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타이 강신석 대표
빈타이 강신석 인터뷰는 꽤 했다. 초창기에는 많이 했었다. 어느순간 부담감이 많아져서, 제가 노출되는 것보다 저희 브랜드가 노출되는게 맞다고 판단, 뒤로 빠졌다. 철학일 수 있지만, 사장이 누구인줄 모르는 매장을 만들고 싶었다. 제가 오픈했을때는 저를 보고 오는 분이 태반이었지만, 오히려 족쇄가 된다 나중에는. 제가 그 자리를 비웠을 경우나. 그러다보니, 체인아닌 체인이 돼 버렸고, 오히려 대중적인 것을 향해 가려면, 제가 사라지는게. 누굴보고 오는게 아니라, 빈타이라는 간판을 보고 들어오게 하려고. 그래서 제가 나서는 일이 없어지고. 팀원들이 할 수 있는일이 많아져야. 저는 원천. 로스팅에 집중. 그러다보니 매스컴을 꺼려하게 되고, 두려워하게 됐다. 처음 시작은 빈타이라는 브랜드가 아니었다. 처음에는 전북대 앞에 상가에 10그램이라는 카페다. 10그램이라고 지금으로 보면 고수닭갈비 사거리에서 번화가쪽 말고 반대편. 하얀색 카페가 있었다. 2008년에 오픈을 했었다. 그렇게 시작을 했다. 제 커피가 시작이 됐고, 거기서 2~3년정도 운영을 하다가 빈타이로 2011년도에 브랜드를 만들어서 그때부터 시작이 됐다. 차츰 체인을 하려고 했던 것은 아니다. 사실 그런 마음으로 한 게 아니었기 때문에. 그러다보니 제 커피를 조금 더 알리고자 했던 것이고, 그래서 빈타이라는 카페를 열었고, 동시에 원두를 같이 했다. 지금처럼. 훨씬 작게. 원두 납품을 시작했던 것이다. 그렇게 시작했던 것이 원두 납품을 계속 하게됐고, 입소문이 와서 찾아와주신느 분들 중에서 카페에 관심있는데 창업이 가능할까, 하나둘씩 생겨나게 되서, 현재 13곳이다. 직영은 아니다. 그당시에는 객사매장, 전북대매장, 호송점 이렇게 3개를 운영했었는데, 하나둘씩, 어떻게 보면 관리가 안된다. 제 성격이 제가 해야 하는 사람인데, 관리가 안되는 경우도 생기고. 어떠헥 보면 신시가지점부터, 외부 사장님들이 시작이 된 것이다. 5개가되다보니 법적의무가 생긴다. 체인 등록을 해야한다. 직영이 아닌 이상은. 어쩔수없이 이렇게 되버려서.그때 체인이라는 걸 처음 알게된것. 정보공개서나, 가맹계약서나 이런것들을 그때부터 부랴부랴 만들고, 지금까지 온 것. 지금도 사실 체인을 시켜야겠다는 마음이 크지는 않다. 당연히 체인이니까 매장은 늘겠지만, 기존 체인처럼 우후죽순 늘수 없는 구조고, 저희는 한 매장 한 매장이 기존 매장과 겹치면 안되고, 컨셉을 정해야 하니까 바운더리도 커지게 되고, 그래서 외부에 가맹 문의 하는 분들으 ㄴ왜케 추진이 더디냐고 하는데. 저희가 할 수 있는 능력은 정해져 있으니까. 문의하는 분들은 넘쳐나고, 저희가 할 수 있는건 정해져있고. 무리보다는, 저희가 체인을 목적으로 한게 아니니까. 체인을 목표로 했으면 엄청 늘었을거다. 그러나 저희 원천은 원두, 커피회사이지, 체인회사의 개념이 아니다보니까. 저희도 준비한 사항들을 보면 법적인 문제가 가장 크잖아요. 어떤 한 분이 저희회사를 보고 투자하는건데, 법적인문제도 다 생각해야하고, 제품을 생산해서 납품하는 것도 체크해서 실질적으로 가맹점주분들에게 원두나 케이크 등을 납품해야하는데, 생각보다 그런 부분들이 까다롭더라. 커피를 처음에 왜? 처음에요.. 2006년도일것 같다. 아마도 제가 이런 서비스업을 하다가. 올해 42세입니다. 26살때, 레스토랑에서 일을 했었다. 근무를 하다가, 일반 직원, 처음에는 파트타이머. 트레이너까지 오르게 됐는데, 그런 과정에서. 매장에 우연치 않게 커피 머신이 있었다. 커피 머신이 있다보니, 패밀리레스토랑이다보니 그게 주가 아니다. 디저트 등으로만 나가고, 사용안하는 경우가 많았다. 지금으로 보면 유튜브. 우연치 않게 라떼아트를 보게 됐다. 동영상도 아니고, 사진으로. 이거는 그냥 그렸겠지 라는 생각으로 무의식적으로 봤는데, 동영상을 찾아보게 됐다. 우와, 그때 무너가 번쩍하는 느낌이 났다. 저거 해보고싶다. 마침 머신도 있으니까. 업무보다 한시간 일찍 출근했다. 편의점에서 우유를 사서, 해보기 시작한 것. 그당시에는 바리스타 학원도 없었고, 교육도 없었다. 그래서 라떼아트를 그냥 동영상보며 따라했다. 재미있다보니, 배워보고 싶다는 생각에 검색을 했고, 강남에 바리스타 학원이 있더라. 그리고 그때 이슈가 커피프린스, 드라마. 저의 첫 선생님은 커피프린스 교육해주시는 선생님이었다. 레스토랑 근무하면서 월 1회 휴무였는데, 화요일이었던 것 같다. 화요일마다 서울로 간 것. 배우러. 그 당시 클래스로 하는데, 40명 중에서 저만 지방에서 올라 온 사람이었다. 40명 중에 저만 서울. 붐이니까 서울 사람들이 먼저 배우더라. 그러다가 계쏙 머리속에는 카페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뿐. 젊은 나이에 모아둔 돈도 없을 것이고, 라떼아트를 배우고, 로스팅도 배우고. 커리큘럼이 있어서 시작한 것. 너무 해보고 싶어서. 수료는 끝났는데. 느낌상 멈춰버릴 것 같았다. 몸으로 익힌거니까 바로 써먹지 않으면 뭔가 안될 것 같아서, 빨리 여기 레스토랑을 그만둬야겠다고 생각. 그당시에 책임자이다 보니, 오너에게 말을 해야 하는데, 조심스럽게 말씀을 드렸다. 제 생각을. 여기에 근무하는건 좋은데, 제 머릿속은 커피밖에 없어서, 가게에 마이너스다. 흔쾌히 그분이 저를 키워준거나 다름없는데. 그렇게 말씀 드리고, 저는 바로 나와서, 원래는 카페에 취직을 하려고 했다. 그당시에 그런데 26~7이다보니 쉽지 않더라. 왜냐면 일하는 근무자들이 저보다 어리니까. 그당시면 매니저나 그러니까. 당시에 카페보다는 프렌차이즈에 들어가고 싶었다. 객사 안에 스타벅스. 그자리에 원래 체인점이 있었다. 무슨 브랜드였는데, 거기에 지원했는데, 나이가 있어서 안될 것 같다고 하더라. 고민 엄청 많이 했다. 취직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큰일이다. 젊은 나이에 할 수 있는게. 그래서 저질러야겠다. 창업이다. 답이 없다. 그렇게 해서 전북대에서 10그램이라는 카페를. 말도 안되는 곳에. 제가 창시자다 거기는. 로프트는 테이크아웃점이 있었고, 앞쪽에. 저는 그니까. 그 골목이다. 지금은 그 건물이 없어졌다. 신축을 해서. 제가 운영했던 카페다. 인터넷을 통해 찾아서 보여준다. 아기자기한 모습. 지금도 검색하면 나온다. 약간. 일본의 조그마한 카페 느낌. 빈티지한 카페 느낌. 그런걸 좋아해서 그렇게 꾸몄었다. 그쪽에는 커피숍이 없었다. 아예. 그렇게 시작했다.] 그런데. 2년동안 너무 잘됐다. 너무너무 잘됐다. 그래서 카페 골목이 됐다. 앞에 세븐이라는 카페. 지금 되게 너무 많아졌다. 그렇게 창업이 시작됐고, 재미있게 했던 것은 교육이었다. 커피 교육을 같이 했다. 돈을 받지 않고, 무상으로. 그냥 재미있게 했다. 지금의 시작점으로 볼 수 있다. 매장 운영후에도 어떻게 보면, 어떤 사장님이 라떼아트 배우고싶다하면, 그럼 영업 끝나고 우유한박스 들고 들어오세요. 이렇게. 새벽까지 하고, 커피 모임도 생기고. 무료로 창업을 시키게 됐고.오픈을 하게 되는 것. 어떻게 보면, 그게 영업아닌 영업이 됐다. 빈타이로 와서 객사점으로. 로스팅을 했었다. 커피교육도 계속하고. 그렇게 시작이 됐다. 그렇게 하나둘씩. 시작이돼서, 부여아울렛에도 입점을 했던데? 빈타이 좋아하는 친구들도 많다. 빈타이는. 이것도 그당시 커피를 배우러 다니면서, 10그램이라는 카페를 접고, 빈타이를 만들기 위해 다시 서울로. 조금더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에. 2년동안 커피를 좋아해서 했지만, 제가 느끼기에 장사를 하고 있더라. 저는 고객들도 좋은데, 내가 좋아하는 커피가 어느순간 장사가 돼 있었다. 어쩔 수 없는 것이지만, 그당시에는 너무 싫었다. 그게. 제 생활도 없었고, 어떻게 보면 대출도 갚아야하니 현실을 직시해야해서 그렇게 했지만, 점점 한계를 느끼고, 재미도 없어졌다. 그래서 정말 남들이 왜이렇게 잘되는걸 그만두냐고 했는데, 저는 바운더리를 조금 더 키우고 싶었다. 조그마한 가게에서, 제가 제 로스팅을 통해서. 비유를 하자면, 카페테이블 장사를 했다면, 그 테이블이 카페가 되는 것. 그럼 전국이나 그렇게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다. 그래서 다시 서울로 올라가서 공부를 하게 되고. 서울에서는 다시 밑바닥부터라 생각했다. 그땐 로스팅을 더 집중적으로 공부했다. 그리고 커피 머신을 공부했다. 지금의 선생님을 만나서, 그당시에도 커피 머신을 설치하고 다니기도 했다. 그러고 나서 창업을 해야겠다고 생각해서, 창업 한 것. 전주로 와서 창업했다. 10그램에서 같이 일하던 직원. 직원은 지금도 있다. 저희 과장으로 있다. 그 과장이 10그램때 파트타이머로 시작해서, 빈타이 만들고 나서는 최초의 직원이 됐다. 직원이라면 딱딱할 수 있지만, 그때 인연이 지금까지 왔다. 되게 힘들었다 처음에는. 사실. 10그램이라는 카페가 워낙 잘됐고, 그랬기 때문에, 저희가 옮긴다고 알리는 것은 사장님께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어디로 간다고. 그래서 객사로 옮긴 후에 일주일정도 됐을때, 아, 안되나보다. 너무 형편없는 매출이었다. 하루에 4만원? 아 이건 아니다 라는 생각. 객사를 잘 몰랐다. 평일에는 손님이 없고 주말에 있는, 저는 반대로 생각. 학교는 반대니까. 일주일 정도했는데, 자존심이 상하더라. 그만해야겠다는 생각에 바로 가게를 내놨다. 누가 바로 한다고 왔더라. 그래서 하루만 시간을 달라고 했다. 그날밤이 잠이 안오더라. 그때 곰곰히 생각한게, 제가 초심을 잃었더라. 어떻게 준비해서 이 샵을 열었는데. 2년동안 장사하면서 초심을 잃었다. 다시 초심으로 돌아가자고 했다. 다시 안판다고 하고, 얼마를 팔든, 그당시에는, 20대 초반부터 서비스업을 했기 때문에 자료가 있었다. 서비스업을 하면서 왜 저 카페나 레스토랑은 잘되는지 안되는지 저만의 노트를 만들었었다. 그걸 토대로 10그램을 만들었었다. 준비아닌 준비를 참 많이 해서 잘됐을 수 있다. 그런데 빈타이 창업할때는 그런걸 잃었다. 나는 잘했었으니까 하는 거만함이 있었다. 그당시에는 청소할때도, 의자나 테이블 닦으면서, 웃긴 얘기지만, 주문을 외웠다. 제 그당시 10그램 슬로건이, 행복한 커피 나라, 였다. 여기 와주시는 분들이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닦으면서도 여기 앉으시는 분들은 행복하세요 라는 그 말을 하면서 했다. 어떻게 보면 미쳤다고 할 수 있는데. 그런걸 잃었던 거다. 다시 리셋으로. 다시 처음부터 하자. 내가 잘할 수 있는건 웃는거고, 친절하게 하는것. 그게 밑바탕이되야하는데, 못했었다. 다시 차츰차츰 올라왔다. 다시 일정 수준 올라왔다고 느낀게. 객사점을 하면서, 1년정도했을대, 원래 있던 카페를 인수해서 조금만 리모델링했는데, 주인이 바뀌면 많이 바꼈다는 신호탄이 필요하더라. 그래서 1년정도 하고 전체 리모델링을 했다. 조금더 예쁘게. 리모델링 후부터 반전이 왔다. 그런데, 리모델링 후 일주일 후에 화재가 났다. 토요일에. 오픈 준비를 하는데 타는 냄새가 나더라. 여름이었는데, 실외기에서 불이. 한옥이다보니 엄청 위험했다. 기어나오면서 119 신고하고. 그렇게 소방관이 5분만 늦어도 주저앉았다고. 천운이라고 하더라. 그때가 최고의 위기. 가진돈 다 넣어서 리모델링했는데. 다시 수리해서 오픈했는데, 그때부터 잘되더라. 그리고. 리모델링 하면서 케이크를 하게 됐다. 수제케이크. 딸기 생크림이라는. 그게 시초가 됐다. 전북에는 거의 최초. 수제케이크를 할 수있는. 그게 발판이 돼서 커졌다. 빈타이하면 딸기생크림. 그렇게 커져서. 베이킹 팀도 1명 2명, 늘어서 10명까지 늘었다. 호성점에서 다 만들어서 납품하는 것. 베이킹 팀이 1층이 전부다. 코로나라는 걸 저도 처음 겪는 것이고. 그러다보니. 해썹 공간이다. 밀실이다. 창문도 없다. 감염이 되기 쉽더라. 한명만 되면 무조건. 단체로 걸린 것. 그렇게 해서 그런 일도. 디저트나 케이크 시작 생각은? 저희 과장한테 좋은 기술이 있는데, 사실 그 당시에는 냉동케이크를 납품받아서 하면 되는데, 그러다보니, 하루에 많이 나가야 몇조각이야. 라고 해서 시작된 것. 저도 이렇게 될 줄 모르고, 구색맞추기로. 근데 이왕하는거 수제로해보자고 해서. 지금은 빈타이는 커피땜에 오는게 아니고, 메인이 케이크라고 한다. 저는 그게 메인이 됐다. 처음에는 커피하는 사람으로서 자존심이 상했다. 그런데 그게 문화니까. 예전에는 커피맛을 보러 오는 사람이었는데, 지금은 커피맛이 너무 좋아서 온다기보다는, 공간과 디저트가 주가 됐다. 원두도 여기서 모두 로스팅해서 나간다. 원두와 케이크는. 저희가 커피회사다 보니까. 커피회사에서 빈타이라는 카페를 만든 것이지, 또 저는 원두회사가 있다. 인스틸이라는 커피회사가 있다. 빈타이 컴퍼니에서 빈타이 카페를 운영 중이고, 인스틸이라는 원두회사가 있다. 저에게는 그게 주 업이다. 전국에 납품한다. 제가 그 일을 하다보니까. 그러다보니, 빈타이가 쇼룸이 된 것이다. 저희 원두를 맛볼 수 있는 곳이다. 문의내용이 빈타이에서 마시고 연락드렸는데요. 라고 한다. 빈타이에서 먹는 커피는 그러면 품질이 동일하겠네요? 라는 질문에. 어… 어떻게 보면 그렇게 말해야 하는데, 그런 면에서 커피가 재미있는게. 각종 원두가 똑같이 가지만, 100% 똑같지 않다. 맥락은 비슷할 것. 색깔은 같다. 검정색이지만 약간 흰색이 있는 검정 등등 100% 같지는 않다. 한 지점에서도 아침 점심 저녁 커피가 모두 다를 수 있다. 그걸 맞춰나가는게 바리스타 테크닉이다. 오늘처럼 비가오는날, 햇볕이 쨍쨍한날 등등 커피 세팅을 맞춰서, 우리가 갖고있는 원두를. 로스터들이 볶을때, 이 커피는 검정색을 표현하고 싶어라고 한다면, 검정색을 맛을 표현하는 사람이 바리스타다. 바리스타 협업을 통해서, 검정색을 만들어내는게 바리스타 역할이다. 원두의 상태, 매장의 상태, 공간의 상태에 맞춰서. 지점마다 교육을 하나? 기본적으로 저희가 처음에 창업 교육을 할때 본점에서 일을 시킨다. 창업교육이라고 하면 교육이겠지만, 직원처럼 일을 한다. 조금전 신시가지 사장님이다. 와서 계속 일을 하고. 그때는 커피도 커피지만, 빈타이의 색을 입히는 것. 그분들에게. 우리가 어떤 일을 하는구나, 우리가 어떻게 하고있구나, 어떤 서비스를 하는구나, 어떤 멘트를 하는구나. 지금은 제가 필드에서는 나와있지만, 직접 체화하는 것. 사장님과 매니저님 이렇게 두분이 오셔서 한다. 지금은 직영이 본점뿐이고. 나머지는 다 다른 사장님들이다. 빈타이를 공부하면서, 창업을 했는데, 저는 로스티잉 주 업이다보니, 로스팅은 볶은 사람에 맞춰서 맛이 달라지더라. 그러면, 우리가 옷에 비유가 되더라. 정장을 입을때, 트레이닝 입을때, 캐쥬얼 입을때 행동거지가 달라지더라. 그래서 그걸 표현하고 싶었다. 용산 전철역에서 그려봤다. 이미지화 시킨 것. 원두에 옷을 입히고 싶었다. 그래서 처음에 원두 그림에 나비넥타이. 그래서 빈타이다. 보타이를 표현했다. 처음에 로고가 나왔고, 현대식으로 바뀌다보니 이렇게 현재처럼. 그렇게 만들어진 것 빈타이는 공간이 눈에 띤다. 디자인. 모두 다르더라. 인테리어나 그런건 어떻게. 사실 저는 문외한이다. 저희 지금 케이크 담당 과장이, 어떻게 보면 저의 와이프다. 아내가 공간 공간을 디자인 컨셉을 잡는다. 전문가는 아니다보니, 표현해 줄 팀이 필요한데, 그 팀은 인테리어 하는 분이 따로 있다. 섭외를 해서, 지금 맞는 업체가 선정이 되서, 그 대표님과 수시로 미팅을 해서, 지금이야 오래돼서 대표님이 서치를 바로바로 스케치 해주시고, 피드백 주시고. 공간적인 부분이 이뤄진다. 예쁘긴 한데, 저희는 과정을 아니까. 마냥 이뻐보이지만은 않다. 소비자분들은 그냥 예쁘게 봐주시면 된다. 저희는 힘들었던게 더 떠오른다. 난 커피하는 사람이지, 사업가가 아니라는 생각을 많이 한다. 괜히 사업가가 따로 있는게 아니구나 생각하기도 한다. 왜 전주에서 시작? 전주가 제 고향이다. 타지에 나가서 잠깐 공부할때는 그렇지만, 타지에서 살아본적이 없다. 단 한번도. 그냥 자연스럽게 전주에서. 서울 올라가서 해도 되겠지만, 전주니까. 제가 해야하지 않았을까. 전주라서 힘든건… 지금으로서는 사실 뭐 취약점이나 그런게 크게 없는 것 같고. 아무래도 바운드가 작다보니까, 커질 한계는 좀 있다. 확장이. 규모가 작은 카페는 아니다보니, 저희가 우후죽순 동네 상권에 들어갈 컨셉은 아니다보니 한계는 있다. 오히려 더 열심히 한다면, 인지도는 더 많이 올라오지 않을까 싶다. 저희를 모르는 분들은,. 얘네는 어떻게 단시간에 커졌지/할 수 있다. 하지마 그렇지는 않다. 단시간에 커진게 아니다. 준비가 좀 미흡해서 이렇게 된것. 그리고 방향성이 이런게 아니었기 때문에. 지금도 미안하다. 문의오시는 분들에게. 왜 더이상 전주에 내지 않냐고 한다. 하지만 더이상 전주에 내는 건 매리트가 없다. 있을만한 곳은 다 있다. 더 세부적으로 나누면 들어갈 수 있겠지만, 그렇게 하면 그분들이 살아남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 카페를 좋아하는 분들이라면 알겠지만, 또다시 트랜드가 바꼈다. 시대도 시대이니 만큼,. 외부 카페가 트랜드다. 그만큼의 커피 시장이 커진 것ㄹ수도 있는데. 지금은 소자본으로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돈있는 사람이 돈을 번다고, 그런 것 같다. 작게하는 분들에게는 속이 상할 수ㅜ있겠지만. 막상 운영해보면. 가맹점을 늘릴 생각? 지금도 추진하고 있는 것은 있다. 지금은 전국에서 연락이 오기 때문에, 현재로서는 전국으로 갈 수 있다?는 아닌 것 같다. 어려운 문제다. 일단 전북에서 아직 들어가지 않은 곳에 들어가는게 1순위인것 같다. 저희가 추구하는게, 디저트를 많이 하는데, 그중에 케이크다. 케이크가 생산과 유통이 생각보다 어렵다. 냉동이면 조금 편할 수 있는데. 이게 다 냉장이다보니 쉽지 않다. 매일 아침 생산해서, 배송팀에서 탑차로 일일이 배송해야하니까. 가시권 1시간 정도. 이제는 사업성을 봐야하니까. 광주에 한곳이 생겼다고 해서 갔다오면 마이너스다. 쉽지 않다. 문의는 전국에서 온다. 저희는 일단 안된다고 하는게 크다. 현재로서는. 그러면 저희가 원천을 바꾸지 않는 이상. 그리고 혹은 전국구로 나가려면 생산 공장을 늘려야 하는데, 구상은 하는데도 답은… 너무 어려운 문제다. 코로나 시대에 인건비뿐 아니라, 쉽지 않더라. 우후죽순 많이 생겨나서 대량생산으로 이뤄지지 않는 이상 어렵다. 매장 내에서 파티쉐 보유하면 되지 않냐 하지만, 파티쉐 보유할만큼 매출이 유지되야 하는데, 쉽지 않다. 처음에는 될 수 있지만 나중에는 쳐내야할 수도. “전주의 스타벅스” 엄청 웃는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사실 어떻게보면 좋은 말이다. 근데, 지금의 모든 칭찬은 모든 부담감으로 온다. 엄청 아주 엄청 부담감으로 오다보니. 무조건 잘되겠지? 하는 마음이 크다. 문의하시는 분들. 너무 쉽게. 빈타이 무조건 잘되잖아요 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엄청 힘들다. 똑같이 힘들다. 보여지는게 다른 곳에 비해 많으니까 그럴 수 있다. 그런 것들이 부담아닌 부담이다. 10년이상 하고 있지만, 어떻게 보면, 폐점 안하려고 엄청 노력한다. 그게 부담이다. 그런 것들이 저희에게는 큰 부담. 지금은 어떤 판단을 하고 일을 진행함에 있어서, 저 혼자 하는 건 넘어섰따. 모든 가맹점주님들과도 상의해야 하고, 뭘 하나 할때도 알려드려야하기 때문에,. 그런것들이 고충일 수 있다. 한분한분 맞춰드릴 수 없으니까, 불만이 무조건 나오게 돼 있다. 저는 성격상. 안에 상처가 너무 크다. 왜 나는 못해줄까, 왜 못맞춰줄까 라는 마음이 크다. 속된 말로, 나같으면 굳이 빈타이 안하고 내가 하고싶은대로 할 것 같은데, 굳이 왜 빈타이를 해서 하고싶은 메뉴도 못하고. 그런 생각도 한다. 오히려 맞다고 생각한다. 창업얘기할때도, 그렇게 예산있으면, 빈타이 아니어도 충분히 잘 됩니다. 라고 말씀드린다. 충분히 매리트있고. 저희는 체인이다보니 가격 선정에도 문제가 된다. 예를 들어서 누구는 1억 투자하고 5000짜리 팔고, 누구는 20억 투자해서 5000원짜리 팔면 이게 안맞는 것. 이게 엄청 크다. 요즘에는 외곽 카페 가보면 5000짜리 없다. 아메리카노 6~7~8000원 한다. 둘이 가서 시키면 2만원 넘어간다. 그러면 이게… 밥을 머거야하지 않나 싶기도 하다. 저는 이 계통에 있으니 이해한다. 하지만 소비자들은 한번가고 안가게 되는 경우도 생긴다. 그게 무서운거다. 재방문을 하려고 하면, 이 가격을 투자해서 얻는게 커야 한다. 한번 가고 마는게 되면, 투자한 사람들은 1년 지나고 2년 지나고 3년 지나면 매출이 ㄷ급격히 떨어진다. 그때 알게 된다. 그게 가장 큰 문제다. 저는 이런 것들을 말씀 드려야하니까. 왠만해서는 말릴려고 한다. 가격이 높으려면, 그것에 대한 기준을 맞춰줘야 한다. 힐링이 돼야 하지. 지금은 경쟁하는 곳이 워낙 많다. 전북에도 대형샵이 엄청 많다. 저희같이 분명히, 체인점을 준비하는 분들이 많을 것이다. 저또한, 저희 앞세대 분들을 보고 준비를 했고. 저희가 로컬이긴 하지만, 1세대는 아니다. 저희보다 앞서 한 브랜드도 있다. 자바데이브, 컬러인커피 등 이런분들 쟁쟁했던 분들. 지금도 쟁쟁하신데. 사실, 그런데 이게 어떻게 보면 우리도 우연찮게 잘 되서, 젊은층에게 인지도가 있는 것 뿐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면 분명히 저희 후속주자들이 나올거다. 3~4개 5개까지는 충분히 가능하다. 그 이상은 어렵다. 제가 봤을때. 해보니까. 다른 사장님들도 인정하는게, 5개 이상일때. 신시가지점부터 신기했다. 오픈을 공지하고, 그러면, 10시오픈이다라고 하면 그전에 사람들이 밖에 와 있더라. 신시점부터 줄을 서더라. 뭔가 느낌이 달랐다. 은파점을 기점으로, 전국으로 알려지게 됐고. 관광지다보니까. 기점으로 더 알려지는 계기가 됐다. 더 생각하는 것? 제가 이걸 하면서 오래할 줄 몰랐다. 사실. 5년 정도 됐을때, 한 10년은 해봐야지 라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어느덧 10년이 넘었다. 이렇게 되니 20년은 해봐야겠다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 그러면 50대가 좀 안될텐데. 원래는 목표는 일 자체를 49살까지 하는 거였다. 그 이후는 생각해본적이 없다. 커피교육도 안할거다. 아예, 커피는 마시는 걸로 끝내고 싶다. 좋은 곳 가서 힐링. 그것땜에 시작했고. 이거는 너무 전쟁이니까. 좋은 커피 마시는게 제일 좋은 것 같고. 이렇게 이렇게 앞을 본다고하면. 아무래도 저희는 커피회사다보니, 커피 회사 쪽으로 더 키우고는 싶다. 준비하는 것은 커피 해썹공장. 커피를 위주로 해서, 커피 로스팅 공장을 조금 더 짓고싶은 생각은 있다. 그걸 해야하지 않나 싶다. 빈타이도 잘될 수 있고, 교육장 아닌 교육인거죠. 직원들이 교육장에 와서 연습할 수도 있고. 그런곳을 만드는게 가장 가까운 목표다. 계속 사실. 원하는 건 장사하는 사람이니까, 빈타이가 망하지 않고 계속 계속 하는 것들이 제일 좋지 않나 싶다. 그 자리에서 계속 할 수 있고, 손님들이 나이들어서 계쏙 찾아올 수 있는 것. 제일 좋은건, 타지에 가서, 전주에도 이런 곳이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 타지에서 친구들 놀러오면, 데리고 오는. 이게 엄청 신기하다. 커피라는 분야에서 그래도 카페를 다니는 분들은 알 정도가 됐다고 본다. 그것 자체가 엄청 신기하다. 누워있을때도 뜬금없이 신기할때가 있다. 정말 감사한것이고. 빈타이 얘기를 하면, 그래도 프리패스가 될때가 있다. 지금 많이 느낀다. 제가 사회활동을 많이 하지 않지만, 어디를 가도, 빈타이 대표님이다하면 정리가 되더라. 어떻게 보면 그게 지역 사람들의 생각인 것 아니냐. 당연히 저희에게 안좋은 추억이 잇을 수 있지만, 그런게 좋았다. 명함도 사실, 엄청 오래전에 만들어놨는데, 한박스에 있는 한곽도 쓰지 않았다. 예전에는 이런생각을 안했는데, 이제는 저를 보고 오시는 가맹점분들도 있으니까, 빈타이를 홍보할 수만 있다면, 제가 해야한다고 생각이 들었다. 라디오광고나 영상미디어광고나 이런것도 시작을 생각하는데, 1차적 노출을 해야하고 전주시나 전북에서 같이 하는 것이 있다고하면 그런것은 흔쾌히. 도움을 줄수 있는 것은. 어쨌든 전북분들이 저희를 도와주셨기 때문에, 환원할 수 있는 부분은 환원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게 크다고 생각한다. 예전에는 인터뷰를 깨 했다. 중3때부터 22살까지 비보이 활동을 했다. 맥스크루. 비보이 출신이라고 하니까, 계속 방송에서 연락오더라. 비보잉 하면서 라떼아트 할 수 있는지 스타킹 이런 곳에서. 천경석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