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멋과 맛을 찾아 떠는 가족 여행
어릴 때 자주 헤엄을 치러 갔던 계곡은 물귀신이 발목을 잡아챈다는 시퍼런 물속을 겁도 없이 뛰어든 나의 어린 시절의 여름을 풍성하게 했다. 그날의 풍경과 감정을 찾아 지리산 뱀사골을 찾아가 본다.
뱀사골 계곡은 깊고 온전하다. 이곳에서 쓰러져 간 수많은 청춘의 피로 붉게 물든 산천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시치미를 떼고 있지만 실은 뱀사골 계곡 돌 틈 사이사이에 처연하고 슬픈 이야기가 숨어 있다. 때로는 돌돌돌, 때로는 조졸조졸 흐르는 소리는 죽어간 이들이 남긴 모스 신호이다. 생생한 현장의 목소리를 가족과 함께 듣는 뜻 깊은 시간을 갖자.
복효근 시인의「환상적 탁족」을 읊는 것도 뱀사골을 즐기는 방법이다. ‘한여름 염천을 피해/ 지리산 뱀사골 계곡에 발을 담갔다’는 시인이 글과 함께 철쭉이 흐드러지게 피는 지리산 바래봉도 추천한다. 하늘이 아닌 땅에 물든 노을을 감상하는 것으로 한 해의 출발을 선언하는 건 어떨까. 호남의 소금강이라 불리는 순창 강천산은 김용택 시인이 그토록 보고 싶어서 하는 진달래나무와 때동나무, 산딸나무를 볼 수 있는 곳이다.
산행이 힘든 가족은 조금 덜 힘들고 신나는 여행지를 추천한다. 예로부터 고추장으로 유명하한 순창장류박물관을 찾아가 보자. 강천산 단풍보다 진하고 갓난아기 볼처럼 윤기가 자르르 도는 고추장. 양병호 시인의 시 「순창 고추장」에 ‘매콤 쏘면서도 달콤하게 앵기는 알싸한 그 맛’이라는 문구를 읽으면 입안에 저절로 침이 고인다. 장류박물관은 고추장 만드는 체험도 있다. 자녀와 함께 체험을 하면 하나의 먹거리가 식탁에 올라오기까지의 과정을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저절로 터득이 된다.
임실치즈역사문화관으로 가면 벨기에 출신 지정환 신부의 치즈 이야기와 치즈 만들기 체험을 동시에 할 수 있다. 수많은 실패를 거듭한 끝에 만들어진 임실치즈의 역사를 통해 꿈의 완성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임을 깨닫게 된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는 빤한 명언이 너무나 잘 어울리는 이곳에서 가족끼리 치즈를 만들며 서로를 더욱 유연한 태도로 바라봐도 좋다.
순창 오일장과 삼례시장도 가족과 함께 가면 좋다. 카트의 크기를 욕망하기보다 까맣게 그을린 시골 할머니가 건넨 시금치 한 다발에 깃든 자연의 수고로움을 욕망하자. 시장이란 공간은 생산자와 판매자 사이에 오가는 돈보다 정이 먼저인 곳이다. 덤과 에누리라는 밀고 당기는 행위 속에서 정이 싹튼다. 그 과정에서 설득과 이해, 소통을 저절로 배우게 된다. 사진작가 이흥재와 시인 김용택이 함께 낸 사진에세이집 『그리운 장날』처럼 순창 오일장을 배경으로 생생한 삶의 현장을 찍어보는 재미를 느끼는 것도 방법이다. 엄마 손을 잡고 시장에 갔다가 꽈배기 튀김 하나에 행복했던 그 시절의 나와 우리가 그리우면 삼례시장도 좋다. ‘우리의 얼굴을’ ‘모두 다 만나’는 삼례시장이기 때문이다.
△사랑을 찾아서 떠나는 가족 여행
섬진강을 끼고 삶을 꾸리는 마을은 부지기수다. 그중 진뫼마을은 시인의 마을이다. 이 마을에는 시인이 많다. 그중 부모를 향한 지고지순한 사랑을 노래하는 김도수 시인이 있다. 시인의 자택과 가까운 곳에 흔하디흔한 고추밭이 있다. 그 밭 가장자리에 자그마한 돌비석은 이름하여 ‘사랑비’다.
사랑비 앞에는 ‘월곡양반 월곡댁/ 손발톱 속에 낀 흙/ 마당에 뿌려져/ 일곱 자식 밟고 살았네’ 라고 새겨졌고, 뒤에는 ‘어머니 아버지, 가난했지만 참으로 행복했습니다.’라고 쓰여 있다. 김도수 시인의 사모곡은 『섬진강 진뫼밭에 사랑비』(전라도닷컴·2015)에도 잘 드러나 있다. 이곳에 오면 사랑비에 적힌 문구를 소리 내어 읽어보자. 부모를 바라보는 자녀의 눈빛이 사뭇 달라짐을 느낄 것이다.
부부의 사랑을 더욱 단단하게 하고 싶다면 남원 최대의 사찰이었던 만복사로 가보자. 만복사를 배경으로 한 「만복사저포기」의 주인공 양생을 만나면 부부간의 신뢰가 쑥 올라간다. 사랑보다 더 깊은 믿음이 둘 사이를 단단하게 한다.
부부의 정을 더 깊게 느끼고 싶다면 남원 유천마을 김삼의당 시비가 있는 곳으로 가자. 김삼의당은 가난한 살림을 꾸리는 여염집 여인으로 남편과 아이들, 시집살이와 같은 일상 속 크고 작은 일들과 자연의 멋을 소재로 260여 편의 한시와 산문을 남겼다. 조선 시대 여인 중 가장 많은 작품을 남긴 김삼의당은 남편 하림과 가문의 사정과 글재주가 비슷해 천상배필이라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함께 시를 쓰고 문학을 이야기하는 부부의 애정도는 글로써 꽃 피운다.
△어린이의 눈높이에 맞춘 가족 여행
어린이가 있는 가족은 어디를 가든 좋다. 아이들 눈에는 매양 모든 것이 새롭고 신기한 것투성일 테니. 우선 동화 속 배경지로 가자. 「콩쥐팥쥐」이야기가 살아 숨 쉬는 이서면 앵곡마을에는 담벼락이 그림책이다. 담벼락을 한 장 한 장 넘기다 보면 아이는 어느새 콩쥐의 사정에 가슴 졸이고 팥쥐 엄마와 팥쥐의 못된 행동에 주먹을 불끈 쥔다. 실제 콩쥐가 살았음 직한 마을에 오면 착하게 살면 복을 받고 나쁘게 살면 벌을 받는다는 교훈을 굳이 입 아프게 말하지 않아도 된다. 이것이 배경지가 주는 힘이다. 어찌어찌 살아야 한다는 잔소리가 필요 없다. 현장이 곧 가르침이다.
오수의견공원도 어린이에게 문학의 힘을 보여주는 현장이다. 충실한 개가 주인을 살리기 위해 온몸에 물을 적셔 불을 끈 의견의 동상을 세워놓은 이곳에 오면 진정한 희생을 저절로 생각하게 된다. 작은 희생부터 큰 희생까지 타인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는 알찬 시간을 통해 책에서 얻는 지식보다 더 값진 지식과 지혜를 얻을 수 있다.
동화 속에서 나와 이제는 슬렁슬렁 산책하기 좋은 완주 봉동 상장기공원으로 가자. 과거에 이곳은 장마철에 제방이 자주 무너져 인명피해가 컸다. 제방을 재정비하고 강물의 범람으로 죽은 이들을 위로하기 위해 매해 당산제를 지낸 전통이 오늘날까지 이어진다.
오래전 당산제에서는 씨름대회를 열어 축제의 분위기를 한껏 올리는데 이때 아이부터 어른까지 참여연령이 다양했단다. 동학농민혁명 농민군을 소재로 한 최기우의 희곡 「들꽃상여」에 봉동의 소년장사 이복룡과 봉동씨름에 얽힌 여러 이야기가 고스란히 담겼다. 씨름터는 봉동 상장기공원. 200년 전통이 살아 있는 봉동씨름의 현장이다. 당산제에 맞춰 이곳에 온다면 우리 전통 스포츠인 씨름에 관심도 두고 씨름대회에 참가해서 아름다운 추억을 만들면 더 없이 좋다.
△강바람을 따라 떠나는 가족 여행
강을 따라가는 여행은 어떨까? 임실 옥정호를 따라 달리면 일상의 노고를 잠시 잊게 된다. 옥정호가 내려다보는 국사봉에 오르면 더 자세하고 깊은 감흥을 얻을 수 있다. 국사봉 전망대에 서면 산 중턱을 따라 물을 가둔 옥정호수도 만나고 붕어섬도 조우한다. 호수를 가로지르는 운암대교와 최근 만들어진 출렁다리 또한 볼거리다.
옥정호는 수몰지다. 저 호수 바닥에는 아직도 납작 엎드린 초가지붕과 땅따먹기, 자치기를 하며 놀았던 공터가 아이들을 기다리는지도 모른다. 그리움은 붕어섬으로 남아 하늘에 작은 구름을 띄운다. 떠나간 이들을 그리는 붕어섬의 노래는 구름을 따라가서 비가 되고 눈이 되어 곳곳에 기별을 보낸다. 차를 세우고 시골 버스정류장에 앉아 박성우 시인의 「자두나무 정류장」을 읽어보자. 비가 오고 눈이 오고 달이 오고 별이 오는 그곳에서 시를 읽으면 버스를 타고 내리는 비와 눈과 달과 별을 만날 수 있을지 누가 아는가. 기별 없이 오는 것은 더없이 반가우니 말이다. 가지각색으로 오는 그것들을 맞이하러 가는 운암호 여행은 어느 곳에 발을 디뎌도 후회가 없다. 기별 없이 딛는 발은 모든 것에게 기쁨이며 환호를 선물한다.
이제 문학적 감성에 젖었으니 섬진강을 따라 달려보자. 열린 창으로 팔을 뻗어 환호성을 질러보자. 스트레스 푸는 방법은 특별하지 않다. 시원한 강바람을 맞으며 털어내면 된다. 강이 담고 있는 역사와 숱한 이들의 눈물 나는 이야기를 함께 하는 것만으로 가족은 공유할 게 많아져서 더 단단한 관계가 된다. 가족이 별거 있나. 함께 자고, 먹고, 한 공간에서 호흡하며 가끔 여행을 통해 조금 솟았던 불신의 담을 슬쩍 무너뜨리자. 그 담은 너무 허성해서 언제 무너졌는지 모를 만큼 무너져 사라지고 없다.
가족이 있다는 건 든든한 배경을 둔 것과 같다. 말없이 나를 지지해주는 가족과 함께 하는 문학 명소체험은 오늘의 우리를 내일의 우리로 건너게 하는 징검다리 역할을 한다. 주저 말고 문학 명소를 따라 다정한 대화를 나누어보자. /김근혜(동화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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