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도 건축기행] 인천우체국
인천 중구 개항장 문화지구 일대는 개항기와 일제강점기 지은 근대 건축물이 밀집해 있으면서 잘 보존돼 있기로 전국에서 손꼽히는 지역이다. 제물포구락부, 옛 인천부청사(현 중구청), 만국공원(자유공원), 옛 일본 제1은행 지점(인천개항박물관), 옛 일본 제18은행 지점(인천개항장 근대건축전시관), 옛 일본 제58은행 지점(요식업중앙회 중구지부), 옛 일본우선주식회사 인천지점(인천아트플랫폼 사무실), 옛 대화조 사무소(카페 팟알), 인천세관 옛 창고와 부속동, 답동성당 등 근대 건축물만으로도 시가지를 형성할 수 있을 정도로 즐비하다. 지역 자체가 거대한 박물관인 인천 개항장에서 랜드마크를 꼽는다면 예나 지금이나 단연 '인천우체국'(인천시 유형문화제 제8호)이다. 인천우체국은 1922년 12월1일 착공해 이듬해 12월10일 준공했다. 1924년 2월9일 공식 개청 행사(낙성식)를 한 지 올해로 100주년이다. 이 건물은 인천중동우체국이 2019년 5월24일 오후 6시 업무를 종료하고 인하대병원 옆 정석빌딩 임시청사로 이전할 때까지 95년 동안 우체국으로 쓰였다. 문화재로 관리되는 우체국 건물은 인천우체국, 진해우체국(1912년), 곡성 삼기우체국(1948) 등 3곳이 남아있는데, 이 가운데 인천우체국이 가장 규모가 크다. '팔도건축기행' 인천우체국 편은 인천문화재단이 지난해 말 펴낸 '인천우체국 기록화 조사보고서'를 주로 참고했다. △우체국 역사 첫 페이지 쓴 인천 인천은 우리나라 우체국 역사의 첫 페이지부터 등장한다. 조선은 1876년 조일수호조규(강화도조약)을 통해 처음으로 일본에게 부산항을 열었지만, 외국에 문호를 연 실질적 개항은 1882년 미국과 조미수호조규 체결 이듬해 '제물포(인천항) 개항'이다. 1883년 개항으로 인천은 근대 도시로 변모하고, 개항장에는 외국인 거주 지역인 '조계'가 형성됐다. 이 때부터 서구 문물과 함께 자본주의 경제 체제가 물밀듯 인천으로, 한성으로, 조선으로 들어온다. 근대 통신 수단인 '우편' 업무를 담당하는 우정총국은 고종의 명에 따라 1884년 11월17일 수도 한성에 설치됐고, 그 다음날 우정총국 인천분국이 가장 먼저 설치됐다. 올해는 우리나라 우편 역사가 시작된 우정총국 인천분국 140주년이기도 하다. 그러나 한 달이 채 되지 않은 12월4일 우정총국 개설 축하연 자리에서 김옥균(1851~1894) 등 급진개화파가 일으킨 '갑신정변'으로 우체국도 문을 닫는다. 대한제국은 1895년 6월1일 한성과 인천에 다시 우체사가 설치돼 우편 업무를 재개하고, 1900년 1월1일 '만국우편연합'에 가입해 국제 배송망을 갖췄으나, 일본우편국과 '불편한 동거' 상태를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1905년 5월부터 일본 통감부는 대한제국 통신기관 탈취를 목적으로 인천을 비롯한 전국 우체사를 일본 우편국으로 편입했다. 일제강점기를 맞으며 대한제국 우체 업무는 해체돼 조선총독부 산하 체신국으로 개편됐다. 인천우체국은 해방 이후 일부 건물이 미군 우편국으로 사용됐으며, 한국전쟁 이후 반환돼 역시 우체국으로 운영됐다. 우여곡절의 역사를 더하면 인천우체국 건물이 갖는 상징성은 배가된다. △100년 전 랜드마크 인천우체국 1918년 인천항에 최초의 근대식 갑문을 갖춘 내항이 건설되면서 재편된 도시의 중심에 인천우체국이 건립됐다. 축항과 해안 매립으로 새롭게 만들어진 항동 일대에는 인천우체국을 비롯해 인천세관, 오사카상선 인천지점, 조선상업은행 인천지점, 인천곡물협회 등이 이전해 물류 중심지를 이뤘다. 인천우체국은 현 중구 신포로와 제물량로가 만나는 모서리에 입지했다. 인천우체국 동쪽에 있는 신포로는 내항 1부두에서 성공회 내동성당까지 이어지는 길이고, 우체국 북쪽으로는 조선 시대부터 인천과 서울을 잇던 경인가도의 끝에 맞닿아 있다. 건립 당시부터 도심의 주요 간선도로의 교차점에 있고, 항만이 배후에 있으니 100년 전부터 이 지역 랜드마크였다고 할 수 있다. 인천우체국의 입지는 건물 배치와 디자인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인천우체국은 조적조 건축임에도 석조 건축의 외관을 갖춘 서양식 역사주의 양식을 따랐다. 일제강점기 초기 조선총독부가 선호했던 건축 양식이다. 안창모 경기대 건축학과 교수는 '인천우체국 기록화 조사보고서'에서 "우편 업무와 우편 금융 업무를 담당하는 성격상 역사주의 건축 양식이 구축한 신뢰의 이미지를 이어가겠다는 건축가와 건축주의 디자인 의도가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고 했다. 서양의 역사주의 건축물에선 건물 모서리에 출입구를 설치하지 않는데, 인천우체국은 '디귿(ㄷ)자' 형태임에도 건물 동북측 모서리에 정문을 낸 점이 독특하다. 안창모 교수는 "우체국에서 대민 서비스가 이뤄지는 공간의 동선을 최대한 줄여 기능성을 높이기 위함"이라며 "매립지에 형성된 업무중심지구의 2개 주요 간선도로가 만나는 곳에 출입구를 설치하고, 모서리를 둥글고 높게 처리해 시선을 집중시킴으로써 우체국의 존재감을 줄 수 있는 효과가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이러한 건물 배치로 인해 제물량로에서 개항장 중심가를 향해 비스듬하게 진입할 때 인천우체국이 갖는 시각적 효과가 크다. △우정통신박물관으로 탈바꿈 중 현재의 인천우체국은 본래의 '디귿(ㄷ)자' 형태가 아닌 사각형이다. 우체국 중정부에 해당한 1층 후면부는 목조지붕이었는데, 한국전쟁 당시 파괴된 것으로 판단된다. 1954년 전쟁 피해 복구 차원의 대수선 공사에서 중정부를 2층으로 증축해 현재의 형태를 갖췄다. 신축 당시 설계도는 남아 있지 않고, 1924년 1월 발간된 조선체신협회 잡지에 공사 개요가 기록돼 있다. 설계는 체신청 체신기사 오카다 준조가 맡았으며, 연면적 598평(약 1천977㎡)에 1층 268평, 2층 176평 등으로 구성됐다. 둥글게 처리된 동북측 모서리에 돌출된 정문은 석조를 사용해 위용 있는 디자인을 추구했다. 정문 양측에는 원형 기둥을 세웠고, 상부는 부조로 수평적 패턴을 새겼다. 2층 동북측 모서리에는 원형 기둥 5개를 둘러 건물의 정면성과 장식성을 더했다. 신축 당시 벽체는 연와조(벽돌)로, 슬라브는 철근콘크리트 구조로, 정문은 석재로 만든 혼합 구조다. 지난해 9월 인천우체국 원형 파악을 위한 일부 해체를 통해 원래의 구조와 재료 일부가 확인됐다. 인천시는 지난해 6월 정부로부터 인천우체국 건물을 매입하고, 용역을 통해 '건물 보존·활용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인천시는 최근 인천우체국의 역사성과 상징성 등을 고려해 '우정통신박물관'으로 활용하기로 잠정 결정했다. 인천시는 1923년 기준으로 원형을 보존한다는 원칙으로 본관 중정부, 별관과 수위실은 철거할 방침이다. 인천시는 내달 중 인천우체국 보존·활용 방안을 확정하고, 행정 절차와 리모델링 등을 거쳐 2027년 박물관을 개관할 계획이다. 우정통신박물관 조성 과정에서 인천우체국과 관련한 새로운 역사가 발굴될 것으로 기대된다. 1948년 5월 노동당원의 인천우체국 소이탄 투척 사건, 1979년 한국 첫 여성 집배원 입사 등은 여전히 흥미로운 이야깃거리다. 인천우체국과 관련된 전보·전신 역사도 더욱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관심을 키울 필요가 있다. 경인일보=박경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