 검증된 고고학 자료로 후백제 초기청자를 논의하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일행은 고창을 지나 정읍으로 향했다. 정읍은 아직도 백제의 양식이 돋보이는 석탑과 고분이 남아 있다. 궁예가 철원에 도읍을 정하고 나라를 일으켰다면 전라도에서는 견훤이 민중적 지지를 기반으로 전주를 도읍으로 후백제를 건국했다. 견훤이 의자왕의 울분을 풀겠다는 선언도 전라도 지역 백제인들의 환심을 사려고 백제 역사의식을 계승하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드러낸 것이라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정읍 은선리 삼층 석탑(보물 제167호)은 백제시대 탑의 양식을 모방해 만든 고려시대의 석탑으로 목탑에서 석탑으로 변해가는 시기의 건축 양식을 잘 보여준다. 지붕들은 평면으로 처리해 간결하고 소박하다. 2층 몸돌의 남쪽 면에 문 두 짝을 단 방 모양이 있는데 문짝을 하나만 새기는 다른 탑과 비교하면 특이하다. 2011년에 탑 주변을 발굴 조사한 결과 백제 시대 기와가 많이 나왔는데 이것으로 볼 때 이곳에 백제 때부터 사찰과 관련된 건축물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정읍 천곡사지(泉谷寺址) 칠층석탑(보물 제309호)은 고려시대에 세운 탑이다. 1층은 네 개, 2층과 3층은 두 개, 4층 이상은 하나의 돌로 만들어졌다. 정읍에 있는 유일한 칠층석탑이다. 이 탑 옆에는 오층석탑이 있었으나 일제 강점기인 1925년 무렵 일본인들이 가져갔다고 한다. 전해 오는 말에 따르면 칠층석탑은 남승의 탑이고 일본인들이 가져간 탑은 여승의 탑이라고 한다. 발길을 돌리면서 바라본 칠층석탑은 천년이 넘는 세월 동안 기구한 사연을 간직한 채 신비롭고도 고요한 분위기를 품고 있었다. 이곳에서 만난 마을 주민인 조재곤(78) 씨는 말없이 칠층석탑을 바라보더니 “종종 산책을 나와 보는데 석탑의 웅장한 모습이 보기 좋다”고 말했다. 

정읍 은선리와 도계리 고분군(古墳群)은 지표조사 결과 백제 고분 275기가 확인됐는데 전북지역에 위치한 백제 고분으로는 규모가 가장 크다. 이 지역에 굴식돌방무덤이 밀집돼 있어 백제 지방 통치의 영역 확장 양상을 잘 보여주는 곳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곳에 분포하고 있는 고분은 백제의 사비 시기 고분이 대다수이지만 일부 웅진 시기 고분도 확인된다. 송 전 교수는 “웅진 시기에서 사비 시기로 이어지는 백제 굴식돌방무덤의 변화 과정을 살펴볼 수 있어 학술적 가치가 높은 유적이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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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정읍시 고부면 고부리에 위치한 고사부리성(古沙夫里城)은 과거 통일신라가 물러나고 견훤왕이 접수한 후백제 산성으로 현재는 복원작업이 한창이다. 조현욱 기자

다음으로 일행은 정읍 고사부리성(古沙夫里城)을 찾았다. 고사부리성은 후백제 산성으로 현재는 복원작업이 한창이다. 송 전 교수는 “통일신라가 고사부리성에서 물러난 후 후백제의 견훤이 고사부리성을 접수한다”고 말했다. 당시 영주성(瀛州城)이라고도 불린 고사부리성은 백제시대 지방 통치의 중심인 오방성(五方城) 중 하나인 중방성(中方城)으로 사용된 이후 1765년(영조 41년)까지 읍성으로 중심적인 역할을 하던 곳이다. 정읍시 고부면 성황산(133m)에 위치해있다. 성황산 정상부와 서쪽 봉우리를 기점으로 둘레는 1055m다. 2004년부터 2011년까지 원광대학교 박물관이 5차례 발굴 조사했다. 조사결과 고사부리성은 백제 때 축조된 이후 조선시대까지 꾸준히 사용된 것으로 밝혀졌다. 산성의 내부시설 중 대표적인 것은 장방형 집수시설이다. 집수시설은 백제시대에 처음 만들어진 이후 통일신라시대 확장 개축된 것으로 파악됐다. 성벽의 축조에 사용된 것과 동일한 형태의 석재가 사용됐다. 백제 중방성으로 알려진 고사부리성에서 후백제에 의해 개축된 것으로 보이는 성벽이 확인됐다. 견훤왕은 고사부리성을 리모델링했던 것이다. 고사부리성이 위치한 정읍 고부 일원은 지정학적으로 후백제 도성인 전주에서 바닷길을 통해 중국으로 곧장 나아갈 수 있는 대 중국 교류의 관문에 해당한다. 견훤왕은 고부를 후백제의 제2도시로 육성할 구상이었다. 후삼국시대 호남지역에서 유일하게 고려 왕건의 영향력 아래 있었던 나주세력을 견제할 수 있는 군사적 요충지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러한 고사부리성의 중턱에 올라 낮아 하늬바람을 맞으니 어느새 더웠던 날씨로 땀방울이 맺혔던 이마도 금세 시원해짐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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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백제 견훤왕은 국가 경쟁력과 농업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정읍시 고부면 관청리에 위치한 눌제(訥堤) 자리는 견훤왕이 개축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조현욱 기자

일행은 고사부리성을 떠나 고부 눌제(訥堤)로 향해 그곳에서 곽형주 향토사학자를 만났다. 당시 견훤왕은 국가 경쟁력과 농업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고 한다. 실제 견훤왕은 고부 눌제를 개축했다고 전해진다. 정읍 눌제와 함께 김제 벽골제, 익산 황등제를 ‘3제’라 불렀을 만큼 당시 눌제는 큰 규모를 자랑했다. 눌제는 제방을 축조해 농경을 이루고 도로 역할도 해 부안 줄포면 방면으로 나룻배를 이용하도록 했다. 축조연대는 영주지(瀛州誌)에 후백제 견훤왕이 축조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영주(瀛州)는 지금의 고부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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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형주 정읍 향토사학자(오른쪽 두번째)가 답사를 함께한 송화섭 전 중앙대 교수 등 일행에게 눌제(訥堤)에 대한 유래를 설명하고 있다. 조현욱 기자

​눌제를 지나 일행은 또 하나 주목할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는데 후백제의 군사적 전략 요충지이자 해상교통로를 살펴보고자 부안으로 이동했다. 고부의 정방향에 ​검모포(黔毛浦)가 위치하는데 검모포는 부안의 포구 이름이다. 현재 보안면 구진마을에 위치해 있는 검모포에 대해 송 전 교수는 “현재 구진마을에는 해양 방어 체제인 토성과 군함을 만들었다는 조선소 흔적이 있다”며 “마을 주민의 증언에 따르면 200여평의 석축과 석축을 지지하는 200여개의 나무기둥이 조선소 자리에 있었다”고 말했다. 지금의 구진마을을 가보면 도로도 닦여있고 소문난 빵집도 생겨 정돈된 분위기다. 하지만 옛 자취가 사라졌다고 송 전 교수는 아쉬움을 토로했다. 신형주 시인의 시 ‘별’을 보면 “가슴에 별을 간직한 사람은 어둠 속에서 길을 잃지 않는다”고 했다. 옛것을 간직해야만 지역 소멸 위기인 어두운 터널에서도 후대는 결코 길을 잃지 않으리니. 후백제의 역사를 다시 일으키는 짧지 않은 여정에서 일행은 한때 반짝였던 후백제의 발자취를 찾아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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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백제의 군사적 전략 요충지이자 해상교통로였던 검모포(黔毛浦)는 현재 부안군 보안면 구진마을에 위치해 있다. 이곳은 해양 방어 체제인 토성과 군함을 만들었다는 조선소 흔적이 있다는 마을 주민의 증언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조현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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