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시조계의 큰 어른 가람 이병기 생가
사람은 어느 한 분야에 능하기도 쉽지 않다. 그러나 여러 분야에서 커다란 발자취를 남겼을지라도 관심을 갖지 않으면 잊히기 쉽다. 바로 가람 이병기 선생이 그런 분 가운데 한 분이다. 가람은 당신의 큰 업적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평가받지 못해 진흙에 뒤덮인 보석 같아 못내 아쉽다.▲가람 생가 가는 길익산시 금마면에서 1번 국도를 따라서 연무대 방향으로 가면 익산시 여산면이다. 4차선 신작로를 따라 여산면에 들어서면 얼마 가지 않아 이정표가 나온다. 또 여산면 초입에서 2차선 구도로인 '가람로'를 따라 가면 '가람1길'이라는 표지판이 나오는데 이 길로 가면 된다.마을 이름은 진사동인데 '참숯골'이었다가 '참실골'로 바뀌고 진사동(眞絲洞)으로 다시 바뀌었다. 마을 입구 '진사교' 양쪽 난간에는 벽화가 그려져 있는데 한가운데에 '시조의 마을'이란 글씨를 써 놓았다.▲생가와 그 주변생가 앞에는 널따란 주차장이 있다. 이 주차장을 볼 때면 이곳에 백련을 심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가람문선'에 보면 생가 앞 논 반 마지기에다가 백련을 심은 이야기가 나온다. 할아버지가 심은 백련이 죽어서 다시 여러 차례 시행착오를 겪은 끝에 백련을 가꾸었다고 한다.최근에는 여러 곳에서 백련을 관광 상품화하는데 중국에서 백련을 처음으로 들여온 이가 익산 사람으로 조선 선조 때 문인인 표옹 송영구라고 한다. 아무런 역사성도 없는 데다가 백련을 가꾸는 것보다 백련과 깊은 인연이 있는 익산에 백련을 가꾸어야 한다. 주차장을 콘크리트를 거둬 내고 백련을 심을 날이 오기 바란다.가람 생가는 지금 보수공사가 마무리 단계에 있다. 처음에는 이엉만 다시 올리고, 담장 보수하고, 배수로만 내려고 계획했는데, 도리까지 썩어서 공사가 더 커졌다고 한다.가람 생가에 들어서면 먼저 네모난 작은 못이 나온다. 가람 생가에서 만난 김장환씨의 증언에 따르면 2004년 무렵에 주차장을 만들면서 못도 만들었다고 한다. 본래는 폭 1미터 정도의 작은 못이 울타리 안 마당 남쪽에 있었다고 한다. 못가에는 개나리, 산수유나무, 배롱나무 들이 어울려 있는데, 얼마 전까지만 해도 배롱나무 꽃이 앞서 맞이했다.그리고 현재의 못 남쪽 끝에는 계일정(誡溢亭)이라는 정자가 있었다고 한다. '지나치는 것을 경계하라'는 의미이므로 항상 분수를 지키고자 노력했을 고인들에게 새삼 머리가 수그린다. 언젠가는 이 정자도 복원해야 한다.과거에는 부속건물이 더 있었지만 지금은 정자, 사랑채, 안채, 그리고 곳간채 한 동이 있다. 모두 초가로 화려하지 않아 소박하기 그지없다. 당호(堂號)는 수우재(守愚齋)이다. 할아버지 때부터 불러온 이름이란다. '어리석음을 지키는 집'이란 겸손한 이름이다.사랑채 앞에는 승운정(勝雲亭)이란 자그마한 정자가 있다. 다분히 도교적인 이름이다. 이 정자에 앉아서 호산춘이라도 한 잔 한다면 구름을 탄 기분이리라. 승운정 옆에는 도지정기념물로 지정된 커다란 탱자나무가 마치 문지기라도 되는 듯 서 있다.사랑채에는 주련이 걸려 있다. 이곳에 올 때면 가람이 담배를 피우지 말라고 할 것만 같다. 2년 전에 가람 친척에게서 들은 이야기다.어느 날인가 가람이 방안에서 밖으로 담뱃대를 내밀며 불을 붙여 오라고 했단다. 당연히 아랫사람에게 시킨 것이었겠지만 마침 사랑채를 지나던 사람이 담뱃대를 받아 불을 붙여서 방안으로 담뱃대를 내밀었다고 한다. 담뱃대를 받으면서 보니 바로 아버지였다. 깜짝 놀란 가람이 이 일을 계기로 담배를 끊었다고 한다. 가람도 가람이지만 아버지도 훌륭한 분이다.안채는 ㄱ자 모양이다. 양반 가옥의 구조를 따라 누마루까지 갖췄지만 규모가 작고 소박하다.주차장 오른쪽 언덕에는 동상이 있는데, 둘레에 가람의 시조 '고향으로 돌아가자'와 연보가 새겨져 있다. 이 옆으로 난 작은 길을 따라 100여 미터를 더 들어가면 가람의 묘소가 나온다. 곧 가람 생가 대나무 숲 뒤다. 그런데 안내문이 없어서 생가 뒤에 있지만 찾는 이가 많지 않다. 막상 묘소에 가더라도 너무 방치되어 있고 석물 하나 제대로 갖추지 않아 아쉬움이 든다. 이곳이 금계포란형(金鷄抱卵形)으로 닭이 알을 품은 형상이라 석물을 설치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를 모르는 이들은 너무 방치했다면서 안타깝게 여긴다.가람 생가에서 1킬로미터 남짓 떨어진 곳에는 폐교가 된 여산남초등학교가 있다. 이곳은 가람이 돌아가셨을 때 조문객을 받았던 곳이다.또 여산초등학교는 가람이 20대 때 근무하던 학교다. 학교에 들어서면 흉상과 함께 가람이 지은 교가가 새겨 있다. 그런데 노랫말이 참 재미있다."여산은 옛 고을 호남의 첫 고을그 역사 몇 천 년 나리어 오면서이렇다 할 만한 자랑은 없으나그래도 우리는 못 잊는 이 고장."▲가람 이병기는 누구인가가람 이병기(1891~1968)는 국문학자 또는 시조시인이다. 가람은 국문학 연구의 초창기에 주춧돌을 놓은 학자요, 쇠약해 가던 우리 시조시를 부흥발전시킨 시인이었다. 또한 교육자한글운동가애란가애주가이기도 했다.▲난초빼어난 가는 잎새 굳은 듯 보드랍고자줏빛 굵은 대공 하얀한 꽃이 벌고이슬은 구슬이 되어 마디마디 달렸다.본래 그 마음은 깨끗함을 즐겨하여정한 모래 틈에 뿌리를 서려두고미진도 가까이 않고 우로 받아 사느니라.비록 문학소녀가 아닐지라도 학창시절에 한 번쯤 들어 보았을 가람의 '난초'라는 시조다. 가람은 난초복, 술복, 제자복을 타고 났다고 한다. 얼마나 난을 아꼈으면 일본 순사에게 붙잡혀 갈 때도 처자식의 안위보다는 난초가 죽지 않게 잘 보살피라고 했을까? 가람은 술자리와 강의실이 따로 없었다. 전주 풍남문 근처에서 술을 마시고 길가에 앉으면 그곳이 곧 강의실이었다고 한다.가람은 1891년 3월 5일 현재의 익산시 여산면 원수리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연안이다.주시경 선생의 제자가 된 뒤 우리 말글에 관심을 갖게 된다. 조선어학회를 중심으로 국어학 연구와 한글 연구를 하는 한편, 시조시 창작과 그 이론적인 연구에도 차츰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 1926년 '시조란 무엇인가' 등 여러 편의 논문을 발표하고, 1927년 시조회, 1928년 가요연구회를 조직하여 시조시뿐만 아니라 우리의 고전시가 전반에 걸친 연구를 계속하였다. '한중록', '인현왕후전', '의유당일기', '요로원야화기', '어우야담', '역대시조선' 등은 가람이 발굴하여 소개한 것들이다.가람은 창씨제도(1940)의 협박에도 본성명 '이병기'를 고수하였다. 그러다가 '조선어학회 사건'(1942)으로 근 1년간 옥살이를 하였다.1946년 서울대학교에서 '국문학개론' 첫 강의를 하고, 1952년 명륜대학이 국립 전북대학교 문리과대학에 편입되자 그 학장이 되어 1956년 정년퇴임까지 재직하였다. 1957년 한글날 기념행사에 참석하고 귀갓길에 뇌일혈로 와병하였다가, 1968년에 돌아가셨다.▲기념사업주차장에 들어서면 올 4월에 제3회 가람시조문학제를 했던 현수막이 지금도 붙어 있다. 가람시조문학제는 가람기념사업회에서 주관하는데 해마다 4월 둘째 주 토요일에 가람 생가에서 열린다. 문학제 때는 학술행사와 함께 전국가람시조백일장을 열고 있다. 가람기념사업회에서는 문학관을 지어야 한다고 역설하고 있다.한 쪽에는 원광대학교 대안문화연구소, 익산문화재단, 익산의제21 등이 공동으로 주관하는 '가람 이병기 학술대회'가 오는 9월 23~24일에 원광대학교에서 열린다는 현수막이 걸려 있다.익산시는 가람의 업적을 추모하고 시조문학의 발전을 위하여 가람시조문학상을 제정하여 운영하고 있다. 79년부터 97년까지는 시조문학사에서 시행(17회 시상)하다가, 98년과 99년에는 문학사상사에서 2회, 그리고 2000년부터는 익산시에서 시행하고 있다. 2009년도부터는 가람시조문학신인상을 제정하여 2011년에 3회 시상을 했다./ 이택회 문화전문 시민기자(시조시인)※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