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훤은 전주를 후백제의 도읍으로 건설하는데 풍수지리와 미륵신앙이 그 바탕이 되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전주부사』의 고성벽지(古城壁址)는 도심화로 인해 성벽의 흔적이 뚜렷이 확인되지 않는 구간이 있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후백제 도성벽으로 보는 것은 큰 무리가 없을 것 같다. 이를 토대로 후백제의 도성을 복원해 보변 반월형에 가까운 평면 형태에 기린봉을 주산으로 하여 뻗어내린 산줄기 등 자연지형을 최대한 이용한 것으로 보인다. 대부분이 자연지형을 이용하였기에 부분적으로 삭토와 판축의 토성 축조법이 보이고 있다.
△전주, 후백제 왕도(王都)였다
1980년 9월에 진행된 동고산성에 대한 개괄조사는 후백제 흔적 찾기의 시작이었다. 당시 조사를 담당한 고(故) 전영래 교수님은 조사를 통해 확인된 성의 둘레와 형태, 내부 시설 등 조사내용을 보고하는 한편 동고산성은 견훤이 쌓은 후백제 산성임을 주장하였다.
동고산성 조사 이후 전주지역에서는 20여개소의 크고 작은 후백제 유적이 발굴조사 되었다. 또한 2017년과 2022년에는 전주지역 일원을 대상으로 한 정밀지표조사에 의해 성곽유적, 궁궐유적, 건축유적, 생산유적, 분묘유적 등 다양한 후백제 유적이 확인되었다.
후백제 도성을 추정할 수 있는 자료로는 1942년 전주부윤 구로키요스케〔黒木儀壽圭〕가 편찬한『전주부사(全州府史)』를 들 수 있다. 이 책의「전주부경역연혁도(全州府境域沿革圖)」에는 견훤왕궁지(甄萱王宮址)와 함께 고성벽지(古城壁址)가 표기되어 있다. 이 고성벽이 어느 시대에 축조된 성벽인지에 대해서는 명확하지 않다. 다만 전주 일대에 광범위하게 성벽이 축조될 시기는 후백제의 도읍기 이외에는 설명이 충분하지 않다.
왕궁은 왕이 거주하면서 정사(政事)를 살폈던 권위와 권력의 중심지로서 기능적으로는 정사공간·생활공간·정원공간 등으로 구분되는데 왕궁의 위치는 당시 왕도의 규모와 성격을 파악하는데 있어 매우 중요하다. 그렇다면 견훤은 AD 900년 전주를 후백제의 도읍으로 정하면서 왕궁을 어디에 두었을까? 문헌자료의 부족과 인식의 결여, 도심화로 인한 지형의 변화, 그리고 1100여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후백제 왕궁을 찾는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견훤 왕궁의 위치 비정은 몇몇 학자들에 의해 주장되어 왔다. 대표적으로는 물왕멀, 동고산성, 전라감영, 인봉리 등을 들 수 있다. 이 중 후백제 도성벽 내에 자리하고 있는 인봉리 일대가 궁성벽의 흔적과 주공(柱孔) 및 해자(垓字)의 확인 등 고고학 자료를 통해 볼 때 후백제 왕궁 터였을 것이라는 주장은 적잖은 근거를 갖게 되었다.
△견훤왕, 왕궁을 어디에 두었을까
후백제 왕궁의 위치 비정에 대해 가장 먼저 언급된 것은『전주부사』이다. 1938년 6월 조선총독부 도서관장 오기와라 히데오가 사각형의 커다란 석재와 천석 1만 여개를 목격하였고 연화문 막새가 수습되며 임금이 성을 둘만 한 사신상응의 지형을 이루고 있다는 점을 근거로 물왕멀 일대를 견훤왕궁지(甄萱王宮址)로 비정하였다.『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33 전주부 고적 고토성조에는‘전주부성 북쪽 5리에 견훤이 쌓은 고토성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렇듯 물왕멀이 견훤의 왕궁터라는 주장은 견훤이 축조한 고토성이 왕성 역할을 했다는 주장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물왕멀 일대는『전주부사』전주부경역연혁도의 고성벽을 후백제의 도성벽으로 보면 도성 밖에 자리하고 있으며, 서해그랑블아파트 건립 때 물왕멀 부근에 대한 발굴조사 결과 왕궁과 관련된 어떠한 고고학 자료도 확인되지 않았다.
1990년과 1992년에 진행된 동고산성에 대한 발굴조사에서 정면 22칸 측면 4칸의 대형 건물지 확인과 함께 건물지에서 전주성(全州城)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막새기와가 발견되었는데 이를 토대로 동고산성이 견훤의 왕궁터로 주장되었다. 이후 2020년까지 8차례의 크고 작은 발굴조사가 이루어져 3개의 문지와 13동의 건물지가 확인되었는데 건물지에서는 관(官)·천(天)·왕(王)자 명문와와 선문·무문·격자문 등의 후백제 평기와가 출토되어 후백제 때 매우 중요한 산성이었음이 밝혀지게 되었다. 하지만 동고산성은 승암산의 정상부에 입지하고 있으며 조사된 건물지에서 겨울 난방을 위한 구들시설이 확인되지 않았고 일상생활이 유지되었음을 입증할 만한 유물이 출토되지 않았다. 따라서 동고산성은 후백제 산성임은 부인할 수 없으나 산성의 축조 목적은 피난성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할 것 같다.
전라감영설은 2005년 전라북도청이 효자동의 신청사로 이전되면서 2007년과 2017년에 이루어진 발굴조사에서 통일신라시대 건물지, 담장, 부석시설과 보도시설, 배수로, 우물 등이 확인되었으며, 쌍사자무늬 전(磚)을 비롯하여 동고산성 출토품과 유사한 관(官)자와 전○(全○)자명의 기와가 출토된 것 등을 근거로 주장되었다. 하지만 전라감영터의 맨 아래층에서 확인된 건물지의 규모와 축조 양상, 출토유물 등을 통해 볼 때 통일신라시대 완산주(完山州)의 치소(治所)였을 가능성은 추론이 가능하지만 후백제 왕궁으로 확정하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중노송동 인봉리 일대가 후백제 왕궁터로 비정된 것은『전주부사』전주부경역연혁도의 후백제 도성벽으로 추정되는 고성벽 내에 자리하고 있고 전주정보문화산업진흥원-인보성체수도회-전주삼마교회-우성해오름아파트-기린봉아파트입구-전주제일고등학교로 이어지는 사다리꼴 형태의 추정 궁성벽이 확인되며, 동쪽에 위치하여 서쪽을 향하는 좌동향서(坐東向西)의 위치와 방향은 미륵신앙을 반영하고 있다는 점 등이다.
인봉리 일대에 대한 발굴조사는 2015년 국립전주박물관에서 처음으로 추진하였으며 이후 2017년 12월부터 2023년 5월까지 5차례 이루어졌다. 후백제 추정 궁성지의 북동벽에 해당되는 삼마교회 인근 부분에서는 토성의 축조에서 보이는 풍화암반토의 삭토와 함께 판축으로 쌓아올린 흔적이 확인되는 한편 크고 작은 주공(柱孔)이 열을 이루고 있는 상태로 드러나서 목책이나 망루와 같은 성벽시설의 존재 가능성도 추정해 볼 수 있게 되었다. 전주정보문화산업진흥원의 남쪽주차장 부지는 추정 궁성지의 남벽과 서벽이 교차하는 지점에 해당하는데 이 지역에 대한 조사에서는 풍화암반토를 다듬고 점토로 성토한 인위적인 흔적과 함께 궁성의 서벽 추정지 외곽에서 남북방향으로 흐르는 해자가 조사되었다. 해자의 바닥에는 모래와 점토, 잔자갈을 섞어 다진 점토 다짐층이 확인되며 회청색경질토기편, 후백제 기와편 등이 출토되었다. 또한 왕궁의 후원으로 추정되는 곳에서는 정원석이 어렵지 않게 목격되고 뻘흙과 함께 가공 석렬이 노출되고 있으며, 다량의 후백제 기와가 출토되고 있다.
/유철 전주문화유산연구원장
후백제 고도(古都) 복원 프로젝트
남고산성 내의 남고진터로 알려져 있는 계곡 주위에는 평탄대지와 석축과 우물 등이 남아있다. 평탄대지에서는 초석과 기단석 등의 석재와 궁(宮), 관(官)자가 새겨진 후백제 기와가 수습되고 있어 후백제 행궁지의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이 추정 행궁지의 남쪽에는 반월형의 갈대숲이 자리하는데 행궁과 관련된 연못의 가능성이 높다. 동고산성은 동문지·서문지·북문지와 함께 성 내부에서 13동 이상의 건물지가 확인되었다. 조사된 유구와 출토된 다양한 후백제 기와 등을 통해 볼 때 가장 확실한 후백제 산성으로 여겨진다.
기린봉의 동쪽인 아중 저수지 주변에서는 왕릉급의 무덤과 돌을 사용한 무덤들이 확인된다. 무릉마을 내 아중산장 뒷산의 정상부에 자리한 무릉고분은 외관상 산의 형태인데 마을 주민에 의하면 고분의 정상에 자리하고 있는 민묘를 이장하기 위해 땅을 팠을 때 다량의 숯이 깔려있었다고 전한다. 아마도 이 숯은 고분의 축조와 관련된 것으로도 추정되며, 봉분의 규모로 본다면 왕릉급에 해당한다.
견훤은 국찰(國刹)을 어디에 조성하였을까? 도성에서 멀지않은 곳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기린봉의 동쪽 기슭인 무릉마을 남쪽의 암석골 안쪽에는 비교적 넓고 평탄한 대지가 형성되어 있다. 예로부터 이 곳에 절이 있었다고 전하는데 최근까지는 민가가 있었다. 주변에서 소량의 와편들이 수습되는데 바로 이 사찰 터가 후백제의 원찰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고대 도성의 필수 요소로는 산성, 왕궁, 외곽성, 왕릉, 불교사찰 등을 든다. 익산은 왕궁〔왕궁리유적〕, 사찰〔미륵사지〕, 분묘〔무왕릉〕유적 등이 조사되어 백제 고도(古都)에 포함되었다. 이제 전주도 도성, 왕궁, 무덤, 사찰 등의 성격을 밝히기 위한 조사가 지속적으로 이루어져야 할 것이며 이를 통해‘고도 보존 및 육성에 관한 특별법’에 의거한 고도(古都)에 포함될 수 있도록 힘을 기울어야 할 것이다.
/유철 전주문화유산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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