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은 작품으로 만나지만, 작가와 공간으로도 접할 수 있다. 작가의 여운이 여전한 곳과 작품에 담긴 장소는 문학과 독자를 더욱 가깝고 다정하게 만나도록 해주기 때문이다. 전라북도는 예부터 지금까지 다른 시·도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빼어난 문학 작가와 작품을 냈다. 하지만, 문학 명소를 관광 자원화한 곳은 많지 않다. 다른 도시에서 어렵지 않게 추진하는 △시의 거리 △소설의 거리 △문학의 길(문학 벨트) △작가 ○○○의 길 등의 사업도 찾기 힘들다. 최명희문학관과 혼불기념사업회, 얘기보따리가 소설·수필·시·아동문학·평론·희곡에 담긴 전라북도 14개 시·군의 문학 콘텐츠와 문학 명소를 찾아 나섰다. 문학 자원을 전라북도의 자랑으로, 도민의 자부심으로 만들고, 문학과 관광의 연결 고리를 잇기 위해서다. 시작은 남원시·순창군·완주군·임실군. 4개 시·군의 문학 명소를 각 주제로 묶어 매주 2회 소개한다.
△지역의 힘을 쌓는 작가들
문학 작품에 담긴 문화유산들은 하나의 매개가 되어 감동을 줬고, 독자들의 발길을 책 밖으로 이끌었다. 장소가 가진 생명력. 김제 귀신사를 배경으로 한 양귀자의 소설 「숨은 꽃」과 완주 화암사를 소재로 한 안도현의 시 「화암사, 내 사랑」이 대표적인 예다. 한적하다 못해 외롭고 적막했던 귀신사와 화암사는 소설과 시에 나오면서 깊은 역사와 천연한 아름다움이 다시 드러났고, 세월에 부대껴 까매진 기둥은 사람들의 손때로 반질반질해졌다.
전라북도는 지극한 애정으로 지역 문화에 윤기를 더하고 있는 문학인이 많다. 곽진구·윤영근(남원), 김영·김유석(김제), 박형진·배귀선·이용범(부안), 장교철(순창), 이병수·이복명·전선자(무주), 조기호(전주), 허호석(진안) 등과 같이 자신의 탯줄이 묻힌 고향의 역사·문화 자원들을 시와 수필과 소설에 맛깔나게 담고 있는 시인과 작가들. 이연희는 산문집 『이연희의 무주기행』(인간과문학사·2021)에 적상산 안국사와 덕유산 무주구천동, 벼룻길과 금강변마실길 등의 역사와 생태, 따뜻한 이야기를 푸른 능선처럼 펼쳐놓았고, 박일만은 시집 『살어리랏다』(달아실·2021)에 장수 육십령 연작시 60여 편을 실었다.
우리가 특별한 눈길을 준 적 없는 곳에서 조용히 살다간 문학인과 그들의 작품을 찾아내 세상에 알리는 일은 그만큼 소중하다. 예향 아닌 곳이, 걸출한 작가 한 명쯤 내놓지 않은 고장이 얼마나 되겠는가마는 작가들이 지역의 자랑으로, 또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마음에 항상 자부심으로 남는 것은 보이지 않는 지역의 힘이다.
△전북 곳곳에 흔전만전한 작가들의 흔적
태조어진과 어진화사를 소재로 한 서철원의 장편소설 『왕의 초상』(다산책방·2015), 완판본과 각수를 소재로 한 장은영의 동화 『책 깎는 소년』(파란자전거·2018), 전주한지가 담긴 박월선의 동화 『닥나무 숲의 비밀』(청개구리·2011), 1987년 전주의 민주화운동을 그린 최형의 시집 『다시 푸른 겨울』(시와사회·2000), 정여립을 앞세운 홍석영의 장편소설 『소설 정여립』(범우·2008), 전주비빔밥을 소재로 한 김자연의 『개똥 할멈과 고루고루 밥』(살림어린이·2015)도 전북의 콘텐츠가 생생한 작품이다. 신영복의 수필 『감옥으로부터의 사색』(햇빛출판사·1996)의 모악산과 이병초의 시집 『밤비』(모아드림·2003)의 황방산, 이병천의 소설 『모래내 모래톱』(문학동네·1993)에 담긴 전주 사투리, 진동규의 시집 『아무렇지도 않게 맑은 날』(문학과지성사·1999)에 실린 남고사 종소리, 양귀자의 단편소설 「한계령」에 그려진 옛 전주역(현 전주시청)과 철길, 박성우의 시집 『가뜬한 잠』(창비·2007)의 전주한옥마을 풍경 역시 마찬가지다.
문학은 곧고 넓은 소통의 길이다. 전라북도 곳곳에 자리 잡은 시인과 작가들의 흔적은 그곳을 접한 사람들의 가슴을 채운다. 익산의 미륵사지를 거닐면 정양의 「결코 무너질 수 없는」과 정군수의 「미륵사지에서」를 시작으로 문신·문효치·박미숙·이동희·이승훈·이시연·임미성·채규판 등의 시가 떠오르고, 고창 선운사 일대는 송희의 「삼월 눈꽃」을 비롯해 김정웅·박남준·서영숙·서정춘·손택수·송기숙·유하·유휘상·장석남·정철훈 등의 시가 간질간질하다. 부안 내소사에 서면 김혜선·박형진·복효근·오인덕·우미자·장화자 등이, 진안 마이산에는 강신일·김정배·송희철·이소애·이운룡·오창렬·전병주·허소라 등이, 김제 망해사에는 김정경·박두규·이병욱·조미애 등이 생각난다.
바다로 다가앉고 싶어 하는 낙서전(樂西殿)과/ 절 마당까지 차오르는 파도/ 늙은 벚나무 몇 채가 단단히 동여매고 있다// 새들이 제 깃털 뽑아 둥지를 덥히는 이 저녁/ 동안거에 든 망해사를 흔들어 깨운다/ 그대 뒷모습에도 꽃 피우겠다/ 내 벼랑에도 봄을 머금겠다// 주저앉은 몸이 녹아내리자 나는/ 발자국 지우며 망해사를 빠져나온다
∥김정경의 「녹으면서 사라지는 – 망해사」 부분
문학 작품 속 공간은 독자에게 더 현실적인 문화적 사유를 경험케 한다. 특히, 작품에 문화재가 담겨 있다면 그 활용과 확산은 더 커진다. 우리의 세시풍속과 관혼상제, 음식, 노래 등 민속학·인류학적 기록들을 철저한 고증을 통해 생생하게 복원한 최명희의 소설 「혼불」이 대표적인 예다. 소설에는 남원시 사매면과 전주시 교동·다가동 일대의 문화자원이 풍성하다. 송기숙의 소설 「녹두장군」과 박태원의 소설 「갑오농민전쟁」에는 고창 선운사의 동불암지 마애여래좌상이 그려있다. 홍석영의 소설 「양곡 소세양의 빛과 사랑」을 펼치면 익산의 소세양신도비가 아련하고, 서권의 소설 「시골무사 이성계」를 읽으면 남원의 황산대첩비지가 자연스레 떠오른다. 김남곤의 시 「안국사에서」와 박두규의 시 「망해사에서」, 정도상의 소설 「실상사」에는 각각 무주 안국사의 극락전과 김제 망해사의 악서전, 남원 실상사의 풍경이 스며있다. 이병천의 소설 「사냥」에는 진안 매사냥이 있고, 윤미숙의 동화 「소리 공책의 비밀」은 임실필봉농악을 소재로 했다. 임영춘의 소설 「갯들」에는 군산·김제·익산의 근대문화유산들이 숱하다. 이런 작품들은 기존 낭송·낭독 프로그램에 문화재를 주제로 설정해 낭송·낭독 축제를 열 수 있고, 문화해설사의 설명 자료에 문학에 담긴 문화재의 모습을 더해 관광객과 함께 읽으며 친밀한 느낌을 나눌 수도 있다. 지자체와 협조를 통해 문화재 현장에 관련 문학 콘텐츠를 배치하거나 별도의 알림판을 설치해 많은 사람과 공유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문학으로 전라북도 재발견하기
스토리텔링이 대세가 된 지 오래다. 유·무형의 문화유산에 얽힌 이야기를 발굴해 관광객에게 전하는 관광자원 스토리텔링 마케팅의 필요성도 갈수록 높아진다. 그러나 꽤 근사한 스토리텔링 글은 이미 가까운 곳에 있다. 전라북도의 수많은 콘텐츠는 시·소설·수필·동시·동화·희곡 등 문학 작품으로 쓰여 있기 때문이다. 문학 작품을 이용한 전라북도 스토리텔링은 글쓰기의 자연스러운 확산으로 이어질 것이다. 그 확산은 지역에 새로운 생명을 얹히는 창조적 생산의 과정이며, 전라북도의 재발견이다. /최기우(극작가)
※이 글은 혼불기념사업회·최명희문학관·얘기보따리의 ‘전라북도 문학 명소를 찾아서Ⅰ: 남원시·완주군·임실군·순창군’ 사업의 일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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