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알려져 있다시피 전주는 조선을 개국한 이성계의 고조부가 영흥으로 근거지를 옮기기 전까지 그의 조상들이 대대로 살았던 조선왕실의 본향이다. 조선 개국 후 왕실의 본향으로서 달라진 위상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태조의 어진을 모신 경기전과 실록을 보관하기 위한 사고(史庫)의 설치를 들 수 있다.
조선은 고려와는 달리 오직 개국조인 태조의 어진만을 단독으로 모시는 별도의 진전을 마련하였다. 진전은 당시 주요 도시였던 경주와 평양, 태조가 태어나고 이후 정치적 터를 닦았던 영흥과 개경, 그리고 왕실의 본향인 전주에 세워졌다. 전주에는 전주부의 요청에 따라 1410년 경기전을 세우고 경주 집경전에 모셔진 어진을 모사하여 봉안하였다. 또한 1439년 조선왕조의 주요 기록물인 실록을 보관할 사고가 전주에도 설치되었다. 조선 초 사고는 충주 한 곳에만 설치되었는데, 위험을 분산하고 안전하게 보전하기 위해 도성 내 춘추관과 전주, 성주에 추가로 설치하고 실록을 각기 1부씩 보관하였다.
각지에 세워진 진전과 사고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의 전란을 거치면서 모셔진 어진, 실록과 함께 불타 사라지는 피해를 보았다. 태조어진은 영흥의 준원전과 전주의 경기전에 모셔진 어진만이 마지막까지 보전되었고, 지금은 1872년 새로 옮겨 그린 경기전의 어진만이 온전하게 남아있다. 실록은 임진왜란 당시 모두 불타 사라지고 전주사고본만 피해를 면하였다. 이후 전주사고본을 원본으로 삼아 새로 출판하여 춘추관과 강화도 마니산, 봉화 태백산, 평창 오대산, 영변 묘향산에 사고를 마련하여 봉안하였다. 이때 전주사고에 봉안되어 있던 원본은 마니산 사고에 보관하였다. 병자호란 뒤 마니산 사고를 정족산으로, 묘향산 사고는 무주 적상산으로 옮겼다. 일제강점기에 정족산과 태백산 사고에 보관되어 있던 실록은 조선총독부와 경성제국대학을 거쳐 광복 후에는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소장되었고, 태백산사고본은 1984년 다시 부산의 국가기록원으로 이관하였다. 오대산사고본은 동경제국대학으로 반출되었다가 1923년 관동대지진 당시 대부분 불타 없어졌고, 남아있던 일부가 2006년 국내로 반환되었다. 적상산사고본은 구황궁 장서각으로 이관되었다가 6.25 전쟁 당시 북한이 가져간 것으로 전한다.
태조어진과 조선왕조실록의 보전 과정에서 알 수 있는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전주에 보관되어 있던 어진과 실록만이 어지러운 전란의 와중에도 온전히 지켜졌다는 점이다. 물론 이는 조선왕실의 본향이라는 자부심과 책임감을 바탕으로 이를 지키고자 한 지역민과 관리들의 노고가 있었기 때문이다. 힘들게 지켜낸 태조어진과 조선왕조실록은 일찍이 국보로 지정되었고, 특히 조선왕조실록은 다양하고 풍부한 내용과 높은 신뢰성, 역사적 가치 등을 인정받아 1997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이처럼 가치를 따질 수 없을 만큼 뛰어난 보물을 지켜낸 저력에 자부심을 느끼게 된다. 우리 지역에는 전통문화의 고장답게 다양하고 풍부한 문화유산이 남아있고, 어려운 여건에서도 이를 제대로 이어가고자 부단히 노력하고 있다. 일찍부터 문화의 가치와 소중함을 깨닫고 있는 곳이기에, 또한 태조어진과 조선왕조실록을 지켜냈던 저력이 있기에 지역의 문화자산을 훌륭하게 계승할 뿐만 아니라 더욱 발전시켜 세계적 수준으로 성장시키리라 기대하게 된다. 국립전주박물관도 맡겨진 역할을 다하며 힘을 보태 기여하고자 한다.
/박경도 국립전주박물관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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