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문학관 지상강좌 - 한국 문학의 메카, 전북] ⑧ 고창의 아전 ‘동리 신재효’, 전북을 판소리 본향으로 만들어
신재효 초상화. 국가무형문화재 제5호이며, 유네스코 지정 인류무형문화유산인 판소리와 카네기 홀.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두 단어가 이제 낯설지 않다. 음악인들의 꿈의 무대인 카네기 홀에서 우리 판소리가 신명나게 울려 퍼지고, 모든 청중들로부터 열렬한 기립박수를 받았다는 기사도 익숙하게 다가온다. 가장 한국적인 판소리가 세계 음악의 정점에 올라서고 각광을 받게 되는 일이 어떻게 가능한 현실로 이뤄졌을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인물이 동리(桐里) 신재효(申在孝, 1812-1884)다. 신재효는 어떤 이유로 판소리에 빠져들고, 판소리 사설을 정리하고, 창작하게 되었을까. 판소리에 대한 최초의 문헌이 1754년의 만화본 『춘향전』인데, 이는 한역본이므로 판소리의 발생 시기는 아마 17세기 말에서 18세기 초엽으로 추정된다.
단군 이래 우리 한민족에게는 고유의 신앙이 내려온다. 무속신앙이다. 무속의 한 형태로 무당굿은 우리 주변에서 계속 이어지고 있다. 굿할 때 무당이 하는 소리가 무가(巫歌)다. 그런데 이 무가는 신(神)을 향한 기원의 소리이다. 수천 년 이상의 긴 세월 불리던 무가가 17세기 말이나 18세기 초 소리에 능한 창조적인 소리꾼에 의해 판소리가 탄생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재미난 이야기들이 이제 신이 아닌 민중들을 즐겁게 하기 위해 거듭난 것이다.
신재효의 존재가 알려지게 된 것은 시조시인 조운(1900-1948?)이 1929년 『신생』 1,2호에 신재효를 소개했기 때문이다. 이후 초기 국문학자들의 거론이 있었고, 신재효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관심을 갖고 그의 가사를 수집한 학자가 가람 이병기(1891-1968) 시조시인이다. 가람은 오랜 기간 신재효 관련 자료를 수집하고 정리하여 서지학자로서의 면모를 보여주었으며, 국문학사에서 신재효의 위상을 확실하게 부여하였다. 가람은 신재효 연구의 초석을 다진 분이라 할 수 있다.
본(本)이 평산인 신재효의 조상들은 경기도 고양에 살았다. 그의 부친은 신광흡으로 서울에서 직장(直長)을 지내다 전라도 고창현의 경주인(京主人)이 되었다. 경주인은 지방에서 올라오는 향리 등에게 숙식을 제공하고 그 비용을 지방관아에 청구하는 사람이었다. 이를 인연으로 하여 그는 고창으로 내려와 관약방을 운영하였으니 어느 정도 재산을 가졌을 것으로 여겨진다.
신재효가 천석의 부를 누릴 수 있었던 것은 부친의 기본 재산에 영향을 받은 바 있겠으나, 동리 자신의 몸에 밴 근검절약의 습관과 재산을 늘리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인 결과였다. 중인 출신인 자신의 한계를 알고 있기에 관직으로 나가는 일을 하지 않고 부를 축적하는 데 힘썼다. 신재효가 창작한 사설 치산가에는 부를 축적하는 데 그가 어떻게 실천하였고, 합리적 경영을 하였는가를 알게 한다.
재산 형성에 성공한 동리는 1876년의 큰 흉년에 가산을 풀어 백성들을 구했고, 1877년에는 경복궁 재건에 큰돈을 희사하였다. 이런 일 등으로 하여 그는 가선대부, 통정대부, 절충장군, 호조참판, 동지중추부사를 제수받았다. 그러나 이런 관직은 명목상일 뿐 실제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실직(實職)은 아니었다. 그는 첫째, 둘째 부인을 일찍 사별하였고, 나이 차가 큰 셋째 부인도 동리의 나이 57세에 사별하여 말년 15년을 외롭게 보냈다.
행복보다는 오히려 불행이 한 인간을 예술적으로 승화시킨다. 중인으로서의 한계에다 가정적 불행이 겹쳐 동리는 더욱 판소리에 힘을 쏟았을 것으로 보인다. 신재효의 이속(吏屬) 생활은 30대 중반에서 50대 중반까지 20년 동안인데, 동리가 판소리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이방을 맡은 1852년(41세) 무렵으로 보고 있다. 이방이 된 이 무렵에 각종 연회를 주선하고, 판소리 창자 및 가객과 기녀, 예능인들과 자주 접촉했을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이후 그가 호장(戶長)도 그만두고 판소리에 몰두한 것은 경제적 안정 이외에 소리예술을 통해 자신이 뜻하는 바를 실현하겠다는 나름의 의지가 크게 작용했으리라 여겨진다. 그가 향리의 소임을 수행하는 과정에 판소리를 감상할 기회가 많았다는 점, 판소리를 즐길 요호부민(饒戶富民) 층이 형성된 시대적 배경 등이 판소리 전문가 신재효를 탄생시킨 큰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왕족과 양반 사대부들이 판소리의 주요 향유층을 형성하게 된 18세기의 흐름 속에서, 고창의 토착 세력도 아닌 아전 출신의 신재효로 하여금 사대부 이상의 우월적 자부심을 가능하게 한 것이 판소리였다는 점도 그의 시도에 큰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그는 1865년 53세가 되기 이전에 자신의 거처에 부용헌을 짓고 이곳에서 시 모임을 가졌다. 판소리 감상도 이곳에서 이루어졌을 것이고, 부용헌은 속(俗)을 포섭하는 동시에 속을 초월하는 공간이었던 셈이다. 판소리에 몰입한 그가 한 일은 당시 불리던 판소리 열두 마당 중 여섯 마당(춘향가, 심청가, 흥보가, 수궁가, 적벽가, 가루지기타령)을 정리, 개작한 일과 호남가, 광대가 등 15수 이상의 새로운 사설을 다수 창작한 일, 많은 판소리 제자들을 길러낸 일 등으로 정리할 수 있다. 판소리 역사에서 신재효가 끼친 가장 큰 영향은 앞뒤 맥락이 일관되지 않았던 판소리 사설을 합리적 내용으로 정리한 사실을 들 수 있다. 이러한 일은 사대부 층으로 확대된 판소리 향유자의 취향을 고려한 결과다. 그의 개작 판소리가 판소리 창자들에게 많이 불리진 않았으나, 구전되던 판소리 사설의 정리는 판소리계 소설의 출판을 활발하게 하고, 판소리 향유층의 확대에 기여했다.
신재효가 정리한 여섯 마당의 공통점은 소외된 민중들의 욕구 충족을 충분히 반영하고 있다는 점이다. 아전으로 진입할 무렵에는 신분상승의 의지도 있었을 것이고, 명목상 양반층에 진입했다 해도, 그는 엄연한 중인 출신이다. 18세기 흔들리는 신분제도 속에서 그가 진정 표출하고자 한 것은 해학과 골계를 통해 양반층을 풍자하고 민중의 한을 대변하는 일이었다.
신재효의 판소리 개작은 치밀하고 다양하게 이루어졌다. 가창 능력 및 성별에 따라 춘향가를 동창춘향가, 남창춘향가, 여창춘향가로 분리하여 개작하였다. 발흥기를 지나 판소리가 고제, 중고제, 동편제, 서편제 등으로 분화하는 판소리의 역동적 확장기에 신재효는 판소리의 역사적 소임을 실행한 것이다. 판소리에 대한 신재효의 안목이 특히 두드러지는 점은 최초로 여성 창자를 발굴하여 교육시킨 일이다. 당대에 이는 판소리계의 혁명과도 같은 일이었다. 지방 관기를 주로 하여 많은 여성 제자를 키워냈고, 이후 판소리의 문화는 큰 변화를 맞이하게 된 것이다.
신재효가 키워낸 판소리 최초의 여창은 진채선(陳彩仙)이다. 기량이 탁월한 그를 발굴, 양성하여 1867년 경복궁 낙성연에 보냈고, 판소리를 좋아하던 흥선대원군은 진채선의 기예에 반하여 그를 애첩으로 삼았다. 한양 땅에 올라가 돌아오지 않는 제자 진채선을 그리워한 동리는 짧은 판소리 사설 도리화가(桃李花歌)를 불러 그리움을 달랬다. 소설가 문순태는 이를 토대로 2015년에 장편소설 『도리화가』를 냈고, 같은 해에 이들 삼각관계를 극적으로 재구성하여 영화 도리화가(이종필 감독)가 상영되었다.
아쉽게도 신재효가 정리한 판소리 이론은 전해오지 않으나, 다행히 그가 지은 판소리 단가 광대가를 통해 판소리 전문가로서의 그의 면모를 다소 알게 한다. 창을 하는 광대가 갖춰야 할 네 가지 요소로 인물, 사설, 득음, 너름새를 말하였다. 너름새를 통해 청중을 웃기고 울리는 예술적 역할을 강조했다. 또한 그는 판소리 교육생들을 숙식시키며 집단교육을 한 최초의 인물이다. 이런 정도면 한량 중에 멋 알기는 고창 신호장(申戶長)이 날개라.라는 당대의 평이 충분히 이해된다.
제자 진채선을 그리며 지은 동리의 사설 도리화가의 일부와 이에 대한 화답으로 진채선이 노래한 추풍감별곡 일부를 감상한다. 스물네 번 바람 불어 만화방창 봄이 되니 구경 가세 구경 가세 도리화 구경 가세 채색으로 옷을 하고 신선되어 우화(羽化)하니 아름다운 이름 뜻이 생각하니 더욱 좋다.(도리화가), 은하작교(銀河鵲僑) 끊겼으니 건너갈 길 아득하다. 인정이 끊겼거든 차라리 잊히거나. 아름다운 자태 거동 이목에 매양 있어 못 보아 병이 되고 못 잊어 한이로다. 천수만한(千愁萬恨) 가득한데 끝끝이 느끼워라. /김광원 전북문학관 학예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