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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올해는 아무래도 연둣빛, 그래도 내년엔 '노란 맛' 볼 수 있겠지

분명 거의 다 왔는데, 이쯤이면 노란 물결이 보일 때가 됐는데, 차창 밖으로 보이는 건 연둣빛이었다. 긴가민가, 자갈을 밟아대며 다가가자 그제야 마치 에어브러시로 멀찍이서 뿌려놓은 듯한 노란 점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사진가 한 무리가 그 점묘화 속에서 걸어 나오고 있었다. 진안군장애인종합복지관 사진반 일행이었다. 작년에 왔을 때는 예뻤는데, 꽃들이 활짝 안 피고, 노랗지도 않고 작년엔 예뻤거든요. 전정준 씨(72)의 말에는 실망이 묻어났다. 김순자 씨(78)는 꼭 그렇지만은 않은 듯했다. 가서 걍 겁나게 찍어갖고요 하면서 찍은 사진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진안군 상전면 금지배넘실마을은 지난 2016년부터 해바라기로, 지난해부터는 또 유채로 유명해졌다. 용담댐이 건설되면서 생긴 호숫가 땅을 이춘식 축제위원장(60)과 이 마을 사람들이 개간해 해바라기유채밭을 만들었다. 그 넓이가 14.2ha에 달한다. 이렇게 봄에는 유채, 가을엔 해바라기가 노란 물결을 이루며 여행객들의 눈길을 사로잡은 이곳. 그러나 유채밭 하면 연상되는 압도적인 노란 맛은 올해는 찾아보기 힘들다. 냉해 때문이란다. 일군의 사진가들이 떠나자, 유채밭은 한산해졌다. 전주에서 온 강혜리 씨(48) 부부와 취재진 정도가 남았다. 작년엔 좋았는데, 올해는 실망이 컸어요. 관리가 잘 안 된 것처럼 보이네요. 여긴 전주에서 바람 쐬러 오기도 좋고, 잘만 하면 괜찮을 것 같은데. 아쉽네요. 그래도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나태주의 풀꽃에서)고 했던가. 노란 점들을 향해 뽀짝 다가가니, 멀찍이서 대충 본 것과는 또 다르다. 옳지, 옳지, 보이, 하. 꽃마차 한 대가 먼저 눈에 들어온다. 곳곳에서 흰 바탕에 까만 글씨가 적힌 팻말들이 말을 건다. 나는 참 예쁘다거나, 나의 살던 고향은 꽃 피는 산골이라거나. 꽃을 향한 말도 보인다. 노랑이들아 올해도 예쁘게 피어나주렴. 곳곳에 노랑이들을 탐하는 나비와 벌들이 날았다. 유채 이파리들이 구멍이 숭숭 뚫려있는 것을 보니, 이 밭에서 태어나 자란 녀석들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상수원인 용담호에 닿아 있는 곳이니 농약이나 제초제는 전혀 쓸 수 없어서 가능한 일이다. 이 꽃밭의 가장 큰 포인트는 바로 뒤쪽의 용담호다. 파란 물과 그 파란 물을 감싸는 초록 산줄기가 노란 꽃과 어우러져 특별한 분위기를 선사한다. 진안군장애인종합복지관 사진반을 담당하는 강양선 씨(48)도 저 용담호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으면 좋다고 귀띔해 줬는데, 역시 사람 생각은 다 비슷한 것인지, 꽃이 피면 예쁠 것 같은데 너무 안 피었네라며 실망한 표정을 짓던 여행객 한모 씨(50)도 저 위에 저수진가 호순가, 되게 괜찮네라고 말했다. 배넘실마을의 유채꽃 축제는 올해가 두 번째다. 지난해 축제 때 5만여 명이 방문하는 성과를 거둔 뒤, 올해는 겨울과 봄의 한파로 유채가 제대로 자라지 못하면서 지난해에 한참 못 미치는 성적표를 받았다. 1000원씩 받을 예정이던 입장료도 폐지했지만, 이춘식 위원장의 계산으로는 방문객이 1만 명도 채 되지 않는다고. 그래도 이 위원장은 자신감을 내비쳤다. 이제 매뉴얼을 정립하는 단계죠. 실패의 과정은 일종의 섭리라고 보고. 내년에는 다를 겁니다. 노하우가 쌓였거든요. 배넘실마을의 올해 유채꽃 축제는 26일로 막을 내린다. 축제가 끝나면 마을 사람들은 유채 씨를 받고 땅을 갈아엎을 예정이다. 그리고 다시 씨앗을 심을 것이다. 내년에는 다시 노란빛이 가득한 유채밭을 볼 수 있을까? 유채의 꽃말은 '쾌활'이라고 한다.

  • 기획
  • 권혁일
  • 2018.05.25 13:28

장미의 계절, 도로공사 수목원으로 꽃구경 가자스라

햇볕이 공기와 지면을 달구기 시작하는 계절. 봄과 여름의 경계는 그 열기로 녹아내린다.이글거리는 태양을 고개를 들어 똑바로 쳐다보며, 오뉴월을 대표하는 꽃 장미는 그렇게 피었다.2017 FIFA U-20 월드컵 코리아가 한창인 전주, 세계 청소년 축구 스타들이 한 판 승부를 벌이는 전주성 바로 근처에, 전북도민이 사랑하는 장미 명소가 있다.장미를 보러 왔어요. 꽃이 참 다양해서 좋습니다. 이만한 곳이 없죠.장미를 배경으로 연신 어린 아들의 사진을 찍던 전주시민 김지수 씨(37)는 미세먼지가 없으면 보통 여기로 온다고 말했다.그의 평가는 관리가 잘 돼 있다는 것, 꽃을 하나하나 보기 좋다는 것, 그리고 외지인에게도 자주 추천하곤 한다는 것이었다.지난 24일, 전주시 반월동 한국도로공사 수목원에 취재팀이 들어서자 참 타이밍 좋게도 하늘을 덮고 있던 구름이 살살 걷히며 파란 하늘이 드러났다.그러고서는 마치 올 신상 여름날 체험행사라도 하겠다는 듯, 햇볕이 뜨거워졌다.수련이 동동 떠 있는 연못(수생식물원)을 지나 오솔길(?)을 잠깐 걸으면, 이내 형형색색 제 잘난 얼굴을 뽐내는 장미들이 눈에 들어온다.빨간색, 자주색, 분홍색, 노란색, 흰색 등 색깔도 다양하지만, 그 모양도 천차만별이다.장미는 5월 하순 무렵, 그러니까 봄과 여름의 경계선을 밟고 피어난다.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이미지는 화려함이지만, 사실 다 세기도 힘들 정도로 많은 품종이 있어 한 가지로 단언하기는 어렵다. 워낙 품종 개량이 활발해, 지금도 새로운 장미가 계속 생겨나고 있다.전체 규모가 29만1795㎡에 달하는 한국도로공사 수목원에서 장미원이 차지하는 면적은 3520㎡. 여기에 약 600주의 장미가 심어져 있다.어디까지나 관찰학습이 주 목적인 수목원이기 때문에 휴식여가가 목적인 다른 장미 명소와는 달리 빽빽하거나 화려한 느낌은 덜하다. 대신 꽃 하나하나를 깊게 음미하기에는 좋다.이것도 일장일단이 있는데, 이날 동료들과 함께 장미원을 찾은 한 사진 애호가는 풍경사진을 담기에는 조금 부족하지만, 한 송이 한 송이, 감성사진 찍을 땐 오히려 좋다고 말했다.한국도로공사 수목원은 사진 애호가들 사이에서는 이미 전국구적으로 잘 알려져 있다. 수목원 측이 밝힌 올 5월(1일~25일) 하루 평균 입장객은 약 2300명. 이날 만난 사진가는 이를 한 마디로 정리했다.사진 찍는 사람들은 다 알죠.단, 수목원 내에서 삼각대를 펼치는 것은 금지돼 있으니 주의하자.장미의 계절이지만, 장미만 보고 가기엔 나머지 공간이 아깝다.수생식물원 나무다리 위에서 물 위에 동동 떠 있는 수련과 이따금씩 첨벙 소리를 내는 잉어들을 바라보는 것도 즐거움이다. 한 달여 뒤에는 연꽃이 필 테니 그때 다시 찾아도 좋다.어쩌면 이열치열의 느낌으로 온실에 들어가 보는 것도 좋을 테지만, 햇볕이 뜨거울 땐 역시 숲속으로 들어가는 게 최고. 수직으로 쭉쭉 뻗은 죽림원 대나무 사이에 서서 열을 식혀보는 것도 좋겠다.한국도로공사 수목원은 하절기인 요즘은 오후 8시까지 열려 있다. 월요일에는 휴원한다.시내버스로는 423424428번 등을 이용하면 된다.자가용 승용차를 몰고 외지에서 찾아온다면, 호남고속도로 요금소를 빠져나오자마자 CBS 방향으로 우회전해 지하통로로 건너면 만날 수 있다.

  • 기획
  • 권혁일
  • 2017.05.26 23:02

[철도기행: 오산리역 편] 흐릿한 기억 속, 등잔 밑 간이역

동쪽으로 다시 달려 군산시와 익산시의 경계를 넘는다. 철길은 완전한 직선이 되어 내달리고, 자동차는 들판 한가운데를 미끄러진다.오산리역 방향을 가리키는 이정표 같은 것은 없다. 의지할 것은 지도뿐이다.황금빛으로 빛나는 들판과 거대한 콘크리트 구조물들, 코스모스, 어린이 보호구역, 공사 현장 등이 나타났다 사라진다.역이 없어진 지는 오래됐어요. 예전에, 그러니까 제가 여기 부임할 때만 해도 열차가 서긴 했죠.- 김미영 오산 농협 하나로마트 점장(오산리역이 없어진 지)오래됐어요. 정확히는 모르겠어요.- 인근 식당 관계자(오산리역이)있었다는 말은 들었는데.- 오산면사무소 관계자존재감은 이미 희미해져 있었다.오산리역을 찾아가는 길은 생각보다 간단치 않았다. 대야역처럼 그래도 어느 정도 규모가 되는 역도 아니고, 임피역처럼 문화재가 된 것도 아니다. 그래서 이정표도 따로 없다.그냥 그렇게 조용히 있다가 조용히 사라지고 있다. 그것이 오산리역의 일생이다.임피에서 넘어가려면 북쪽으로 크게 돌아 서수교차로에서 27번 국도에 올라탄 뒤 장신교차로에서 내려오는 방법과 제희미곡종합처리장 남쪽 삼거리에서 왕복 2차선 길을 타고 동쪽으로 가는 방법이 있는데, 전자 쪽 길은 속도를 내기 좋고, 후자 쪽 길은 철도와 최대한 가까운 거리를 유지하며 움직일 수 있다.북쪽에서 내려간다면 왼쪽에 오산초등학교가 나올 무렵, 남쪽에서 올라간다면 왼쪽에 농협이 나올 무렵이면 거의 다 왔다고 할 수 있겠다.그리고 철도와 나란히 서쪽을 향해 뻗은, 자동차 교행이 불가능한 좁은 길을 따라 200m쯤 들어가면 오산리역이라 쓰인 역명판을 만날 수 있다. 중간에 무인건널목이 하나 있다.오산리역이라는 이름은 물론 지명에서 비롯된 것이다.행정구역으로는 익산시 오산면 오산리인데, 여기서 오산은 한자로 五山인데, 오산면 측에 따르면 이것은 처음부터 다섯 개의 산을 가리키려던 이름이 아니고, 鰲山, 그러니까 자라산이 변한 것이라고 한다. 이는 이 지역의 주산 이름이다.오산역이 아니고 굳이 마을 리 자를 붙여 오산리역으로 지은 것은 물론 다른 지역에 오산역이 있기 때문이다. 경부선 오산(烏山)역이 그것인데, 이쪽은 무려 1905년에 문을 연 데다 규모도 훨씬 크고, 지명의 단위도 시급(경기도 오산시)이니 이쪽을 우대해도 이상할 것은 없다.눈에 띄는 것이 없었다. 보이는 것은 풀이 무성한 플랫폼(이었던 콘크리트 구조물)과 오산리역이라 쓰인 역명판, 그리고 이들을 지키려는 듯 빙 둘러 있는 철조망뿐이었다.철도산업정보센터 자료에 따르면 오산리역은 1931년 6월 15일 역원무배치간이역으로 처음 문을 열었다. 그냥 그랬다.이 역은 단 하루도 보통역이 된 적 없이 일생을 간이역으로만 살았다. 1964년부터 1972년까지는 역원이 배치돼 있었는데, 이 기간을 제외하면 등급은 쭉 역원무배치간이역이었다.역원이 배치된 적이 있으니 역사(驛舍)라고 할 만한 건물이 있던 시절도 있었지만, 대체로 시골 버스정류장 같은 조그만 시설물의 모습으로 알려져 있다. 이 점은 옛 군산선 동지인 개정역과 비슷하다.그러나 10월 18일 취재팀이 찾았을 때는 그 조그만 시설물조차도 사라지고 없었다. 이 시설물은 코레일 전북본부에 따르면 지난 2010년 철거됐다고 한다.플랫폼 방향으로 가서 보면 (오산리역과는 딱히 관련 없는)기록탑이라는 글자가 박혀 있는 조형물이 있고, 그 뒤로 조그만 공터를 남겨둔 채 민가가 자리하고 있다. 다만 꽃등에와 나방이 노란 돼지감자꽃 주위를 바쁘게 날아다닐 뿐이었다.철조망이 역을 감싸고 있었다. 그 철조망은 넝쿨이 감싸기 시작했다. 한때 사람과 작은 짐 보따리들이 오르내렸던 콘크리트 구조물은 이제는 아무도 밟을 수 없다. 사실 굳이 밟을 이유도 없다. 이곳에는 어떤 열차도 멈추지 않는다.2007년, 그러니까 군산선 통근열차가 다니던 마지막 해에 오산리역에서 열차를 탄 사람은 3128명, 여기서 내린 사람은 1724명이었다. 승하차 인원 합계가 4852명인데, 이는 개정역(3182명)보다는 조금 많고 임피역(8807명)에 비해선 절반 정도 수준이었다.승차 인원 대부분은 군산역으로 가는 사람이었고, 상행, 그러니까 익산 쪽으로 가는 열차를 이용한 이는 많지 않았다.그럴 만도 하다. 여기서 송학동 시가지까지의 직선거리가 2㎞를 조금 넘는 수준이고, 익산역은 3.4㎞, 익산 고속버스터미널시외버스터미널도 비슷한 거리에 있다. 익산시내 쪽으로 가고자 한다면 차라리 면사무소 쪽으로 조금 걸어나가면 있는 버스정류장에서 25번이나 76번 시내버스를 타는 게 나을 수도 있다.등잔 밑이 어둡다는데, 이런 것이 도시 옆에 바짝 붙어 있는 간이역의 운명일까. 딛고 있는 땅이 서울이었다면 전철역으로라도 생을 이어갈 수 있었을 텐데. 사실 옛 통근열차를 대신할 전북권 광역전철이 제안된 적도 있지만, 아직까지는 꿈일 뿐이다.2008년 1월, 철도가 금강 건너 장항선과 연결되고 군산선 통근열차가 폐지되면서, 오산리역은 그날로 여객취급이 중지됐다. 임피역이 서천~익산 새마을호로 생명을 넉 달 연장한 것과도 또 다르고, 이런 점에선 오히려 군산화물선에 앉아 있는 개정역 쪽과 비슷하다.남쪽 삼거리에서 동쪽 오산면사무소 방향으로 나와 평동로를 따라 약 500m를 가면, 이제부터는 철도와 도로가 마지막으로 나란히 달리는 구간이다.여기서 들판 넘어 남쪽 지평선 위로 익산~대야 간 복선철도가 놓일 다리가 보인다. 열차는 훨씬 빨라질 것이고, 또 더 많은 수가 지나다닐 것이며, 철도는 도로와는 꽤 멀어질 것이다.철길 옆 코스모스가 흔들흔들 춤을 추는 그 광경 뒤로 익산 도심이 보이기 시작한다.전북제일고와 이리중학교를 옆구리에 끼고, 철도는 호남에서 가장 바쁜 역, 장항선의 종착역을 향해 마지막 커브를 그린다.

  • 기획
  • 권혁일
  • 2016.10.28 23:02

[철도기행: 임피역 편] 멈춘 시간과 멈추지 않는 열차들

뿌옇게 흐린 공기의 저편, 서쪽 대야 방향에서 붉은 기관차가 달려오고 있었다.붉은 기관차가 푸른 화차를 끌고 노란 들판을 가로질러 내달리는 총천연색의 풍경이 퍽 인상적이었다. 하늘의 빛만 분명했다면 완벽했을 텐데.무당벌레를 닮은 7600호대 디젤기관차 두 대가 나란히 붙어(이를 중련이라고 한다) 힘을 합쳤다. 손가락으로는 다 셀 수 없을 정도 되는 수의 화차가 달달달 끌려 익산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열차가 지나가는 것은 금방이었다. 역은 다시 조용해졌다.미즈호와 이엽사그리고 농민들점심시간에 잠시 짬 내서 와봤는데, 그냥 신기해요.안내판을 들여다보던 방문객 일행은 이렇게 말했다. 혹시 과거 임피역을 이용해본 적이 있는지 묻자, 일행 중 한 명이 여기 열차가 서느냐, 안 서지 않냐고 반문했다.사실 와본 적도 없고, 들어본 적도 없어요.아는 사람은 알지만, 또 모르는 사람은 모른다. 역으로서의 삶이 사실상 끝난 간이역의 숙명일 것이다.1912년 3월 6일, 군산선이 개통되면서 군산역과 대야역이 개통 원년멤버로 문을 열었다. 그리고 12년이 지나 1924년 6월 1일, 임피역이 역원배치간이역으로 영업을 개시했다.임피역이라는 간이역이 필요했던 것은 역시 쌀 수탈 때문이다. 지금 봐도 너른 들판이 펼쳐져 있는 이 지역에는 일제 강점기 일본인 지주들의 농장이 있었다.그중에서도 잘 알려진 것으로는 지금도 서수라는 지명에 남아 있는 서수촌(瑞穗村), 그러니까 미즈호라고 읽는 농장이 있다.가와사키 토타로(川崎藤太郞)라는 일본인 상업가는 1904년, 충남 연산 지역과 전북 옥구임피 지역의 땅을 대규모로 매입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05년 4월에 농장을 개설했다. 미즈호는 윤이 나는 싱싱한 이삭을 의미한다.가와사키는 농장 설립 4년 뒤에 자신의 고향인 니가타(新潟)에서 흙을 가져와 신사를 짓기도 했다고 한다.이후 가와사키의 농장은 1927년 이엽사 농장으로 합병되는데, 쌀 수탈에 앞장섰던 이엽사 농장은 농민들에게 수확량의 무려 75%를 소작료로 내라는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한다.참을 수 없던 농민들은 그해 11월 25일, 그러니까 농장 측이 정한 납부 기일에 소작료 납부 거부를 결의했다. 그러자 경찰이 다음날 농민조합 간부 장태성을 잡아 가뒀고, 이에 분개한 농민들이 임피역전 술산지서로 쳐들어가 장태성을 구출했다. 이어 서수지서이엽사를 연달아 격파했다. 그러나 이내 들이닥친 무장 경찰들은 농민들을 무더기로 잡아 가뒀다.이 사건은 옥구농민항일항쟁으로 역사에 기록된다.수탈의 실적은 꽤 쏠쏠했던 모양이다. 본래 간이역이었던 곳이 개업 12년 만인 1936년 11월에 보통역으로 승격하고 한 달 뒤에 번듯한 역사(그러니까 지금 서 있는 그 건물)도 들어섰으니 말이다. 이 건물은 2005년 11월에 국가 등록문화재(제208호)로 지정된다.통근열차와 새마을호 그리고그러나 보통역으로서의 삶은 반세기를 넘기지 못했다. 1985년에는 운전간이역으로 격하됨으로써 임피역은 간이역으로 돌아간다. 이후 1995년에는 역원배치간이역으로, 2006년에는 그나마 있던 역원도 철수해 역원무배치간이역으로 떨어졌다.그래도 군산~전주 간 통근열차가 운영되던 동안에는 다른 간이역들과 비교해볼 때 상황이 나쁜 편은 아니었다. 통근열차 운행 마지막 해인 2007년의 철도통계연보를 보면 임피역 승하차 승객 수는 8807명이었는데, 이는 군산선 역 중에서는 군산역(42만7800명)과 대야역(1만8801명) 다음으로 많은 수다.같은 해 군산~전주 구간의 역들을 보면 전라선 춘포역은 겨우 291명이 이용했을 뿐이고, 동산역은 7636명이 이용했다. 오산리개정역에서는 각각 4852명3182명이 타고 내렸다.2008년 1월 1일, 통근열차가 사라졌다. 그리고 동시에 아주 이상한 광경이 만들어졌다. 한국철도공사의 무인역 사상 최초로 정기편 새마을호(?!)가 서기 시작한 것이다.이것은 통근열차 폐지와 함께 코레일 측이 주민 편의를 위해 서천~익산 간 새마을호 열차를 대신 투입하면서 생긴 일인데, 그러나 이 희한한 상황은 채 그해 여름이 되기도 전에 끝나버리고 말았다.2008년 5월 1일, 서천~익산 새마을호 열차가 폐지됐다. 그리고 임피역도 오산리개정역의 뒤를 따라 여객 취급이 중지됐다. 2008년 철도통계연보에 따르면 그해 임피역의 승하차 인원은 47명. 마지막으로 태운 불꽃이라 하기엔 초라한 성적이었다.그리고 이곳의 시간은 멈췄다.이제 플랫폼에는 들어갈 수 없고, 열차는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이곳을 통과한다. 반대쪽 플랫폼은 흔적만 남았다. 언젠가 그 플랫폼에 닿아 있었을 측선도 사라진 지 오래다.시실리 시간이 멈추다임피역은 이제 유적지이자 관광지인 공간으로 변모했다.군산 구불길 2-1코스 미소길이 호원대와 이곳을 거쳐 남쪽 만경강을 향해 뻗어간다. 대야 방향으로 조금만 걸어가면 미소길 탐방쉼터도 나온다. 다만 취재팀이 찾아간 날은 쉼터 건물의 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군산시청에 따르면 이 쉼터는 2013년 개소 이후 식당 및 숙소 시설로 이용돼 오다, 구불길 탐방객이 줄면서 위탁 운영으로 전환된 뒤 계약이 만료된 상태라고 한다. 재입찰을 준비 중이라고.옛날 농민들이 이엽사 농장의 횡포에 항의하며 딛고 있었을 역 광장은 시실리 광장이 됐다. 시실리는 어쩐지 지중해의 어느 섬 이름 같다는 느낌적 느낌이지만, 여기서는 時失里, 시간을 잃어버린 마을이라는 뜻이란다. 이 이름표를 달고 있는 탑에는 거꾸로 가는 시계가 붙어 있다. 숫자가 시계 반대 방향으로 올라간다.광장 한쪽에 조그만 연못이 있는데, 이것은 연방죽이라 불리던 옛 방죽을 복원한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채만식의 소설을 모티브로 한 조형물도 군데군데 서 있다.이곳에서 가장 이질적인 것을 꼽자면 단연 주차장 뒤쪽에 세워져 있는 새마을호 객차 두 칸이 아닐까?어쨌거나 새마을호가 이곳에 서긴 했었고 또 사상 최초로 정기편 새마을호 열차가 서는 무인역이라는 타이틀도 있으니 그 나름대로 수긍은 가지만, 그래도 사람들의 기억 속 임피역은 동동동동 소리를 내며 굴러가던 통근열차와 더 어울리는 것 아닐까 하는 아쉬움이 든다.이 어색한 차량은 일종의 박물관처럼 꾸며져 있다. 군산선임피역과 군산, 일제의 수탈, 그리고 민중의 저항 등에 관한 것들을 볼 수 있다.역 주변, 노랗게 물든 논에서는 가을걷이가 한창이었다. 콤바인이 털털털 논바닥 위를 미끄러지는 풍경 뒤로, 이번엔 파랗게 칠해진 해랑 디젤기관차가 임피역에 서 있는 것과 비슷한 객차들을 등에 달고 지나간다.그 한참 뒤로는 새로 지어지고 있는 익산~대야 간 장항선 복선철도 구간이 보인다. 몇 년 뒤면 열차들은 논 옆이 아니라 땅에서 10m쯤 위, 곧게 뻗은 다리를 밟을 것이다.그렇게 되면 임피역은 정말로 역이 아니게 되는 것이다. 조금은 서운해질 지도 모르겠다.

  • 기획
  • 권혁일
  • 2016.10.22 23:02

[철도기행: 개정역·대야역 편] 경계를 타고 '큰 들' 속으로

인간을 태운, 바퀴 달린 탈것은 콘크리트와 아스팔트가 뒤섞인 구조물 위를 미끄러지듯 굴러가고 있었다. 차창 너머로는, 참말로 대체 며칠 만에 보는 것인지도 모르겠는 파란 하늘 밑으로 노란 평면이 꾸물대고 있었다. 대야. 이름 그대로 큰 들판 속으로 탈것은 굴러 들어갔다. 도시와 농촌의 경계를 타고 옛 군산선(군산화물선) 철길은 나운동 등 군산 시내 중심가를 지나 사정동으로 빠져나온다. 사정삼거리를 지나면 철길 남쪽으로는 널따란 논이 펼쳐지고, 전군도로로도 불리는 번영로가 철길 옆에 바짝 붙어 함께 달린다. 최근 결정된 전북대 병원 신축부지가 이 부근이고, 군산소방서가 여기에 있으며, 차도를 건너면 지난 2009년에 기아 타이거즈가 정규시즌 우승을 확정 지었던 월명 경기장이 있다. 농촌 풍경과 도시 풍경 사이의 경계를 이루는 것은 바로 군산화물선 철길이다. 지금은 열차도 다니지 않고, 또 각종 풀과 넝쿨이 레일을 휘감고 있어 당장은 열차가 다닐 수도 없는 상태지만, 그래도 철길은 철길. 아직은 엄연히 철도거리표에 올라 있는 노선이라 함부로 건드릴 수도 없다. 군산시 입장에선 이런 철길들은 도시의 발전을 가로막는 장애물이다. 도심인 수송동 일대는 군산화물선에서 갈라지는 옥구선 철길 때문에 도로 확장 하나도 하기가 어려운 실정. 그래서 장항선 연결 개통 이후 꾸준히 도심 철도를 철거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지만, 아무래도 군장국가산업단지 인입철도가 개통되기 전까지는 철거는 어려울 것이다. 철길에서 낭만을 찾는 사람이야 이 몇 년의 유예기간이 반가울 터지만. 그런 자신의 처지를 아는지 모르는지. 붉게 녹슨 철길은 들판의 가장자리를 타고 동쪽을 향해 곧게 뻗었다. 간이역의 일생, 개정역 군산에는 개정이라는 이름을 가진 행정구역이 두 곳 있는데, 하나는 개정동이고 또 하나는 개정면이다. 원래는 옥구군 개정면으로 한 덩어리였는데, 1973년에 옥구군의 개정면 개정리와 옥산면 사정리가 각각 개정동, 사정동이라는 이름으로 군산시에 편입되면서 이렇게 됐다. 1995년에 군산시와 옥구군이 합쳐지면서 옥구군 개정면이 군산시 개정면으로 바뀌었고, 그래서 결과적으로 한 기초자치단체 안에 같은 이름을 가진 행정구역이 두 개가 된 것이다. 옛 군산선 개정역은 개정동에 있다. 역이라고는 해도 사실 줄곧 간이역으로 있었으니 번듯한 건물 하나 찾기가 어렵다. 있어야 찾지. 개정파출소 맞은편에서 오른쪽으로 샛길 따라 들어가서 어림잡아 20m쯤을 걸어가면, 노란 들판 앞에 서 있는, 개정역열차야! 달려다오라고 쓰인 팻말이 눈에 들어온다. 물론 달려달라는 말을 들을 열차는 지금 이곳엔 없다. 통근열차가 다니던 시절에는 시내버스 정류장에서 볼 수 있는 벽돌로 된 간이 대기실이 있었는데, 지금은 그런 것도 없다. 단지 옛날 플랫폼으로 쓰였던 콘크리트 구조물이 있을 뿐이다. 철도산업정보센터에 따르면 개정역은 1924년 역원배치간이역 등급으로 문을 열었다. 근처에 구마모토 농장이 있었으니, 일제 강점기에는 나름대로 중책을 맡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후 수요 감소로 인해 1972년에는 무배치간이역으로 격하됐고, 2008년 1월 1일부터는 장항선 연결로 옛 군산선에는 여객열차가 다니지 않게 되면서 사실상 버려진 역이 됐다. 한편 개정역 주변에는 군산의 주요 역사문화유산 중 하나인 이영춘 가옥이 있다. 군산간호대학교 안에 있는 일본식 건물인데, 원래는 대지주 구마모토 리헤이가 지은 별장이었다고 한다. 조선총독부 건물의 건축비와 맞먹는 비용을 들였다고도 알려져 있다. 자혜의원 원장으로 부임해 개정 지역의 소작인들을 돌봤고 광복 이후에는 개정중앙병원(개정병원), 개정간호학교(군산간호대학교) 등을 세운 농촌보건위생의 선구자 쌍천 이영춘 박사가 이곳에 기거했다. 이제는 서울로 통하는 군산선 최후 생존자 머리 위로 29번 국도와 장항선 새 고가철도가 지나가고 나면 야트막한 고개를 하나 넘는다. 사실 딱히 고개라고 할 것까지도 없지만, 쭉쭉 뻗은 평야지대에 이 정도의 기복이면 고개라고 불러줘도 틀린 표현은 아닐 것이다. 대야는 문자 그대로 큰 들판이라는 의미로 붙은 이름이다. 면의 북쪽으로는 얕은 구릉 지대가 있지만, 남쪽으로는 마치 김제의 그것과도 같은 광활한 평야가 펼쳐져 있다. 개정뜰을 스쳐 달리던 철길은 북쪽에서 내려오는 장항선 새 철길과 만나 지경리 평야지대의 가장자리를 타고 흐르며 대야역에 닿는다. 대야역은 옛 군산역과 나이가 같다. 둘 다 1912년생, 개업일도 3월 6일로 같다. 그러니까 대야역 또한 군산선 개통과 동시에 문을 연 원년멤버인 셈이다. 물론 지금 있는 대야역 건물은 옛 건물 그대로는 아니고, 1991년에 새롭게 지어진 것이다. 전형적인 볼록할 철(凸)형 시골 기차역 형태를 갖고 있다. 70~80년대에 유행했던 역사 양식으로, 전북지역에서는 신리역이나 황등역에서 이런 모양을 볼 수 있다. 차이점이라면 신리역(1981년 준공)이나 황등역(1982년 준공)과 달리 대야역은 90년대에 유행한 적벽돌을 외장에 활용했다는 점 정도일까. 대야역의 본래 이름은 지경역이다. 개업 당시 등급은 개정역과 같은 역원배치간이역이었는데, 개업한 지 7달 만에 보통역으로 승격했다. 지금과 같은 대야역이라는 이름은 1953년에 붙여졌다. 대야역사(史)에 따르면, 대야역은 1940년대에 이른바 리즈시절을 보냈다. 여객 승하차 합이 1940년 한 해 36만 명이었고, 1942년에는 무려 64만여 명에 달한다. 참고로 2015년 군산역 여객 승하차 인원이 43만7266명이었다. 1940년대의 이 번영은 일본의 식민지배와 어떻게든 연관이 있었을 것이다. 화물 운송량을 보면, 1943년 발송화물이 1만1075톤, 이듬해인 1944년은 2만74톤이었다. 같은 해 도착화물이 각각 1251톤, 1745톤에 불과했다. 나간 화물의 대부분이 군산항을 통해 수탈된 쌀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대야역의 여객수송량은 그러나 이후 꾸준히 줄어, 2000년대에 이르면 승하차 합계 3만 명을 겨우 채울 수준이 되고 만다. 2014 철도통계연보에 따르면 지난 2014년 대야역의 여객 승하차 인원은 8362명. 개업 첫해인 1912년 승하차 인원이 3만4000여 명이었는데. 그래도 지금은 옛 군산선의 역 중 유일한 생존자다. 개정역, 임피역, 오산리역이 문을 닫고 군산역은 이사를 간 가운데, 대야역만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이다. 다만 역의 일부 기능이 축소됐다. 역사 서편에 남아 있는 넓은 공터가 그 증인이다. 2000년에 지어진 이 컨테이너 야드는 물론 대야역에서 화물을 취급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2008년 장항선 연결 개통 이후 화물 취급 기능을 새 군산역에 넘겨줬다. 지금은 장항선 무궁화호 열차가 하루에 상행 4회, 하행 5회 정차한다. 통근열차가 다니던 시절과 비교하면 많이 한적해진 것이긴 하지만, 여기서 열차에 한 번 오르면 서울(용산역)까지 갈아타지 않고 갈 수 있으니 어떤 면에서는 새로운 활기를 얻었다고도 할 수 있다. 서울까지 바로 가니까 편하지. 몸이 편치가 않아서 갈아타는 게 힘드니까. 용산행 열차를 기다리던 최모 씨 취재팀이 찾아간 10월 4일, 대야역 승객 대기실은 조용했다. 용산행 열차를 기다리던 두어 명과 취재팀뿐이었다. 평일인 데다, 철도 파업의 영향도 있었을 것이다. 하루 평균 30여 명? 주말이 되면 좀 많죠. 학생들, 그러니까 호원대 학생들은 주말에 많이 이용하고. 김성규 부역장(55)의 설명이다. 호원대는 사실 임피역에 더 가깝지만, 임피역에는 열차가 서지 않으니 대야역까지 가야 한다. 약 7㎞ 정도 거리라서 걸어 다닐 만한 것은 아니지만, 호원대에서 출발해 대야사거리를 지나 군산 시내로 들어가는 38번 버스를 타면 된다. 특히 여름에는 대천으로 가는 승객이 많다고 한다. 대천 또한 장항선 철도로 한 번에 갈 수 있으니 윈윈이다. 얼마 안 가 사라질 것들 역전 시리즈 간판들이 맞이하는 거리를 벗어나 대야검문소 사거리로 나선다. 이 길을 경계로 동북쪽은 산월리, 서남쪽은 지경리인데, 길을 건너 산월리로 들어서면 나오는 것이 매 16일 대야 5일장이 열리는 대야시장 거리다. 검문소 사거리 바로 동쪽에는 검문소 삼거리도 있다. 그 사이에는 철길이 지난다. 열차가 자취를 감춘 군산화물선 같은 것이 아니라, 하루 50여 차례 여객화물열차가 지나다니는 장항선 철길이다. 시장이 역 근처에 있는 것은 당연한 이치지만, 대야면을 관통하는 큰 도로의 가운데에 철길 건널목이 있다면 좀 불편한 것도 사실. 버스터미널도 이 근처에 있는데, 간혹 대야를 경유하는 군산~전주 간 시외버스도 건널목 차단기에 걸려 멈춰 서기도 한다. 거기에 장날이면. 그런데 건널목 관리원 신웅철 씨(62)의 답은 좀 쿨했다. 뭐 얼마 안 가서 없어지잖아요. 저쪽 복선전철 지어지니까. 옛 군산선 단선 철길을 쓰는 장항선 익산~대야 구간을 대신할 복선 철도 공사가 진행 중인데, 군장국가산업단지 인입철도가 이 새 장항선 복선 철길에서 분기할 예정이다. 2018년 완공 예정인데, 한두 해 정도는 미뤄질 가능성도 있다. 어쨌든 그때가 되면 대야역도 새 철길 곁으로 옮겨갈 것이고, 대야건널목도 사라질 것이다. 그래도 다행히 대야역의 기능은 보존된다고 한다. 여기는 아직인데, 임피 넘어서 까지는 노반 공사가 많이 진척이 됐어요. 여기도 없어지겠죠. 포철에서 이거 다 조사해갔어요. 들판이 황금빛으로 물들어가는 풍경 속에서, 대야역은 그렇게 백 년 넘게 지켜온 자리, 이제 얼마 뒤면 비워줘야 할 자리에 그렇게 그대로 앉아 있었다.

  • 기획
  • 권혁일
  • 2016.10.07 23:02

[철도기행: 군산항선 편] (부록)군산 근대역사문화거리, 꼭 가봐야 할 6곳

시간여행의 기점은 역시 군산 근대역사박물관이다. 시간여행! 군산 근대항 스탬프 투어도 근대역사박물관에서 시작하고 말이다.군산시 관광진흥과가 배포하는 근대역사문화거리 관광안내도도 근대역사박물관을 중심으로 그려져 있고 이 박물관을 중심으로 도보 8분권, 15분권, 20분권 등 권역이 표시돼 있는 것을 보면 애초 군산시의 의도가 이것이었던 것 같다.이곳에서 출발해 발길 따라 20분 거리, 군산 근대역사문화거리에서 꼭 가봐야 할 곳을 (앞선 기사에서 소개한 곳은 빼고)여섯 곳 골라봤다. 마침 오는 30일부터 10월 2일까지 군산 시간여행 축제가 열린다.옛 군산 세관 본관앞선 기사에서 소개한 군산 근대건축관(옛 조선은행)이나 근대미술관(옛 제18은행) 등을 제외하면, 군산 근대역사박물관에서 출발하면 아마 가장 먼저 들르게 되는 곳이 이곳 아닐까. 박물관 바로 옆에 있으니 말이다. 특히 스탬프 투어에 욕심을 낸다면 근대역사박물관에 이어 두 번째로 들러 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군산항이 열린 것은 1899년. 개항이라는 말은 항구가 열린다는 뜻인데, 이 항구는 무역항을 말하는 것이었다. 무역에는 통관 절차와 관세가 따르고, 이런 업무를 맡아 보는 기관도 필요했을 터다. 그래서 세워진 것이 이 군산 세관이다.1908년 지어진 옛 군산 세관 본관 건물은 지금은 호남관세전시관으로 쓰인다. 아담한 서양식 단층 건물인데, 석재와 벽돌이 적절한 비율로 쓰여 고풍스러우면서도 세련된 느낌을 준다.세관이라는 기관의 특성상 군산항을 통해 이뤄졌던 수탈의 기록을 담고 있다.또 군산 세관이 적발한 각종 신묘한 물건들을 전시해놓은 곳도 있는데, 석궁이나 총 같은 위험한 물건부터 호랑이 탈(...), 비아그라(...) 같은 물건들도 볼 수 있다.얼핏 보고 지나가면 모를 수도 있겠는데, 세관장실에서 제복을 입고 코스프레를 해볼 수도 있다. 인스타그램에 이런 인증샷 한 컷쯤 올리는 것도 재미지 않을까.빈해원과 이성당군산 맛집이라 하면 중화요리 전문점 이름이 여럿 나온다. 짬뽕 명가만 해도 벌써 복성루, 쌍용반점, 용해장, 수송반점 같은 이름들이 술술 나오는데, 역시 항구도시라 그런지 다들 해산물을 잘 쓰기로 정평이 나 있다.쟁쟁한 군산 중화요릿집 가운데서도 특별한 한 곳을 꼽자면 아무래도 빈해원을 꼽아야 할 것 같다. 1952년 개업, 엄연히 군산 역사의 한 축을 맡고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지난 2010년 개항 111주년을 맞아 군산시청이 선정한 군산 기네스에서 가장 오래된 중국집으로 선정되기도 했다.)군산 근대건축관(옛 조선은행)에서 길을 건너면 나오는 빈해원은 겉모습은 초라하다.아무리 봐도 그냥 평범하고 오래된 중국집 정도의 인상이지만, 안으로 들어가면 얘기가 달라진다.2층 구조인 식당 안으로는 넓은 홀이 나오고, 옛날 여관을 연상시키는 작은 방이 좌우로 늘어서 있다. 그 양식이 마치 중국에 있는 건축물을 그대로 들어다 심어놓은 것처럼 돼 있어 인상적이다. 꽁시파차이라고 읽는 恭喜發財 글씨가 붙어 있고 붉은 등이 여럿 걸려 있는 것을 보면 영락없다.이곳의 대표 메뉴로는 역시 짬뽕을 꼽을 수 있다. 짜지 않으면서 칼칼한 것이 퍽 자연스러워 그릇째 들고 들이키게 된다. 물론 탕수육, 별미고추초면 역시 널리 입소문을 타고 알려진 주력 상품이다.카테고리는 조금 다르지만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빵집인 이성당 또한 군산 여행에서 놓칠 수 없는 맛집이다.광복을 맞은 해인 1945년에 이성당이라는 이름으로 개업한 이 빵집은 군산은 물론 우리나라 전체를 놓고 봐도 가장 오래된 빵집이다.전주에서는 관광객들이 죄다 PNB의 주황색 종이봉투를 들고 다닌다고 하면, 군산에서는 이성당의 노란 종이봉투가 정확히 그 자리에 놓인다고 보면 된다.이성당을 찾을 때는 두 가지만 기억하면 된다. 팥, 야채. 팥 앙금빵과 야채빵이 워낙 유명하다 보니 이 두 가지를 찾는 손님을 위한 대기 장소가 따로 마련돼 있을 정도다.달달하면서 깊은 맛이 나는 팥 앙금은 여름에는 빙수에도 올라가는데, 이 역시 일품이다.물론 이성당 역시 군산 기네스에 등재돼 있다.고우당이 고우당께형용사 곱다는 고와 -ㅂ, 그리고 -다로 이뤄져 있다. 활용 때에는 고운, 고우니 등과 같이 우가 붙곤 하는데, 이는 -ㅂ이 변한 것이다.가끔 이것이 사람들 입에서 고우다, 고우당께 등으로 나오기도 한다. 추+우+ㅓ인 추워가 가끔 추+ㅂ+ㅓ, 추버로 나오기도 하는 것의 역에 해당한다고 하겠다.군산 근대역사문화거리 한가운데에 위치한 근대역사체험공간 고우당은 한자로 古友堂, 그러니까 옛 벗 집인데, 전라도 사투리 고우당께를 표현한 것이라고도 한다.지난 2012년 문을 연 고우당은 이듬해 제2회 군산시 건축문화상에서 아름다운 건축물 부문 금상을 받을 정도로 곱다.옛 가옥을 고쳐 다듬은 일본식 건물이 모여 있으니 꼭 일본에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게스트하우스로 알려진 고우당의 핵심은 물론 숙박공간이다. 다다미가 깔려 있고 겨울에는 코타츠(일본식 탁자형 난방기구)가 놓이는 일본식 공간인데, 그 이국적인 모습이 신선하다.건물들 가운데 놓여 있는 정원은 정원을 둘러싼 일본식 건물과 연못, 징검다리와 나무가 어우러져 아름다운 경관을 선사한다. 취재팀이 방문한 날은 구름이 많이 꼈지만, 하늘이 새파란 날이나 눈이 많이 쌓인 날이라면 더욱 아름답다.고은 시인의 동명의 시에서 이름을 따온 선술집 세노야와 편의점, 카페가 딸려 있다. 또 히로쓰 가옥이나 동국사, 창작문화공간 여인숙 등 주변 명소와도 가까워, 군산 시간여행의 거점으로 삼기에 손색이 없다.동국사의 아이러니담장 위, 분홍빛 꽃이 몽글몽글 달린 배롱나무 가지를 따라 시선을 움직이면 경사로 끝 대문을 지나게 된다. 이어 오른쪽으로 시선을 다시 옮기면, 작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웅장하게 아주 큰 것도 아닌, 그러면서 또 뭔가 지붕 모양이 이질적인 건물을 마주하게 된다.동국사는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유일한 일본식 사찰이다. 동국사의 모체는 1909년 일본 조동종 계열 승려 우치다(內田)가 세운 금강선사라고 하는데, 현재의 자리에 세워진 것은 1913년이다. 그러니까 동국사 대웅전이 지어진 지는 올해로 103년이 지난 셈이다.건축 당시 일본인 승려가 일본에서 건축자재를 들여와 지었다고 하는데, 그렇게 듣고 보니 더욱 일본스러운 느낌이다.그러나 이 일본인이 일본산 자재를 가지고 지은 일본식 사찰의 모습을 완성하는 것은 따로 있었다. 바로 범종각 근처, 대문에서는 곧바로 정면에 위치한 참사비와 소녀상이다.지난 2012년, 일본 동국사를 지원하는 모임이 주관해 이 비석을 세웠다(관련기사 : 日 불교종단 동국사에 '참사비' 제막). 제막식이 열린 날은 9월 16일이었는데, 그날이 바로 동국사 창건 기념일이었다.참사비에는 그보다 20년 전인 1992년에 발표된 참사문의 일부가 적혔다. 참사문이란 참회와 사죄의 글이라는 뜻이다. 전쟁이 끝난 것이 1945년이었으니, 좀 늦은 감이 있다.우리 조동종은 명치유신 이후 태평양 전쟁 패전에 이르기까지 동아시아를 중심으로 아시아 전역에서 해외포교라는 미명 하에 당시의 정치권력이 자행한 아시아 지배 야욕에 가담하거나 영합하여 수많은 아시아인들의 인권을 침해해 왔다. (중략) 과거 일본의 억압 때문에 고통을 받은 아시아 사람들에게 깊이 사죄하면서 권력에 편승하여 가해자 입장에서 포교했던 조동종 해외 전도의 과오를 진심으로 사죄하는 바이다.2012년 참사비 제막식에 참석한 이치노헤 쇼코(一戶彰晃) 스님은 당시일본 불교계는 근대화를 추진하는 일본의 국가 권력에 협력하여 전쟁에 가담했다. 지울 수 없는 커다란 상처를 동아시아에 남긴 점을 참회하며 사죄드린다고 말했다(관련기사 : "일제 강점기 과오, 용서 빕니다" 군산 동국사 '참사문비' 건립 日 이치노혜 쇼고 스님). 또 과거 침탈 자료들을 군산시에 기증하기도 했다.참사비 앞에는 평화의 소녀상이 서 있다. 일본군이 강제로 동원한 이른바 위안부 문제를 상징하는 것이다.지난해 세워진 이 소녀상은 두 발로 땅을 딛고 서서 먼 곳을 응시하고 있다. 그 시선은 대웅전 옆 요사채에 가 닿는다. 대웅전과 연결돼 있는, 일본인이 일본산 자재로 지은 일본식 건물이다.제국주의와 국가 가부장제가 만들어낸 이 거대한 집단 성폭력 사건은 여전히 해결되지 않고 있다. 아무도 일본 정부가 건네는 10억 엔을 참회와 사죄의 표시로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한편 동국사는 그 자체도 많은 사람이 찾는 명소지만, 고우당에서 길 건너 올라오는 동국사길 전체가 또 훌륭한 문화예술 거리다. 1960년 개업해 2006년까지는 상봉여인숙이었던 문화창작공간 여인숙이 이 길에 있고, 발달장애 대안학교인 산돌학교가 있다. 같은 건물에 산돌갤러리와 고은 시화전시관이 있다.아수라발발타 신흥동 히로쓰 가옥어릴 적에는 주위 사람들이 히로쓰 가옥, 히로쓰 가옥 하니까 히로쓰라는 말이 어떤 건축 양식을 가리키는 말인 줄 알았다. 그게 아니라 이 집을 세운 히로쓰 게이샤부로라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얼마 되지 않은 일이다.지금은 신흥동 일본식 가옥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이 집은 2층짜리 목조 건축물 두 채와 정원으로 구성돼 있다. 정원은 규모가 크지는 않지만 돌과 나무의 배치가 꽤 조화롭다. 조그만 석탑은 귀여운 느낌마저 든다.이 집을 지은 사람이 포목점과 농장을 운영하던 지주였으니, 이 건물과 정원도 결국 농민 수탈의 결과물이라 할 수 있겠다.눈썰미가 좋은 이들에게는 낯이 익을 수도 있다. 바로 영화 타짜에서 고니(조승우)가 평경장(백윤식)에게 도박을 배우던 곳이다. 아수라발발타 하는 소리가 문득 귀를 스친다.사실 이 일대에는 이런 일본식 가옥이 여럿 있다. 그냥 길을 걷다가도 뭐가 보여서 보면 그게 일본식 가옥이고 그렇다.이를테면 옛 조선주조 군산 분공장이 있던 건물은 지금 게스트하우스로 쓰이고 있다. 고우당 인근 사거리에 위치한 관광안내소나 동국사길 들어가는 입구 즈음에 위치한 군산항쟁관도 일본식 건물이다. 길 가다 마주친 조그만 상가 건물이 뭔가 평범하지 않은 것 같아서 보면 일본식 건물이다. 이런 것들이 거리 발 닿는 데마다 하나씩 있으니 묘한 기분이 든다.시간여행이라면 시간여행이랄 수 있지만, 그 기분을 조금 더 엄밀하게 말한다면 시간의 모자이크라고 할까. 1900년대의 조각과 1930년대의 조각과 1960년대의 조각과 2000년대의 조각이 무심한 듯 시크하게 붙어 있는 느낌이다.그 시대에 고정된, 어떤 잘 통제된 그런 박제된 것이 아니라, 한 블록을 걸어도 100년의 시간을 관통할 수 있는, 그런 살아있는 거리. 그것이 군산의 근대역사문화거리라 하겠다.<끝>

  • 기획
  • 권혁일
  • 2016.09.13 23:02

[철도기행: 군산항선 편] 탁류 따라 덜컹덜컹, 100년을 관통하다

다른 도시보다 보존이 잘 돼 있는 게 매력인 것 같아요. 일본식 가옥이나 철길에서 옛날 분위기를 느낄 수 있어요. 보통 관광지라고 하면 명소 한 군데만 꾸며놓는데, 군산은 그쪽(근대역사문화지구) 분위기가 다 그래서 좋아요.대전에서 온 백모 씨김모 씨(25) 커플은 군산에서 받은 느낌을 이렇게 정리했다. 군산시가 내세우는 시간여행이라는 말이 문자 그대로인 것이다. 근현대사를 관통하는 100여 년 세월, 군산의 구도심 지역에는 켜켜이 쌓인 그 시간이 그대로 겹쳐 있었다. 그리고 그 가운데로 철길이 지나고 있었다.경암동을 지난 철길은 쭉쭉 대명동 옛 군산역(군산화물역)을 향해 뻗어 있었다.군산 화력발전소 방향으로 난 지선이 하나 보였는데, 골목을 채 다 빠져나가기도 전에 아스팔트에 묻혀 사라져 있었다. 이 선로는 군산 화력발전소 인입선으로, 지금의 화력발전소 자리에 있던 옛 화력발전소가 지어질 때 함께 건설된 것이다.풍경은 바둑이와 나비가 노는 여느 골목길과 다를 바 없었다. 가운데 철길이 지난다는 것만 빼면.철길은 경안천 다리와 주차장을 지나며 마침내 자취를 감춘다.도로는 철로를 간단히 밟고 넘어가 구시장로와 중앙로(전군도로라 불리던 번영로에서 곧장 이어지는 길)에 연이어 닿는다.신작로가 철로를 밟고 넘은 자리, 도로 좌우에는 녹색 철문이 걸려 있었다. 철문 너머로는 잡초가 무성한 가운데, 붉게 녹슨 레일이 가만히 앉아 있었다.서쪽으로는 역전종합시장이라 쓰인 건물과 오래된 듯 보이는 상점 건물들과 널따란 주차장이, 동쪽으로는 굴러다니는 자갈과 웃자란 풀과 조그만 콘크리트 건물이 있었다.옛 군산역(군산화물역)이 있던 자리다.군산역은 1912년 3월 6일 문을 열었다. 전주역이 처음 개업한 것이 1914년이었으니 전북지역에서는 꽤 이른 것이다.물론 군산선 철도와 군산역이 먼저 개통된 것은 순전히 일본 측의 편의 때문이었다.군산은 개항장이었기 때문에 일본인이 많이 살았으므로 여객 수요도 충분했고, 군산항은 호남 지역에서 몇 안 되는 근대 항구였으므로 화물 수요도 충분했다. 그 화물 수요라는 것은 사실상 미곡 수탈과 등치 된다.군산선은 여기서 군산 내항 방향으로 다시 뻗어가고, 또 이곳에서 남쪽 옥구 방향으로도 뻗는다. 이 철도가 옥구선인데, 옥구는 일제 강점기 일본인이 경영하던 대농장이 있던 곳이다.군산역은 한국전쟁 중에 소실됐다가 1960년에 흔한 콘크리트 상자 모양으로 다시 지어졌고, 그 뒤로 47년 더 이용되다가 2008년 1월 1일 여객 기능을 내흥동 새 역으로 넘기고 군산화물역이 됐다. 그리고 2010년 말에 마침내 완전히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열차가 다니지 않게 되면서 굳이 있을 필요가 없게 된 팔마고가차도도 사라졌다.9월 6일, 옛 군산역 자리를 다시 찾았다.어느 도시나 철도역 주변부터, 그러니까 역세권부터 상권이 형성되기 마련이다. 이른바 역전 그룹이라 불리는, 역전 ○○류 상호를 필두로 다양한 상점들이 들어서곤 하는데, 군산 역시 마찬가지였다.무성한 풀이 덮어버린 옛 군산역 플랫폼을 떠난 철길은 다시 단선으로 합쳐지며 역전종합시장과 군산 공설시장 곁을 스쳐 지나간다.작은 가열로를 갖춘 대장간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마치 큰 돔구장을 연상시키는 디자인을 한 군산 공설시장 건물이 뒤이어 눈에 띈다.구시장이라 불리는 역전종합시장과 군산 공설시장은 연속돼 있다. 그 사이에 양키시장도 있다. 더 나아가면 신영시장도 연속 선상에 있어, 군산선군산항선 철길과 구시장로를 따라 대명동과 흥남동, 신영동을 아우르는 거대한 상권이 형성돼 있다.철길을 계속 따라가면 째보선창 삼거리에 이른다.얼핏 보기엔 삼거리보다는 오거리 정도에 가까운 구조인데, 아스팔트에 파묻힌 철길이 유유히 도로를 가로지르고 있었다.째보선창이라는 말이 재미있는데, 여기서 째보의 어원에 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대중적인 설은 언청이, 그러니까 구순구개열을 가진 이를 가리키는 멸칭 째보에서 왔다는 설이다. 구순구개열을 가진 힘이 센 사람이 이곳 상인들에게 돈 상납을 요구하곤 해 이 일대를 째보선창이라 부르기 시작했다는 얘기가 전해진다.혹은 강 물줄기가 옆으로 째져서 째보로 부르기 시작했다는 얘기도 있고, 옛 지명 진포가 찐포로 변하고 이것이 다시 째보로 변한 것이라는 얘기도 있다.확실한 것은 없다.째보선창을 죽성포구라고도 하는데, 이 이름은 근처의 죽성동이라는 지명과도 연결된다. 정작 째보선창은 죽성동이 아니라 금암동에 있다.지금은 콘크리트로 덮였기 때문에 포구의 모습을 볼 수 없다. 바다를 보려면 조금 더 걸어가야 한다.바닷물은 쭉 밀려나 있었다.어선 몇 척이 넓게 펼쳐진 펄을 깔고 앉아 있었고, 드러난 갈색 내지는 고동색 육지 위를 셀 수도 없을 정도로 많은 게가 바삐 오가고 있었다. 그게 다 갈매기 뱃속으로 가는 것인지, 뒤뚱뒤뚱 움직이는 갈매기가 도심 닭둘기 뺨치도록 투실투실하다.철길은 해안과 나란히 달렸다. 왼쪽에는 일본식 창고 건물이 있었다. 이 건물은 일제 강점기에는 중본상점(中本商店)이었다고 한다. 아마 나카모토 쇼텐이라고 읽었을 것이다.철길은 이즈음에서 여러 갈래로 갈라져서, 오른쪽에 진포해양테마공원을 두고 널따란 공터로 진입한다. 여기는 군산부두역이 있던 자리다.군산부두역은 조선총독부 관보 고시에 따르면 1943년 12월 1일에 영업을 시작했는데, 군산항의 역사에 비교해 보면 개통이 너무 늦다. 사실 군산항역은 1931년 8월 1일에 먼저 개통됐다. 12년 동안 그렇게 활용되다가 이후 이곳에 기능을 넘긴 것이다.곽동근 군산시청 근대문화시설계장은 흔히 생각하는 것 같은 역사(驛舍)가 있었던 게 아니라, 쌀을 싣고 내릴 수 있는 시설(플랫폼)을 갖춘 곳으로 본다고 말했다.군산항역은 도선장 쪽에 있었습니다. 규모는 작지만 대합실도 갖추고 여객 업무를 포함한 기능을 했을 것으로 봅니다. 부두역은 쌀을 내리기 위해 부두 쪽에 만든 것이지요. 저 어렸을 적만 해도 해양공원 쪽에 큰 창고가 많이 있었거든요. 지금은 없어졌지만.공터는 지금은 주차장이 돼 있는데, 플랫폼 또는 화물 창고의 기능을 했던 곳이다. 그렇다면 이곳엔 과거에는 군산항을 통해 일본으로 빠져나가는 쌀가마가 그득그득 쌓여있었을 것이다. 실제로 군산 근대역사박물관의 사진 자료(링크: http://museum.gunsan.go.kr/content/sub04/04_02.do?act=view&Id=181&tct=04&page=9)에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다.군산부두역 터에서 바다 방향을 바라보면 함포가 사용된 최초의 해전이라 불리는 진포대첩을 기념하는 진포해양테마공원이 보인다.뜬 다리 부두, 그러니까 부잔교라 불리는 구조물이 먼저 눈에 들어오고, 또 커다란 함선과 그보다는 좀 작은 해경 경비정이 놓여 있다.그리고 전차, 자주포, 전투기 등 병기들이 함께 이 테마공원을 장식하고 있다. 전쟁박물관도 아닌데 육해공을 아우르는 다양한 병기들이 전시된 것이 조금 생경했지만, 화약과 포를 연결고리로 묶어 보면 또 아주 이해를 못 할 바는 아니겠다. 물론 대체 이곳의 정체성이 뭐냐고 묻는다면 음, 대답하기가 쉽지는 않을 듯하다.전시된 함선은 미국과 한국 해군이 사용하던 LST(전차상륙함) 위봉 호다. 1945년 1월생으로 제2차 세계대전의 막바지부터 두루두루 거쳐 온 역전의 용사다.함 내부에 들어가 볼 수 있고, 스탬프를 찍을 수도 있다. 군산 근대역사박물관을 먼저 들러 스탬프 투어 용지를 받아 와서 찍어보는 것이 좋겠다.교통이 편리한 곳에는 상권이 발달하고, 상권이 발달한 곳에는 돈이 모이며, 돈이 모이는 곳에는 금융기관이 들어선다.철길 바로 남쪽에는 일본식 건물이 여러 채 서 있는데, 그중 하나가 옛 조선은행 건물이다.지난 2013년 보수복원을 거쳐 지금은 군산 근대건축관으로 쓰이고 있는 이 건물은 1922년 지어진 건물인데, 지금 기준으로 보아도 꽤 세련된 외관을 하고 있다.벽돌과 석재로 구성된 이 2층짜리 건물 안에는 옛 군산역 등 근대 건축물 모형사진 등과 과거 일제 강점기의 수탈 상을 보여주는 자료가 전시돼 있다.특히 눈길이 가는 것은 옛 건물의 벽체를 그 자리 그대로 보존해 유리 벽을 둘러쳐 놓은 부분이다. 단지 단순한 벽체요 창틀일 뿐인데, 과거와 현재가 손을 맞잡고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은행이라면 또 옛 일본 제18은행 건물을 빼놓을 수 없겠다.일본 제18은행은 나가사키에 본사를 두고 있던 은행으로, 나가사키 18은행 또는 나가사키의 한자 표기(長崎)를 따서 장기 18은행으로 부르기도 한다.왠지 기분이 나쁜 숫자 18은 일본에서 18번째로 설립 인가를 받은 은행이라는 의미라고 한다. 1907년 설립된 군산 지점은 제18은행의 7번째 지점이었다.이 건물은 1911년 준공됐는데, 1936년 지점 폐지 이후 조선식산은행에 팔렸고, 이후 다시 조선미곡창고주식회사가 매입해 쓰기도 했다. 조선미곡창고주식회사는 대한통운의 전신이다.지난 2008년 보수복원 후 군산 근대미술관으로 쓰이고 있는데, 건물 뒤쪽으로 나가면 금고를 볼 수 있다. 금고 위에 적힌 글귀가 인상적이다.이 금고가 채워지기까지 우리 민족은 헐벗고 굶주려야만 했다.전라북도는 1910년 기준 일본인 소유 경지면적 비율이 18.92%로 2위 전남의 세 배에 달했다. 군산항을 통해 유출된 미곡은 1926년 137만 석, 1933년 179만 석이었고, 1934년에는 200만 석에 이르렀다. 이는 조선 전체 쌀 생산량의 20%를 넘는 것이었다.근대미술관 주변으로 장미갤러리, 옛 미즈상사(현 미즈카페), 옛 조선미곡창고주식회사 창고(현 장미공연장) 등 일제 강점기 건물들이 한 블록 안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데, 이 모양만으로도 꽤 신선하다. 마치 군산이 아니라 어디 일본 나가사키에라도 온 것 같은 느낌이 든다.그리고 그 중심에는 군산 시간여행의 기점인 근대역사박물관이 있다.지난 2011년 문을 연 근대역사박물관은 지난해 무려 81만5337명이 찾은 관광 명소이자 근대역사지구의 구심점이다.특히 3층 근대생활관은 1930년대 군산을 충실히 재현해 놓았기 때문에 이곳에서 시간여행 튜토리얼을 경험해 봐도 좋을 듯하다.군산부두역 터를 지나온 철길은 근대역사박물관 건물 뒤로도 몇 가닥 뻗어 있다.여기서 끝나는 레일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거의 파묻혀 있던 레일의 끝부분은 위로 들려 있다.그 바로 옆 목화밭 건너편에는 어디에 있던 것인지 걷힌 레일과 폐침목이 쌓여 있고, 그 뒤로 보일 듯 말듯 철길이 지나고 있다. 원래 해망동까지 이어져 있던 철길은 그러나 더는 나아가지 못하고 이내 자취를 감춘다.선로의 끝단이 가리키는 곳에 군산 세관이 서 있다. 1908년 지어진 세관 옛 본관 건물은 벽돌로 지어진 아담한 서양식 단층 건물로, 지금은 호남관세전시관이라는 문패를 달고 있다.철길을 따라온 쌀은 이곳을 거쳐 강철로 된 배에 실려 바다로 나갔다.쌀이 떠나고, 한국전쟁 이후 군산부두역이 기능을 잃으면서 기차도 떠나고, 1979년 군산 외항이 개항하면서 큰 배들도 떠나고, 그리고 그 모두가 지나야 했던 세관은 108년째 말없이 그 자리에 있다.

  • 기획
  • 권혁일
  • 2016.09.09 23:02

[철도기행: 군산역 편] 시간이 멈춘 곳, 금강 물은 흐르네(2)

1919년, 구암동산의 함성다시 금강을 따라 하류 방향으로 내려오는 길, 바람은 왠지 아까보다 더 세진 듯했다.원래 누워 있던 것인지 아니면 바람이 너무 세서 누워버린 것인지, 강변의 소나무 몇 그루가 피사의 사탑보다도 더 위태로운 모양새로 간신히 버티고 서 있었다.구암동 방향으로 나오면 건설 중인 동백대교(가칭 군장대교로 알려져 있지만 지난 3월 동백대교가 공식 명칭으로 결정됐다)의 아치형 구조물이 명확하게 보인다. 그 왼편, 그러니까 안쪽에 군산항을 비롯한 군산 구도심이 놓여 있는데, 이쯤 되면 아무래도 강이라기보단 바다에 가깝다고 하겠다.그래서 그런지 아니면 그냥 기분 탓이었는지, 구암동 쪽으로 접어들면서는 약간 비릿한 바다내음이 느껴지는 듯도 했다.구불길이 찻길과 만나는 지점에서 횡단보도를 건너서 다시 서쪽으로 100m쯤 걸어가면, 구불길 이정표가 묘한 곳에 서 있는 것을 볼 수 있다.웬 아파트 단지 같은 곳으로 안내하는 이 푯말을 따라가면, 다시 웬 놀이터를 지나 웬 산길에 다다르게 된다.따라 올라가면 이번엔 널따란 잔디밭이 나오고, 다시 푯말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걸어가면 조형물이 하나 눈에 들어온다.이곳은 한강 이남 최초의 31운동이라고 하는 구암 35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난 구암동산이다. 구암 역사공원으로 조성돼 있는 이곳에는 이를 기리는 조형물과 관련 내용을 기록한 비석이 세워져 있다.1899년 군산항이 열림으로써 군산은 개항장이 됐다.대한제국이 확실한 주권을 행사하는 가운데 개항장이 됐다면 국제도시로서 우뚝 서고 좋았겠지만, 물론 우리는 역사를 통해 그런 것이 아니었음을 알고 있다. 애초 개항 자체가 일본의 압력에 의해 이뤄진 것이니 군산은 순식간에 수탈의 장이 되고 말았고, 이는 1910년 한일 병탄 이후 더욱 심해졌다.군산에 철도가 놓인 것부터가 원활한 수탈을 위한 것이었으니 더 무슨 말이 필요했을까.31운동이 일어난 1919년 군산의 인구는 1만3614명이었는데, 한국인은 6581명이었고 일본인은 6809명, 외국인이 214명이었다. 일본인이 한국인보다 228명 많았다.군산에서 한강 이남 최초로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난 데에는 아무래도 이런 배경의 영향이 있었을 것이다.구암 역사공원 인근에는 구암 31운동 기념관도 있으니 함께 찾아가 보는 것도 좋다.열차 대신 사람이 밟는 경암동 철길구암동에서 서쪽으로 계속 걸으면 더는 금강을 따라가지 못하는 지점이 나온다. 아직 연안도로가 공사 중이기 때문이다.공사장에서 날아오는 흙먼지를 적절한 움직임으로 피하며 구암31로라는 이름이 붙은 길을 따라 쭉 가다 보면 연안사거리를 만나게 된다. 그 오른쪽이 경암동 철길마을이다.바닥에 깔려 있는 철길은 원래 세풍제지선 또는 페이퍼코리아선이라 불리던, 군산선의 지선이다. 경암동 페이퍼코리아 공장으로 들어가는 철도로, 2008년 6월까지는 화물열차가 지나곤 했다.1944년 처음 이 선로가 깔릴 때만 해도 철길 주변은 군산이라는 도시의 외곽에 해당했겠으나, 이후 해방과 산업화를 거치며 도시 속으로 묻혔다.단선 철길에 겨우 중형 기관차와 화차 몇 량이 지나갈 수 있을 정도의 간격으로 따닥따닥 집들이 붙어 있었는데, 위험한 것은 둘째 치더라도 열차 소음과 진동은 견디기 어려웠으리라.관광객이 여럿 보였다. 딱 평일 느낌으로, 붐비는 정도는 아니었다. 어떤 이는 셀카봉을 손에 쥐고 카메라 렌즈를 응시하며 지나갔다.당일치기 일정으로 군산에 왔다는 정모 씨(23)조모 씨(24) 일행은 개강 전 마지막 여유를 즐기는 중이었다.사진 찍기에 예쁜 곳이 많다고 해서 왔는데, 붐비지 않고 좋네요.그런가 하면 대전에서 온 백모 씨김모 씨(25) 커플은 교복을 입은 채 철길을 걷고 있었다. 버스로 군산에 와서 근대역사박물관을 들렀다가 경암동 철길마을로 왔다고 했다. 군산엔 초행이었는데, 역시 개강 전 마지막 여유를 즐기는 중이라고 했다.다른 도시보다 보존이 잘 돼 있는 게 매력인 것 같아요. 일본식 가옥이나 철길에서 옛날 분위기를 느낄 수 있어요. 보통 관광지라고 하면 명소 한 군데만 꾸며놓는데, 군산은 그쪽(근대역사문화지구) 분위기가 다 그래서 좋아요.열차가 다니지 않는 지금은 공공디자인 활성화 사업 등을 거쳐 관광지가 됐다. 곳곳에 옛날 교복을 빌려주는 곳이 있고, 공방과 소품 가게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2014년께 자원봉사자들이 그려놓은 벽화와 곳곳에 있는 아기자기한 소품도 매력적이다.그리고 기능적인 용도를 잃은 레일은 문화적인 용도를 얻었다. 흰 수정펜으로 적힌 수많은 관광객의 낙서 조각들은 이곳의 현재를 압축해 보여주는 듯하다.페이퍼코리아선의 길이는 전체 2.5㎞로, 대명동 옛 군산역(군산화물역)까지 이어지지만, 실질적으로 관광지라 할 만한 부분은 진포사거리~연안사거리 간 약 500m 정도 구간이다. 진포사거리 너머로도 철길은 이어지지만, 그쪽은 평범한 철길이 지나는 동네의 모습을 하고 있다. 물론 이런 분위기를 좋아하는 이도 많을 것이다.철길은 화력발전소 방향으로 뻗다 만 지선 하나를 더해 서쪽으로 달린다.철길을 따라 걷는 사람도, 철길 위에 쌓인 시간도 따라 뻗는다.<계속>

  • 기획
  • 권혁일
  • 2016.09.03 23:02

[철도기행: 군산역 편] 시간이 멈춘 곳, 금강 물은 흐르네(1)

8월 30일, 전주역. 원래는 유로 스프린터(오이로 슈프린터)라는 이름으로 유럽을 달리도록 설계됐다는 전기기관차가 무궁화호 객차를 끌고 와 멈춰 섰다. 전라선 전철화 전에 그 시끄럽던 특대형 디젤기관차가 끄는 것만 보다가 전기기관차가 끄는 것을 보니 감회가 새롭다.2호차 38번 좌석에 앉았다. 가만히 취재 동선을 점검하고 있는데, 옆자리 승객이 무화과를 하나 내민다. 예상치 못했던 상황에 당황했지만, 옆자리 승객은 태연했다.하나 드셔요, 학생. 씻어 왔으니까 아랫부분만 떼고 먹으면 돼요.한사코 사양했지만, 결국 이기지 못하고 하나 받아 들었다. 맛있었다.그는 또 한 개를 내민다. 이번에도 사양했지만 결국 이기지 못하고 받아 들었다. 역시 맛있었다.이번엔 그가 옥수수를 한 개 내민다. 역시 사양했지만 또 이기지 못하고 받았다.먹을 건 나눠 먹어야지.여전히 어색한 장항선 군산역한때 군산역이 군산선 철도의 종점이던 시절이 있었다. 2007년까지였는데, 그때만 해도 군산이라는 지명은 당당하게 한 철도 노선을 대표하는 이름이었다.그게 군산선 철도가 장항선과 연결 개통되고 군산역이 내흥동으로 옮겨가면서 군산역은 더는 종점이 아니게 됐고, 군산선도 더는 군산선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지 않게 됐다. 그러니까 이제 군산역은 장항선 군산역인 것인데, 아무래도 이렇게 부르는 건 여전히 어색하다.열차는 대야역에 잠시 멈춘 뒤, 북쪽으로 꺾어 내달렸다. 왼쪽으로는 옛 군산선 철로가 갈라지고, 새 철로는 콘크리트로 된 다리를 타고 번영로를 건너 뻗어 있었다. 이어 별로 더 뭘 보기도 생각하기도 할 새 없이, 그대로 군산역 구내로 접어들었다.한 무리의 여행객들이 역사 내 관광안내소에서 안내를 받는 모습이 보였다. 펼쳐놓은 지도를 가리키는 모습으로 보건대 근대역사문화지구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는 듯했다.2008년 1월 문을 연 군산역도 벌써 영업 8년 차다.개통 초기에는 옛 군산역(폐역 직전의 이름으로는 군산화물역)과 비교를 많이 당했다.2007년 군산역 승하차 인원이 42만7800명(2007년도 철도통계연보)이었는데, 신역 개장 첫해인 2008년에는 10만 명이나 줄어든 32만1634명(코레일 전북본부 통계)이었다.아무래도 새 역이 자리한 곳이 군산 시내에서 꽤 떨어져 있어 접근하기 어려웠던 것도 있고, 기존 승객 수송량의 대부분을 차지했던 통근열차가 사라지고 그보다 운임이 비싼 무궁화호나 더 비싼 새마을호가 들어섰기 때문이기도 했다.그래도 시내버스 노선을 집중 배치하는 등의 노력으로 이용객 수는 꾸준히 늘어 2014년에는 40만5092명으로 40만 고지를 회복했고, 지난해에는 43만7266명으로 마침내 옛 군산역의 실적을 넘어섰으니 이제는 되었다. 올해는 7월 31일까지 총 26만184명이 이용했다고 한다.기자가 이곳을 찾은 8월 30일도, 아무래도 평일이라 붐빈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까지는 아니었지만, 전반적으로 활기가 넘치는 모습이었다.통유리로 된 건물은 2000년대 철도 역사 건축 트렌드를 그대로 따르고 있다. 군산이라는 지역의 정체성을 투영하려는 시도는 느껴지지 않았다. 옛 콘크리트 건물보다야 예쁘긴 하지만, 정말 이것이 최선이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다만 역사 내에 군산과 내흥동 지역의 유적유물을 보여주는 내흥동 유적전시관(2층)이 마련돼 있어, 그나마 체면치레는 되겠다.아담한 크기의 유적전시관 내부는 나름대로 충실하게 꾸며져 있다.내흥동 유적지에서 확인된 원형수혈유구(신석기 시대 집터)를 재현한 것이 전시관의 중앙에 있고, 주위를 둘러 그릇 조각과 같은 유물들이 전시돼 있다. 열차를 기다리며 간단히 둘러볼 만한데, 다만 내부 조명이 너무 어두워 제대로 관리되고 있는 것 같지 않다는 느낌을 준다.비단결 금강과 구불길역사 밖으로 나서면 정면에는 공사장 가림막이 서 있다.왼쪽에는 시내버스 승강장과 택시 승강장이 있다. 구불길로 걸어가려면 오른쪽으로 나가야 한다.군산역은 제1코스인 비단강길과 제4코스인 구슬뫼길, 그리고 제6코스인 달밝음길이 만나는 지점이다. 이렇게 되면 고민할 거리가 많이 줄어든다. 열차에서 내려서 무작정 걸어도 그게 훌륭한 여행 코스라 하니 말이다.군산역이나 그 인근에서 자전거를 빌릴 수 있다면 참 좋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군산 시내 곳곳에 자전거 정류장을 만들어놓고 빌려 타고 반납할 수 있도록 말이다.약 500m 걸어나가면 곧바로 금강이 눈에 들어온다. 딱히 둔치라고 할 만한 것도 없이, 그대로 넘실대는 금강 물이 눈앞에 들어오는 구조다.금강은 이름에 비단 금(錦)자를 쓴다. 문자 그대로 비단을 펼쳐놓은 것처럼 굽이치는 물줄기가 잔잔하고 아름답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금강은 이름이 여러 개인데, 전라북도 쪽, 그러니까 대체로 하류 지점에서 부르는 이름은 금강이지만 충청남도 쪽, 그러니까 중류 지점에서는 백마강으로 부르곤 한다. 또 상류로 더 올라가면 충남 금산 즈음에서는 적벽강이라고도 한다.금강은 또 오래전에는 백강이라고도 불렀는데, 백제 충신 성충이 당나라 군사가 넘어오지 못하게 해야 한다고 지적했던 그 백강이다.한편으로는 탁류로 유명한 강이 또 금강이기도 하다. 어느 강이나 하류에 이르면 물이 탁해지기 마련이지만, 유독 금강이 탁류로 알려진 것은 아무래도 백릉 채만식의 공이 클 것이다.그의 표현대로 에두르고 휘돌아 멀리 흘러온 물은 이날도 열심히 흐르고 있었다.하필 바람이 세차게 불었다. 분명 눈앞에 있는 것은 강물인데, 마치 풍랑이 이는 바닷물처럼 크게 요동쳤다. 물결이 부서지며 구불길 위 기자에게도 몇 방울씩 튀었다.기상청 관측값을 보면 이날 풍속이 흔들바람 수준인 9m/s였다고 하는데, 금강 변 구불길에서 맞은 바람은 적어도 된바람 수준은 아니었나 싶다.바다와 가까운 곳이라 역시 갈매기가 많았는데, 바람이 세차니 얘들이 즐겁고 신나는지, 좀 활동적인 녀석들은 기자의 머리 위를 스치듯 지나가며 곡예비행을 한다. 어떤 새들은 수면에 둥둥 뜬 채로 밀려오는 물결을 타고 있었다. 꼭 리듬 타는 힙합 음악가 같다.바람이 세찬 탓에 구름도 빨리빨리 날아가, 수면은 양지와 음지가 매 순간 바뀌면서 마치 얼룩이 진 듯 보였는데, 구름 사이로 내려와 강물의 거친 표면에 반사된 빛이 신비로웠다.금강하굿둑 방향, 그러니까 상류 방향으로 발을 옮겼다. 곧바로 시가 적힌 비석 여럿이 모여 있는 공간이 나왔다. 진포 시비공원이었다.이육사, 윤동주, 김수영 등 친숙한 이름과 시를 볼 수 있었는데, 사실 그다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아니었다.공원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휴게 공간이 잘 꾸며져 있다면 머물며 사색하다 갈 만할 텐데, 기자의 눈에 보인 것은 잡초가 무성한 바닥과 그냥 서 있을 뿐인 시비뿐이어서 아쉬움이 남았다.진포 시비공원에서 상류 방향으로 1㎞쯤 걸어가면 리틀야구단이 사용한다는 푯말이 붙어 있는 작은 야구장이 나오고, 이어 진포대첩 기념탑이 나온다. 진포대첩은 최무선 장군이 우리나라 역사상 처음으로 화포를 이용해 왜구를 격퇴한 싸움인데, 이 진포라는 곳이 바로 군산이다.이 오른쪽에는 채만식 문학관이 놓여 있다.군산 출신 문인 백릉 채만식 선생의 유품과 작품세계, 그리고 그의 작품 속 배경이 된 군산지역 모습을 보여주는 곳인데, 금강물만 보고 따라가다 보면 자칫 놓치기 쉬운 위치에 있어 사전에 지도를 잘 살펴야 한다.공원을 지나면 이제 금강하굿둑이 나온다. 바람에 밀린 강물이 하굿둑의 철제 갑문에 부딪히며 기이한 소리를 낸다. 만약 어두울 때 들었다면 무섭다고 했겠다.한쪽에는 어도와 생태학습장이 마련돼 있다. 물론 인도도 있다. 하굿둑의 아래를 통과하는 인도는 자동차도 교행 통과할 수 있을 것 같은 꽤 널찍한 규모인데, 한강 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굴다리와 비슷한 느낌이다.통로를 나오면 금강호 휴게소다. 그리고 여기서 조금 더 올라가면 철새 조망대가 나온다. 겨울철 철새가 무리 지어 찾아올 때면 전국에서 애호가, 사진가들이 모여드는 곳으로 유명하다.취재팀은 휴게소에서 돌아 하류 방향으로 움직이기로 했다.구암동경암동에 멈춘 시간을 만나기 위해서.<계속>

  • 기획
  • 권혁일
  • 2016.09.02 23:02

도심에서 건지는 피서지 건지산 : 편백 숲과 둘레길

바쁜 현대인을 위한 3줄 요약- 한국소리문화의전당 바로 뒤, 들어서면 서늘. 이거 리얼.- 덕진연못, 오송제 등 잇는 전북대 캠퍼스 둘레길 산책도 괜찮음.- 휴가 종료, 방학 종료힘내서 일상 복귀 준비합시다.휴가 일정 중에서 가장 행복한 날은 휴가가 시작되기 전날일 것이고, 방학 기간에서 가장 행복한 날은 방학하는 날일 것이다.휴식은 영원하지 않고, 언제나 여름은 그 휴식보다 길다. 다시 일상으로 돌아온 우리의 행동반경은 이제 크게 좁아질 것이다.그렇다면 가까운 곳에 시나브로 찾아갈 수 있는 피서지가 있다면 좋지 않을까?다행히 전주에는 도심에서 건지는 피서지, 건지산 편백 숲이 있다.도심 속 선풍기 편백 숲편백 숲으로 들어서자마자 서늘한 기운이 느껴졌다.숲 속이 도심보다야 당연히 시원할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이렇게까지 차이가 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물론 기분 탓은 아니다.최근 전북녹색연합이 발표한 2016년 전주 열섬 실태조사 결과에 따르면 지난 7월 30일 오후 2~3시에 전주 경기전은 섭씨 37.4도, 전북대가 37.2도 등 도심지 26곳이 평균 35.6도로 기록됐는데 건지산 편백 숲은 32.7도였다. 이것도 물론 더운 기온이긴 하나, 도심 평균 기온보다 섭씨 3도가 낮다면 이것은 분명 체감할 수 있는 차이다.또 앞서 발표된 형질별 지면 온도 변화 추이 조사 결과에 따르면, 도심의 아스팔트 지면은 한낮에 섭씨 50도 이상으로 치솟은 반면, 건지산 도시숲의 지면은 섭씨 27.6도 이상으로 올라가지 않았다.온도 차이를 직접 확인해보기 위해 취재팀이 온도계를 들고 찾아간 19일 오후 2시 40분, 한국소리문화의전당 앞 삼거리에서 잰 기온은 섭씨 무려 40~41도. 숲으로 들어가기 직전 주차장 앞 온도도 섭씨 37도였다. 반면 편백 숲에서 잰 기온은 섭씨 32도로 큰 차이를 보였다.물론 백엽상 등 잘 통제된 조건에서 잰 것은 아니었지만, 실생활에서 체감하는 온도는 오히려 이쪽에 가깝다는 점을 고려하면 분명 의미 있는 차이라고 할 수 있겠다.건지산 편백 숲은 전북대가 조성운영하고 있는 학술림의 일부다.전북대 학술림은 지난 1964년 지정됐는데, 전체 면적은 133.6㏊다. 편백 숲은 이 중에서 5㏊ 정도를 차지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사실 전북대 캠퍼스 둘레길 상에 등장하는 건지산 편백 숲은 한 곳이 아니라 오송제한국소리문화의전당 쪽에 하나, 조경단 쪽에 하나, 이렇게 두 군데가 있다. 취재팀은 8월 17일과 19일 두 차례에 걸쳐 오송제 쪽 숲을 찾았다.전주시민, 특히 송천동이나 덕진동, 호성동 등 인근 지역 주민들에게는 친숙한 공간인데, 17일에도 평상에 앉아 부채질하며 쉬고 있는 주민을 여럿 만날 수 있었다. 어머니 소모 씨와 함께 나와 있던 호성동 주민 정모 씨도 그 가운데 있었다.숲이 좋으니까 자주 오죠. 공기도 좋고. 집에 있는 것보다 훨씬 낫죠, 새 소리도 들리고.이 주민은 질문하는 기자의 온몸에 흐르던 땀을 보고는 세상에, 땀 좀 봐 하며 부채를 부쳐 주었다.아침부터 이 시각(오후 3시께)까지 와 있는 거예요. 너무 좋죠. 점수를 준다면 100점 만점에 95점? 좀 더 울창했으면 좋겠지만요.사실 건지산 편백 숲은 잘 알려진 다른 편백 숲과 비교하면 규모가 작은 편이다.도내 편백 숲의 대표주자로 널리 알려진 완주 상관면 공기마을 편백 숲은 무려 86㏊ 규모에 편백이 10만여 그루에 달하는데, 건지산 편백 숲은 이에 비하면 한참 작은 셈.서울에서 찾아온 손님과 함께 탁자에 앉아 있던 이모 씨는 이 점을 아쉬운 점으로 지적했다.좋다고 해서 와봤는데, 완주 상관보다는 좀 답답하네요. 규모도 작고. 거기가 에어컨이라면 여기는 선풍기 정도?그렇지만 건지산 편백 숲이 갖진 엄청난 강점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압도적인 접근성이다.시간이 넉넉하다면 전북대나 덕진공원에서 캠퍼스 둘레길을 따라 시나브로 걸어갈 수도 있고, 그렇지 않다면(특히 산길에서 마주칠 수 있는 날벌레가 싫다면) 165번 시내버스가 지나가는 한국소리문화의전당 뒷길로 곧장 들어갈 수도 있다.이 씨도 이 점은 인정했다.도심에 있다는 점에서는 좋죠. 거기(완주 상관 공기마을 숲)는 한참 들어가야 되는데 여긴 도심에 바로 있으니까 접근성이 아주.편백은 측백나뭇과에 속하는 침엽수로, 높이 40~50m까지 자라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흔히 편백나무라고 하지만, 표준국어대사전에는 편백으로만 올라 있다. 그런데 편백과 친척뻘 되는 측백은 측백과 측백나무 모두 표준국어대사전에 올라 있다. 뭘까, 이것은.노송나무라고도 불리며, 원산지는 일본이다. 일본어 이름은 히노키로, 일본식 고급 욕탕인 히노끼 욕탕을 만드는 데 쓰이는 나무가 바로 이 나무다. 그 은은하게 퍼지는 나무 향이 편백의 향이었던 것이다.피톤치드라는 성분을 많이 방출하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이 피톤치드는 나무가 해충이나 곰팡이 등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방출하는 천연 항균물질인데, 이것이 벌레에게는 독소지만 인간에게는 이로운 작용을 한다. 그래서 삼림욕이나 아토피 질환 치료에 이 편백이 널리 활용되고 있다.아마도 그래서 더 시원하게 느껴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시나브로 걸어보는 전북대 캠퍼스 둘레길건지산은 전주시 덕진구에 솟아 있는, 해발고도 약 100m의 야트막한 산이다. 높이로 따지면 전북지역의 이름난 명산과는 비교할 수 없고, 완산칠봉(해발 163m)에 비해서도 한참 낮다.그래서 오히려 더 전주시민의 사랑을 받는, 친근한 산이 된 것일 터다.전북대의 북서쪽을 차지하고 있는 뒷산이 바로 이 산인데, 전북대가 자랑하는 캠퍼스 둘레길에 이 산을 관통하는 산책 코스가 포함돼 있다.캠퍼스 둘레길의 총 연장은 11.4㎞인데, 전북대는 이 가운데 탐방 구간으로 9.1㎞(소요시간 4시간)의 풀 코스와 6.2㎞(소요시간 2시간)의 하프 코스를 제시하고 있다.전북대 측이 제시하고 있는 풀 코스의 공식 시작점은 신정문에 조성된 전대 힐링 숲이지만, 굳이 거기서 출발할 필요는 없다.추천할 만한 시작점은 덕진공원인데, 호수를 한 바퀴 돌고 전북대 예술대학 방향으로 시나브로 걸으면 플라타너스 길이 꽤 걷기 괜찮다.물론 정석대로 신정문(하프 코스는 전북대 박물관)에서 출발하는 것도 나쁘지 않은데, 둘레길 코스가 아니라 캠퍼스를 가로지르는 길로 곧장 북문으로 나가는 것도 좋다. 캠퍼스 중앙 분수대를 지나 만나는 가로수 길도 그 나름대로 운치가 있다.단 방문객이 많이 머무는 일부 지점을 제외하면, 건지산 산길 곳곳에 위치한 벤치는 관리 상태가 좋은 편은 아니어서 무용지물에 가까우니 참고. 일부 갈림길의 이정표 부재도 아쉽다.또 코스 전체를 통틀어 휴지통이 매우 귀하기 때문에 혹 쓰레기가 나올 가능성이 있다면 이를 처리할 수 있는 가방이나 봉투를 미리 준비해야 하겠다.(당연한 이야기지만)음료 자동판매기 같은 것도 산길에서는 찾아볼 수 없으므로, 코스 중간에 있는 전북대 생활관 카페나 한국소리문화의전당 시설을 이용하면 도움이 되겠다.

  • 기획
  • 권혁일
  • 2016.08.19 23:02

민물 vs 바닷물, 부안댐 vs 변산 해수욕장

바쁜 현대인을 위한 세 줄 요약:- 부안댐도, 가는 길 벼락폭포도 절경아담한 물놀이 공간도 좋아- 한때 서해 3대 명품 변산 해수욕장 부활 중앞으로의 변화 기대- 산으로 갈지 바다로 갈지 고민된다면 그냥 부안으로당신은 부먹파인가, 찍먹파인가?고양이파인가, 강아지파인가?러브라이브파인가, 아이돌마스터파인가?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인간은 같은 질문을 반복한다. 온라인 세계를 끊임없이 달궜던 양자택일의 질문들. 그리고 당신은 어쩌면 여름마다 또 한 가지의 질문을 받아들곤 했을지 모르겠다.산인가, 바다인가?그렇다면 이제는 이렇게 답할 때도 됐다.답은 부안이다.벼락폭포, 물 문화관, 물놀이장, 그리고 부안댐30번 국도를 타고 부안군의 북쪽 경계 부분을 훑으며 서쪽으로 달리다 보면 삼거리가 몇 개 나오는데, 그중 부안댐, 변산온천 등이 적힌 이정표가 세워져 있는, 그러니까 다리 밑에서 갈라지는 곳이 있다.혹은 새만금 방조제를 통해 북쪽에서 부안 방향으로 내려온 경우라면, 새만금전시관 앞 삼거리에서 좌회전해 들어간 도로에서 만나는 두 번째 삼거리(물론 일반 차량이 들어갈 수 있는 길 기준이다)다. 사실 내비게이션 없이 찾아가기에는 이정표가 조금 미흡하긴 하다.묵정삼거리에서 안쪽으로 들어가다 보면 주차장이라 쓰인 이정표가 보인다. 그리고 이정표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호수가 하나 있다.착각하기 쉽지만, 주차장은 주차장인데 이곳이 부안댐 주차장은 아니다. 물론 호수도 부안호가 아니다. 부안댐에 찾아가고자 한다면 그냥 지나쳐도 좋다.하지만 여기에 굳이 주차장이 있는 이유가 있다. 호수 반대편에 보이는, 바위가 드러나 있는 지형 때문이다. 이 지형의 이름은 벼락폭포다.아마 화창한 날에 이곳을 찾은 이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르겠다.엥? 벼락폭포? 그거 완전 허구 아니냐?폭포라고 하면 시원하게 쏟아지는 물줄기를 생각하지만, 벼락폭포는 비가 내릴 때만 폭포가 되고 비가 그치면 곧 자취를 감춘다. 비가 내리지 않는 날에 볼 수 있는 것은 다만 때때로 물이 쏟아지곤 했음을 증명하듯 쪼개져 있는 틈새뿐이다.요즘 날씨가 항상 그렇지만, 취재팀이 찾은 8월 10일도 화창한(이라고 쓰고 햇볕이 뜨거운이라고 읽는) 날이었다. 물줄기를 볼 수 없었음은 물론이다.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이곳은 또 다른 아름다움을 품고 있다. 흰 바위와 연녹색 숲, 파란 하늘과 그 하늘이 비치는 수면이 어우러져 장관을 이룬다. 수변에 길지 않은 산책로가 나 있으니, 양산 하나 받쳐 들고 시나브로 걷는 것도 괜찮다.여기서 1㎞쯤 올라가면 이제 부안댐이 나온다. 아래쪽에는 수문이 있고, 흔히 댐 하면 연상되는 거대한 인공 벽은 조금 더 올라가야 볼 수 있다.부안댐이 피서지인 이유는 사실 댐 자체에 있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댐 아래에 조성된 물 문화관과 물놀이 공간이 피서객을 불러 모으는 것이다.비교적 아담한 크기인 물 문화관에는 전시실이 3개 있다. 1층에 하나, 2층에 두 개인데, 특히 1층 전시실에는 물을 가지고 놀 수 있는 장치가 있다.▲ 한 관람객(...)이 펌프를 눌러 수차를 작동시키고 있다.그리고 2층에 있는 전시실 두 곳에서는 부안댐과 부안에 대한 이야기를 볼 수 있다.물 문화관 옆 분수광장 한쪽에 마련된 물놀이 공간은 역시 아담한 편이다. 물이 발목 정도 깊이로 흐르고, 물가에선 나무가 그늘을 만들고 있다.어린이들이 저마다 튜브를 하나씩 끼고(물 문화관 옆 매점에서 물놀이 용품을 판매한다) 첨벙첨벙 뛰어다니고, 어른들은 그늘에 돗자리 깔고 앉아 아이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런저런 이들을 합해, 30여 명이 이곳에서 놀고 있었다.일가족과 함께 이곳을 찾은 설모 씨는 평소에도 이곳에 자주 오는 편이라고 했다.일단 무료라서 좋고요, 그늘도 있고, 물이 얕아서 위험하지 않고, 또 깨끗하고. 바닷물은 아무래도 탁한 편이고, 눈도 맵고, 아이들 위험할까 신경 쓰이잖아요.광장 한쪽 부안호 문학동산에 나 있는 길을 따라 올라가면 작은 폭포와 물레방아가 나온다. 여기서 약 200m를 더 올라가면 부안호가 내려다보인다. 보통 여기를 부안댐 정상이라고 부르는데, 잔잔한 수면을 내려다보면 더위에 잔뜩 짜증 났던 마음이 조금은 고요해진다.다만 댐 정상부 광장 한쪽에 있는 물사랑 쉼터는 냉방이 가동되지 않은 상태였고, 그 앞에 놓인 음료 자동판매기도 작동하지 않아 아쉬웠다.돌과 콘크리트가 섞인 높이 50m, 길이 282m의 구조물 부안댐이 막아선 것은 내변산을 흐르던 백내천 물이다. 계곡 물을 막아 만수위 42.2m, 수몰면적 3㎢의 호수를 만들었으니, 이쯤이면 상전벽해급이다.물론 다른 잘 알려진 댐과 비교하면 규모가 큰 편은 아니다. 당장 용담댐만 해도 높이 70m, 길이 498m고, 수몰면적은 31.4㎢니까 비할 바도 아니다. 하지만 부안댐이 작다고는 해도 어디까지나 상대적으로 작은 것이고, 이 정도로도 전라북도 서해안에 각종 용수를 공급하는 데에는 무리가 없다고 하니 굳이 비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댐 정상 광장에서 계단을 올라가면 직소정이라 쓰여 있는 정자와 망향탑이 나온다. 망향탑은 수몰민들을 위로하기 위한 비석으로, 매년 이곳에서 망향제가 열린다.직소정 남쪽으로는 오솔길이 하나 나 있는데, 이 길을 따라 올라가면 호수를 좀 더 넓게 바라볼 수 있다. 바람 또한 지상의 그것과는 다르게 시원하게 불어오니, 땀 좀 흘리는 보람이 있다.앞으로의 변화를 기대해 달라, 변산 해수욕장잠깐의 산행을 마치고 다시 도로에 섰다. 무심한 주인은 가속 페달을 밟고, 불쌍한 바퀴는 한껏 달궈진 아스팔트 포장도로를 구른다.묵정삼거리로 나와 과거에는 해안이었던 들판을 오른쪽에 놓고 달리면 곧 새만금 방조제가 나오고, 거기서 다시 서쪽으로 달리면 전에 없던 새로운 길이 나타난다.새만금 방조제에서 변산 해수욕장으로 가는 길은 이제 두 가지가 됐다. 하나는 합구마을을 지나치며 S자로 해안을 스쳐 지나가는 왕복 2차선 옛길이고, 다른 하나는 왕복 4차선으로 곧게 뻗은 새 길(격포-하서 간 도로)이다.어느 쪽이든 타고 남서쪽으로 약 4㎞를 달리면, 깔끔하지만 왠지 어수선한 느낌인 곳이 나온다.취재팀이 찾아간 날에도 인부들이 인도에 블록을 까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아스팔트를 새로 깐 지 얼마 안 돼 보이는 도로와 아직 주차선도 그려져 있지 않은 주차장도 풍경의 한 부분을 차지했다.과거의 그 대단했던 변산 해수욕장이라기보다는, 이제 막 새로 개발되는 해변을 보는 듯했다.변산 해수욕장은 지금 변신 중이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전라북도를, 아니 우리나라 서해안을 대표했던, 여름만 되면 발 디딜 틈이 없던 해수욕장이었다. 서해 3대 해수욕장으로도 꼽히던 곳이었으니 말 다 한 것이다.그게 어느 정도였는지는 1960~70년대에 촬영된 사진을 보면 알 수 있다.하지만 1988년 지정된 변산반도 국립공원에 변산 해수욕장이 포함되면서 주변 개발이 막혔고, 그 결과 시설이 점차 낙후되면서 점차 잊히기 시작했다.여기에 더해, 변산 해수욕장 몰락의 결정타가 된 것이 바로 새만금 방조제였다. 2006년 4월에 방조제 물막이 공사가 끝난 이후, 파도의 힘을 방조제가 튕겨내면서 방조제에서 가까운 변산 해수욕장의 모래가 깎여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세굴 현상으로 매년 2.5㎝씩 깎여나갔으니, 백사장이 생명인 해수욕장으로선 치명적일 수밖에.당연히 방문객은 크게 줄어, 원래 한 해 10만 명을 넘겼던 방문객이 2010년께에는 2만여 명 수준으로 떨어지고 말았다.이것을 그냥 두고 볼 수만은 없는 법. 부안군이 변산 해수욕장 주변 지역을 재개발하는 작업에 나섰고, 그 (아직 마무리가 덜 된)1단계 사업의 결과물이 바로 지금의 변산 해수욕장이다.재개발 사업은 오는 2018년까지로 예정돼 있고, 1단계 사업은 올 9월 끝날 예정이다.아직은 변한 것이 그다지 많지는 않지만, 눈에 띄는 변화는 분명히 있다.접근하는 길에 4차선 신작로가 추가됐고, 샤워장이 깔끔해졌고, 주차장이 정비됐다.바닷가에 나가는 것이 조금 그렇다, 특히 아이들을 바닷가에 내놓기가 좀 그렇다 하는 관광객을 위한 물놀이 시설도 새로 들어섰다.또 최근 조성된 변산 마실길 제1코스와 제12코스(이 코스는 부안댐에서 출발하는 코스다)가 만나는 지점이기도 하다.국립공원에서 풀려났으니 앞으로는 더 달라질 터다.해안은 깔끔하고 평화로웠다.관계자에 따르면 7월 말에서 8월 초까지는 하루 800여 명이 찾아왔고, 8월 둘째 주에는 하루 200~300명이 찾는다고 한다. 개장 마지막 날인 광복절까지 라스트 팡을 기대해볼 수는 있겠지만, 아무래도 명성에 비하면 방문객은 적다.올해 단장을 했거든요. 그래서 올해 개장한 줄을 아직 모르시는 분이 많은 것 같아요.물론 여름 휴가철인데도 사람이 많지 않다는 것은 휴양지로서 대단한 장점이다. 시끄럽지도 않고, 세족장이나 샤워장이 밀리지도 않는다.길이 약 700m의 백사장을 독차지한 듯 밀짚모자 하나 눌러쓰고 비스듬히 누워 느긋하게 저 멀리서 반짝이는 바다를 바라보며 속세를 잊어볼 수도 있다.모래는 상당히 부드럽다. 밟는 감촉이 좋아, 그저 맨발로 백사장만 거니는 것도 괜찮다. 신발을 신은 채로 빠르게 걷기는 좀 힘들다. 속도를 내려 하면 발이 모래 속으로 빠지는 탓이다.서해안에 위치한 해수욕장의 공통적인 매력은 역시 썰물 때 드러나는 광활한 갯벌에 있다.변산 해수욕장 역시 예외가 아닌데, 이날도 쪼그려 앉아 작은 조개 채취용 갈퀴나 호미 따위를 들고 열심히 갯벌을 긁는 사람들을 여럿 만날 수 있었다.서울에서 찾아왔다는 이정훈 씨(43)와 그의 가족도 거기에 속했다.군산, 새만금으로 해서, 새만금 방조제 근처에 변산 해수욕장이 있다기에 구경할 겸 해서 찾아왔습니다. 꽤 가깝더라고요. 바다는 아무래도 아이들이 놀기 좋다는 점이 매력이죠. 특히 서해안은 갯벌이 있으니까, 뭐 잡을 것이 많아서, 뭘 잡는 재미가 좋습니다.그렇게, 오후 7시가 넘었다.그렇게도 뜨거웠던 태양이 서쪽 수평선으로 떨어지기 시작한다.변산 해수욕장의 다른 매력은 해가 질 무렵에 나타난다.서해안의 해안이 다들 그렇긴 하지만, 변산 해수욕장 또한 해넘이를 바라보기 참 좋은 장소다. 변산 해수욕장의 북쪽 끝에는 아예 해넘이를 테마로 한 사랑의 낙조 공원이 조성돼 있는데, 팔각정 위에서 느긋하게 붉게 물드는 하늘을 바라보는 것도 좋고, 하트 반쪽 모양의 조형물에 넘어가는 해를 넣어 사진에 담아보는 것도 재미가 있다.미국 국적의 유명한 총잡이 제시 맥크리의 말이 불현듯 떠오른다.석양이 진다.(제시 맥크리는 게임 오버워치의 등장인물이다)이제 돌아갈 시각이다.

  • 기획
  • 권혁일
  • 2016.08.12 23:02

햇볕은 쨍쨍, 모래알은 반짝! 찾아가자 무녀도·선유도 (2)

바쁜 현대인을 위한 세 줄 요약1. 무녀도-선유도-장자도-대장도는 한 덩어리. 하지만 전부 다 보려면 하루로는 턱도 없다.2. 고군산군도 연결도로가 부분 개통됐지만 여전히 여객선이 중심. 자전거도 괜찮다.3. 스카이라인망주봉도 볼 만. 선유도 해수욕장 백사장은 말이 필요 없다.△모개미와 서드이무녀도는 이름 그대로 무녀처럼 생겼다고 해서 무녀도다.크게 보아 두 군데로 나눌 수 있는데, 하나는 무녀도 교회가 있는 동쪽 마을이고, 또 하나는 무녀도 초등학교가 있는 북서쪽 마을이다. 각각 모개미, 서드이라고 부른다고 한다.원래는 서드이라는 말이 무녀도를 가리키는 원래 말이라고 하는데, 열심히 서둘러 일해야 살 수 있다는 뜻이라고 한다. 뜻을 알고 나니 왠지 슬프다.어서 무녀도를 지나 선유도로 가고자 하는 여행자는 먼저 무녀도 교회가 있는 동쪽 마을을 통과하게 된다. 새파란 하늘과 옥색 바다, 그리고 벽이 샛노랗게 칠해진 건물 등이 눈에 들어온다.해안을 돌아서, 혹은 마을 골목길을 통과해서 마을 남쪽으로 빠져나와 펜션이 자리 잡고 있는, 바스러진 굴 껍데기가 가득한 해안을 따라 걸으면, 이번에는 산길이 나온다. 산이라고 해도 실은 언덕에 가까운 규모지만.진행방향 왼쪽으로는 나무 데크 산책로가 있고, 앞쪽으로는 선유도 방향으로 곧장 진행할 수 있는 길이 있다. 산책로는 그리 길지는 않다.선유도 방향으로 진행하다 나오는, 옛 염전이 있던 들판을 끼고 뻗어 있는 제방길로 쭉 걷다 보면 곧 무녀도 초등학교가 나온다. 좀 더 걸어 갈림길이 나올 때 오른쪽으로 가면 선유교로, 왼쪽으로 가면 무녀봉으로 갈 수 있다.다만 왼쪽으로 갈 때는 고군산군도 연결도로 공사 현장을 지나게 되는데, 취재팀이 찾았던 7월 20일에는 위험 표지판 외에는 달리 안전 설비가 돼 있지 않아 통행 시 위험할 수도 있겠다는 느낌이 들었다.△다리 혹은 배, 배 혹은 다리선유교의 그 붉은 거대한 아치 형상이 가까워졌다.아직은 그 큰 다리를 건널 수는 없고, 대신 왼쪽에 놓여 있는 작은 인도교를 건너야 한다.1986년 놓인 이 다리는 무녀도와 선유도를 배 없이도 왕래할 수 있도록 해 생활권을 묶은 중요한 교통로다.같은 해에 선유도-장자도 간을 잇는 장자교도 개통됐는데, 이들 다리를 통해 무녀도-선유도-장자도가 사실상 한 덩어리가 됐다. 여기에 장자도와 아주 가까워 애초부터 사실상 한몸이나 다름없던 대장도까지 끼워, 4개 섬이 한 덩어리인 채로 30년을 지내온 것이다.선유교는 교통로이기도 하지만 그 자체가 훌륭한 전망대이기도 하다. 이곳에서 내려다보는 푸른 바다가 인상적인데, 성수기 때에는 관광객들이 다리 위에 멈춰 서서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누르는 광경을 볼 수도 있다.선유교를 다 건너 언덕을 내려가면 곧바로 선유도 여객선 선착장이 나온다.비록 고군산군도 연결도로가 부분 개통돼 육로로도 선유도에 닿을 수 있다고 하지만, 길이 열린 지 얼마 안 되기도 했고, 또 자동차로는 무녀도 초입을 넘을 수가 없기 때문에 여전히 관광객들이 선유도를 찾을 때 이용하는 주요 교통수단은 배다.수원에서 왔다는 김모 씨신모 씨 일행이 선택한 교통수단도 배였다.기차를 타고 군산에 갔다가 배를 타고 선유도에 도착했다는 이들은, 다시 뭍으로 나가는 여객선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여긴 자전거 타기 좋은 것 같은데, 오늘은 너무 덥네요.여객선은 군산시 소룡동에 있는 군산항 연안여객터미널에서 하루 4차례 출발하는데, 소요 시간은 진달래호가 45분, 옥도훼리호가 1시간 15분이다. 주말 등 관광객이 몰릴 때는 증편된다.또 비응도야미도에서 유람선으로 선유도를 찾는 방법도 있다. 유람선은 주 선착장이 아니라 북쪽 선유3구 지역에 있는 유람선 선착장으로 향하는데, 최대 11차례까지 운항한다고 한다.다만 이제는 자전거 페달을 밟아 선유도를 찾는 관광객이 변수다. 이날만도 족히 두 자릿수의 라이더를 만났다.이날 만난 김은수 씨(48)도 그런 라이더 중 한 명이었다.저는 충남 서산에서 왔는데요, 선유도 다리 개통했다고 해서 한 번 와봤습니다. 자전거로는 새만금 방조제, 부안 쪽을 주로 다녔어요. 제가 사는 서산도 바닷가지만, 여기가 물은 정말 깨끗한 것 같네요. 해수욕장 백사장도 길어서 가족끼리 오면 좋을 것 같아요.선착장 맞은편으로는 수산물을 파는 상가가 늘어서 있고, 그 앞엔 마치 버스 종점처럼 생긴, 좁고 긴 콘크리트 광장이 있다.사실 이곳은 과거 전동 골프 카트가 운행되던 때, 그 종점 역할을 하던 곳이다. 전기를 충전해 시속 10~20㎞ 정도의 속도로 섬을 돌아볼 수 있었는데, 섬사람들의 생활 교통수단이자 관광객들의 이색 탈것이기도 했다.한때 선유도에만 200여 대가 있었다고 하나, 지난 2013년에 군산시가 전동카트 운행을 전면 중단하기로 하면서 이제는 과거의 기억이 됐다.오른쪽에 해안을 끼고 천천히 모퉁이를 돌면 스쿠터 등을 대여하는 업체와 함께 횟집 등이 나온다. 시각은 벌써 2시, 취재팀은 물회 한 그릇 먹고 가기로 했다.△ 아직은 절반고군산군도의 어색한 과도기지난해 운영이 시작된 스카이라인은 어느새 선유도의 랜드마크가 돼 있었다.스카이라인은 선유도 해수욕장 남쪽 끝, 거대한 등대 혹은 전망대처럼 생긴 탑에서 케이블을 타고 내려가는 놀이기구(?)로, 이곳에서 선유도 해수욕장 복판에 떠 있는 솔섬까지 약 700m를 1분여에 걸쳐 내려가며 해안을 내려다볼 수 있다.스카이라인 체험 비용은 성인 개인 기준 1인 2만 원이고, 군산시서천군 거주자 및 무녀선유장자도 지역 상품 10만 원 이상 구매자는 할인을 받을 수 있다.또 체험은 원치 않고 다만 높은 곳에 올라가 주변을 바라보고만 싶다면 성인 개인 기준 1인 2000원을 내면 전망대에 오를 수 있다.평일에는 오륙십 명 주말에는 수백 명 찾아오죠.스카이라인 관계자 김모 씨는 한 무리의 관광객을 무사히 솔섬으로 내려보내고 이렇게 말했다.하지만 어쩐지 표정이 밝지만은 않았다.고군산군도 연결도로 부분 개통이라고 하는데, 아직은 절반뿐이라서 욕만 먹어요. 차라리 개통을 안 했으면 모를까, 부분 개통을 해놔서 관광객들이 이 더위에 걸어와서는 갈 때 되면 다 지쳐있는 거예요.역시, 개통이라는 말만 듣고 무작정 찾아오는 관광객이 많은 모양이다. 무녀도에 정식 주차장을 마련해놓고 그쪽에 주차하게 한다면 조금 나을 수도 있겠지만, 그 많은 차량을 전부 감당할 만한 공간이 될까?결국 고군산군도 연결도로가 전면 개통되는 2018년이 돼야 해소될 문제일지도 모르겠다.△명사십리 모래 밟기7월 20일은 그래도 아직은 여행객들이 밀려들 때는 아니어서 해안이 한적한 편이었다.명사십리라는 이름이 붙은 해변이 전국에 여러 곳 있고, 전북지역에서도 고창군 구시포-동호 사이 해변에 명사십리라는 이름이 붙어 있지만, 선유도의 명사십리 또한 이름에 걸맞은 아름다운 경관을 자랑한다.백사장은 총 길이 1.3㎞정도 되는데, 솔섬으로 들어가는 목제 다리가 백사장을 양분한다. 백사장의 폭은 약 100m다.밝게 빛나는 모래는 밟으면 그 촉감을 오래도록 잊을 수 없다. 그만큼 부드럽고 곱다.맨발로 걷기 저어하게 하는 이물질들이 이곳은 유독 적어서, 발가락 사이사이로 잔잔한 파도를 느끼며 그저 아무 생각 없이 백사장을 걷는 것도 해볼 만하다. 가끔 파도에 밀려 올라오는 보름달물해파리만 조심하면 말이다.밀물 때는 이렇게 백사장의 모래를 밟는 재미가 있고, 썰물 때는 양손에 각각 맛소금 한 봉지와 호미 하나씩 가지고 나와 맛조개를 잡는 재미가 또 있다.△천 년 역사 품은 오리지널 군산선유도를 상징하는 또 한 곳이 바로 망주봉이다. 해발 152m면 육지 기준에서는 그다지 특별할 것 없는 봉우리지만, 작은 섬에서는 존재감이 다르다.해수면 바로 위에서 시작하는 등산로를 따라 올라가는 바위산은, 마치 섬에 박힌 거대 생명체의 알과도 같은 형상을 하고 있다. 이 봉우리와 주변 지역이 바로 천 년 전 오리지널 군산의 자부심을 품고 있는 지역이다.고군산군도는 문자 그대로 옛 군산을 이루는 섬들이다. 유인도 16개를 포함해 총 63개 섬으로 이뤄져 있다고 알려져 있다. 물론 신시도 같은 곳은 이제는 섬이 아니게 됐으니 정의가 달라져야 할 것도 같다.군산이라는 이름은 선유도를 가리키는 옛말이기도 하다. 고려시대, 당시 행정구역상 만경현에 속했던 선유도는 고려-송 간 무역로의 기항지였고, 그래서 온갖 나라의 상인들이 드나들었다고 한다.송나라 사신 서긍이 편찬한 선화봉사고려도경에 따르면 인종 원년이던 1123년, 김부식(삼국사기를 편찬한 그 김부식 맞다)이 주관해 군산도에서 국가 차원의 대규모 영접 행사가 열리기도 했다.선유도 북쪽 망주봉 인근에는 임금의 임시 거처인 숭산행궁, 사신을 맞이하던 군산정, 바다 신에게 제사를 지내던 오룡묘 등이 있었는데, 최근에는 여기서 최상급 청자와 기왓조각 등이 발견되기도 했다.이후 조선 태조 6년(1397년)에 선유도에 수군 만호영을 두기도 했다. 그러나 방어전략의 효율성 등의 문제로 세종 때 군산진을 진포, 그러니까 지금 군산 지역으로 옮겼다. 그래서 고군산군도에 옛 고(古) 자가 붙은 것이다.선유3구 지역에는 옥돌해변이 있다. 옥돌해변은 반대편 선유1구 지역에도 있는데, 선유도 해수욕장의 명성이 워낙 자자해서 그렇지 이들 옥돌해변도 매우 아름답다.또 장자도, 대장도 또한 그 풍광으로 유명한 곳이지만, 이들 지역을 도보로 하루 안에 다 돌아보기는 매우 힘들다. 자전거를 이용한다고 해도, 충분히 여유롭게 즐길 만한 시간이 나오지는 않을 것이다.그러니 선유도 여행을 하려거든 최소한 1박 2일, 조금 여유를 갖고 싶다면 2박 3일 이상의 일정은 잡아야 이곳저곳에 숨겨진 매력을 다 볼 수 있다.어느덧 해가 질 무렵이 됐다.망주봉 주위를 한 바퀴 돈 취재진은 이만 아쉬움을 뒤로 하고, 다시 온 길을 더듬어 무녀도 회차지점을 향했다. 백사장을 다시 건너, 해수욕장 남쪽 끝 슈퍼마켓에서 물 두 병을 샀다. 여기서부터 다시 5㎞ 이상을 걸어야 한다.아, 평소에 운동 좀 할걸.<취재팀 이동 경로>

  • 기획
  • 권혁일
  • 2016.07.29 23:02

햇볕은 쨍쨍, 모래알은 반짝! 찾아가자 무녀도·선유도 (1)

삐이이익!이제는 많이 익숙해진 재난문자 소리. 폭염을 조심하라는, 사실 바깥에 잠깐이라도 나가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몸으로 알 수 있는 이야기를 참 요란하게도 한다는 생각이었다.그것도 사람들이 어디 길을 나서기 전이 아니라 다들 이미 밖에 있을 시각, 정오가 가까운 때가 돼서야 이런 메시지를 보내다니, 사람 약 올리는 것 같다는 느낌마저 들 정도였다.7월 20일. 타는 듯한 햇볕만 뺀다면, 그야말로 아주 좋은 날씨였다.지난 5일 개통된 고군산군도 연결도로로 가려면 우선 새만금 방조제 길을 타야 한다. 전남이나 광주 등 남쪽에서 접근하려면 30번 국도를 타고 부안군 변산면으로 간 뒤 방조제를 따라 가력도를 거쳐 올라가야 하고, 서울대전 등 북쪽 지역이나 전주 등지에서 접근하려면 흔히 산업도로라고 부르는 21번 국도를 타고 군산 비응도를 거쳐 방조제를 따라 내려가야 한다.취재팀은 군산 방향에서 접근하기로 했다. 아무래도 전주에서 접근하기에는 아무래도 이쪽 길이 넓고 단순해 찾아가기가 좋다.△방조제 시작점은 관광 어항 비응항먼저 마주친 것은 비응항이었다. 원래는 비응도라는 이름을 가진 섬이었는데, 1994년에 군장국가산업단지 조성 사업 과정에서 방조제로 육지와 연결되면서 더는 섬이 아니게 된 곳이다.군산 서부에는 이런 곳이 많은데, 내초도, 오식도 등도 비응도와 비슷한 역사를 가졌다고 볼 수 있겠다. 행정구역명이 내초동인 내초도 지역은 섬으로서의 흔적이 완전히 지워졌지만, 오식도 지역과 비응도 지역은 아직도 오식도동, 비응도동으로 불리고 있다.하긴, 최근에 오식도동 이름을 바꿔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됐고, 오식도 초등학교는 아예 새만금 초등학교로 개명되기도 했다.그러게 뭣허러 나오자고 했어?강아지 한 마리가 지쳐 그늘을 찾고 있고, 한 중년 남성이 강아지 목줄을 잡고 말하고 있었다. 그는 그렇게 말하며 허허 웃었다.비응항은 전북의 대표적인 관광 어항으로, 낚시꾼을 비롯한 여행객들이 많이 찾는 명소다. 이곳에서는 낚싯배나 유람선을 타고 바다로 나갈 수 있다.그 자체로 목적지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새만금 방조제의 북쪽 끝(정확히는 4호 방조제의 북쪽 끝. 비응도~내초도 간 군장산업단지 남측 방조제도 새만금 방조제 구간에 포함된다)이기도 해, 새만금 방조제로 가고자 하는 이들이 거쳐 가는 곳이기도 하다.북쪽을 바라보면 커다란 날개가 돌고 있는 풍력발전단지가 보이고, 그 사이로 현대중공업 군산조선소의 1650톤짜리 골리앗 크레인이 보인다.방향을 돌려 남쪽을 바라보면 곧게 뻗어 있는 거대한 방조제와 함께, 산봉우리처럼 솟아 있는 섬 몇 개가 보이는데, 이것들이 바로 고군산군도를 이루는 섬들이다.△교통로? 관광지? 새만금 방조제비응항을 한 바퀴 돌고 새만금 방조제에 올라탔다. 세계 최장 방조제로 알려진 새만금 방조제의 총 길이는 33.9㎞. 무려 19년 동안의 공사 끝에 지난 2010년 4월 준공됐다.방조제와 간척지의 용도, 그리고 환경(특히 갯벌생태계와 수질)에 미치는 영향 등을 두고 갑론을박이 있었으나, 적어도 교통로와 관광 명소로서의 기능에는 충실한 편이다.이 방조제로 인해 가력도신시도야미도 등은 육지와 완전히 연결됐고 또 고군산군도 연결도로를 통해 무녀도가 추가로 연결됐으니 교통로의 기능은 확실한 셈이고, 자전거나 자동차를 타고 오가며 풍경을 바라보기 좋아 전국에서 모여들고 있으니 관광 명소로서도 나쁘지 않다. 특히 자전거 라이더 사이에서는 이미 대중적인 코스로 잘 알려져 있다고 한다.이날 방조제 중간 돌고래 쉼터에서 만난 한진섭 씨(73)도 그런 이유로 새만금 방조제를 찾은 자전거 마니아였다. 그는 휴가철을 앞두고 고군산군도가 가족단위 휴가지로 적절한지 자전거로 사전 답사하고 돌아가는 길이었다.자전거를 좀 좋아해요. 좋아해가지고 남한강, 북한강, 뭐 이 지역 저 뭐야 섬진강, 전남 영산강, 충청남도 금강 요렇게 막 자전거 타고 다녔어요. 여기는 처음이에요. 선유도까지 돌고 나오는 길인데, 아주 상쾌하고 기분이 좋아가지고, 콧노래, 노래 부르며 그러고 가는 거예요. 저기 비응도 가서 짬뽕 한 그릇 하고 집에 갈라고.한 씨 외에도 이날 새만금 방조제에서는 자전거 라이더를 여럿 마주칠 수 있었다.△고군산군도 연결도로 시작점 신시도돌고래 쉼터를 지나면 야미도가 나오는데, 야미도는 크기가 신시도보다는 작지만, 선유도로 가는 유람선이 출발하는 곳이기도 하고, 또 낚시 명소로 알려진 곳이기도 해서 언제나 북적이는 편이다.야미도를 지나면 곧바로 신시도가 나온다. 신시도는 고군산군도를 이루는 섬 중에서 가장 큰 섬으로, 이 일대의 실질적인 중심지 역할을 하는 곳이다.새만금 방조제 구간에서 가장 큰 휴게소인 새만금 휴게소가 이 섬에 있고, 새만금 동서 2축 도로가 이 섬 인근에서 시작한다. 또 아리 공연이 펼쳐지는 아리울 예술창고가 이 섬 바로 남쪽, 신시도 33센터 인근에 있다.최근 여기에 또 하나가 추가됐는데, 바로 고군산군도 연결도로의 시작점이라는 사실이다.신시도항 인근 삼거리에서 서쪽으로 들어가면 곧바로 무녀도로 향하는 연결도로에 올라탈 수 있는데, 신시도의 북쪽 해안을 빙 돌아 나가는 구조로 돼 있다.연결도로 왼쪽에는 산이, 오른쪽에는 바다가 펼쳐진다. 이 길 자체로도 훌륭한 여행 코스라고 할 만하다. 차도 좌우에는 상하행선이 구분된 자전거도로가 나란히 달리고 있다. 설계부터 자전거 라이더들을 고려한 듯하다.다만 연결도로만을 보고 나갈 게 아니라면, 자동차는 신시도항에 마련된 임시 주차장에 세워두고 자전거 대여소에서 자전거를 빌려 가는 것을 추천한다. 왜냐하면, 그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는 잠시 뒤에 서술하기로.자전거 대여소에서는 2인용 자전거를 포함해 100대를 운영 중이고, 이용 요금은 3시간 3000원, 1일 5000원이다.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 이용 가능하다.언덕을 올라가니, 한동안 단등교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던 고군산대교가 눈에 들어왔다.마치 두바이의 유명한 호텔 부르즈 알 아랍을 연상시키는 영문 알파벳 D 모양의 주탑이 당당히 서 있었다. 돛단배를 형상화했다고 한다. 위엄도 위엄이지만, 미(美)적으로도 꽤 괜찮은 구조물이다.흔히 현수교라고 하면 광양만을 가로지르는 이순신대교처럼 다리 양쪽에 서 있는 탑이 강철 케이블로 상판을 지탱하는 다리가 떠오르지만, 고군산대교는 현수교면서도 탑이 하나밖에 없다. 일주탑 현수교라고 하는데, 이 주탑의 힘으로 지탱하는 구간이 400m다. 이는 일주탑 현수교 중에서는 세계에서 가장 긴 것이라고 한다.400m라고 하지만, 실제로 다리를 건너보면 길이가 1㎞는 족히 돼 보인다. 사실은 신시교무녀교가 양쪽에 붙어있는 구조라 그런 것인데, 전체가 한 다리처럼 느껴질 정도로 위화감이 없다.어디서 봐도 멋지긴 한데, 도로가 상하행 1차로씩뿐이라 나중에는 통행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혹여 좌우의 풍경을 즐기느라 서행하거나 멈추는 이가 있다면 그것도 문제가 될 듯하다.△자동차엔 안 돼, 돌아가자전거가 甲이네다리를 전부 지나 무녀도에 닿으면, 2016년 7월 기준, 이제 자동차로 갈 수 있는 곳은 더 없다. 4.4㎞의 부분개통 구간은 여기서 끝이다.선유도 방향으로는 중장비들이 도로를 내고 있고, 그 앞은 회차 지점이라는 팻말이 가로막고 있다. 외부 차량은 로터리처럼 돼 있는 이 회차 지점을 돌아 나가야 하고, 무녀도 주민들은 해안으로 내려가는 길을 통해 마을로 들어간다.현재까지는 따로 주차장도 없기 때문에, 여행객으로서는 도리가 없다.이것이 바로 신시도 임시 주차장에 차를 대놓고 자전거를 빌릴 수밖에 없는 이유다.자전거 페달을 밟는 것이 힘들다면, 스쿠터처럼 발로 페달을 밟지 않아도 되는 이륜 이동수단이 있다면 그것도 괜찮은 방법일 테고, 세그웨이나 전동 휠 같은 것도 나쁘지 않겠다.실제로 이날 무녀도와 선유도에서 자전거와 스쿠터, 오토바이는 수도 없이 봤고, 세그웨이나 전동 휠을 타고 다니는 이도 몇 명 마주쳤다.다만 무녀도 초입에서부터 선유도 3구장자도대장도 등 깊은 곳까지 들어갔다 나오기에는 배터리 용량이 모자랄 수도 있다.취재팀은 관계자에게 양해를 구하고 해안으로 내려가는 길가에 주차한 뒤 도보로 선유도까지 움직이기로 했다.우선 무녀도 해안길을 따라 (아직 문을 열지는 않은)전망대로 향했다. 아담한 주차공간과 화장실, 그리고 전망대 건물이 눈에 들어온다.이 건물 옥상에서 바라보는 풍경이 참 대단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아직은 공사 중일 뿐이다.한 단 아래, 좀 더 바다에 가까운 콘크리트 길로 내려가면 짠 바다 냄새가 확 끼쳐 온다.꽥꽥도 아니고 빡빡도 아닌, 수달과 고양이의 울음소리를 합쳐놓은 것 같은 소리가 연신 들려온다. 갈매기 소리다.무녀도 해안 마을을 거쳐 서쪽, 선유도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출발할 때 약간 뿌옇던 하늘이 맑아졌고, 태양은 취재팀의 머리 위를 그대로 내리쬐고 있었다. 푸른 하늘, 푸른 바다, 이제야 조금씩 불기 시작하는 바람. 무녀도의 해안은 아름다웠다.그리고 그것이 여행길이자 고행길이었던 여정의 시작이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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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권혁일
  • 2016.07.22 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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