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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시 민원 서비스 '전국 최우수'

민원이 해결될 때까지 민원인들과 끝까지 동행하는 민원행정을 펼쳐온 전주시가 중앙행정기관 42곳과 광역자치단체 17곳, 시도교육청 17곳, 기초자치단체 226곳 등 총 302개 기관을 대상으로 실시된 2017년 민원서비스 종합평가에서 최우수 지방자치단체로 선정돼 행정안전부장관 표창을 수상했다. 전주시는 8일 정부 서울청사에서 열린 시상식에서 도내 자치단체 가운데 유일하게 최우수기관 표창을 수상했다. 민원서비스 종합평가는 △민원행정 관리기반 △민원행정 활동 △민원처리 성과 등 3개 분야, 총 23개 지표에 대해 실시됐는데 끝까지 동행 민원실을 운영해온 전주시는 기관 표창과 함께 수상에 따른 인센티브로 5000만원의 특별교부세도 지원받게 됐다. 전주시는 특히 △각종 민원에 대한 기관장 의지 및 관심도 △민원행정 및 제도 개선 △처리기간 준수율 항목 등에서 높은 점수를 획득했다. 대표적으로 시청과 구청, 주민센터 등을 방문한 민원인들과 끝까지 동행하며 민원처리를 돕는 끝까지 동행 민원실 운영과 상세주소 원스톱처리, 운수사업관리시스템 솔루션, 농촌형 마을택시 등이 소통공감대를 형성한 민원제도개선 수범사례로 평가받았다. 전주시는 시민들에게 더욱 친절한 행정민원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한옥마을사업소와 기업지원사무소, 한문화지원사무소, 전통시장육성지원사무소, 전주푸드지원사무소, 서노송예술촌사무소 등 6개의 현장시청을 운영하고 있으며, 지역 중소기업의 애로사항을 청취하고 지원활동을 펼치는 기업 기 살리기 프로젝트도 꾸준히 전개해왔다. 양영숙 전주시 자치행정과장은 2017년 민원서비스 종합평가는 서비스 행정의 수준을 보여주는 바로미터인데 전주시가 최우수기관으로 선정돼 큰 자부심을 느낀다며 앞으로도 시민의 불편사항 해소와 사회적 약자를 위한 민원서비스 실천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 사람들
  • 강인석
  • 2018.03.08 20:04

군산 GM 해법, 하이트에서 찾아라

하이트진로(주)가 지난 7일 전북에 낭보를 전했다. 지난해 9월 전북, 경남, 강원도에 있는 3개 공장 중 1개를 매각하겠다고 했던 하이트진로가 돌연 공장 매각 계획을 철회한 것이다. 나아가 완주군 용진면에 소재한 전주공장에 160억 원을 신규 투자, 전주공장 맥주 생산설비를 늘리겠다고 밝혔다. 이렇게 되면 고용도 창출 될 것이다. 지난해 전북에 고약한 가슴앓이 병을 주었던 하이트가 새해 봄맞이 선물로 명약을 내놓은 셈이다. 이날 하이트진로가 밝힌 전주공장 설비라인 증설 확정 및 투자 방안에 따르면 경남 마산에 있는 맥주 생산라인 중 일부를 소주 생산으로 돌리고, 이에 따라 남게 되는 마산 공장의 기존 맥주 생산 설비를 전주공장으로 이전한다. 하이트측은 이에 따른 전주공장 투자비용으로 약 160억원 정도를 예상하고 있다. 하이트진로의 이번 공장 효율화 결정으로 경남 마산과 전북 전주완주 경제가 기지개를 펴게 됐다. 맥주만 생산하던 마산공장이 맥주와 소주를 만들고, 완주 용진의 맥주공장 설비를 강화함으로써 하이트가 지역과 상생하는 기업 이미지를 보여 준 것은 높이 평가될 일이다. 이번 결정은 하이트진로의 면밀한 시장 조사와 경영적 판단으로 이뤄졌다고 한다. 최근 영남지역의 소주 소비가 꾸준히 증가하고 있는 반면 마산공장에는 소주 생산 설비가 없다. 이에 마산공장 맥주 라인 5개 중 2개를 완주 용진공장으로 옮기고, 대신 소주 생산 라인을 신규 설비하기로 한 것이다. 물론 수십년 터를 잡고 지역경제에 활력을 불어넣어 온 하이트공장 철수 소식에 화들짝 놀란 전북과 경남 등 지역의 상생 방안 요구도 한 몫했다고 한다. 지자체와 정치권은 기업 관리 제대로 해야 한다. 지역경제는 역내의 괜찮은 대기업 영향을 크게 받는다. 전북처럼 대기업과 중견기업이 부족한 지역에서는 더욱 그렇다. 2년 전부터 전북에서는 현대중공업 군산조선소 철수, 익산 태양광 기업 넥솔론 파산, 익산 주정공장 폐쇄, BYC전주공장 폐쇄, 한국지엠 군산공장 5월 폐쇄 결정 등으로 지역경제가 크게 흔들려 왔다. 다행히 최근 닭고기 전문 향토기업 하림그룹이 익산에 4000억 원대 투자에 들어갔고, 이번에 매각 위기에 몰렸던 하이트전주공장이 신규 투자까지 결정 하면서 그나마 훈풍이다. 다행한 일이다. 정부와 지엠도 이번 하이트의 경영효율화 결정같은 군산공장 상생 해법을 내놓기 바란다.

  • 오피니언
  • 전북일보
  • 2018.03.08 20:04

특사단의 3·5합의는 남북한 윈-윈이다

▲ 양무진 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 대북특사단이 전 세계의 관심 속에 1박 2일의 평양방문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 왔다. 특사단의 선물 보따리는 파격적이었다. 35 합의는 4월말 판문점 평화의 집에서 제3차 남북정상회담 개최, 남북정상간 직통전화 설치, 북한의 비핵화 의지 표명, 비핵화 및 관계정상화를 위한 북미대화 용의, 대화 기간 핵미사일 시험 중단, 남측 태권도시범단과 예술단 평양 초청 등 6개항을 담고 있다. 4월말 정상회담 개최는 역사적 의미가 담겨 있다. 1948년 4월 김구김규식김일성김두봉 등 남북의 정치지도자들이 각각의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고 통일정부 수립을 목표로 평양에서 남북연석회의를 개최했다. 올해가 70주년이 되는 해이다. 판문점 평화의 집에서 남북정상회담을 개최한다는 것은 정상회담의 정례화를 예고한다. 판문점에서 남북회담을 할 때 남측의 평화의 집과 북측의 통일각을 번갈아 가면서 하는 것이 관례다. 과거 두 차례 정상회담은 형식과 격식이 복잡했다. 양정상이 당일회담출퇴근회담을 한다면 그 효용성은 배가될 것이다. 남북정상간 직통전화 설치는 한반도의 제반문제를 수시로 협의해결하겠다는 의지가 반영되어 있다. 냉전시대 미소, 영소, 프소간 직통전화 협정 체결로 위기국면을 돌파한 경험적 사례들이 많다. 국제사회의 탈냉전에도 불구하고 한반도에는 냉전이 지속되고 있다. 남북한의 군부들은 최고지도자의 뜻과 관계없이 호전성을 지닌다. 남북관계가 좋을 때나 나쁠 때나 군사적 충돌은 있어 왔다. 정전체제에서 오해는 전쟁으로 이어질 수 있다. 정상간의 직통전화는 우발적 충돌을 예방하고, 충돌시 확산을 방지하면서, 충돌 후 재발방지에 큰 도움이 된다. 북한의 비핵화 표명은 성과 중의 성과다. 김정은 시대 들어와서 사회주의 헌법에 핵보유국을 명시했다. 미국과의 비핵화 대화를 결코 하지 않겠다고 역설해 왔다. 김정은 위원장은 특사단에게 비핵화가 선대의 유훈이라고 밝혔다. 체제안전이 보장된다면 핵을 보유할 이유가 없다고도 했다. 핵이 체제보장용임을 보여준다. 선 체제보장, 후 비핵화 구도라면 조건부 비핵화로 해석된다. 체제보장과 비핵화가 선ㆍ후 관계가 아니라면 체제보장은 비핵화로의 입장변화를 위한 명분확보용으로 해석된다. 조건부든 명분확보용이든 북한의 비핵화 표명은 북미대화의 조건을 충족시킬 수 있다. 비핵화 및 관계정상화를 위한 북미대화 용의 표명도 중요하다. 비핵화 대화를 하겠다는 미국의 조건에 부합된다. 김일성 주석의 유훈은 한반도의 비핵화와 북미관계정상화이다. 북미대화는 주석의 유훈을 관철하기 위한 출발점이다. 특사단장이 곧 미국을 방문한다. 미국에 전할 김정은 위원장의 메시지를 지참한다. 특사단장이 김위원장의 전언을 가지고 간다는 것은 남측의 중재자적 역할을 신뢰한다는 방증이다. 김위원장의 전언은 대미특사 파견, 미국인 억류자 석방, 미군 유해 발굴 재개 허용, 미국을 비롯한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찰단의 영변핵단지 복귀 등으로 추정된다. 대화기간 핵미사일 시험 중단은 비핵화의 진정성을 보여준다. 미국의 대화조건을 충족시키는 대목이다. 한미합동군사훈련과 연계하지 않았다. 북한 군부의 입장에서 비핵화와 한미군사훈련의 불연계는 불만일 수가 있다. 김정은 위원장의 결단으로 평가된다. 태권도 시범단과 예술단의 평양 초청은 평창올림픽의 화합과 통합 정신을 이어가겠다는 의미가 담겨있다. 특사단의 방북 1라운드는 남북한 윈-윈의 합의를 이끌었다. 2라운드는 북미대화이다. 미국은 1라운드의 합의를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북미간 탐색적 대화 또는 예비회담이 조만간 개최가 예상된다. 미국이 북한문제를 국내정치에 이용하지 않는다면 의미있는 결과 도출이 그리 어렵지 않다. 3라운드는 남북정상회담이다. 양정상은 지난 한달 동안 친서도 교환하고 특사도 교환하면서 신뢰를 쌓아 왔다. 김정은 위원장은 대화 상대로써 진지한 대우를 원한다. 문재인 대통령은 8000만 한민족이 핵과 전쟁의 두려움이 없는 평화로운 한반도를 원한다. 제3차 남북정상회담이 신뢰에 토대한 평화로운 한반도가 열리는 날이 되기를 기대한다.

  • 오피니언
  • 칼럼
  • 2018.03.08 20:04

제4기 방송통신심의위원회 허미숙 부위원장 "미디어 소통방식 대변혁기…시청자 주권시대 시작돼"

지난 1월 30일 제 4기 방송통신심의위원회가 출범했다. 위원회의 공식적인 심의활동이 중단된 지 8개월만이다. 심의위원회는 방송과 인터넷의 내용 규제 전반을 담당하는 공정성 규제 기구다. 방송 내용의 공공성과 공정성을 유지하고 보장하는 활동이 목적이니 실질적으로 사회 전반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 그럼에도 이 위원회는 짧지 않은 기간 활동을 멈춰야했다. 대통령이 추천한 3명, 국회의장이 국회 각 교섭단체 대표위원과 협의해 추천한 3명, 국회 방송통신특별위원회가 추천한 3명 등 9명으로 구성되는 심의위원회 구성이 늦어졌기 때문이다. 방송심의 활동이 중단되면서 심의 안건은 눈덩이 불어나듯이 누적되었다. 4기 위원회가 위촉식 직후 곧바로 누적된 방송 심의 업무 처리에 들어간 것도 이 때문이다. 4기 위원회는 이전 구성과 달리 나이와 성별 폭이 넓어졌다. 아홉 명 모두 50대 이상의 남성위원으로 구성되었던 3기에 비하면 큰 변화다. 눈길을 끄는 변화가 또 있다. 부위원장으로 선임된 허미숙 위원(65)이다. 김제가 고향인 허부위원장은 80년대 CBS 언론 민주화 운동을 이끌어 지켜온 주역이다. PD로 시작해 기자, 편성국장, TV본부장을 두루 거치면서 시대를 읽고 호흡하는 방송의 역할을 지켜온 그의 삶은 굴곡진 CBS방송의 역사와 온전히 함께 있다. 상임직 부위원장인 그의 역할이 기대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를 만났다. 새로운 일을 만나 변화된 일상도 궁금했거니와 대한민국 방송 현실을 통해 저널리즘이 지켜야할 가치를 듣고 싶어서였다. 서울시 양천구 목동 방송타운 빌딩에 있는 방송통신심의위원회 그의 사무실 책상위에는 심의를 기다리는 문서들이 쌓여있었다. 그 분량이 만만치 않아 보였다. -위원회 활동이 너무 오랫동안 멈춰있었던 것 같습니다. 방송과 광고소위에 상정된 것만도 461건이나 된다고 들었습니다. 작년 6월 12일에 3기위원회가 이임식을 했어요. 공백이 없으려면 6월 13일에 취임식이 있었어야죠. 그런데 해를 넘겨 1월 30일 취임을 했으니 8개월이나 중단되었던 셈이예요. 심의가 시급한 안건이 너무 많아 위촉식 마치고 한 시간 후에 첫 번째 심의를 시작했어요. 원래는 일주일에 한번 심의를 하게 되는데 지금은 두 번으로 늘려 심의하고 있습니다. 심의하기 위해 준비하는 과정도 만만치 않은데, 듣기로는 직원들이 4기 취임 이후 저녁약속을 다 취소했다고 하더군요. 어쨌든 누적 안건을 조금이라도 앞당겨 처리하는 것이 당장 해결해야할 과제입니다. -심의할 안건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공공공정성이 제기되는 방송 광고물이 많다는 것일 텐데요. 방송이 지나치게 상업화되면서 지금은 우려되는 수준 그 이상이 아닌가 싶어요. 심의위의 역할은 방송의 공정성과 공공성을 지켜내고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는 일인데, 그 기준을 벗어나는 대상이 늘고 있다는 것은 방송환경이 그만큼 위기라는 것을 말해주는 것 아니겠어요. -이러한 위기를 심의위의 규제만으로 극복하기는 어렵지 않을까요. 물론이지요. 저는 그 힘을 시청자들이 갖고 있다고 봅니다. 이탈리아의 굴리엘모 마르코니가 라디오송출을 처음으로 성공한 것이 1895년, 서울 경성방송이 개국한 것이 1927년입니다. 90년이나 지났죠. 그때는 라디오로 새로운 소식을 들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했겠지만 지금은 환경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방송을 송출하는 사람과 이용하는 사람들 사이가 더 이상 일방적이지 않지요. 언제든 비판받고 반론을 들어야 합니다. 정보를 독점한 사람도 없고요. 누구나 스마트폰을 이용해 손쉽게 영상을 만들고 소비하고 비판할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잖아요. 그런 의미에서 일방적인 소통이 아니라 상호 이해에 바탕을 둔 관계가 중요해진 것이죠. 저는 이미 시청자주권시대가 시작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산업으로서의 방송 환경 변화는 어떻게 보십니까. TV에 인터넷이 연결되면서 시청자들은 더 이상 방송 채널에 얽매일 필요가 없게 됐고, 아무 때나 원하는 것을 볼 수 있는 콘텐트 업체가 각광 받고 있습니다. 음악이 더 이상 LP레코드나 CD를 거치지 않고 온라인으로 소비되듯이, TV 콘텐츠도 방송국 없이 소비자에게 직접 전달되는 시대예요. 미디어 종사자들의 품격과 수준이 그 어느 때보다도 중요해진 시점이지요. -공영방송의 역할과 기능도 그만큼 더 절박해진 셈인데요. 물서구의 공영방송은 공정성 문제에서 벗어나 무한미디어 경쟁 상황에서의 공영방송 역할을 고민 중입니다. 그런데 우리 공영방송들은 지난 10년 동안 공정성과 공공성이 참혹하게 무너지는 역주행을 겪었어요. 촛불혁명을 기점으로 높아진 방송환경의 변화 욕구가 그 상황을 반증합니다. 공영방송들의 리더십 교체가 숨 가쁘게 이루어지고 있지만 망가진 방송환경의 복원이 이미 변화한 미디어 환경에 맞게 보다 발전된 형태로 이뤄질 것인지는 지켜보아야할 것 같습니다. -아까 시청자의 힘을 주목한다는 말씀을 하셨는데요. 방송환경의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는 가장 큰 힘이 시청자들이니까요. 이번 KBS의 사장 선출에 40%의 선택권을 행사하는 시민자문단도 사실은 시청자의 다른 이름이지요. 이런 저런 변화를 보면 지금 우리는 미디어 소통방식의 대 변혁기를 통과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만큼 방송통신심의위원회의 역할이 더 중요해질 것 같습니다. 물론이죠. 방송통신심의위는 정기적으로 허가 또는 승인을 받는 전국의 340개 방송사의 프로그램과 광고가 적법하게 송출되었는지를 사후심의 합니다. 방송법 준수 여부와 사회질서 유지, 개인의 기본권 보호가 심의기준이지요. 특히 이번 4기 위원회의 경우 소수자와 사회적 약자의 기본권에 시선을 맞추고 언론의 인권감수성을 높이도록 촉구하는 데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통신에서는 마약판매와 사행성 오락, 불법정보, 국가전복을 목적으로 한 통신회합 그런 내용을 담은 사이트를 찾아서 차단합니다. 청소년에게 해로운 선정적이고 잔혹한 영상을 삭제하고, 청소년유해정보를 목록화하는 작업도 담당하고요. 최근에는 이용자 권익보호와 관련해 개인의 명예를 훼손하는 사건에 대한 분쟁조정업무도 시작했습니다. 심의위 조직도 시청자중심이용자중심 조직으로 대규모 개편을 준비 중이예요. -오랫동안 방송제작 현장을 지켜오셨는데, 이제는 입장이 바뀌었습니다. 방송 심의에 걸려 불려온 적도 있으셨을 것 같은데요. 정치가 언론을 폭압하던 80년대에는 저도 의견진술자 자리에 여러 번 앉았습니다. 30년이 지나 진술을 듣는 방송심의소위원회 위원장 자리에 앉으니 여러 가지 마음이 교차하더군요.(웃음) 입장은 서로 바뀌었지만 방송의 공정성 심의에 있어서의 불편부당과 사회적 약자에 주목하는 시선은 맥락이 같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심의위원이 갖춰야 할 방송의 가치관이 매우 중요할 것 같습니다. 가장 중요한 덕목은 정파적이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겠지요. 방통심의위 위원 9인은 대통령이 위촉하는 자리로 법적 지위와 역할이 정해져 있고 그에 대한 책임을 집니다. 문제는 여당 몫, 야당 몫의 위원자리가 6대 3의 구조로 대통령과 국회의장, 국회 과학기술방송위원회에서 각 3인을 추천하고 대통령이 위촉하는 제도로부터 오는 정파성이예요. 이런 구성은 정부로부터의 직접적인 간섭을 최소화 하라는 사회적 합의가 법제화된 결과지만, 지난 10년 동안 청와대를 필두로 여당과 야당이 첨예하게 대치한 채 갈등을 빚어온 게 사실입니다. -4기 위원회가 8개월 동안 표류한 것도 실제로는 정치권의 갈등 때문이었죠. 태생적 한계가 있으니 쉽지는 않겠으나 정파성을 벗어나는 일이 무엇보다도 절실하겠습니다. 그래서 4기 심의위원들은 그 어느 때보다 공정성, 객관성, 독립성을 바탕으로 한 합의제 정신을 중요한 가치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덕분에 위원회 출범 이후 방송소위에 상정된 모든 안건이 프로그램에 대한 법정제재까지도 매 회 전원합의로 의결되는 기록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지금까지는...... -방심위의 궁극적인 목표가 궁금해집니다. 명실상부한 표현의 자유 보호기관으로 자리매김하는 것입니다. 방송의 공정성 훼손에는 제재를 가하지만, 제작과 취재의 자율성은 훼손되지 않도록 보장돼야 하고요, 더불어 소수자와 사회적 약자를 포함한 시청자 권익보호를 위해서도 노력해야죠. -그 목표를 위해 심의위원들이 지켜야할 가치는 무엇일까요. 아까도 말씀 드렸듯이 합의제 정신입니다. 방송통신심의위원회는 헌법재판소와 유사한 합의제 기구입니다. 심의위원은 공정하고 객관적이며 독립적으로 모든 사안을 판단해서 결정해야 합니다. 심의위원이 정파적이거나 특정한 이익에 좌우되면 그때부터 우리사회는 정의로울 수 없게 되죠. -화제를 잠깐 돌려보겠습니다. 부위원장님은 현업에서 일할 때 방송 민주화를 가장 큰 과제로 삼았었는데요. 인생의 변곡점이 그만큼 적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 고난과 맞닥뜨렸을 때 스스로를 지켰던 가치가 궁금합니다. 시간의 질량에 대한 인식과 사람과의 관계입니다. 관계에서 형성되는 에너지와 기쁨은 평생 놓치고 싶지 않은 선물 같은 것이니까요. -방송에 오랫동안 몸담았던 선배로서 후배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겠지요.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해 가장 바람직한 방향이 무엇일지 끊임없이 고민하자는 것입니다. 가치도 시대에 따라 조금씩 변화하니까요. 변화하는 가치에 맞는 새 규칙과 삶의 스타일을 만들 필요는 있습니다. 그러나 항상 잊지 말아야할 것은 방향입니다. 가령 낡은 전통을 단절하고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해 속도를 낸다고 해서 그 시대가 빨리 다가오지는 않죠. 오히려 어느 방향으로 갈 것인가와 그 방향을 향하기 위해서 필요한 가장 적절한 속도를 찾자는 것입니다. 두 시간 남짓 인터뷰를 하는 동안 그는 오랫동안 고민해온 심의위원회의 역할을 명쾌하게 정리했다. 심의위원은 미디어가 지배하는 우리 사회에서 전통과 윤리를 지키는 마지막 문지기 같은 존재들입니다. 심의위원을 하수종말처리를 담당하는 청소부에 비유하는 것도 그 때문이지요. 심의위원들은 하수라도 청정해역에 내보낼 수 있도록 수질을 향상시키는 일을 담당해야한다는 그가 여러 번 강조한 대목이 있다. 정파성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일. 그것은 곧 부위원장으로서 그가 경계하고 지켜내야 할 의무 같은 것이다. 인터뷰 말미 그가 말했다. 만일 마지막 문지기가 정파적이고 편향적이며 특정 정치세력의 대리인 노릇만 한다면 우리의 방송 환경은 어떤 지경에 처할까요. 아마 쓰레기와 오폐수가 넘쳐나는 최악의 방송 상황을 맞겠지요. ● 허미숙 부위원장은 - 독재정권 하 검열의 시절, CBS 민주화 지켜온 산증인 허미숙 부위원장은 1952년 김제시 금산면 용산리에서 태어났다. 종가의 장손으로 중국문학에 심취했던 아버지(허 환)는 한학자였다. 평생 직업을 갖지 않았지만 물려받은 재산으로 1남 4녀를 키웠던 아버지는 늦둥이로 낳은 딸을 엄하게 가르쳤다. 덕분에 종아리 맞으며 한문을 배웠던 시절이 아직도 또렷한 기억으로 남아 있지만 삶의 변곡점마다 중요한 깨달음과 지혜의 길을 찾게 해주었던 통로가 어린 시절 배웠던 한학 덕분이었으니, 인생의 가장 귀한 선물을 남겨준 아버지의 엄한 가르침을 그는 감사해한다. 언니들과 오빠는 그가 성장하는 동안 실질적인 보호자가 되어 주었지만 일찍부터 독립적인 삶을 받아들여야했다. 원평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전주로 나와 중학교를 다니는 동안에도 환경은 그의 의지와 관계없이 수시로 바뀌었다. 특별한 의지 없이 중학교를 졸업하지 않고 검정고시로 고등학교 입학 자격을 얻고, 기전여고에 문예장학생으로 들어가 전주대 국문과를 입학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작가가 되고 싶었던 그는 원하던 대학에 가지 못한 상실감을 이겨내고 싶었다. 대학 3학년 때 시내버스 안에서 우연히 보게 된 CBS(이리방송)의 PD 채용 공고가 그의 삶을 바꾸었다. 중고등학교시절부터 문학적 재질을 인정받았던 그의 답안지는 당시 채점위원이었던 소설가 홍석영씨(원광대 교수)가 그의 글 실력을 두고두고 칭찬할 정도로 빼어났다. 1975년 방송 PD가 됐다. 가벼운 음악방송으로 시작한 그의 프로그램은 점차 저널리즘의 특성을 담아내는 시사성 프로그램으로 확장되었다. 78년부터 80년까지 직접 제작하고 진행까지 도맡아 했던 <안녕하세요 허미숙입니다>가 그 시작이었다. 독재정권의 탄압이 엄혹했던 검열의 시대, 80년 언론통폐합으로 CBS는 뉴스 보도 기능을 빼앗겼다. 시대를 읽지 못하고 함께 호흡하지 못하는 현실은 자존감을 무너뜨렸다. 83년, CBS는 뉴스를 뺏겼다는 1분짜리 스파트를 시작으로 <방송사설> 등 뉴스의 기능을 대신 할 수 있는 논평프로그램 등을 만들어냈다. 익산(당시 이리방송)에서 뉴스 회복 운동이 시작되자 서울 본사도 나섰다. 방송위원회에 불려 다니기 시작한 것도 그 즈음부터였다. 뉴스 기능을 회복시키는 일은 방송 PD로서 그가 해내야하는 가장 절실한 의무였다. 본사 편성국 차장으로 자리를 옮긴 87년, 동료들과 의기투합해 다섯 시간짜리 생방송 우리는 CBS 뉴스를 듣고 싶습니다를 만들었다. 그 직후 CBS는 뉴스 기능을 회복했다. 그러나 후유증이 컸다. 당시 CBS 뉴스 기능 정상화 운동에 나섰던 주동자(?)들을 해고하라는 압력을 받은 경영진이 중심에 섰던 사람들을 지방으로 뿔뿔이 헤쳐 놓으면서 그는 다시 이리방송으로 돌아왔다. 이후 광주방송 보도국장과 뉴욕특파원을 거쳐 92년 대선을 앞두고 본사로 복귀한 그는 제작 1부장으로 있으면서 시사토론의 절정을 달리는(?) 프로그램들을 제작해냈다. <월요특집> <시사자키> <통일로 가는 길>등이 그가 만들어낸 CBS의 대표적인 시사프로그램이다. CBS의 민주화를 이끌어내고 지켜온 방송인으로 자타가 공인하는 그는 그 덕분에 험지로 내몰리는 상황에 번번이 처했지만 경남방송(마산)과 전남방송(순천)을 설립해내는 강단(?)을 발휘했다. 본사 편성국장과 TV본부장을 거쳐 2009년, CBS전북방송 본부장을 끝으로 CBS를 퇴직했으며 2012년 C채널 대표이사 사장으로 자리를 옮겨 IP TV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해내고 싶었으나 희망이 보이지 않는 구조적 한계를 절감하고 자유인이 됐다. 3년 동안 스스로에게 준 안식년을 마치고 2018년 1월 방송통신심의위원회 부위원장에 위촉되면서 새로운 일을 시작했다.

  • 기획
  • 김은정
  • 2018.03.08 20:04

[불멸의 백제] (46) 3장 백제의 혼(魂) ⑤

누구냐? 어둠속에서 외침이 울렸다. 밤, 축시(2시)경, 기마군은 삼현성에서 동쪽으로 1백리 정도 나아간 상태다. 이곳은 정안성에서 20리쯤 떨어진 강가, 흐린 날씨여서 별빛도 없는 천지는 먹물속 같다. 그때 선두에서 기마군을 안내하던 전택이 소리쳐 대답했다. 나는 삼현성 보군대장 급벌찬 전택이다! 너는 누구냐! 저는 정안성 유천 검문소 군사올시다! 앞쪽에서 사내가 외쳤다. 이 밤중에 어디로 가는 군사입니까? 세곡을 싣고 대야성으로 간다! 군주의 지시로 밤을 세워 가는 중이야! 그러는 사이에 기마군은 검문소로 더 접근했다. 어둠속이었지만 검문소가 드러났다. 앞장선 전택은 이제 검문소 앞으로 바짝 다가갔다. 검문소 윤곽이 드러났다. 통나무로 지은 2채의 막사, 이미 검문소 안에서 군사들이 쏟아져 나왔는데 10여인이다. 그때 군사들을 헤치고 무장 하나가 나섰다. 나는 검문소장 대사 유만성이오! 삼현성 급벌찬이라면 증표를 보이시오! 여기있네. 전택이 마상에서 나무를 깎아만든 증패를 내밀었다. 이제 검문소 군사들이 횃불을 켜서 주위가 환해졌다. 기마군 3백기가 검문소를 둘러싸고 있는 상황이 되어서 군사들이 잔뜩 긴장하고 있다. 그러나 모두 신라군 차림이라 두리번거리기만 할 뿐이다. 그때 증표를 본 검문소장이 전택에게 돌려주면서 다시 물었다. 삼현성에 내 의형제가 있소. 수문장으로 있는 사지 안태상이를 아시오? 누구? 사지 벼슬의 안태상이오. 그때 계백이 군사들을 헤치고 앞쪽으로 나와 둘의 이야기를 듣는다. 이제 기마군은 검문소를 사방으로 둘러쌓아서 물샐틈이 없다. 3백 기마군이 모두 침묵을 지키고 있는 터라 둘의 문답이 뒷쪽에까지 들린다. 그때 전택이 물었다. 대사, 그대도 가야인인가? 그렇습니다. 올려다보는 대사 직급의 검문소장의 눈이 번들거렸다. 30대쯤의 건장한 체격이다. 시선을 받은 전택이 쓴웃음을 지었다. 나를 믿지 못하고 있군. 무슨 말씀이오? 나도 가야인이야. 그렇습니까? 사지 벼슬의 안태상이란 수문장은 작년에 병으로 죽었네. 의형제가 그것도 모르고 있었나? 아. 수문장의 얼굴에 쓴웃음이 번져졌다. 잠깐 잊고 있었소. 그순간이다. 전택이 허리에 찬 칼을 후려치듯이 뽑으면서 수문장의 목을 쳤다. 비명도 지르지 못한 수문장이 목에서 피를 품으며 쓰러지기도 전에 기마군이 덮쳤다.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에 누가 명령을 하지도 않았다. 비명과 외침, 신음은 잠깐동안 이어지다가 뚝 그쳤다. 마상에서 공격한 기마군은 함성 한번 지르지 않고 검문소 군사들을 도륙한 것이다. 말에서 뛰어내린 기마군사 10여명이 막사 안까지 뛰어들어가더니 신음이 울렸다. 그때 피가 묻은 칼을 칼집에 넣으면서 전택이 계백을 보았다. 장군, 제가 동족을 쳤습니다. 살려둘 수가 없었어. 계백이 위로하듯 말하더니 말고삐를 당겼다. 검문소가 당한 것을 알면 전령이 김품석에게 보고를 할 거다. 이제는 낮에도 달려야겠다.

  • 문학·출판
  • 기고
  • 2018.03.08 20:04

묵향에 실린 '긍정의 힘', 환우들에 전해요

전주 엠마오사랑병원이 개원 20주년을 맞아 서예가 람곡 하수정 선생 초대전을 연다. 오는 12일부터 28일까지 병원 내 예배실에서 열리는 전시는 반백년 예술가로 살아온 하수정 선생의 주요 작품을 엄선해 선보이는 자리다. 개막식은 14일 오전 11시. 람곡 선생은 전주사범교육대학을 졸업한 후 갓 교편을 잡았을 무렵 서예에 입문했다. 강암 선생을 사사하며 12년간의 교직생활을 접고 본격적인 서예가의 길로 들어섰다. 람곡 선생은 작품 활동과 함께 전주에 금하(金河) 미술관을 설립해 운영했다. 미술관 개관전은 남도미술관에서도 다시 열려 화제가 됐다. 당시 여성으로서 대규모 개인전을 개최하는 일은 드물었기 때문이다. 이번 초대전에서는 람곡의 부정을 긍정으로 환원하는 힘이 잘 묻어난다. 서예 작품에는 호학정신으로 얻은 삶의 깨달음이 깃들었고, 모시와 한지를 천연 염색해 만든 작품은 순수함이 묻어난다. 이은혁 국립 한국전통문화대 강의전담 교수는 람곡의 생활이 곧 예술이 되는 동력이라고 말했다. 그는 세상만물에 존재하는 양면성을 인정하고 합일을 추구하려는 람곡의 태도는 화해와 상생으로 귀결된다며 선생의 예술정신을 되돌아보는 것만으로 충분한 배움이다고 말했다. 윤욱희 엠마오사랑병원장은 의학의 아버지 히포크라테스는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고 했다며 의학으로 섬겼던 환우들의 유한했던 삶을 예술작품으로 잇대 영원한 삶으로 이어보고자 한다고 밝혔다.

  • 문화일반
  • 김보현
  • 2018.03.08 20:04

[박용덕 첫 사진전] 오랜 풍파에도 꿋꿋한 소나무, 인간과 닮았네

무엇을 보았는가. 바람 묻은 길섶에서는 무엇이 보일까 하면서 오늘도 걷는다. 오랜 걸음 끝에 박용덕 사진가가 마주한 것은 소나무다. 박 사진가의 렌즈는 10여 년간 소나무만을 쫓았다. 그는 경주 왕릉을 든든하게 지키고 있는 소나무를 보면 기가 막힌다며 우리 민족이 삼국시대부터 좋아했던 나무라고 설명했다. 오랜 역사뿐만 아니라 소나무에서 느껴지는 인간적인 감정이 계속 이를 찾게 했다. 소나무가 자라는 과정과 우뚝 서있는 모습을 보면 인간 삶과 닮은 것 같아요. 오랜 풍파에 허리가 굽을지언정 쓰러지지 않고 살아내는 모습이요. 그는 온라인에서 정보를 얻어 전국의 소나무를 보러 다닌다. 마음에 드는 현장은 몇 번이고 가서 시간대별로 촬영한다. 최근에는 생활 주변에서 소나무를 보기 힘들어진 것에 아쉬움을 토로했다. 그는 전주 평화동 일대에 소나무 무리가 굉장히 멋있었는데 약 2년 전에 죽어서 베었다며 도시 공해로 소나무가 죽어가는 것이 안타깝다고 말했다. 그가 10여 년간 촬영한 소나무 사진을 모아 첫 개인전을 연다. 10일부터 15일까지 전북 교육문화회관에서 솔숲의 빗장을 열다. 개막식은 10일 오후 4시. 전시와 함께 사진집과 사진글집도 냈다. 글은 그가 사진 작업을 하면서 느낀 내면의 감정을 시로 쓴 것이다. 이흥재 사진작가는 사진을 찍는 사람은 많지만 특정한 주제를 잡아서 사진집을 내는 사람은 흔치 않다며 아무리 사진이 많아도 정리하고 결과물로 만들어 두지 않으면 소용 없는데 박용덕 작가는 큰일을 하셨다고 말했다. 한국사진작가협회 자문위원, 한국사진작가협회 2기 촬영지도회 부회장, 전북문인협회 회원 등으로 활동중이다.

  • 문화일반
  • 김보현
  • 2018.03.08 20:04

[김소윤 첫 소설집 '밤의 나라' 출간] 위태로운 '여성들'… 그래도 살기 위해 맞선다

김소윤 소설가가 최근 펴낸 첫 소설집 <밤의 나라>(바람꽃)는 여성들에 관한 이야기다. 최근 몇 년간 쓴 단편소설을 엮은 것으로, 위안부탈북자결혼 이주 여성장애 여성국제 밀거래 조직 등 소재는 다양하지만 그 중심에는 항상 여성이 존재한다. 김 소설가는 소설 속의 인물들은 모두 결핍과 상처를 지니고 있어서 쓰면서도 고통스러웠다고 털어놨다. 이어서 그들의 치유와 행복을 진심으로 바랐고 내가 그래줄 수 있기를 소망했지만, 아마도 그건 내 몫이 아닐 것이다. 할 수 있는 건 보이지 않는 곳에 숨어 있는 이들을 끌어내 세상 속에 세우는 일뿐이었다고 말했다. 표제작인 밤의 나라는 삶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자유를 찾아 탈북한 여성 미호의 이야기다. 탈북 과정에서 온 가족을 잃은 미호는 모든 것에 환멸을 느끼고 일본으로 밀항한다. 그곳에서마저 밀항선 선장으로부터 목숨을 잃을 위기에 처하자 살기 위해 조직으로 들어간다. 자신의 안전을 보장받기 위해 결국 권력자에게 자신의 자유를 양도한다. 그러나 자신의 고향에서 온 소년과 마주치며 다시 자신의 정체성에 의문을 갖게 된다. 그 대가는 죽음이었지만 미호는 더이상 숨고 도망치며 자신을 잃어버리진 않겠다고 결심했다. 나머지 단편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도 우리 사회가 구성원으로 상정하고 있는 표준적인 모델은 아니다. 김대현 문학평론가는 김소윤은 지금까지 우리의 시선에 포착되지 않았던 위태로운 여성들을 보이게 한다고 평했다. 하지만 억압받는 주인공들은 자신을 시험하는 가혹한 운명 앞에서 광기로 대항하거나 자신의 탓이 아니라며 싸운다. 때로는 극단적인 방법으로 저항한다. 김 평론가는 아무리 비루한 삶이라도 살아지는 이 끈질긴 생명의 힘을 보라며 모든 과정이 아름답지는 않지만 그래도 그들은 간다. 그것이 그들과 우리 모두가 살아가는 방식이라고 말했다. 전북 출신인 김소윤 소설가는 고려대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했다. 한겨레21 손바닥문학상에서 단편소설 벌레 당선, 2012년 제1회 자음과모음 나는 작가다에서 장편소설 코카브―곧 시간의 문이 열립니다 당선 등의 경험이 있다.

  • 문학·출판
  • 김보현
  • 2018.03.08 20:04

'만인은 평등' 외친 정여립 소설로 만나다

역사 속 정여립(1546~1589)의 모습은 전제왕권에 도전한 반역자 등 부정적인 기록으로 덧칠돼 있다. 하지만 조선왕조실록과 혼정편록, 연려실기술, 대동야승 등 기축옥사와 관련한 역사 내용을 살펴보면 정여립에 대한 오해가 상당했음을 깨닫고 시대를 앞서간 그 사상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게 된다. 정여립은 성리학이 지배하던 조선시대, 차별 없는 평등한 세상을 꿈꾸며 대동계(大同契)를 조직한 인물이다. 장편소설 <여립아 여립아>의 저자 박이선 씨는 정여립을 영국 올리버 크롬웰보다 앞선 공화주의자라고 평가했다. 시대를 앞선 그 사상이 조선시대에 어울리지 않았던 것뿐입니다. 이런 인물이 제대로 조명받지 못하고 묻혀 있다는 사실이 안타까웠습니다. 어떻게 하면 그를 지금 이 순간 살아 있는 인물로 불러올 수 있을지 생각했습니다. 그것은 소설 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정여립과 대동계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고 싶었다. 특히 동후가 의병들을 모아놓고 말하는 대목은 정여립의 혁명적인 사상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 나라 조선은 임금의 나라도 아니요 양반의 나라도 아니다. 우리가 여기에 죽기를 각오하고 모인 것은 사랑하는 내 피붙이들을 위함이 아닌가. 옛 성현들도 말하기를 백성이 나라의 기본이요 무거운 존재라고 했다. 천하에 어찌 주인이 따로 있겠는가. 천하는 공물(公物)이니 우리가 바로 이 땅의 주인인 것이다. (본문 중 일부) 이 책은 역사 속에 묻혀 있는 정여립의 삶과 죽음을 촘촘히 그려낸다. 정여립, 정철, 송익필, 지함두, 변숭복 등 당대 인물들은 철저한 사료 고증을 거쳐 작품 속에서 되살아난다. 또 저자는 마치 르포르타주(기록문학)처럼 당대의 역사를 정교하게 묘사하면서 정여립과 기축옥사(己丑獄事, 정여립 모반으로 일어난 동인과 서인 간의 정쟁)의 전말을 드러낸다. 기축옥사를 각각 인물의 시점으로 총체적으로 묘사해 역사의 한 장면을 입체적으로 바라보도록 했다. 남원 출신 박이선 씨는 2015년 전북일보 신춘문예에 소설 하구로 당선됐다. 대한민국디지털작가상, 월간 문학세계 신인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저서로는 장편소설 <춘포>, <이네기>, <이어도 전쟁>이 있다.

  • 문학·출판
  • 문민주
  • 2018.03.08 20:04

[윤주 한국지역문화생태연구소장의 사연 있는 지역이야기] 29. 눈물처럼 지는 꽃, 선운사 동백 - 다시는 불나지 말라 심었지만 붉은 꽃잎 불꽃처럼 '활활'

꽃이 피는 건 힘들어도 / 지는 건 잠깐이더군 / 골고루 쳐다볼 틈 없이 / 님 한 번 생각할 틈 없이 아주 잠깐 이더군. 최영미의 <선운사에서>란 시의 문장이다. 동백꽃의 소식이 들리기 시작하니 문득 이맘때쯤 선운사(禪雲寺)를 찾아가 발길을 돌렸던 기억이 난다. 추운 겨울 흰 눈 속에서 붉게 피어나는 동백의 모습을 그리며 찾았던 선운사는 동백꽃이 피기 전이었다. 선운사의 동백은 봄날이 한창일 때 벚꽃과 더불어 핀다는 이야기를 듣고 다시 찾았을 때는 이미 송이째 떨어져 처연하게 지고 난 후라 그 잠깐의 아름다움을 번번이 놓쳤다. 몇 계절에 이름을 걸어 놓고 피어나는 동백(冬柏)은 흔히 겨울에 꽃이 핀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지만 피어나는 시기에 따라 선운사의 동백처럼 봄에 피는 춘백(春栢)도 있고, 가을에 피는 추백(秋栢)도 있다. 오래전 중국에서는 해홍화라고 불리다 지금은 산다화라고 부르며 일본에서는 애기동백을 다매, 유럽에서는 카멜리아라 불리는 등 그 이름이 많지만, 일반적으로 우리나라에서는 동백으로 불리며 그 아름다움이 문학의 소재가 되고 노래로 불리는 꽃이다. 가수 이미자의 대표곡인 동백아가씨는 1964년 신성일 엄앵란 주연의 영화 <동백아가씨>의 주제가로 35주간 가요순위 1위를 달렸던 히트곡이다. 그러나 동백아가씨는 인기 절정을 누리던 중 갑자기 왜색풍이라는 이유로 금지곡이 되는 수난을 겪게 된다. 일제강점기 시절 대중가요의 주류였던 일본 엔카와 비슷한 트로트가 다시 유행되는 것을 염려했다는 것과 동백나무의 주요 자생지가 일본으로 잘못 알려져 금지되었다는 설이 전해진다. 동백아가씨는 오랫동안 금지곡이었다가 1987년 6월 항쟁 이후 해금된 노래로 땅에 떨어져 다시 피어나는 동백과도 같은 아픈 사연을 지녔다. 동백에 대한 색다른 오해를 남긴 문학작품도 있다. 김유정의 단편 『동백꽃』으로 산골 마을을 배경으로 풋풋한 사랑을 담은 작품이다. 소설 속에서 동백꽃은 그 바람에 나의 몸뚱이도 겹쳐져 쓰러지며 한창 피어 흐드러진 노란 동백꽃 속으로 폭 파묻혀버렸다. 알싸한 그리고 향긋한 그 냄새에 나는 땅이 꺼지는 듯이 온 정신이 그만 아찔하였다.라는 문장 속에 등장한다. 대부분 붉은빛이나 흰색을 띠는 동백꽃과 달리 작품 속에서 노란 동백꽃으로 서술된 꽃은 바로 강원도에서 동백나무 혹은 동박나무로 불려왔던 생강나무 꽃이다. 이른 봄 가장 먼저 꽃을 피우는 생강나무를 입안에 넣고 깨물어 보면 알싸한 향이 나니 작품의 내용과 맞아 떨어진다. 우리가 알던 동백이 아닌 생강나무이다 보니 이런저런 오해를 불러오기도 했다. 붉은 동백꽃이 김유정의 단편집 표지와 관련 자료를 장식했고 김유정 문학관 조성 시 쪽동백나무가 심어졌다가 생강나무로 다시 심었다는 에피소드도 전해진다. 어찌 되었건 동백나무는 유명세만큼이나 사연이 많은 꽃나무이다. 이들 동백 중에는 우리 민족과 운명을 같이하며 슬픈 사연을 지닌 동백도 있다. 울산과 제주의 동백이다. 울산이 원산지인 울산동백은 한 나무에 오색빛깔 여덟 겹으로 피어나는 희귀종으로 학성에 자생하고 있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왜장 가토 기요마사가 울산동백을 발견하고 채집해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바쳐지면서 일본에 빼앗긴 꽃이다. 불행히도 학성의 울산동백은 군락지가 소멸되었으나, 이후 1989년 일본의 한 사찰에서 발견되어 반환 운동을 통해 다시 고향인 울산으로 돌아올 수 있었으며, 지금은 울산시청과 울산 중구 학성공원에서 그 모습을 볼 수 있다. 또한 제주의 아픈 역사인 43항쟁의 70주년을 상징하는 꽃도 동백꽃이다. 제주 43항쟁 때 토벌을 피해 주민들이 동백동산으로 숨어들었던 그 슬픔이 이젠 역사의 아이콘이 되어 우리의 가슴과 어깨 위에서 붉게 피어나고 있다. 꽃이 아름다운 동백은 그 모습과 다르게 향기가 없는 꽃이다. 게다가 추운 겨울부터 피는 꽃이다 보니 벌과 나비가 아닌 새에 의해 꽃가루가 수정되는 조매화(鳥媒花)로 동백의 이름을 딴 동박새와 공생한다. 차나무과에 속하는 나무로 우리나라를 비롯한 일본중국 등에 분포하며, 우리나라에서는 주로 남쪽 해안이나 섬에서 찾아볼 수 있다. 군락지 중 북단 경계에는 고창 선운사(禪雲寺)의 동백숲이 있는데, 그 가치가 높고 사찰과 아름다운 경관을 이루어 1967년 대한민국의 천연기념물 제184호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선운사 동백나무는 정확히는 동백(冬栢)이 아니라 봄기운이 제대로 올라야 활짝 피는 춘백(春栢)이며 절 뒤쪽 비스듬한 산 아래 절을 수호하는 모습으로 군락을 이루어 선운사의 역사와 함께하고 있다. 선운사는 신라의 진흥왕이 창건했다는 설과 백제 위덕왕 24년(577년) 때 창건되었다는 설이 있으나, 백제 무왕 무렵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 뒤 고려말 공민왕 3년(1354년)에 중수되었고, 조선 성종 때에 이르러 십여 년에 걸쳐 건물이 189채나 되도록 중창되면서 1475년 봄에는 선왕선가(先王仙駕)를 위한 수륙재(水陸齊)를 크게 열고 번창하였다. 그러나 정유재란 때인 선조 30년(1597년)에 어실을 제외한 모든 건물이 소실되었다. 이후 광해군에 이르러 승려를 위한 선방과 법당을 건립하게 되며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고, 당시 사찰의 역사를 기록한 『선운사적』, 『운사고작』 ,『선운사사적』등이 전해져와 선운사의 자세한 창건기록은 물론이고 조선시대의 불교사를 연구하는 귀중한 자료로 인정받아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55호로 지정되었다. 동백나무 숲은 정확지는 않지만 사찰이 전소된 후 중건과정에서 승려들이 심은 것으로 추정된다. 선운사 대웅전 뒤편 경사진 언덕에 평균 높이는 약 6m이고, 둘레는 30㎝인 동백나무 2000여 그루가 병풍처럼 띠를 둘러 선운사를 호위하듯 조성되어 있다. 아름다운 사찰 경관을 위해 심은 듯하나 선운사에 동백나무 숲을 조성한 이유는 분명하다. 동백나무의 두꺼운 잎이 수분을 많이 머금고 있어 예로부터 방풍림이자 방화림으로 쓰여 화재로부터 사찰을 보호하기 위해서라 한다. 그래서인지 선운사는 정유재란 이후 화재 피해가 없었다. 게다가 열매에서 짠 동백기름은 머릿기름이나 사찰을 밝히는 등불과 부처님전에 바치는 등잔불의 기름으로 유용하게 사용되었다. 조선시대 임신한 왕비의 태교를 위해 쓰인 『태교보감』에는 동백기름이 피부를 탄력 있고 윤택하게 가꾸어주기 때문에 피부에 좋다고도 나와 있으니 동백나무는 여러모로 선조들에게 사랑받는 나무였던 것 같다. 선운사에 있어 동백숲의 조성은 필요에 의한 이로운 나무의 식재였지만, 선운사와 어우러진 동백숲의 아름다움은 봄날의 감성을 건네주는 지역의 귀한 자산이 되었다. 선운사에 가신 적이 있나요 / 바람 불어 설운 날에 말이에요 동백꽃을 보신 적이 있나요 / 눈물처럼 후두둑지는 꽃 말이에요 나를 두고 가시려는 님아 / 선운사 동백꽃 숲으로 와요 떨어지는 꽃송이가 내 맘처럼 하도 슬퍼서 당신은 그만 당신은 그만 못 떠나실 거예요 선운사에 가신 적이 있나요 / 눈물처럼 동백꽃 지는 그곳 말이에요 송창식의 노래가 선운사의 동백숲으로 마음을 이끈다. 봄이 한창인 어느 좋은 날 춘백으로 남아있는 선운사에 다시 가볼 참이다. 가서 선운사와 어우러진 동백나무도 보고 눈물처럼 후두두 지어 땅에서 피어난 처연한 꽃송이를 만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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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3.08 2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