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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백제 역사, 다시 일으키다-문화유산으로 본 후백제] (20)백제 계승의 상징, 후백제의 불상과 석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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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주 봉림사지 삼존불.

 

892년 무진주에서 자립한 견훤은 900년 전주로 천도한다. 그에 앞서 견훤은 ‘백제가 나라를 금마산에서 창건하여 600여 년이 되었는데, 나당연합군에 의해 멸망되었으니 내가 도읍을 전주에 정해 의자왕의 오랜 울분을 풀지 않을 수 있겠는가?’하고 일갈한다. 

견훤이 전주로 천도를 단행한 배경은 완산주 민중들의 호응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견훤이 의자왕의 울분을 풀겠다고 한 것으로 보아 그들은 망국(亡國) 백제에 대한 귀소의식(歸巢意識)이 강했던 것으로 보인다. 비록 무진주에서 자립하였으나,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지 못하였던 견훤은 비로소 완산주의 주민들에 의해 각성했다고 할 수 있겠다. 백제 계승을 공언한 것이다. 국호도 ‘백제’로 정한다. 그런 만큼, 백제를 연상시키는 상징물을 만들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완주 봉림사지(鳳林寺址) 삼존불과 익산 왕궁리(王宮里) 오층석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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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주 봉림사지 보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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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주 봉림사지 발굴조사 후 모습.

△후백제 교통로에 만든 백제 계승 상징물, 완주 봉림사지 삼존불

완주 봉림사지는 2015년부터 2017년까지 있었던 발굴조사로 다수의 건물지가 확인되었고, 나말여초 즉 후백제 때부터 조선에 이르는 기와·청자·분청사기·토기 조각이 수습되었다. 이곳에는 삼존불, 오층석탑, 석등 등이 있었는데, 봉림사지 석탑과 석등은 일제강점기에 군산의 시마타니[島谷] 농장으로 옮겨졌고, 석조삼존불은 1960년대에 전북대 박물관으로 옮겨졌다. 

이 가운데, 봉림사지 석조삼존불은 대좌와 광배를 모두 갖추고 있는 본존불과 좌·우협시보살로 이루어져 있다. 본존불은 전체적으로 아담하지만, 균형이 잘 잡혀있어 통일신라 후기 석불의 영향이 강하다. 안동지역 특정 불상의 형식도 보인다. 그것보다 주목되는 것은 광배(光背)다. 광배는 9세기 통일신라 불상 광배와 같은 형태와 구성을 보이기는 하지만 백제 불상인 익산 연동리(蓮洞里) 석불좌상 광배의 화불(化佛)과 유사한 고식(古式)의 화불을 조각하였다. 

본존불 좌우에 있는 보살상도 9세기 후반 불상의 특징을 보이면서도 백제 군수리사지(軍守里寺址) 출토 금동보살입상과 같은 6세기 후반 보살상의 천의와 같은 X자 천의를 걸치고 있다. 이로써 봉림사지 석조삼존불에 백제 불상을 연상시키는 요소들을 적극적으로 반영하고자 했음을 알 수 있다.

완주 봉림사지는 전주의 북동쪽인 완주군 고산면 읍내리에서 대둔산 쪽으로 2.4km 정도에 떨어진 완주 지역경제순환센터(구 삼기초등학교) 뒤편 인봉산 남쪽 줄기에 자리 잡고 있다. 현재 이곳 앞으로는 전주에서 대둔산을 거쳐 금산으로 가는 국도가 있다. 이 길은 후백제 때에도 중요한 교통로였다. 특히, 이 길은 삼국시대부터 신라에서 백제를 침공할 때 활용되었던 추풍령로(秋風嶺路)와 연결되어, 견훤의 출생지인 문경(聞慶)까지 연결된다. 즉 왕도 전주에서 후백제의 주요 전장인 경북 북부지역으로 가는 북방로(北方路)의 중요 거점에 조성된 사찰이 바로 봉림사였다. 그곳에 백제 불상의 특정 요소를 연상시키는 삼존불은 900년 전주로 천도할 때 견훤이 밝힌 백제 계승의 상징물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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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산 왕궁리 오층석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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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산 미륵사지 석탑.

△백제 계승 완수의 기념물, 익산 왕궁리 오층석탑

900년 전주로 수도를 옮긴 견훤은 첫 번째 군사 행동으로 901년 대야성을 공격한다. 대야성은 7세기 전반 백제와 신라 사이에 여러 차례 공방이 있었던 곳이다. 백제군은 드디어 642년에 대야성을 함락한다. 그런데, 당시의 대야성 성주는 후에 백제를 멸망시킨 태종무열왕이 된 김춘추(金春秋)의 사위 김품석(金品釋)이었다. 그때 김춘추의 사위와 딸은 자결한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김춘추는 당나라와 동맹을 추진한다. 즉, 660년 나당연합군의 백제 공략은 642년 사건에 대한 보복 전쟁 성격이 짙다. 백제사에서 642년의 대야성은 백제 멸망의 시발점이었다. 이를 알고 있던 견훤은 의자왕의 원한을 풀 수 있는 상징적인 공간으로 대야성을 지목하고, 천도 직후 최초의 군사 행동으로 그곳을 선택했을 것이다. 그러나 901년 공략은 물론 916년의 제2차 공격도 실패한다. 천신만고 끝에 드디어 920년 견훤은 대야성을 함락한다. 비로소 이때 의자왕은 원한을 풀 수 있게 된 것이다. 

 「갈양사(葛陽寺) 혜거국사비(惠居國師碑)」에 따르면, 920년 후백제가 대야성을 차지한 직후 922년 후백제는 ‘미륵사 개탑’을 거행한다. ‘미륵사 개탑’과 같은 국가적 의식을 견훤이 백제의 개국지로 지목한 금마산에서 국가적 의식을 거행했던 것은 후백제가 백제의 계승을 완수했음을 공식화하는 자리였다. 

920년 대야성 함락과 뒤이은 922년의 미륵사 개탑으로 의자왕의 원한을 풀겠다는 900년의 약속을 지킨 견훤은 익산을 중심으로 백제의 부활을 알리는 다양한 기념사업을 펼친다. 후백제 정권은 미륵사와 제석사 등 백제 때 만들어진 절들을 보수하는 한편, 백제의 왕궁터에 백제 석탑을 연상시키는 탑, 즉 익산 왕궁리 오층석탑을 세웠다. 

왕궁리 석탑이 만들어진 시기에 대해 여러 견해가 있지만, 백제 때 만들어졌다고 할 정도로 백제 석탑과 외형이 비슷하다. 그도 그럴 것이 얇고 넓으며 처마가 만나는 곳이 살짝 들려 있는 지붕돌은 영락없이 대표적인 백제 석탑이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과 같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단부의 구성과 결구 수법이 9세기 후반 문경과 상주 일대 단층 기단 석탑과 같아 백제 때의 석탑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특히, 9세기 말~10세기 초에 제작된 금동불이 기단에 봉안되었다는 점은 이 석탑이 후백제시기에 만들어졌다는 것을 알려준다. 후백제는 백제 때의 석탑 기술을 복원하지는 못하였지만, 백제의 옛 왕궁터에 백제 석탑을 연상시키는 특징들이 최대한 드러난 왕궁리 오층석탑을 세움으로써, 자신이 백제의 진정한 계승자이자 이제 백제가 부활했음을 대내외에 공표하고자 했을 것이다. 

/진정환 국립익산박물관 학예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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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환 국립익산박물관 학예연구실장.

 

고려 석탑과 불상에 영향을 끼친 후백제 불교미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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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 지당리 석불입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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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읍 은선리 삼층석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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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 죽산리 삼층석탑.

936년 백제 계승자로서 후삼국을 통일하고자 하였던 후백제의 꿈은 일장춘몽이 되었다. 그러나 고려시대에는 흔히 ‘백제계’로 일컬어지는 백제 복고양식(復古樣式) 석탑은 물론 석불이 조성되었다. 백제 석불의 영향이 강한 고려 석불 가운데 대표적인 것은 태안 마애불, 정읍 보화리 석불입상 등 백제 때 불상을 연상시키는 남원 지당리 석불입상이다.

백제 석탑과 외형이 비슷한 것들을 꼽자면, 익산과 가까운 군산 죽산리의 삼층석탑과 김제 귀신사 삼층석탑, 정읍 은선리 삼층석탑, 부여 장하리 삼층석탑, 서천 성북리 오층석탑, 공주 계룡산 청량사지(靑凉寺址) 오층석탑 등이 있다.

이러한 석탑은 신라의 일반적인 석탑에 비해 부재(部材)의 수가 많고 탑신에 비해 낮은 단층 기단이라는 공통점을 보인다. 이뿐만 아니라 귀기둥[隅柱]과 탱주(撑柱)에 목조건축물의 전형적인 형식인 ‘민흘림 수법’과 ‘안 쏠림 현상’이 적용된 점이나 옥개석은 넓고 얇으며 4장 혹은 8장으로 구성된 점 또한 같다.

앞서 열거한 대표적인 백제 복고양식 석탑이 세워진 곳은 백제의 불교문화가 꽃 피웠던 수도, 지방 거점도시, 지방사원이 있던 곳이다. 부여, 공주, 익산은 백제의 왕도였다. 은선리 삼층석탑은 백제의 중방(中方)이었던 고사부리성(古沙夫里城)과 인접한 곳에 있다. 성북리 오층석탑 인근에서는 백제의 기와 가마터와 절터[개복사지(開福寺址)]가 확인된 바 있다.

후삼국 시기의 혼란을 끝낸 고려는 불교로 사회를 통합하고자 하였다. 그런 만큼 많은 불사가 있었다. 그러나 이 시기 불사는 호장(戶長)을 중심으로 한 지역민들이 그 불사의 중심이 되었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그들의 성향이나 역사적 경험과 인식이 석탑과 불상 등 불교미술품에 고스란히 드러나게 되었다.

고려시대 옛 백제 땅에 살았던 사람들은 왜 백제 석탑을 연상시키는 석탑을 만들고 만들었을까. 백제 멸망 이후 신라에 예속된 백제의 옛터에 살던 사람들은 스스로 백제인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백제 멸망 후 신라에 대한 반감으로 비칠 우려가 있는 백제를 연상시키는 불상이나 석탑을 조성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차츰 백제에 대한 연고 의식이 사그라졌을 수도 있다. 그러나 백제 계승을 내세우며 등장한 후백제는 그들에게 백제에 대한 귀소의식을 다시금 샘솟게 했을 것이다. 그들은 고려가 들어선 이후에도 후백제가 그러했듯 백제 석탑을 모델로 지극정성 탑을 쌓고 또 쌓았을 것이다. 

/진정환 국립익산박물관 학예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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