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기록유산이 된 '동학농민혁명기록물'] (20)동학농민군 한달문 편지
“어머님께 올리나이다. 제번하고 모자 이별 후로 소식이 서로 막혀 막막하였습니다. 남북으로 가셨으니 죽은 줄만 알고 소식이 없어 답답하였습니다. 처음에 나주 동창 유기모 시굴점 등에서 죽을 고생하다가 한 사람을 만나서 소자의 토시로 신표를 하여 보내어 어머님 함께 오시길 기다렸더니, 12월 20일 소식도 모르고 오늘 나주 옥으로 오니 소식이 끊어지고 노자 한 푼 없어 우선 굶어 죽게 되니 어찌 원통치 아니하리요. 돈 300여 냥이 오면 어진 사람 만나 살 묘책이 있어 급히 사람을 보내니, 어머님 불효한 자식을 급히 살려 주시오. 그간 집안 유고를 몰라 기록하니 어머님 몸에 혹 유고 계시거든 옆 사람이라도 와야 하겠습〔니다. 부디부디 명심불망 하옵고 즉시 오시기를 차망복망 하옵니다. 남은 말씀 무사하나 서로 만나 말하옵기로 그만 그치나이다. 1894년 12월 28일 달문 상서 의복 상하 벌, 보신 한 벌, 토시 한 벌, 주의 한 벌, 망건, 노자 3냥 온 사람과 함께 가 과세를 편히 할 터이니 혹 가고 싶어도 올 수 없으면 옥동 가고골 한기에서 의복 지어 보내소서.” 『동학농민군 한달문 편지』는 전라도 나주에서 동학농민군으로 활동한 접주급 인사 한달문(韓達文, 1859~1895)이 관군에게 체포되어 나주 감옥에 있던 중에 고향집에 있는 모친 쌍동댁(雙同宅) 박씨에게 보낸 한글 편지이다. 작성일자는 1894년 12월로 추정되며 한달문의 당시 나이는 36세였다. 이 편지의 작성자 한달문은 1859년 6월 2일 전라도 화순 도암면에서 출생한 인물로, 한경진(韓敬鎭)과 밀양 박씨 사이에서 태어났고, 족보와 호적 명은 한영우(韓英愚)이며 호는 묵헌(黙軒)이다. 그는 전라도 남부지역에서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였다가 체포되어 ‘나주 동창 유기 모시굴 점등’에 잡혀 있다가 얼마의 시간이 지난 후에 나주 감옥으로 이송되었다. 한달문은 돈 300냥이면 목숨을 구할 수 있으니, ‘부디부디 명심 불망하옵고 즉시 오시기를 차망복망 하옵니다’라고 애원하고 있으며, 옥중생활의 어려움을 호소하며, 추운 날씨를 이기기 위해 ‘의복ㆍ보신(명주옷)ㆍ토지ㆍ주의ㆍ망건’ 등을 함께 요청하고 있다. 이 글에서 ‘노자 3냥(路子 三兩)’은 추가로 기록된 것으로 편지를 전해준 자에게 전달하는 돈으로 파악된다. 호남초토사이자 나주목사로 동학농민혁명 당시 농민군 진압 책임자였던 민종렬(閔種烈)이 전라도 각지에서 체포한 동학도(東學徒)들의 성명과 처리 상항 등을 중앙에 보고한 자료인 『전라도 각읍 소착 동도수효 및 소획집물 병록성책(全羅道各邑所捉東徒數爻及所獲汁物幷錄成冊)』(1894)에서 동학농민군 한달문이 잡혀 압송되었다는 기록이 확인된다. 당시 동학농민군의 활동을 기록하고 있는 『김낙철역사(金洛喆歷史)』에서도 나주 감영에 잡혀 온 농민군들이 가혹하게 다루어진 모습이 기록되어 있는데, 현재 나주초등학교 소각장 부근이 나주옥(羅州獄)이 있었던 곳으로 추정되며 많은 농민군들이 이곳에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나주옥’은 동학농민혁명 관련 기록인 이병수의 『금성정의록(錦城正義錄)』(1946), 오지영의 『동학사(東學史)』(1926), 이두황의 『양호우선봉일기(兩湖右先鋒日記)』(1894) 등에서도 언급되고 있다. 문헌 기록과 증언에 따른 한달문의 동학농민군 참여 내용을 보면, 그는 전남 화순 도암면 동두산 인근 부락에서 ‘한대장’이라 지칭되었다. 동학농민군의 주력이 태인에서 해산한 후 전라도 남부지방으로 밀려 내려와 12월 중순 격전장이었던 ‘나주 동창 유기 모시굴 점등’에서 토벌대와 싸워 농민군 13명이 전사하고 14명이 포로로 잡혔다. 이때 한달문은 14명의 포로 중 한 명으로 나주옥에서 모친에게 구원을 요청하는 편지를 작성했다. 유족 증언에 의하면 그는 다음 해 3월 석방되어 조카 한일수가 업고 집에 돌아왔으나 감옥에서 나오자마자 장독으로 사망하였다 한다. 2004년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등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되어 동학농민혁명 참여자와 유족에 대한 명예회복사업이 진행되자, 한달문의 손자 한우회가 한달문을 참여자로, 한우회 등을 유족을 신청한 바 있다. 이에 2005년 동학농민혁명참여자명예회복심의위원회에서는 1894년 전투 중에 작성된 동학농민군 한달문 편지와 전라도 각읍 소착 동도수효 및 소획집물 병록성책 등을 근거로 한달문을 동학농민혁명 참여자로, 그의 손자 한우회를 유족으로 인정하였다. ※ A : 한달문 거주지, B: 나주 동창 유기 모시굴 점등, C: 나주옥 동학농민군 한달문 편지 및 관련 내용은 전남대 사학과 이상식 교수에 의해 광주일보(1994. 2. 16)에 처음 보도되었다. 편지의 원본은 한관용(1937년생)이 한달문의 직계 후손인 백부의 유품에서 발견하여 간직해온 것으로 손자인 한우회(1938년생)가 오랫동안 보관해 오다가 2019년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에 기증하여 현재 이 재단에서 소장하고 있다. 이 편지에는 나주 감옥에 갇혔던 농민군의 절박한 상황과 어려움을 잘 드러내고 있고, 짧은 편지이지만 동학농민군의 상황을 생생히 전해주는 역사성과 진정성, 19세기 전라도 방언을 국어사적으로 작성했다는 희귀성 등의 측면에서 매우 귀중한 사료이다. 동학농민군 활동과 관련한 문서의 대부분은 관변자료나 양반 유생들의 기록이고, 동학농민혁명에 직접 참여한 농민군이 남긴 기록 중 특히 서간문은 한문으로 작성된 유광화 편지를 제하면 찾아보기 어렵다. 이 편지의 주요 내용 및 특징을 보면, 한달문이 나주 감옥에 갇혀 목숨을 구하기 위한 자금으로 300냥을 모친에게 부탁하고 있는데, 이는 농민군의 옥중생활과 나주 감옥의 실상을 알려주는 내용이다. 그가 모친에게 돈 300냥과 노자, 의복 등을 요구하는 것은 자신의 집안이 300냥을 융통할 수 있는 집안이었음을 짐작하게 하며, 당시 목숨 거래를 담보로 부패한 자금을 요구했던 세태를 보여주는 것이다. 또한 ‘나주 동창 유기 모시굴 점등에서 죽을 고생하다가’라는 글을 통해 농민군 격전지인 이곳에서 격렬한 전투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한달문 편지는 문화재적 가치도 높다. 한달문이 모친에게 보내기 위해 직접 한글로 작성한 유일한 옥중 한글 서신은 전북대 국어교육학과 서형국 교수에 따르면 조선 후기의 한글 편지 형식으로 국어사적 가치가 뛰어나다고 한다. 그가 작성한 한글은 19세기 말 사용되었던 한글로 전라도 방언을 그대로 표현하고 있으며, 서간문 형식 등을 보여주고 있어 국어사적 가치가 높은 것으로 판명되었다. 여기서 ‘고상’은 ‘고생(苦生)’의 한자어 모음 ‘ㅐ’가 ‘ㅏ’로 변동된 것이고, ‘신표ㅣᄒᆞ여’에서 ‘표(標)’를 ‘표ㅣ’로 적은 것으로 중간 단계를 거쳐 정착한 표기이다. ‘어마임 항게’는 ‘ᄒᆞᆫᄢᅴ’에서 온 ‘한께’가 변동된 발음을 그대로 작성한 것이고, ‘지달이던이’는 ‘기다리더니’로 ‘기’가 ‘지’로 구개음화된 표현, ‘업신이’, ‘깊피’, ‘직시’는 각기 ‘없으니’, ‘급히’, ‘즉시’의 모음으로 ‘ㅡ’가 ‘ㅣ’로 발음된 것이고, ‘모로고’는 ‘모르고’를 적은 것으로 모음 동화를 겪어 어간이 고정된 것이다. 이 편지는 전봉준, 손화중, 김개남 등을 비롯하여 동학농민군 주도세력과 그들을 진압한 조선 정부, 일본군의 입장에서 동학농민혁명을 이해해 왔던 기존 인식의 틀에서 벗어나,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싸우다 죽을 수밖에 없었던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농민군들을 새롭게 조명하는 계기가 된다는 점에서도 보존 및 연구 가치가 충분한 자료이다. 1894년 동학농민혁명 당시, 특히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했던 농민군이 직접 작성한 자료가 현재 거의 남아있지 않다는 점 등을 고려할 때 유물로서 이 편지가 갖는 사료적 및 문화재적 가치가 매우 높으며, 대표성․희소성도 충분하다. 동학농민군 한달문 편지는 2022년 2월 국가유산청 국가 등록문화재로 등록되었다. 국가유산청 설명문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동학농민군 한달문 편지는 전남 화순에서 동학농민군으로 활동하다 나주 감옥에 수감 중이던 한달문(韓達文, 1859~1895)이 고향에 계신 어머님께 직접 쓴 한글 편지 원본이다. 본인의 구명을 요청하는 내용이 담겨 있으며, 양반가의 자제로서 동학농민군의 지도부로 활동한 유광화가 동생에게 보낸 한문 편지와는 다른 면에서 동학농민군의 처지와 실상을 보여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