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원시·순창군·완주군·임실군에는 문학과 미술이 자연스럽게 어울린 곳이 여럿이다. 남원시립김병종미술관의 ‘김병종’은 화가이면서 극작가이고, 순창군 박덕은미술관의 ‘박덕은’은 화가이면서 시인이다. 순창 구미마을에 터 내린 송만규 화백은 섬진강을 화폭과 수필집에 담았고, 사진작가 이흥재는 순창과 임실의 오일장에서 만난 사람과 풍경을 사진수필집에 담았다. 광한루원 춘향사당은 춘향의 영정을 보관한 곳이며, 완주 그림책미술관과 삼례문화예술촌은 문학과 미술이 공존한다.
△그림에 자연스레 스민 깊은 사유, 남원시립김병종미술관
김병종은 한국화의 현대화와 세계화를 이끄는 대한민국 대표 화가지만, 1980년 동아일보와 중앙일보 신춘문예에서 각각 미술평론과 희곡 부문에 당선돼 등단했으며, 30여 권이 넘는 평론집과 산문집을 출간한 문학인이다.
특히, 예술기행 산문의 백미로 꼽히는『화첩기행』(문학동네·2014) 연작(총 5권)은 시공간을 넘어 문화예술의 어제와 오늘을 만날 수 있다. 전국 각지의 인문정신과 예술혼이 씨줄과 날줄로 아름답게 수놓아 있으며, 모로코·튀니지·알제리·이집트 등 북아프리카의 독특한 색채와 예술성에 대한 섬세한 사유도 만날 수 있다. 전북과 관련된 이야기는 1권 ‘남도 산천에 울려 퍼지는 예의 노래’에 있다. △이매창과 부안―이화우 흩날릴 제 ‘매창뜸’에 서서 △이삼만과 전주―이 먹 갈아 바람과 물처럼 쓸 수만 있다면 △강도근과 남원―동편제왕이 쉰 소리로 전하는 사랑노래 △조금앵과 남원―달이 뜬다, 북을 울려라 △최명희와 남원―육신을 허물고 혼불로 타오른 푸른 넋 최명희 등이다.
나는 지금 소설의 무대가 된 남원의 혼불마을을 찾아갑니다. 푸른 들길로 철로가 이어진 작은 서도역을 지나자 풍악산 날줄기에 매어 달린 것 같은 노봉마을이 보입니다. 오십 년 전만 해도 밤이면 산을 건너가는 늑대 울음이 예사로이 들리곤 했다는 곳입니다. 소설 속에서처럼 슬픈 근친 간의 사랑이 일어났을 법도 하게 50여 호의 마을은 겹겹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김병종의 인문기행서『화첩기행』
작가는 개정판 서문에 ‘돌아보니 내 40대와 50대를 이 책과 떼어놓고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가 되었다. 문학이라는 가지 못한 또하나의 길에 대한 그리움과 회오 같은 것이 일종의 해원처럼 제3의 형태로 발화했던 것이 아닌가 싶다.’라며 ‘단어 하나 문장 한 줄을 놓고 밤이 이슥하도록 고치고 또 고치던 시간은 나를 다시 문학청년 시절로 되돌려 놓았고 그 황홀한 기억이야말로 이 일을 계속하게 한 동력이 아니었을까 싶다.’라고 써 놓았다.
『화첩기행』 연작을 읽고 미술관에서 김병종의 미술작품을 만나면 그림마다 자연스레 스민 그의 깊은 사유가 담긴 문장이 함께 떠오르며 가슴이 찬다.
△섬진강 들꽃에게 말을 거는 곳, 구미마을
섬진강 물길을 수없이 걸으며 자연의 아름다움과 물이 건네는 곡절을 한지에 수묵으로 담고 있는 송만규 화백. 1980년대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인간미를 좇던 그가 섬진강을 찾은 것은 1992년이다. 작가는 “정월 대보름날 시인 김용택 형네 집에 들러 어머니가 해 주신 밤밥을 먹고 천담, 구담, 장구목, 구미를 거쳐 섬진강 상류를 걸었다.”라면서 “아마도 그때 이 강이 내 가슴에 들어온 듯하다.”라고 말했다. 2002년부터는 섬진강이 내려다보이는 순창 무량산 자락 구미마을에 둥지를 틀고 강과 그 어귀의 풍경을 그리고 있다.
17번 국도를 따라가 본다. 거기서 만나는 섬진강은 늘 조잘조잘 낮게 흐른다. 강물이 흐르고 흘러 이르는 그 길에 한없이 포근한 어머니 같은 산, 지리산이 있다. 지리산 품 안의 산길 야트막한 언덕에는 서너 포기 붓꽃이 피어있다. 보랏빛 비녀를 꽂은 듯 고풍스런 자태다.
∥송만규의『섬진강, 들꽃에게 말을 걸다』
송만규의 그림은 웅장하다. 특히, 21m 길이의 <새벽 강>과 24m 길이의 <언 강>은 수묵의 절정을 보여준다. 골짜기와 골짜기를 굽이굽이 낮게 흐르며 뭇 생명을 살리고, 사람을 깃들게 한다. 스스로 풍광과 자연을 만드는 강물의 행행지도(行行之道)를 겸애 정신이라 사유하며 자신도 강물이 된다.
풀 한 포기, 돌멩이 한 개까지 담고 싶은 마음에 강가를 살피다 발견한 것이 굽이쳐 흐르는 강물 주위에 소담히 피어난 들꽃이다. 이름도 알 수 없는 새끼손톱만 한 꽃들. 작고 여린 생김새의 꽃들이 온갖 것에 밟히고 거센 바람에 휘둘려도 봄이 되면 어김없이 싹을 틔우는 모습에서 고귀한 생명력을 느꼈다. 척박한 시멘트 틈에서도 피어나는 그 생명이 민중의 정신과도 닮았다고 생각했다. 자연스럽게 이들을 화폭에 옮겼다. 꽃의 생김새, 학명, 꽃말 등에 영감을 얻어 생각나는 단어와 문장은 글로 옮겼다. 좁쌀만 한 꽃들이 닥지닥지 매달린 모양의 들꽃, 꽃다지를 보면서 어디에서도 함께 몸 비비며 사는 우리네 삶을 떠올렸다. 거친 들판에서도 꼿꼿하게 꽃을 피우는 노란 민들레는 독재에 항거하고 자기 몸을 희생해 이 땅에 민주주의 씨를 뿌린 열사들과 같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쌓인 그림과 글 101편은『섬진강, 들꽃에게 말을 걸다』(비앤씨월드·2016)에 담겼다. 2022년에는 섬진강 전체를 높은 곳에서 보며 잡아낸 여덟 장면의 사계를 서른두 장의 대형 화폭에 담은 그림과 강의 덕성과 품성을 느끼며 적은 작가의 사유를『강의 사상』(거름·2022)에 담았다. 부제는 ‘다시 붓질, 겸애의 순간들_ 섬진팔경’이다. 두 권의 책 모두 여리면서도 강하고, 웅장하면서도 소박한 섬진강의 심성을 보여준다. 섬진강과 더불어 사는 마을들의 속내를 닮았다. /최기우(극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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