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세계유적지구’에 대한 전북의 역할과 몫을 찾아야
백제는 한국의 고대 국가 중 하나로 기원 전 18년 온조왕이 한강유역에 건국하여 660년 멸망할 때까지 약 700년 동안 31명의 왕이 재위하였다. 비류왕은 김제에 대규모의 벽골제(碧骨堤)를 축조하는 등 수리시설을 확충시켜 농업경제력의 기반을 확대하였고, 이 토대 위에서 4세기 근초고왕(재위 346~375)은 가야를 복속하고 황해도로 진출하는 등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그러나 475년 고구려 장수왕의 남진정책으로 인해 한성(위례성)이 함락되고 웅진(지금의 공주)으로 도읍을 옮겼고, 무령왕(재위 501~523)은 귀족세력을 재편하여 왕권을 강화하면서 중흥의 초석을 다졌다. 성왕(재위 523~554) 시기 538년에는 사비(지금의 부여)로 천도하였고, 이후 무왕(재위 600~641)은 왕권 강화를 도모하기 위해 익산에 왕궁을 건설하고, 미륵의 용화 세계를 구현하려는 염원에서 미륵사를 창건하는 등 동아시아 문화교류의 중심에 위치하였다. 하지만 660년 백제는 나·당연합군에 의해 멸망하고 말았다. 비록 국가는 사라졌지만 찬란했던 백제의 종교·건축·예술 문화의 가치는 시간을 초월하여 현재에도 이어지고 있다. 이러한 역사적·학술적·예술적·기술적 가치를 인정받은 ‘백제역사유적지구’는 2015년 7월 독일 본에서 열린 제39차 세계유산위원회(UNESCO)에서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이는 백제 후기(475~660) 문화를 대표하는 유산으로 「웅진시기」 공주 공산성, 공주 무령왕릉과 왕릉원, 「사비시기」 부여 관북리 유적과 부소산성, 부여 정림사지, 부여 왕릉원, 부여 나성, 「사비후기」 익산 왕궁리 유적과 익산 미륵사지로 구성된 연속유산이다. 등재되기까지의 과정을 대략 살펴보면, 1994년 9월 익산 무령왕릉 잠정목록 등재를 시작으로 2011년 2월에 백제역사유적지구의 공주·부여역사유적지구와 익산역사유적지구를 통합하여 우선추진대상으로 선정하였고, 동년 5월, 문화재청장·전북도지사·충남도지사·공주시장·부여군수·익산시장 등 5개 광역·기초단체장이 세계유산 등재추진을 위한 업무협약 체결 및 준비위원회를 개최하였다. 그리고 2012년 5월, 제반 업무를 총괄할 조직으로 재단법인 백제역사유적지구 세계유산 등재추진단(이하 ‘추진단’)이 출범하였다. 2014년 1월에는 등재신청서 및 부록을 유네스코에 제출하였고, 2015년 7월 드디어 백제문화의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인정받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가 확정되면서 2016년 1월에는 재단법인 백제세계유산센터(이하 ‘센터’)로 법인 명칭을 변경하여 오늘에 이른다. 이를 보면 오늘날 유네스코 등재 및 이를 관리하는 센터 존재의 시초는 1994년 익산 무령왕릉 잠정목록 등재가 출발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현재 센터의 출연금을 보면, 전북과 충남은 매년 25억씩, 익산·공주·부여는 매년 10억씩 총 80억원의 출연금을 지원하는 것으로 파악되는데, 전북과 익산의 합산 출연금 비율은 44%에 육박한다. 하지만 그동안의 사업 추진 실적을 살펴보면, 세계유산 통합관리·활용은 물론 역사·문화·관광콘텐츠 개발 등의 사업들이 충남지역에 치중된 측면이 적지 않다. 센터 역시 대전광역시 서구에 위치하고 있다. 이는 예산 투자 비율의 형평성과 공정성에 어긋날 뿐만 아니라 향후 진행될 백제세계유산의 확장등재 및 역사관광개발을 위해서라도 전북의 역할과 몫을 찾아야 한다. 왜냐하면 백제유적은 단지 어느 한 단면만을 보여줘서는 전체의 흐름과 가치를 제대로 증명해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김도영 (재)한국전통문화전당 원장·문화재학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