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진강을 따라가며 보라
강은 물길이 아니다. 강은 흐르지 않는다. 강은 굽이치지 않는다. 그럼에도 강은 굽이쳐 흐르는 물길이어야 한다. 그것도 인간의 핏줄 속에서 굽이쳐 흐르는 숨길이어야 한다. 그래서 강은 뜨겁게 살아 있다. 섬진강은 전라도의 대동맥처럼 펄떡펄떡 살아서 섬진강을 지척에 두고 사는 사람들에게 흘러든다. 그 맑고 찰랑거리는 강물을 닮아 섬진강가 사람들은 살아간다. 그러므로 섬진강을 따라가며 보라. 그 사람들의 마음을. 그 사람들의 심정을. 그 사람들의 영혼을.
임실 사선대를 돌아가는 섬진강은 임실문학비와 조각공원을 기억한다. 임실문학비는 임실문인협회 기관지『임실문학』 제30호 발간을 기념하고, 협회와 협회원들의 문운과 단결, 애향을 기원하면서 세웠다. 지역의 문학이 이렇게 기념될 수 있는 것으로도 임실의 문학은 충실하다. 사선대 조각공원에는 임실이 고향인 가수 최갑석(1938∼2004)을 기리는 노래비도 있다. 최갑석은 1950년대 말부터 1960년대 말까지 활동하며 <태평양 마도로스>, <한 많은 유랑 나그네>, <평안도 사나이>, <정든 목포항>, <내 고향 찾아가면> 등을 불렀다. 문학의 기원이 노래였으니, 섬진강도 밤낮으로 노랫가락을 흥얼거리며 흘러가는지도 모른다.
사선대를 지나간 섬진강은 굽이치다가 옥정호에서 잠시 숨을 고른다. 옥정호가 내려다보이는 곳에 섬진강댐 물문화관이 있다. 이곳에는 전북문학관에서 기증한 400여 권의 도서가 비치되어 있어 문학의 향기에 젖어 들 수 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건 이 섬진강댐에서 흘러넘치는 섬진강이 한국문학의 중요한 자산이라는 사실이다. 이제 섬진강은 김용택 시인의 시 「섬진강」 연작의 영감이 되어 소리 없이 흘러간다. 진뫼에 이르면 “전라도 실핏줄 같은”(김용택, 「섬진강1」) 섬진강은 묵묵히 흘러가면서 많은 시적 영감을 안겨준다.
진뫼는 시인의 마을이자, 시인의 영혼이 흘러가는 섬진강 물줄기이다. 이곳에는 김용택 시인의 생가가 있고, 섬진강길을 따라 김용택 시인의 시비가 세워져 있다. 천천히 걸으면서 시비에 새겨진 「향기」, 「봄날」, 「사람들은 왜 모를까」, 「나무」, 「섬진강1」, 「섬진강3」 등을 읽다 보면 저절로 마음에 시가 찾아든다. 그런 날, 문득 하늘을 올려다보면 거기 푸른 하늘을 가르면서 한 줄기 강물이 흘러가는 모습도 보인다. 섬진강은 그렇게 이 땅의 골짜기와 하늘, 인간의 마음을 시심(詩心)처럼 유유히 흘러간다.
진뫼에는 김용택 시인만 있는 게 아니다. 진뫼에서 나고 자라 지금도 진뫼에서 밭을 일구는 김도수 시인은 시집 진뫼로 간다, 산문집 섬진강 진뫼밭에 사랑비 등을 통해 진뫼의 문학적 속살을 보여준다. 이렇듯 문학의 땅 진뫼를 떠난 섬진강은 순창 경계에 이르면 한 번 크게 뒤채며 부서진다. 장군목 유원지에 이른 섬진강은 마지막으로 임실을 돌아보며 하얗게 물보라를 남긴다. 그리고는 유유히 순창으로 접어든다. 임실에서는 임실의 하늘빛을 닮고 임실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던 섬진강이 순창에서는 또 순창의 바람에 몸을 맡기고 흘러가는 것이다.
△ ‘만경’창파에 시를 띄워라
임실 슬치에서 흘러내린 전주천과 모악산 자락을 타고 온 삼천이 합류하고, 완주 고산천과 소양천이 몸을 섞어 마침내 만경강 큰 물줄기를 이루는 곳이 삼례다. 그래서 삼례 사람들은 만경강을 일러 큰 하천이라는 뜻으로 한내라고 불렀다. 골짜기의 물줄기들이 삼례에서 비로소 강이 된 것이다. 이렇듯 삼례는 물줄기뿐만 아니라 원근의 사람들이 한바탕 크게 모여드는 땅이다. 갑오년 동학농민군이 한양으로 진격하기 위해 세를 규합했던 것도 마찬가지다.
물이 합쳐지고 사람이 보이는 삼례에 문학적 자산이 많은 것은 당연하다. 그 첫째 자리는 비비정이다. 비비정에서는 만경강 물줄기의 속살까지 볼 수 있다. 비비낙안이라는 말로 비비정의 풍경을 이야기해온 것을 봐도 비비정의 풍경은 알 수 있다. 하지만 서늘한 가을 오후, 비비정에 올라 시를 읽는 모습은 비비낙안에 견줄만하지 않을까? “서로의 가슴속에 저 달을 품어”보자고 했던 김은숙 시인의 시 「비비정에 달 뜨거든」처럼, 비비정은 우리 가슴에 문학이라는 따뜻한 마음을 품게 한다.
만경강이 시작되는 삼례에는 문학적으로 가볼 만한 곳이 많다. 옛 삼례역을 중심으로 삼례문화예술촌이 형성되어 있다. 이곳에는 ‘책 박물관’을 비롯하여 ‘그림책도서관’ 등이 자리하고 있는데, 일제강점기 미곡 수탈을 위해 지었던 창고를 개조한 공간에 자리한다. 당시의 수탈상을 그린 조정래의 대하소설 아리랑이나, 삼례 들녘과 호남평야에서 수탈한 미곡을 야적했던 군산항의 미두장을 다룬 채만식의 탁류 같은 소설을 통해 삼례문화예술촌의 옛 모습을 상상해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삼례문화예술촌은 그 시절의 이야기가 아직 발굴되지 않은 문학적 자산이라고 할 수 있다.
삼례시장이나 삼례역도 많은 시인에게 문학적 영감을 불어넣었다. 안도현 시인이 삼례역의 기차를 시적 대상으로 삼아 “삼례역에서 기차가 운다, 뽕뽕, 하고 운다”라고 시 「기차」에서 이야기한 적 있다. 송하선 시인은 삼례시장의 풍경을 시로 옮기기도 했다. “삼례의 장날/ 그대 장터에 가거든 보아라.// 조선옷 입은 마음으로”라고 「삼례의 장날」에서 읊었을 때, ‘조선옷 입은 마음’이 어떤 건지 삼례시장에 가서 확인하고 싶어지기도 했다.
이렇게 만경강은 삼례의 모든 것을 끌어안고 척왜척화 척왜척화 밤낮으로 흘러간다. 한 번 흘러간 강물은 다시 돌아올 수 없다는 사실이 마치 우리 인간의 역사와 같다. 물결이 흘러간 뒷자리에 새로운 물살이 밀고 오는 것도 마찬가지다. 뒷강물이 앞강물을 밀고, 앞강물이 뒷강물에게 자리를 내어주는 이 자연의 이치를 만경강에서 확인하면서, 사람 사는 풍경이 만경강에서 한 치도 어긋나지 않는다는 걸 새삼 느낀다. 이 강물 위에 달이 뜨면 달빛 아래 만경강의 시가 환하게 반짝거릴 것만 같다.
△산자락마다 시인의 마을이 있다
누군가 말한 적 있다. 한 나라의 산 개수와 그 나라 시인의 숫자가 같다고. 그렇게 본다면 우리나라는 시인의 나라다. 마을마다 크고 작은 산이 무더기로 솟아있고, 산비탈마다 시인의 고향 아닌 자리가 없다. 완주, 임실, 남원, 순창에도 시인의 수만큼 산이 우뚝하다. 그리하여 산이 시인을 품고, 시인은 그 산을 노래한다. 이렇게 산은 문학의 고향이자 문학의 대상이다.
완주 모악산은 도심에서 가까워 계절을 가리지 않고 사람들의 발길이 잦다. 김해강 시인은 “힘 있게 뻗은 네 기슭에서 내 몸이 났”다고 시 「오오 나의 모악산아」에서 적었다. 바로 그 기슭에서 오랫동안 깃들어 살았던 박남준 시인은 모악산의 풍경을 글로 여러 차례 옮겼다. “모악산방, 모악산 그 산자락 속의 외딴집으로 돌아가는 길가에는 초여름의 숲은 무성히도 우거져서 벌써 좁은 산길을 덮고 키 작은 내 그림자를 가리워 가더군요.”라고 산문집 작고 가벼워질 때까지에서 이야기한다. 시인의 말대로, 모악산을 찾는 사람들은 ‘좁은 산길’을 걸어 자기만의 외딴집을 찾아가는 길인지 모른다.
모악산에서 외딴집을 찾았다면, 순창 회문산을 오르는 길은 역사의 ‘비트’를 찾아가는 여정이 될 것이다. 현대사의 비극을 고스란히 품고도 끝내 침묵하는 회문산이다. 그러므로 회문산은 우리 현대사가 꽁꽁 숨어 있는 커다란 비트가 아닐까? 시인 권진희는 시 「회문산1」에서 이렇게 말한다. “산과 산이 밀물처럼 다가오는/ 회문산 정상에 서서 보라”고. 과연 그 정상에 서면 산과 산이 어깨를 겯고 힘차게 우뚝 솟는 것이 보인다. 그러나 때로 그 골짜기가 짙은 그늘에 잠기기도 한다. 그래서 이렇게 또 말해보고 싶다. 산자락이 슬그머니 감추고 있는 회문산 골짜기에 들어가 보라. 그곳에서 마지막으로 올려다보았을 우리 역사의 하늘과 그 하늘을 올려다보는 작고 동그란, 그렇지만 하늘보다 깊었던 한 인간의 눈을 보라고. 문학은 바로 그 눈에 비친 우리들의 자화상이 아닐까?
강천산은 착하고 부끄럼을 타는 산이다. 그래서 강천산을 노래한 시에서는 연정이 무럭무럭 피어난다. 김용택 시인이 “유월이 오면/ 강천산으로 때동나무 꽃 보러 갈라네/ 때동나무 하얀 꽃들이/ 작은 초롱불처럼 불을 밝히면/ 환한 때동나무 아래 나는 들라네”라고 시 「강천산에 갈라네」에서 노래한 것처럼, 강천산은 연심과 시심으로 가득한 사람들이 찾는다. 설임수 시인은 강천사의 단풍을 두고 “두견이 가슴앓이/ 진홍빛 바다”라고 시 「강천사 단풍부」에서 적었다. 시인의 시처럼, 가을 강천산은 누군가의 가슴앓이로 온통 진홍빛이다.
이목윤 시인은 완주 대둔산을 두고 “저 아름다이 꽃들이 피워내고/ 봄 갈 여름없이 구름이 멈추어섬은/ 전라향병의 넋”이라고 했다. 그가 시 「대둔산」에서 노래한 것은 대둔산의 첩첩한 산자락과 기암괴석이 이 땅의 역사라는 사실을 일깨우기 위해서였다. 조미애 시인도 “깜깜한 어둠을 가르며/ 대둔산의 힘진 소리”를 시로 적었다. 대둔산은 이렇게 전라북도의 역사적 순간들을 온몸으로 기록하는 산이다. 임진왜란 당시 이치전투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었던 대둔산이 갑오년에는 동학농민혁명군 최후의 보루였음은 당연하다. 우리의 서사문학은 이런 순간들을 피의 역사로 형상화한다.
이렇듯 산자락마다 살아온 내력이 있고, 투쟁의 역사가 있다. 마찬가지로 산자락마다 들려줄 이야기가 있고, 애끓는 가슴앓이가 있다. 이것들이 우리의 시가 되고 소설이 되었다. 그러므로 산이 그냥 산이 아니라 시라는 것. 산이 그냥 산이 아니라 문학이라는 것. 따라서 눈을 들어 산을 올려다볼 때마다 우리는 시를 읽고 문학을 경험하게 된다. 마음에 산 하나 들어 앉히는 일이 문학에 빠져드는 일이 된다. /문신(문학평론가, 우석대 문창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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