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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공감 2019 시민기자가 뛴다] 전북의 이순신 장군 백의종군로를 걷다 ⑦ 운봉초등학교~밤재

4월 26일(병술) 흐리고 개지 않았다. 일찍 밥을 먹고 길을 떠나 구례현(求禮縣)에 이르니 금부도사가 먼저 와있었다. 손인필(孫仁弼)의 집에 거처를 정하였더니, 고을 현감(이원춘)이 급히 보러 나와서 매우 정성껏 대접하였다. 금부도사(이사빈)도 와서 만났다. 내가 현감을 시켜 금부도사에게 술을 권하게 했더니, 현감이 성심을 다했다고 한다. 밤에 앉아 있으니 비통함을 어찌 말로 다하랴. 4월 25일, 남원부를 출발한 이순신 장군은 억수같이 퍼붓는 비에 일정을 멈추고 운봉의 박산취(혹은 박롱)라는 사람 집에서 하룻밤을 머물게 된다. 박산취라는 인물은 장군이 권율 도원수를 만나기 위해 순천으로 갔다가 다시 구례로 되돌아오는 5월 14일, 운봉의 박산취가 왔다라는 기록을 남긴 것으로 보아 예전부터 잘 알고 지냈던 사이로 추측된다. 그리고 운봉에서 머무는 날, 뜻밖에 백의종군로의 동선(動線)이 바뀌게 된다. 당초 권율 도원수의 군진이 있는 경남 초계(합천)로 향하던 중이었는데, 장군의 신병을 인수해야 할 권율 도원수가 순천에 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장군은 호송책임자로 남원부에 머물고 있던 금부도사에게 급히 그대로 남원에 머물러 있으라는 연락을 취하는데, 이때 순천으로 가기 위해 구례로 향하자는 뜻을 전달한 듯하다. 이렇게 해서 지금의 국도 24호선과 비슷하게 함양을 거쳐 초계(합천)로 가려했던 이순신 장군의 백의종군 행로는 운봉에서 구례를 거쳐 순천으로 갔다가, 다시 구례로 돌아온 후, 하동-산청을 거쳐 합천으로 가는 노정으로 바뀌게 된다. 또 장군은 운봉에 머물 때, 현감인 남간(南侃)이 병으로 나오지 않았다는 짤막한 기록을 남기고 있다. 남간은 전라감사 이광의 군관을 지내며 장군과 잘 알고 지내던 사람으로 임진왜란 직전 난중일기에도 나오는 인물이다. 일부 번역에 남한(南僩)이라는 이름으로 나오는데, 남간과 동일 인물로 추정된다. 그래서 병을 핑계로 나오지 않았다라며 서운함을 드러내는 번역에 더 마음이 닿는다. 남간은 난중잡록과 고대일록에도 자주 등장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폭염으로 달구어져 맹위를 떨치던 대기는 어느새 아침저녁의 선선한 바람에 그 기운이 한풀 꺾였고, 성미 급한 이들로부터 심심찮게 가을 이야기가 들려오기도 한다. 8월 24일, 2주 전의 힘겨웠던 걸음이 아직도 생생하게 느껴지는 운봉초등학교를 다시 찾았다. 전북의 이순신 장군 백의종군로 마지막 답사가 되는 이번 구간은 지난 구간에 지나왔던 이백면사무소까지 다시 되돌아가서 주천면 외평마을로 이동한 후, 전남 구례로 가기 위해 전북 남원과 전남 구례의 경계를 이루는 밤재까지 약 20km를 걷게 된다. 고원지대로 벼 수확이 전국에서 가장 빠르다는 운봉 들녘은 벌써 황금색으로 물들었다. 운봉초등학교를 출발하여 서림공원 ~ 한국경마축산고에 이르는 농로를 지나면, 이제 여원재까지 이차선 국도24호선과 함께 걸어야 한다. 갓길이 좁아 걷기에 위험한 곳이 있으니 주의를 요한다. 여원재에서 여원치마애불상 이정표 방향으로 들어서서 여원재 옛길을 따라 이백면사무소에 닿는다. 백파면과 백암면이 합쳐질 때, 글자를 짜 맞추기가 여의치 않았던 듯 이백이라는 이름을 택한 이곳은 대부분의 지역이 백두대간 산자락 아래 자리 잡고 있다. 과립리 마을을 지나 효기마을로 이어지는 길 사거리에는 응령역 이정표(600m)가 서있다. 응령역은 예전 남원부 인근에 있던 동도역과 인월역 사이에 있던 역참이었는데, 현재 응령역 기념조형물의 위치는 옛길을 잇는 동선과는 다소 떨어져 있는 듯하다. 효기리 마을입석 있는 곳에서 약사암 이정표를 따라 가면 충혼탑이 있는 효촌삼거리를 만난다. 백의종군로는 왼쪽으로 4차선 장백산로와 함께 이어지다가 지리산둘레길 안솔치마을 입구를 지나고 이내 주천면 외평마을에 닿는다. 이곳은 예전 남원과 구례를 잇는 주요 교통로에 있던 지역으로 임진왜란기에는 왜군 침입의 길목이기도 한 곳이다. 외평마을에서 밤재에 이르는 길은 지리산둘레길 주천 외평마을~밤재 구간을 이용하여 오르게 된다. 옛길은 외평마을에서 숙성치(숙성령)를 넘어 지금의 구례군 산동면 원달리로 이어졌으나, 사유지 문제 등으로 밤재(율치栗峙)로 대체로가 나있다. 약 7km에 이르는 주천~밤재 구간은 마을길, 숲길, 임도로 이어지는데, 약 두 시간 정도 소요된다. 마지막 임도 구간을 걷다보니 19번국도의 차량 지나는 소리가 갑자기 뚝 끊기고 사위가 조용해진다. 드디어 밤재터널 위를 지나는 모양이다. 지난 4월, 이순신 장군이 백의종군하며 지나간 5박 6일 동안의 전북의 백의종군로를 걷기 위해 익산시 여산면으로 향하던 기억이 새롭다. 독자들과 함께 역사를 회고하고, 절망적 위기와 고난 속에서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던 이순신 장군의 백의종군 정신을 되새겨보자고 시작하였지만, 여러모로 부족한 점이 많음을 느낀다. 이윽고 밤재 이정표가 보인다. 이순신 장군이 구례로 넘어간 후 불과 110여일 후인 1597년 8월 중순, 물밀 듯이 쳐들어오던 5만6천여 명의 왜군은 이곳의 고개(숙성치, 밤재, 둔산치)를 넘어 만여 명이 지키던 남원성으로 향하였던 것이다. 지나온 길 뒤로는 남원 시가지가 아득히 내려다보이고, 고개 중앙 정면으로는 왜적침략길 불망비가 서있어 그러한 사실을 상기시켜주고 있다. 밤재에서 한동안을 서성이다가 비로소 이번 구간 6시간 30분의 답사를 마치며, 전북권 이순신 장군 백의종군로 140여km 답사를 종료한다. 그동안 응원해주신 모든 분들, 답사 기간 내내 함께 걸으며 큰 힘이 되어준 하동군청 김성채 학예사, 그리고 귀한 지면을 내어준 전북일보에 감사드린다. /조용섭 협동조합 지리산권 마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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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08.27 17:23

[문화&공감 2019 시민기자가 뛴다] 전북의 이순신 장군 백의종군로를 걷다 ⑥ 남원 뒷밤재~운봉초등학교

4월 25일 비 올 징후가 많았다. 아침 식사 후에 길에 올라 운봉(雲峰) 박산취(朴山就)의 집에 들어가니, 비가 몹시 퍼부어 머리를 내놓을 수 없었다. 여기서 들으니 원수(권율)가 이미 순천으로 향했다고 하기에, 즉시 사람을 금부도사(이사빈)에게 보내어 머물러 있게 했다. 이 고을의 현감(남간南侃)은 병 때문에 나오지 않았다.[난중일기] 이순신 장군이 백의종군하며 남원을 지나갈 무렵의 기록을 살펴보면 정유재란의 전개 양상을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단서가 발견된다. 먼저 군량 확보를 위하여 3월 중순 전라도로 파견된 호조판서 김수가 남원의 곡식창고를 점검하고 봉인하였다는 난중잡록 4월 기사가 보인다. 그리고 5월 초, 구원병으로 온 명나라장수 양원이 임금 선조에게 가장 긴요한 방어 지역이 어디냐고 묻자, 선조는 마치 이 질문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남원이 요해처이니 이곳의 방어를 부탁한다라고 답하며, 김수는 계속 그곳에 머물면서 조처하라고 지시를 내리는 선조실록 기사이다. 이렇듯 정유재란 발발조짐이 있자 조선 조정은 당초부터 왜군의 호남 공략을 대비해 남원 방어를 최우선 방책으로 삼았고, 구원병이 도착하기도 전에 이미 이곳을 중심으로 전쟁 준비에 만전을 기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장군은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을 남원의 상황에 대해서 일절 이야기를 남기지 않고 있다. 8월 초순이 끝날 무렵 남원시 뒷밤재로 들어섰다. 오전 9시를 갓 넘긴 시각이지만 대기는 이미 달구어져 있고, 배롱나무도 더욱 붉게 꽃을 피웠다. 이번 답사는 뒷밤재에서 남원시가지와 여원재 옛길을 거쳐 운봉초등학교에 이르는 약 24km 구간을 걷게 된다. 뒷밤재에서 아름다운 배롱나무가 가로수를 이루는 길을 천천히 내려서면 백의종군로는 옛 서남대 앞에서 춘향로(17번국도)와 만난다. 이곳에는 도로 오른쪽으로 인도가 잘 조성되어 있다. 폴리텍대학 버스정류소에 이르면 정류소 뒤의 오솔길로 길이 이어진다. 예전 전라선 철길이 지나가던 곳인데, 뜻밖에 사람의 길로 기능하게 되었다. 향교동으로 이어지는 만인로에서는 옛KBS방송국 고갯마루까지 약 700m를 갓길이 없는 이차선 도로로 걸어야 하니 운행에 주의를 요한다. 고개를 내려서면 이내 남원향교를 지나 축천교를 건너게 된다. 남원부 북문(옛남원역)으로 들어서던 옛길은 아파트 단지 있는 곳으로 이어졌다고 하나, 옛길의 흔적은 전혀 가늠할 수 없다. 길은 향교오거리에서 옛남원역을 잇는 대체로로 복원이 되어있다. 전라선 남원역을 도심 외곽으로 이전하며 폐역된 옛남원역은 예전 남원성 북문이 있던 곳으로, 현재 문화재청의 유물유적 발굴 작업이 한창이다. 남원성은 정유재란기인 1597년 8월 16일, 만여 명의 인명이 처절하게 숨져간 가슴 아픈 역사가 서린 역사의 현장이다. 만여 명의 시신을 합장한 만인의총은 이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다. 백의종군로는 옛남원역에서 횡단보도를 건너 법원사거리(남원지원)로 이어지며, 이곳에서는 왼쪽으로 방향을 틀어 시외버스터미널-동림사거리를 차례로 지난다. 이곳의 도로명은 용성로인데, 남원의 오래된 역사가 서려 있는 길이다. 용성(龍城)은 남원의 옛이름이다. 동림사거리에서는 복잡한 도심 구간을 피하고 아름다운 요천을 보며 걸을 수 있도록 요천변 동림교 앞으로 길을 이어놓았다. 요천은 장수에서 발원하여 남원의 젖줄을 이루며 흐르다가 곡성에서 섬진강 본류와 만나는데, 지리산을 포함한 헌걸찬 백두대간 산자락의 물길이 모여 흐르는 강이다. 동림교에서 요천로를 따라 2km 남짓 진행하면 월락삼거리가 나온다. 백의종군로는 이곳에서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어 이백로로 들어선다. 도로를 따라 이백면사무소까지 약 5Km를 불볕더위와 맞서며 걸어야 한다. 이백면사무소에서 이백초등학교를 지나 작은 다리를 건너니 목가리 마을회관에 도착한다. 목가리(木街里)는 현재 무척 한적한 마을이나, 24번 국도가 주 도로로 기능하기 전인 1960년대까지만 해도 여원재를 거쳐 남원과 운봉-함양을 오고가던 길목으로, 주막과 양조장이 있었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로 북적거렸다고 한다. 양가저수지에 이르면 여원재 옛길이 시작된다. 오래전, 가시나무와 넝쿨로 밀림을 이루던 이 길의 복원을 추진하며, 사람들은 길을 버렸고, 길을 스스로 몸을 감추어버렸다라며 곳곳에 파발을 띄우던 기억이 새롭다. 길은 저수지 왼쪽으로 진행하여 오른쪽 갈대밭 사이로 난 길로 이어진다. 산허리를 가로질러 숲으로 들어서면 이제부터 한동안 너르고 반듯한 오솔길을 걷게 된다. 키 큰 소나무 숲 옆의 삼거리에서는 정면 갈대밭 사이로 난 길로 들어서서 계곡을 건넌다. 철조망과 무덤 있는 곳을 지나니 이내 휴식하기 좋은 숲속의 넓은 공간을 만난다. 쉼터 옆의 예쁜 계곡에서 오늘 폭염 속의 고행을 충분히 위로받는 듯하다. 숲길을 잠시 오르면 오래된 글이 새겨져 있는 거대한 바위를 차례로 만난다. 이른바 유정과차(劉綎過此), 유정부과(劉綎復過) 각석(刻石)이다. 각각 1593년(계사년) 5월, 1594년(갑오년) 3월, 임진왜란기에 구원병으로 참전한 명나라장수 유정이 지나갔다는 내용이 새겨져 있다. 곧이어 나주임씨삼세충의비와 여원치마애불상을 차례로 지나니, 24번 국도로 올라서며 백두대간 고개 여원재에 닿게 된다. 백의종군로는 24번국도(황산로)를 따라 진행하다가, 한국경마축산고 앞의 마산교를 지나 왼쪽 과수원 농로로 이어지며 서림공원을 지난다. 옛길은 24번 국도변 향돈촌 있는 곳으로 곧장 이어졌다고 한다. 예전 운봉 객사가 있었던 운봉초등학교에서 폭염 속의 답사를 마친다. 7시간 30분이 소요되었다. /조용섭 협동조합 지리산권 마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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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08.20 17:48

[문화&공감 2019 시민기자가 뛴다] 영화 속 판소리 이야기

더운 여름이다. 시원한 피서지가 그리워지지만 때로는 집에서 편하게 영화 한 편 감상하는 것도 좋은 피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다양한 영화들이 있지만 판소리 영화 한 편 감상해보는 건 어떨까? 판소리 소재 영화라면 많은 분들이 우선 2015년도에 개봉한 도리화가를 떠올릴 것이다. 류승룡, 수지, 송새벽 등 호화 캐스팅의 영화다. 30, 40대 이후로는 서편제를 떠올릴 수도 있다. 한 극장에서 하나의 영화만 상영하는 단관 시절 1백만 관객을 돌파한 임권택 감독의 1993년 작 영화다. 하지만 영화 휘모리를 기억하시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 같다. 서편제 개봉 이듬해인 1994년에 개봉한 판소리 영화다. 국악계의 명인, 명창이 직접 출연한 영화로 이임례 명창과 국악인 고 이병기 선생의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 남우 주연은 이태백 명고다. 남자 주인공 병기 역을 맡았다. 이임례 명창이 바로 이태백 명고의 어머니고 고 이병기 선생은 그의 아버지다. 여자 주인공 임례 역은 김정민 명창이 했다. 음악은 김영동이 맡았고, 작창은 김일구, 김영자 명창이 했다. 조통달 명창, 고 박병천 명인, 채향순 명무가 특별출연했다. 국악계의 명인, 명창이 대거 출연한 영화다. 영화는 1956년 진도국악원을 배경으로 시작된다. 국악원에서 도둑소리를 하던 임례가 소리 선생 병기의 눈에 들어 판소리를 시작하게 되고 이후 소리꾼으로 성장하고 살아가며 겪는 인생역정을 그렸다. 특별출연했던 조통달 명창을 만나 영화 속 판소리 이야기를 들었다. 비가 오락가락하던 7월 말에 전라북도립국악원 창극단장실을 찾았다. 조 명창이 반갑게 맞아주었다. △휘모리에 출연하게 된 상황을 좀 들려주시겠어요? 제가 1991년도에 전남도립국악단장으로 재직하고 있을 때, 이임례 씨가 제게 출연해주면 좋겠다고 해서 출연하게 되었던 것으로 기억해요. 나오는 시간은 몇 분 안 되어도 촬영시간이 오래 걸렸어요. 표정도 각양각색으로 지어야 했고, 공연장면을 여러 각도에서 여러 대의 카메라가 이리 끊고, 저리 끊고... 저만 잘하면 되는 게 아니라 관객 표정과 연계도 시켜야 하고 되게 복잡하더라고요. 그래도 동시녹음인 점은 맘에 들었어요. 제 소리가 현장 소리 그대로 담겨서 좋았죠. △토굴에서 독공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소리꾼들이 실재로 그런 독공을 많이 하나요? 영화에서는 한 장면만 잠깐 나오지만 실재로는 더 많이 해요. 저도 13세 때 전국명창대회에서 1등을 했지만 변성기가 와서 목이 주저앉아가지고 그걸 극복하려고 독공을 했어요. 어린 나이였지만 집 근처 서울 북악산 등에서 독공을 했죠. 산이나 폭포, 사찰 같은 데서 소리꾼들이 다양하게 독공을 합니다. △산에서 혼자 독공하면서 무섭지 않으셨나요? 한 번은 독공하려고 한 겨울에 북악산에 올라가는데, 산길에서 하얀 것이 하나 올라오는 거에요. 무서워서 백여시인가?하고 자세히 봤더니 어떤 아줌마가 소복차림으로 올라오더라고요. 산 속 약수터에 기도하러 가는 길이래요. 같이 산을 올라가면서도 무서워서 여우 꼬리 보이나 살피며 갔었죠. 이런 일도 있었어요. 심청가 중에 심봉사가 황성 올라가는 대목에 뻐꾸기 소리가 나와요 이 대목을 연습할 때였어요. 한참 뻐꾹, 뻐꾹, 뻐뻐꾹, 뻐꾹했더니, 주변 나무에 앉아 있던 뻐꾸기가 안 가요. 제가 뻐꾹하니까, 나무에서 뻐꾸기가 뻐꾹하더라고요. 지 친구인 줄 알았나 봐요. △소리에 한이 담겨야 한다는 얘기가 나오던데 한이 담긴 소리란 무엇이라 생각하시나요? 인생역정이 없는 사람은 소리의 한을 담은 바이브레이션이 안 나와요. 사람의 심금을 울리는 소리, 이게 한을 담은 소리죠. 스승인 박초월 명창께서는 제게 목구녘에 한을 넣어야 하는데, 너 시련이라도 한 번 당해보면 알 것이다. 애통한 마음이 뿜어져 나오는 그 소리가 한을 담은 소리다.라고 하셨죠. 한이 담긴 소리는 슬픔을 담아 심금도 울리고, 웃음도 진한 웃음을 줄 수 있어요. 한마디로 사람에게 희로애락을 모두 줄 수 있는 소리가 한을 담은 소리죠. △한을 담은 소리를 한다는 건 쉽지 않을 텐데요? 쉽지 않죠. 그래서 항상 소리 앞에 겸손해야 돼요. 대통령상 탔다고 목에 힘주고 그러면 안 돼요. 힘주다 보면 부러져요.(웃음) 아미를 단정히 숙이고(머리를 단정히 숙이고) 그래야 돼요. 박초월 선생께서는 늘 벼가 익을수록 고개를 숙여야 한다. 아미를 숙이고, 그래야 그 자리에 오래도록 설 수 있다.고 하셨어요. 젊었을 때는 몰랐지만 이제는 조금 알 것 같아요. △장단이 한을 불러내야 한다는 얘기가 나오던데요? 북장단의 중요성을 얘기한 것이죠. 소리와 북장단, 어떤 것이 더 중요하다는 얘기는 아니고요. 일 청중, 이 고수, 삼 명창이라는 얘기가 있습니다. 북을 치는 고수는 소리꾼과 청중 사이의 매개자 역할을 하는 존재죠. △전라북도립창극단을 이끌고 계신데 어떤 활동 펼치고 계시나요? 판소리 본류를 돌아보고자 작년 10월에 판소리 페스티벌을 했고 올해에도 6월에 소리문화관에서 저를 포함한 27명의 소리꾼이 정통 소리판을 열었어요. 많은 호응이 있었죠. 지금은 10월에 선보일 창극 만세배 더늠전을 준비하며 바쁘게 지내고 있습니다. △도민들께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요? 도민 여러분께 기쁨 드리는 작품을 만들고자 단원들과 함께 땀흘리고 있습니다. 도민여러분이 계셔야 판소리가 환하게 꽃필 수 있습니다. 아무쪼록 많은 관심과 사랑 부탁드립니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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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08.19 17:09

[문화&공감 2019 시민기자가 뛴다] 휴가철 서노송예술촌에서 예술과 만난다

지난 주 전주시에서 도시재생뉴딜과 함께 문화적 도시재생이 함께 진행되고 있는 서노송예술촌을 찾았다. 지금도 선미촌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서노송동 일대는 전주의 중심 시가지에 위치하고 있지만 가장 낙후된 곳이기도 하다. 성매매집결지라는 지역의 특성상 전주시 중심 시가지에서 1960년대 지어진 낡은 건물들이 위치하고 있으며, 공간의 특성상 지역민의 문화를 통한 삶의 질도 뒤떨어져있다. 2019년 문화적 도시재생사업으로 6월부터 선미촌에 자리를 잡은 전주 문화적 도시재생 사업추진단 인디의 총괄기획자 장근범 작가와 시간을 가졌다. △문화적 도시재생 사업 도시재생뉴딜은 문재인 정부의 주요 국토정책으로 낙후된 기존 도시에 새로운 기능을 도입해 쇠퇴한 도시를 새롭게 부흥시킨다는 것을 목적으로 시행되고 있다. 국토부에서 추진하는 도시재생 사업이 구도심과 노후주거지 개선을 통한 주민 생활 개선을 주된 목표로 하고 있다면, 문체부에서 추진하는 문화적 도시재생은 지역의 정체성을 기반으로 지역 문화 가치 발굴을 통해 지역민의 삶의 질 향상, 사회적 유대감 형성을 통한 공동체 회복을 주된 목적으로 하고 있다. 2018년 처음 시행된 문화적 도시재생 사업은 충남 천안시, 경북 포항시, 부산 영도구 등 4개 지역을 시범사업으로 실시했으며, 2019년에는 총 19곳으로 사업대상지를 확대했다. 전주시는 완산구 서노송동 일대 즉 성매매집결지인 선미촌 인근을 주요 사업지로 공모해 선정되었다. △전주 문화적 도시재생 사업추진단 인디 문화적 도시재생 사업은 지역 고유의 문화가치를 존중하고 지역민이 문화적 삶의 가치를 확립하여 문화를 통해 도시공간의 가치를 재구성하는 것을 목표로 주민, 예술가, 전문가가 함께 참여하여 지역 정체성을 스스로 만들고 지켜가는 것을 주된 목적으로 한다. 전주 문화적 도시재생 사업추진단 인디는 총괄기획자 장근범, 아트디렉터 민경박, 경영지원팀장 김지은, 교육담당 신유정, 창업담당 이정우가 팀을 꾸려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사업추진단 인디의 뜻은 전주사투리 ...인디에서 따 왔다고 한다. 상대방의 말을 잘 듣다가 자신이 하고 싶은 의견을 피력할 때 전주사람들이 잘 쓰는 말 중에 하나가 그랬는디, ...했는디 다. 상대의 의견을 존중하면서 나의 의견도 나누는 접미사로 그 말에서 전주 사람들의 성향이 잘 드러난다. 장근범 기획자는 사투리 ,,,인디처럼 전주의 정체성을 담은 전주에서만 할 수 있는 문화예술을 담고자 인디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말했다. △서노송예술촌-사람이 심고 꽃이 답하다 전주 문화적 도시재생 사업추진단 인디가 예술가, 주민과 함께 만들고자 하는 서노송동은 어떤 모습일까? 인디는 사람이 심고 꽃이 답하다를 사업 주제로 문화적 도시재생사업을 진행한다. 사람이 심고 꽃이 답하다는 주민과 예술가의 협업을 통해 마을 스스로 지속적이고 자생적인 문화재생과 활성화가 가능한 마을로의 변화를 위해 배우고(Learn) 키우고(Grow) 만들고(Make) 나누는(Share) 네 가지의 프로그램으로 운영된다. 또한 5개의 주제인 인문, 가드닝, 창업, 예술, 마켓을 주민과 예술가 그리고 전문가가 결합함으로써 지속적인 문화적 도시재생의 동력을 확보하는 기반을 마련할 계획이다. 6월 14일 사업설명회를 시작으로 5개 주제인 인문, 가드닝, 창업, 예술, 마켓 분야는 매달 지역주민과 예술가, 전문가와 함께 워킹그룹을 구성해 사업의 방향을 논의하고 있다. △서노송예술촌 주민과 함께 하는 물결예술휴가주간 사업단은 주민과 시민, 예술가 등 다양한 참여자가 함께 하는 예술주간 진행으로 선미촌이라는 공간이 성매매집결지가 아닌 예술촌으로 한 걸음 나아가는 계기를 마련하고자 8월 14일부터 20일까지 저녁 7시에서 10시까지 물결예술휴가주간인디를 운영한다. 8월 14일 김정희 박사의 맛있는 채소 이야기 강연과 또띠아 시식회, 8월 15일 박준 시인 시 낭독회, 8월 16일 합정지구 사례 공유 워크숍, 8월 17일 서울 야시장 및 문례 문화예술촌 답사, 8월 18일 인문 예술 소모임 클럽 마주와 함께 하는 영화 토크쇼, 8월 19일 마을 주민과 박규현 예술가가 함께하는 수박 국수 잔치, 8월 20일 이영욱 작가와 함께 하는 선미촌 예술의 방향을 논의하는 묻고 답하다를 진행할 계획이다. 사업단이 저녁 7시부터 10시에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이유는 지역민이 찾지 않는 서노송동의 밤을 지역민과 함께 나누는 예술 프로그램 운영으로 누구나 서노송동의 밤을 공유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기 위한 새로운 시도다. △서노송예술촌에 예술 심기 장근범 총괄기획자는 선미촌이라는 공간의 특수성과 다양한 의제로 사업에 어려움이 있지만 문화를 통한 도시재생이라는 사업의 근본 성격에 집중하겠다고 말했다. 또한 지역민을 위한 문화적 도시재생을 위해 사소한 것부터 주민과 예술가와 논의를 통해 결정하고 있으며, 문화적 가드닝을 통해 시민이 찾을 수 있는 공간으로 변화하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지역의 정체성과 인문적 가치를 기반으로 문화와 예술을 통해 만드는 도시재생은 어려운 과제다. 지역의 문화 정체성을 찾는 것이 주된 목적인 문화적 도시재생사업의 1년 단위로 진행되는 것은 아쉬움이 남는다. 1950년대 이후부터 전주에 가려진 공간으로 존재했던 선미촌이 서노송예술촌으로 변모하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리라고 본다. 그곳이 문화와 예술을 통한 예술촌으로 자리 잡기 위해서는 70여년간 선미촌으로 불려졌던 물리적 시간을 간과할 수는 없다. 서노송예술촌이 지역 주민을 위한 문화 예술 공간으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조금은 느린 시선으로 지켜보는 여유가 필요하리라고 본다. /고형숙 전주 부채문화관 기획팀장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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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08.06 15:58

[문화&공감 2019 시민기자가 뛴다] 동학 126년, 평화그림책으로 꽃 피우다

호남에 깃들어 사유하는 우리에게 익숙한 사건 하나가 동학이다. 동학은 그 뒤 다음과 같은 어휘가 따라붙는다. 혁명이거나, 전쟁. 우리가 동학에 부여하는 의미는 대개 동학농민혁명 혹은 동학농민전쟁이다. 둘 모두 이 땅 사람들의 목숨을 거두어간 참혹함을 담고 있다. 전쟁에 처참히 지고 말았고, 혁명은 흔적도 없이 부수어지고 말았으니, 말이다. 어색하지만, 전국의 청소년들이 모여, 그 동학의 처참함에서 평화를 찾아내는 소박한 캠프를 열었다. 지난 7월 25일부터 27일까지 3일간 책마을해리에서 <2019 청소년 동학캠프>가 열렸다. 벌써 6년째, 횟수로는 일곱 번째다. 이번 캠프는 이 땅에 가장 낮은 사람들이 평화롭게 밥 한 끼 나누자며 일으킨 동학을 바탕에 두고, 전국 청소년 서른 명 남짓과 함께했다. 그동안 열린 캠프가 참가 청소년들이 기자가 되어, 모두 <동학청소년신문>을 결과물로 만들어 냈다면, 올해는 결이 좀 다르다. 그림책이다. 전라북도의 동학공간을 126년 전으로 돌아가 살피며 당시 사람들의 사유를 잠깐 들여다본 청소년들이 그 과정을 평화에 실어 중계해 주었다. 그림책은 9월말 출판기념회를 통해 세상과 만날 예정이다. △청소년동학신문에서 동학평화그림책까지, 6년의 여정 청소년동학캠프가 열리는 책마을해리는 세대를 물문하고 누구나 찾아, 읽고, 하고, 쓰고, 펴내는 책 만드는 인문테마공간이다. 어린이시인학교와 청소년만화학교, 그림책학교, 서평학교, 생태학교 등 경험을 통해 책 짓는 활동을 진행하고 있다. 특히, 2014년 시작한 청소년 동학캠프는 전라북도 곳곳에 흩여져 있는 동학농민혁명의 발자취를 따라 역사적 의미를 되새기는 프로그램이다. 동학농민군 대장을 선발하고, 무장기포지와 무장읍성, 선운사 마애불 등 고창동학 유적지를 탐사한다. 숙영지 만들기와 동학군 후손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 모든 과정을 글과 그림, 사진으로 기록해 청소년동학신문을 발간해 왔다. 2019청소년동학캠프는 조금 다른 결을 가지고 준비했다. 준비팀은 제주43과 광주518, 일본군위안부, 625 한국전쟁, 민주화운동 등 아픈 역사를 통해 평화와 인권을 이야기하는 다양한 그림책들을 접하면서 그 평화와 평등 이야기의 첫 시작인 동학농민혁명을 주제로 한 그림책이 없어 아쉬움이 컸다고 한다. 그 아쉬움이 발단이 되었다. 이번 청소년동학캠프에서는 청소년들 시선으로 동학농민혁명을 바라보고, 고민하고, 그 바탕이 되었던 평화에 대해 이야기하는 그림책을 만들어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도록 하고자 했다. △사흘, 동학이야기는 어떻게 그림책이 되어가는가 청소년동학캠프는 참가자들이 평화그림책 작가가 되어 다양한 주제의 평화그림책들을 탐구하고, 전북지역 동학유적을 답사해 각자각자가 해석한 평화스토리를 만드는 프로그램으로 운영했다. 첫날은, 집결을 마친 청소년동학농민군들과 평화그림책 함께 읽고, 당시 농민들은 왜 동학농민혁명을 시작했는지 배경을 이야기했다. 이후 손화중과 김개남, 전봉준의 이름을 딴 접을 만들어 농민군대장을 뽑고, 우리에게 평화가 왜 필요한지를 이야기 나눴다. 이야기 나눈 것을 바탕으로 가사를 새로 지어, 노래에 붙여 불러보기도 했다. 오후에는 진짜 저녁밥이 주먹밥이냐는 수많은 물음들을 뒤로하고 운동장에 모여 숙영지와 주먹밥 만들기를 진행했다. 비록 숙영지에서 잠을 잘 수는 없었지만 동학농민혁명 당시 농민군들의 생활을 엿보며, 내 마음 속의 평화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청소년 동학캠프 둘째 날은 동학농민혁명의 발자취를 따라 탐사를 떠났다. 동학농민혁명의 발상지인 무장기포지와 동학농민혁명홍보관 무장읍성, 고창읍성, 전봉준 장군 생가, 도솔암 마애불 등을 돌아보았다. 특히 고창읍성에서는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진윤식 이사장의 특강이 이루어졌다. 오후에는 동학농민혁명과 평화, 인간과 삶의 의미를 바탕으로 한 평화그림책 스토리 만들기를 진행했다. 동학농민혁명의 과정을 설명하는 이야기부터, 동학농민군으로 참여한 한 사람의 삶을 통해 바라본 평화그림책 등 다양한 이야기들을 엿볼 수 있었다. 이윽고 밤, 거센 비를 무릅쓰고 참가자들 앞에 모습을 드러낸 건축가 곽재환 선생과 만났다. 곽재환 선생은 삶이 깃드는 건축가로 이름나 있다. 그는 평화의 바탕에는 자유와 평등, 우애가 깃들어야 한다, 누구나 무엇을 뜰 때 손바닥을 모아 만드는 손 집에, 욕심 대신 사랑과 화해, 평화를 담자는 이야기를 청소년들에게 전해주었다. 셋째 날은 이육남 그림책작가와 지난 밤 만든 평화 스토리를 바탕으로 그림책 지면을 구성했다. 한 지면에 글과 이미지가 어떻게 놓일지, 그림은 어떤 방식으로, 누가 그릴 것인지를 함께 생각하고 각자의 역할 나누어 그림책 만들기를 진행했다. 모두 펼침 한바닥씩 그림을 그렸다. 글을 가지런하게 정리했다. 캠프의 마지막 일정은, 가을에 태어난 그림책의 멋진 작가, 저마다 작가를 소개하는 작가소개글 쓰기였다. 작가 소개 글을 마지막으로 사흘동안 아쉬운 일정을 마무리했다. △역사의 현장 지금 여기에서 우리 스스로가 바로 역사라는 깨달음 2017년부터 청소년동학캠프에 빠짐없이 참여한 광주 배자초 6학년 윤채율 학생은 미국에서 태어나 우리 역사에 대해 잘 모르고 있다. 한국에 들어와 매년 여름 참여하는 동학캠프를 통해 우리 선조들이 걸었던 길을 마음에 깊이 새기게 되어서 참 좋다. 작년까지는 신문으로 나와서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는데, 이번에는 책이 나온다고 하니 더 정성을 기울인 것 같다. 책이 나오면 한번 더 고창에 오고 싶다고 말했다. 또 우리 역사에 대한 감성을 키우는 동학캠프에 고마운 마음을 전하기도 했다. 일본에서 몇몇 정치인들이 강제징용 배상판결을 문제 삼아 억지를 부리며 수출규제를 하고 그 일로 우리 국민이 일본 물건 안사고 일본 여행 안다니는 운동을 펴고 있잖아요. 이런 때에 동학캠프를 통해 일본과 우리가 오래전부터 맺은 불행한 관계를 이야기 나누니 더 의미가 컸어요. 해리중학교 이다경(2학년) 친구의 이야기다, 동학캠프는 역사를 돌아보는 캠프에서 나아가 내가 어떤 역사를 만들 수 있는가, 하는 새로운 감각을 길러준다. 시절도 광복으로 치닫는 8월이다. 일본과 물밑 경제전쟁의 복판에서 맞는 광복은 또 우리에게 어떤 의미일까. 동학농민들은 우금치 패전 뒤, 일본군 기관총에 변변한 저항도 못하고 추풍낙엽으로 산화했다. 이번 동학캠프는 전북지역에서 10여명, 서울, 광주, 남양주, 인천, 하동 등 전국 각지에서 참여했다. /이영남 버들눈도서관장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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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07.30 17:12

[문화&공감 2019 시민기자가 뛴다] 전북의 이순신 장군 백의종군로를 걷다 ⑤ 임실군 임실읍~남원시 뒷밤재

4월24일 맑음. 일찍 출발하여 남원에 이르렀는데, 고을에서 15리 쯤 되는 곳에서 정철(丁哲) 등을 만났다. 남원부 5리 안까지 이르러서 내가 가는 것을 송별하였고, 나는 곧장 10리 밖의 동쪽(東面) 이희경(李喜慶)의 종 집으로 갔다. 사무친 애통함을 어찌하리오.(<난중일기> 중) 4월 23일 임실현 치소(治所)에서 하룻밤을 머문 이순신 장군은 다음날 아침 일찍 길을 나서 남원부 앞 15리(6km) 즈음에서 정철 일행과 해후를 한 후, 부성(府城)으로 들어가 저녁나절까지 함께 시간을 보낸 듯하다. 연구자들은 그 일행 중에 선산부사 출신으로 이순신 장군의 종사관과 남원부사를 지낸 정경달(丁景達. 1542~1602)이 동행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그는 장군이 의금부에 투옥되어 있을 때 임금 선조에게 직접 구명운동을 벌인 인물이다. 또 전라좌수영 소속 낙안군수로 있으면서 장군 휘하에서 견내량, 안골포 해전을 함께 치른 신호(申浩.1539~1597)라는 인물도 당시 남원 교룡산성 수어사로 부임하여 성을 지키고 있었는데, 정철과 동행하였을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이순신 장군이 실명으로 밝힌 정철 역시 장군 휘하에서 많은 전투에 참여한 인물이다. 그는 전라좌수영 관내(여수)에 장군의 모친과 친지들의 거처를 마련해주었고, 장군이 의금부에 투옥되었을 때 적극적인 구명활동을 하였다. 그런데 디지털여수문화대전(여수향토문화백과)에는 정철이 1595년 부산전투에서 전사한 것으로 나오고 있어 이에 대한 확인이 필요하다. 불볕더위가 맹위를 떨치는 7월 중순, 전북의 이순신 장군 백의종군로 다섯 번째 답사를 위해 지난 구간 종료지점이었던 임실보건의료원 주차장으로 들어섰다. 이번 구간은 임실읍에서 출발하여 오수면을 거쳐 남원으로 들어서는 길을 걷게 된다. 임실보건의료원에서 임실119안전센터를 지나 삼거리에 이르면 왼쪽으로 방향을 틀어 감성마을 입구를 지난다. 길은 군부대의 철조망과 나란히 이어지며 말재(마치馬峙) 고갯마루에 닿는다. 말재 옛길은 정면으로 이어지는 비포장 도로(임도)를 버리고 왼쪽 폐농장 아래로 크게 방향을 꺾어 숲속으로 들어서야 하니 진행에 주의를 요한다. 옛길은 비교적 넓은 산길로 이어지지만 무릎까지 웃자란 풀숲에 발 디디기가 쉽지 않다. 말재 옛길과 임도를 활용한 말재 순환길을 조성하여 걷기 코스로 활용하면 어떨까 생각해 본다. 성수면 오류리의 외딴집 앞으로 내려서는 옛길은 트랙을 참조하지 않았다면 진행이 쉽지 않았을 듯하다. 외딴집에서 매실과수원 사이의 길을 내려서서 전라선 철길 아래를 지나면 오른쪽으로 크게 방향을 틀며 이차선 도로가 일직선으로 펼쳐진다(4km). 오촌마을 입구(오암3길 이정표)에 이르면 왼쪽으로 진행하여 삼거리에 닿는다. 이곳에는 오수의견비와 의상정(義想亭), 오촌마을 표시석이 있다. 옛 17번 국도를 걸어 인화초중고 앞을 지나면 왼쪽 둔남천 제방으로 올라서서 오동교까지 진행한다. 둔남천은 오수 시가지를 벗어날 즈음 오수천에 합류하여 순창으로 흘러 섬진강의 수계를 이룬다. 오동교를 건너 상신마을 앞을 지나면 오수면 시가지가 가까워져 있다. 오수면은 면단위의 지역답지 않게 시가지가 꽤 발달되어 있고 상권도 꽤 큰 듯하다. 옛 이름이 둔남면으로 대부분의 땅이 옛 남원부의 소속이었던 오수에는 조선시대에 종6품 찰방이 주재하는 오수역이 있었다. 오수역은 경상도 함양, 하동과 남부 전라도 순천, 낙안을 잇는 역참 11곳을 관할하던 오수도의 주 역참이었다. 불과 36년 전인 1983년에도 남원시 덕과면의 금암리가 오수면에 편입되었을 정도로 오수는 남원과 지정학적으로 뿌리가 같은 곳이다. 1992년 8월에 행정구역명을 둔남면에서 오수면으로 바꾸었다. 오수면사무소와 오수시장 앞을 차례로 지나 오수천이 흐르는 금암교를 건너면 남원으로 들어서는 17번국도 오수교차로가 지척이다. 이곳에서는 국도 아래를 지나 남원시 덕과면 소재지 앞으로 이어지는 옛 국도로 진행한다. 오수교차로부터는 남원시에서 세운 백의종군 이정표가 길을 안내하고 있으며, 주요 장소에는 종합안내판도 세워 개념도와 거리, 이순신 장군 백의종군로가 지니는 역사적 사실과 의미를 알리고 있다. 3.1운동 기념비가 있는 남원시 덕과면 월평정류소와 사매면 사매초등학교 앞을 지나 사매교차로를 지나면 17번국도(춘향로)와 나란히 걷게 된다. 진행방향 도로 왼쪽으로 넓은 인도가 있어 안전하게 걸을 수 있다. 이곳에는 춘향전의 고장 남원답게 길 곳곳에 춘향이 버선밭 등 춘향전 관련 내용을 담은 조형물들이 조성되어 있다. 이즈음에서 만나는 오리정(五里亭)은 예전 남원을 오고가는 사람들을 맞이하거나 이별을 하던 곳이다. 이순신 장군이 정철 일행을 만난 고을 앞 15리(6km) 되는 곳도 거리상으로 보아 이곳 즈음으로 추정된다. 오리정은 백의종군로 상에 있는 오리정휴게소에서 도로 아래 통로로 다녀올 수 있다. 17번국도 대율교차로에서 국도를 벗어나 왼쪽으로 진행하면 넓은 공터가 나오고, 왼쪽 산자락 방향으로 춘향길 안내판이 서있다. 이 오래되고 호젓한 이차선도로는 예전 17번 국도이자 오래전부터 한양과 통영을 잇는 조선시대 도로 제 6路인 통영별로 상의 길이기도 하다. 배롱나무가 꽃망울 터트릴 준비를 하고 있는 뒷밤재 고갯마루에서 오늘의 여정을 마친다. 약 24km 운행에 휴식시간 포함 7시간 30분 정도 소요되었다. 이 더운 날, 짧지 않은 길을 동행해준 하동군청 김성채 학예사에게 깊이 감사드린다. /조용섭 협동조합 지리산권 마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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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07.23 17:35

[문화&공감 2019 시민기자가 뛴다]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서 전통예술, 그 전승에 대하여

얼마 전 남원농악이 우리 지역에서 또 하나의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 예고되었다. 지정 대상이 되는 기예능은 악기연주, 판굿, 개인놀이, 부들상모 제작이다. 특이한 점은 부들상모 제작이었다. 악기연주나 판굿, 개인놀이 등은 일반적이나 농악소품을 만드는 기술까지 포함한 경우는 쉽게 접할 수 없었다. 부들상모란 구슬 속에 명주실을 꼬아 만든 끈을 넣고 끝에 날짐승의 깃털로 만든 부포를 달아 만든 상모를 말한다. 남원농악 수장고 염창수 씨가 상쇠 류명철 명인과 소고잽이 고 홍유봉 선생에게 제작 기술을 배워 전승하고 있다. 고창농악의 경우도 수소고 임성준 씨가 고 유만종 선생에게 고깔소고춤에 쓰이는 소고 제작기술을 배워서 계승하고 있다. 각자의 전통과 색깔을 간직한 농악소품은 농악구성의 중요한 부분으로 여겨진다. 상모, 소고 등의 제작 기술은 일종의 도구제작 지식으로서 유네스코에서 인류무형문화유산(Intangible Cultural Heritage of Humanity)으로 주목하는 부분 중 하나다. 21세기 들어 유네스코에서 지정하는 인류무형문화유산이 국내외적으로 관심 받고 있다. 인류무형문화유산이란 문화재청의 설명에 의하면 2003년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 보호 협약에 의거하여 문화적 다양성과 창의성이 유지될 수 있도록 대표목록 또는 긴급목록에 각국의 무형유산을 등재하는 제도로서 지금은 세계유산과 마찬가지로 정부간 협약으로 발전 되었다. 우리나라의 인류무형문화유산은 판소리(2003), 강강술래(2009), 아리랑(2012), 김장문화(2013), 농악(2014), 씨름(2018) 등 총 20개다. 특히 씨름은 한국 전통 레슬링, 씨름이라는 명칭으로 2018년에 사상처음으로 남북공동 등재가 되어 화제가 되었다. 그간 우리나라에서 무형문화유산은 문화재보호법에 의거하여 보호되었다. 그러나 한계를 보여 2015년에 무형문화재 보전 및 진흥에 관한 법률(이하 무형문화재법)이 따로 제정되어 2016년 이후 시행되었다. 한 인터넷 포털에 소개된 국민신문고의 관련 글에서는, 기존의 문화재보호법이 일정한 성과가 있었지만 원형을 유지하도록 하는 원칙 등이 무형문화유산을 창조적으로 계승하는 데는 오히려 저해되었다고 했다. 건물, 그림 등과 같이 일정한 형태를 지닌 유형문화유산은 원형의 모습을 얼마나 그대로 유지, 보존하느냐가 관건일 수 있다. 하지만 사람의 행위나 문화로 이루어지는 무형문화유산은 한 시점에 머무르도록 잡아두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고 그 타당성도 모호하다. 무형문화재법은 유네스코의 무형문화유산보호협약(이하 유네스코 협약) 취지를 반영하고 있다. 유네스코 협약에서 인류무형문화유산은 공동체, 집단 및 개인들이 그들의 문화유산의 일부분으로 인식하는 실행, 표출, 표현, 지식 및 기술뿐 아니라 이와 관련된 전달 도구, 사물, 유물 및 문화 공간 모두를 의미하는 것이다. 범위는 무형문화유산의 전달체로서의 언어를 포함한 구전 전통 및 표현, 공연 예술, 사회적 실행, 의식, 그리고 축제, 자연과 우주에 대한 지식 및 관습, 전통적 공예 기술이다. 무형문화유산을 전승하고 향유하는 사람들로서 공동체와 그들의 문화에 주목하고, 이들이 가진 광범위한 지식의 영역까지 관심의 폭을 확대하고 있는 것이다. 최근 남원농악에서 부들상모제작 기술까지 지정대상이 된 것도 이 흐름의 반영으로 이해된다. 무형문화유산 논의를 국내외에서 선도해 온 전북대학교 함한희 명예교수를 7월 어느 날 그의 연구실에서 만났다. 함 교수는 부들상모 제작을 지정 대상으로 삼은 것은 무형문화재를 총체적, 통합적으로 보는 시각이라고 했다. 유네스코 협약의 방향성을 고려하는 추세의 영향이라고 했다. 유네스코 협약에서 주목하는 것은 원형보다는 살아있는 문화이고, 무형문화유산을 간직하고 향유하는 공동체라고 했다. 사람들이 간직한 다양한 지식, 기술 등을 문화의 관점에서 폭넓고 생동감 있게 보려는 것으로 필자는 이해했다. 누가, 왜 하는가에 주목하는 것이다. 바쁜 21세기에 인류무형문화유산이 주목 받는 이유를 물었다. 함 교수는 무형문화유산은 사람들의 마음을 달래줍니다. 농악이나 줄다리기 등에 사람들이 왜 참여하겠어요? 이걸 통해서 공동체를 형성하고 그 안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고자 하는 것이지요. 현대인들이 공동체를 더욱 만들고 싶어 해요. 라며, 무형문화유산은 옛날 거, 원형적인 것 이런 것만이 아니에요. 과거를 가지고 현재를 살면서 미래로 가져가는 것, 미래 삶의 방향성을 찾는 것입니다. 고 했다. 우리나라 무형문화재 정책이 유네스코 협약 취지에 발맞추려 하곤 있지만 공동체에 주목하지 않는 점, 살아있는 문화 중심이라기보다는 원형, 전형 중심이라는 점이 다르다고 했다. 전주 한옥마을 근처에 가면 유네스코 아태무형유산센터(ICHCAP)를 볼 수 있다. 아시아 태평양 지역 48개 유네스코 회원국들 간의 무형문화유산 교류의 중심이 되는 국제기구다. 그것이 전주에 설립된 것은 한국의 문화적 위상과 전라북도의 풍부한 무형문화유산의 가치를 인정받은 결과다. 2019년 7월의 오늘, 전통예술의 전승도 소수의 예능자 중심에서 다수가 공유하는 현재형의 문화가 되는길로, 원형의 경계에서 생동하는 창조적 계승으로 행보를 넓힐 때다. /조세훈 문화인류학 연구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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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07.16 17:41

[문화&공감 2019 시민기자가 뛴다] 용머리여의주마을 주민이 만드는 도시재생의 현장

날씨가 점차 더워지는 요즘 지난 4월 개소식을 치루고 마을공동체를 통한 도시재생을 위해 애쓰고 있는 용머리여의주마을 현장지원센터 이경진 센터장을 만났다. 전주시 용머리여의주마을은 도시재생뉴딜사업 공모에 선정돼 2021년까지 도시재생사업이 진행된다. 이경진 센터장은 90년대 중반 용머리고개에서 2년 정도 거주했던 경험이 있어 이 마을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다. 3월 13일부터 주민설명회를 시작으로 주민협의회를 통해 환경, 복지, 홍보, 교육, 사업 등의 분과를 나누어 현재 이경진 센터장과 허나겸, 이현재, 조남이 씨가 주민들과 함께 마을 재생을 위해 활동하고 있다. △도시재생뉴딜 도시재생뉴딜은 문재인정부의 국책사업으로 동네를 완전히 철거하는 재건축재개발의 도시 정비사업과 달리 기존 모습을 유지하며 도심 환경을 개선하려는 사업을 말한다. 2013년부터 도시재생 사업이라는 이름으로 낙후된 기존 도시에 새로운 기능을 도입해 쇠퇴한 도시를 새롭게 부흥시킨다는 것을 목적으로 시행되어 왔다. 도시재생 사업은 눈에 띄게 성과를 내지 못했는데 정부의 지원도 넉넉지 못했고, 단순히 새로운 건물이 올라서는 것 에 머물렸다는 것과 지역주민과의 소통의 부족 등이 문제점으로 인식됐다. 2016년 전남 목포시가 원도심 활성화 명분으로 설치 개장한 남행열차포차의 경우 시장활성화를 위해 목포중앙식료시장 도로변에서 진행을 했으나, 사업시행 전 주민설명회 등의 논의 구조를 거치지 않고 일방적으로 진행돼 상인회와 지역민에게 외면 받았다. △용머리여의주마을 마을공동체 논의를 통해 사업 진행 문재인 정부는 매년 100여개의 노후화된 마을을 지정해 정비하고 낡은 주택을 리모델링해 공공임대주택으로 재활하는 것을 주된 목적으로 하고 있다. 기존 도시재생의 1,500억원이었던 한 해 예산을 10조 원으로 확대하고 기존 도시재생의 문제로 지적되었던 거주민과의 소통을 이끌어내기 위해 사전논의 구조를 갖추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용머리여의주마을은 3월 13일 주민설명회를 열고, 3월 22일 주민협의체 첫 준비회의를 시작으로 도시재생뉴딜 사업 첫발을 띄었다. 이후 4월 11일 용머리여의주마을 현장지원센터 개소식을 열고 주민협의회 위원과 주민, 전주시도시재생지원센터와 현장지원센터 일꾼 등 50여명이 함께했다. 이후 매주 정기회의 및 사업구상 워크숍을 진행해 공가 및 텃밭 확인, 쓰레기 배출 문제 논의, 골목길 겨울철 눈길 위험 지대 등 마을 곳곳을 돌며 주거환경 개선을 위해 활동하고 있다. △마을공동체 함께 나누는 음식이 복지의 시작 마을공동체가 주민복지를 위해 처음 실천한 것은 마을 주민들의 먹거리에 신경 쓴 것이다. 40~60대가 거주민의 반 이상을 차지하고 65세 이상이 28%를 차지해 어르신들이 많이 거주하시다 보니 먹거리에 신경을 써 4월에는 열무물김치를 담아 지역 주민과 나눔 행사를 펼쳤다. 이후 5, 6월에 짜장나눔 행사를 진행했다. 마을공동체는 환경개선을 위한 EM 교육, 마을 쓰레기 한 트럭 정리, 쓰레기 불법 투기를 막기 위한 활동, 상추 나눔, 마을소식지 지속 발간 등 다양한 활동을 지속하고 있다. △도시재생, 공폐가 매입이 시급 이경진 센터장은 현장지원센터를 중심으로 주민협의회가 소통하며 주거지재생을 이끌어가고 있는 것은 큰 성과라며, 용머리여의주마을의 최종 목표는 공동이용시설과 LH임대주택 건립이라고 말했다. 공동이용시설은 동네 빈집을 매입해 주민을 위한 주차장, 작은도서관, 다목적실, 카페 등을 마련해 더 살기 좋은 주거복지환경을 위한 공간 마련이다. 이경진 센터장은 용머리여의동마을의 경우 빈집 즉 공폐가가 동네에 20%를 차지한다. 방치된 빈집들은 동네의 미관을 훼손하고 관리부실로 악취, 쓰레기 처리 등 문제가 심각하다. 이를 매입을 위해 집주인과 연락을 시도해도 거주지도 알 수 없어 사업진행의 어려움이 많다며 거주하는 주민의 주거생활에 큰 걸림돌이 되고 있는 공폐가 철거가 가장 큰 문제이고, 공폐가 강제수용이 되지 않는 한 도시재생은 성공하기 힘들다고 밝혔다. 용머리여의주마을 도시재생뉴딜 사업은 주민이 함께하는 마을로 첫발을 내딛었다. 마을개선사업을 통해 살기 좋은 마을로 탈바꿈되는 최종의 목표는 주민의 노력만으로는 어려움이 있다. 이에 마을환경 개선 및 주민 주거 복지실현을 위한 공폐가 철거 및 정리를 위한 실효성 있는 대책이 필요하리라고 본다. /고형숙 전주 부채문화관 기획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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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07.09 17:20

[문화&공감 2019 시민기자가 뛴다] 어린이부터 청소년까지…새로운 기록세대의 탄생

기록은 우리 인류가 지금 문명을 이루어온 긴 여정에서 빠뜨릴 수 없는 핵심 고리이다. 우리가 읽고 있는 이 신문과 같이 수많은 사람들의 기록의 결과물로 태어난 매체야말로 시대를 견인하고 인류를 인류답게 자리매김하도록 쉴새없이 영감을 불러일으킨 주인공이기도 하다. 기록의 주체는 누구였을까? 기록의 임무를 부여받은 사람들은 다양한 모습으로 변해왔다. 왕조시대는 사관이 임금의 곁에서 그 기록의 일을 수행했다. 조선왕조실록이야말로 그 기록의 정수이다. 지금은 유네스코 세계기록문화유산인 그 실록을 우리 지역 선조들이 지키고 오늘에 이어지도록 애를 쓰기도 했다. 기록은 사람을 넘어 시대를 담고 있기 때문에 누구나 쉽게 그 기록자의 역할을 얻지 못했다. 투철함으로 무장한 일단의 사람들에게 부여된 책무였다. 무시무시한 책임이 뒤따르는 일이었다. 신문, 방송, 출판 같은 우리시대를 대표하는 매체를 살펴보면, 여전히 기록자로서 책무는 흔들림 없다. 매체의 위상이 변화하고 있다, 하는 시대상에 대한 고찰은 조금 뒤로 하더라도 우리 곁에 새로운 기록세대가 출현하고 있는 현상을 자주 목격하게 된다. 그 새로운 기록세대는 바로, 우리 다음세대인 어린이 청소년들이다. △흔들리며 스스로 흔들리지 않으려는 세대의 기록 새로운 기록세대의 등장을 알리는 몇 가지 사례를 살피려고 한다. 먼저 고창지역 여덟 명의 청소년들이 쓴 책, 『흔들리며 흔들리지 않고』이다. 2016년 9월 12일 일어난 경주지진(규모 5.8)으로 온 나라가 지진의 공포에 휩싸였다. 이 사건으로 온 국민은 대한민국이 더 이상 지진의 안전지대가 아니라는 것을 느꼈고, 지진을 비롯한 재난에 대비하고자 하는 적극적인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흔들리며 흔들리지 않고』는 미래를 만들어갈 청소년들이 지진과 재난에 대처하는 방법을 이야기하고 있다. 한창 흔들리는 열일곱, 열여덟 살의 청소년들이 흔들리며 흔들리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는 자기보고서인 셈이다. 이 책은 2017년 200종을 가려 뽑는 세종도서에 선정되기도 했다. 청소년들이 직접 쓴 책이 세종도서에 선정되는 일은 극히 드문 일이어서 화제가 되었다. 『아직은, 혹은 이미』는 전라북도 청소년들이 직접 쓴 청소년생활백과이다. 이 책은 우리들 청소년의 삶이라는 주제 아래 자신들의 이야기를 솔직하게 담고 있다. 청소년들의 고민과 그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가는 청소년고민상담소 잘 지내고 있나요?, 아직은 혼란스러운 와중인지, 아니면 스스로 안에서 뭔가 갈피를 잡아가고 있는지 살피는 청소년문화론 아직은 혹은 이미, 마지막 대한민국 청소년 생활의 꿀팁으로 가득한 대한민국 청소년 잡학사전으로 구성되어 있다. △앞 세대를 읽고 기록하는 자서전 써드리기부터 어린이 시집까지 지난 고창한국지역도서전에서는 특별한 행사가 있었다. 어린이, 청소년 출판전시회와 어린이, 청소년 작가와의 만남이다. 고창지역 어린이, 청소년들이 출판한 책 『요리 통, 조리 통, 통통셰프와』, 『톰 소여의 아지트』, 『이미지로 엮는 사람책』 등의 어린이, 청소년들이 출판과정을 이야기하며 독자와 만났다. 군산 푸른솔초 친구들은 쓴 시를 모은 어린이시집 『호박꽃오리』 꼬마시인들은 독자들 앞에서 직접 쓴 시를 낭독하는 시간을 가졌다. 상기된 얼굴로 자작시를 읽어 내려가는 아이들의 모습을 바라보는 관객들의 얼굴엔 흐뭇한 미소가 가득했다. 군산 회현중 친구들은 지난 3년간 회현지역 어르신들의 자서전 써드리기를 진행하며 출간한 『찬란하고 쓸쓸한』(1,2,3)으로 독자들을 만났다. 자신의 엄마, 아빠, 할머니, 할아버지, 그리고 지역 어르신들의 이야기를 듣고 자서전을 대신 써드리는 작업은 아이들에게 지난 세대를 이해하게 하고 자신의 미래에 대해 생각해보게 한다. 어르신들이 살아온 날들이 현재와 미래의 바탕이 되고, 영웅과 위인들뿐 아니라 평범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역사가 오늘을 만든다는 사실을 깨닫게 한다. 저자소개글을 통해 한 친구는 어르신의 일생 이야기를 들으며 내 인생을 부끄럽지 않게 살아야겠다고 결심했다. 나도 늙어서 내 인생을 되돌아보는 나만의 자서전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고백한다. 경기도 평택시립장당도서관에서도 지난 4년간 꾸준히 마을인물백과사전을 만들어 왔다. 『오성을 기억하다, 오성을 기록하다』(1,2,3,4) 역시 청소년들이 대신 써드린 어르신 자서전이다. △다양한 스펙트럼 어린이청소년 저자의 탄생 버들눈도서관이 있는, 책마을해리는 매년 어린이, 청소년들과 출판작업을 꾸준히 진행중이다. 『파도는 내 발이 좋은가 봐』, 『강아지풀은 다 커도 강아지풀』 등 다섯 권의 어린이시집과 『넌 너, 난 나』,『아무 것도 안 할래』등의 만화책, 『열두 살 고민해결서』, 『고양이별』 등 4권의 그림책, 『손그림생태도감』, 청소년서평집 『내가 믿는 사람은, 나』 등 다양한 책을 출간하고 있다. 이외에도 어린이, 청소년 친구들은 <마을신문> 기자로도 참여하며 글과 이미지로 자신들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또한 출판캠프를 통해 어린이, 청소년들이 저자가 되어보는 체험과 실험을 계속 진행 중이다. 올해 초 바닷가 작은 학교 동호초등학교 6학년 친구들은 졸업을 앞두고 초등학교 6년의 이야기를 글로 써 졸업앨범을 직접 만들었다. 전교생이 20여 명에 졸업생 네 명, 시골 작은 학교에서는 졸업앨범을 만들기 쉽지 않다. 턱없이 높은 제작비 때문이다. 책마을해리에서 기획하고 친구들과 선생님, 후배들이 합심하여 만든 동호초등학교 74회 졸업앨범 『자, 이제 날아올라』는 뜻 깊은 선물이 되었다. △새로운 감성으로 함께 읽기 함께 쓰기하는 우리의 다음 세대에 거는 희망 어린이, 청소년들은 출판을 통해 스스로 세상의 중심이 되고 있다. 그런데 그 중심을 혼자서 이룩하는 것이 아니다. 대개의 어린이 청소년 출판은, 혼자 한권의 책을 완성하는 방식이 아니다. 함께 쓰기 통해 또래 여러 친구들이 생각을 모아, 품을 모아 한권의 책을 완성하는 것이다, 여럿이 함께 하나의 세계를 완성하는 길 위에서 친구들은 나도 중심, 너도 중심, 우리 모두가 함께 사회를 이뤄가는 존재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책의 주인공이라는 자존감 형성과 더불어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서로 기대어 함께 사는 존대, 하나의 공동체임을 자각하게 된다. 출판이 어렵고, 출판시장이 점점 위축되고 있지만, 다양한 작가군의 등장이 출판계에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고 활력을 불어넣어줄 것으로 기대한다. 새로운 감성으로 무장한, 함께읽기, 함께쓰기를 통해 공동체의식까지 버무릴 줄 아는 우리의 다음세대, 어린이 청소년 작가, 새로운 기록세대의 출현이 반가운 까닭이다. /이영남 버들눈도서관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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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07.02 15:54

[문화&공감 2019 시민기자가 뛴다] 전북의 이순신 장군 백의종군로를 걷다 ④ 완주군 상관면 신리~임실군 임실읍

4월 23일(癸未계미) 맑다. 일찍 출발하여 오원역(烏原驛)에 이르러 역관에서 말을 쉬게 하고 아침밥을 먹었다. 얼마 후 도사(都事)가 왔다. 저물녘 임실현으로 가니 현감이 예를 갖추어 대접했다. 현감은 홍순각(洪純慤)이다.[난중일기] 4월 22일 전주 남문(풍남문) 근처에서 하룻밤을 보낸 이순신 장군은 다음날 완주군(상관면)과 임실군(관촌면)의 경계를 이루는 고개인 슬치(瑟峙)를 넘어 오원역에 도착하였다. 오전에 20여km에 이르는 짧지 않은 거리를 이동하여, 이곳에서 아침식사를 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초여름(양력 6월 7일)에 오원역에서 불과 12km 거리에 있는 임실현 치소에 저물녘에 도착하였다고 하니 이곳에서 꽤 오랜 시간을 보낸 듯하다. 오원역은 삼례도 소속의 역으로, 영조 때 편찬된 여지도서에 역마 10필, 역리역노 등 180여 명의 인원이 배속되었다고 나오는 것으로 보아, 교통과 숙박 등의 업무를 담당하는 비교적 큰 규모의 역원(驛院)이었음을 알 수 있다. 역이 있던 곳은 본래 상북면이었는데, 일제강점기 때인 1914년 오천면 선천리로 되었다가, 1935년 지금의 이름인 관촌면 관촌리로 바뀌었다. 그리고 일기 끝부분에 현감이 예를 갖추어 대접했다라는 내용은 규례대로 쌀쌀맞게 대하였다라는 뜻이라고 한다. 이번 답사구간은 완주군 상관면 신리를 출발하여 임실군 임실읍 임실보건의료원에 이르는 약 25km 거리로, 대체적으로 17번국도(춘향로)를 따라 진행하게 된다. 6월 15일 오전 10시 경, 신리에 있는 상관면행정복지센터를 출발하였다. 지난 답사 후 약 한 달이 지나는 사이, 여름으로 들어선 산자락은 온통 밤꽃 세상으로 바뀌었다. 약 10여분 진행하여 춘향로를 만나면, 전라북도 도로관리사업소(북부지소) 맞은편에서 횡단보도를 건넌다. 백의종군로는 도로관리사업소 정문 앞을 지나 상관천(전주천) 왼쪽으로 나있는 좁은 포장도로로 이어지고, 편백나무 숲길로 이어지는 공덕교에 닿으면 다리를 건너 상관천의 오른쪽 길(죽림반월길)로 진행한다. 상관교 아래를 지나 죽림온천 단지 뒤편 상관천과 철길 옆으로 이어지던 한적한 길은 북치교 앞에서 17번국도 쪽으로 이동하여 통로를 지난다. 이제 다소 위험한 국도 갓길을 걷게 된다. 상관면(上關面)의 관關은 빗장을 의미한다. 군사장 중요한 지역으로 진(鎭)을 두어 방어하거나 검문소 역할을 하는 곳이다. 상관면은 신리 약 9km 남쪽에 협곡을 이루며 옛 전주부의 관문 역할을 하던 만마관(萬馬關)의 위(북쪽)에 있다하여 지어진 이름이며, 남관진은 상관의 남쪽에 있는 군진을 뜻한다. 남관초등학교 교차로 서쪽에는 1873년(고종10)에 세워진 남관진 창건비가 있다. 남관진 창건비 있는 곳에서 횡단보도를 건너 도로 왼쪽으로 진행 방향을 잡는다. 만마관의 역사를 짤막하게 기록해둔 안내판을 만나기 위함이다. 남관 아울렛 매장을 지나 원용암마을에 닿으면 만마관 안내판이 지척에 있다. 18세기 실학자 성호 이익이 쓴 절영마가(絶影馬歌) 중에 지리산 앞 대방(남원)의 북쪽 마을에는 아직도 만마의 이름이 전해지네라는 내용이 있는 것으로 보아 오래전부터 만마동이 존재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인근을 둘러보면 협곡을 이루는 도로 건너편 군데군데 만마관의 축성에 쓰였을지도 모를 돌무더기가 보인다. 이내 길은 왼쪽으로 휘어지며 산정마을 앞으로 이어진다. 슬치(瑟峙)에 이르러 이제 임실군으로 들어선다. 고개이름에는 대체로 비파 슬瑟을 시용하고 있으나, 조선후기 김정호가 지은 청구도 등에는 소치(掃峙)로도 표기하고 있다. 슬치는 만경강과 섬진강의 물길을 가르는 호남정맥 산줄기 상의 고개이다. 이제 드디어 섬진강 수계로 들어서게 되는 것이다. 백의종군로는 모텔 건너편 슬치마을 쪽으로 횡단보도를 건너 마을 안쪽으로 들어와, 석장승과 솟대가 서있는 곳에서 왼쪽으로 방향을 틀며 내려선다. 국도와 나란히 이어지는 길이다. 관촌시장이 마주 보이는 곳에서 국도로 내려서며 관촌면 소재지로 들어서니 신리에서 약 14km 걸었다는 메시지가 나온다. 관촌리 시가지를 벗어나면 섬진강의 상류인 오원강을 건너야한다. 제법 큰 물길을 이루는 이곳에는 인도가 있는 오원교가 놓여있다. 다리를 건너 사선문에서 완만한 내리막길을 내려서면 저만치 관촌역이 보인다. 백의종군로는 관촌역에서 횡단보도를 건너고, 제2오원교 앞에서 왼쪽으로 방향을 틀며 창인로로 이어진다. 섬진강의 강폭이 꽤 너르게 펼쳐지는 것을 볼 수 있다. 이곳에서는 대체로 약 11시 방향에 있는 예원예술대학교를 이정표 삼아 진행한다. 창인교를 건너면 시골마을 답지 않게 깔끔하게 정돈된 창인리로 들어서고, 예원예술대학교 정문 앞을 통과한다. 이어서 철길이 있는 군사시설의 담을 따라 잠시 진행하다가, 초소 앞에서 왼쪽 언덕으로 올라 용은마을과 두실교를 차례로 지난다. 다시 17번 국도와 만나는데, 임실읍으로 들어서는 용은교에는 갓길도 거의 없어 매우 위험하였다. 백의종군로는 임실휴게소 있는 곳에서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어 호반로로 이어진다. 두곡저수지 옆을 지나 고갯마루를 내려서면 임실읍 시가지가 시야에 들어온다. 삼거리를 만나면 원불교 교당이 보이는 왼쪽 길로 진행하고, 임실문화원을 만나면 다시 오른쪽으로 잠시 이동하여 왼쪽에 보이는 코아루아파트 방향으로 나아간다. 아파트 앞의 천변길을 거쳐 임실등기소에 이르러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면, 정면 큰 교차로에 있는 임실보건의료원이 지척이다. 구간거리 약 25km, 식사 및 휴식시간 포함 약 8시간 소요되었다. /조용섭 협동조합 지리산권 마실 대표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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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06.25 16:39

[문화&공감 2019 시민기자가 뛴다] 다른 역사와 공감의 예술, 그리고 전주

지난 6월 7일부터 10일까지 전주대사습놀이 전국대회(이하 전주대사습놀이)가 성대하게 치러졌다. 전주한옥마을과 경기전, 국립무형유산원 등지에서 전통예술의 향기가 진하게 피어올랐다. 전주대사습놀이가 한창 진행 중이던 8일, 한옥마을 인근 풍남문 광장에서 다른 색깔의 공연이 올려졌다. 제4회 초록바위진혼제. 과거 초록바위에서 죽어간 민초들의 넋을 달래기 위한 공연이었다. 전주대사습놀이는 연구자로 참관하였고 초록바위진혼제에는 공연자로 참여했다. 같은 오늘, 다른 역사가 느껴졌다. 전주대사습놀이는 그 유래에 대해서 몇 가지 의견이 있으나 전라감영의 통인들과 전주부의 통인들이 깊이 관련되었다는 점은 공감을 얻고 있다. 18세기 중엽에 이루어진 전주 통인청 대사습이 명창 배출의 등용문 역할을 했고 그 전통을 고증하여 오늘날의 전주대사습놀이로 계승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통인은 조선 시대에 관아의 벼슬아치 밑에서 일을 보던 사람들을 말하며, 통인청은 이들이 일을 보던 관사다. 통인은 최근 모 지상파 방송의 동학관련 드라마에서 백가네 거시기로 묘사되기도 했다. 극적인 전개 상 악인으로 설정된 점은 고려해야 하겠지만 관아에서 통인들의 지위나 생활을 이해하는 데 참고삼을 만하다. 전주 통인청 대사습은 경연대회 성향을 가진 서민 중심의 판소리 감상회였던 것 같다. 1960년대와 1970년대에 전주대사습을 조사한 홍현식의 면담자료에는 전주 통인청 대사습을 직‧간접 적으로 경험한 전주 노인들의 증언이 다양하게 실려 있다. 양반들은 경연장에 오지는 않고 행사가 마무리된 후 명창들을 자신의 집에 따로 불러 판소리를 듣곤 했다는 증언이 있다. 양반들이 있었나, 없었나가 중요한 건 아니다. 주된 관객층은 서민들이었던 것 같다. 또한 분명한 건 전주의 통인청대사습이 관아에서 주관한 행사였다는 점이다. 국문학자 유영대는, 전주 대사습이라는 명칭을 그대로 사용하였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전주에서 이방이나 통인들이 판소리 명창을 초청하여 일종의 소리잔치를 했던 역사는 300년이 더 되었을 것이라고 봤다. 이는 20세기 초까지 지속되었을 것이라고 했다. 시기를 떠올려 보면 전주에 아로새겨진 또 하나의 역사와 중첩된다. 1894년. 동학농민혁명. 초록바위는 전주천 싸전다리 부근에 있다. 정확하게는 동완산동 곤지산 자락에 있는 바위언덕을 말한다. 조선시대에 죄인을 효수하던 곳이었고, 동학농민군과 천주교 신자들도 이곳 초록바위에서 처형당했다. 동학농민혁명 지도자 김개남 장군이 초록바위 근처 서교장에서 참수당했다는 기록이 있고, 초록바위에서 전주천 물속으로 떠밀려 죽어간 15세의 두 소년 천주교 신자들의 이야기가 전해온다. 권력을 개혁하고 새로운 세상을 만들고자 했던 역사의 기운이 핍박당한 상징적인 곳이다. 칸타타 형식의 이번 초록바위진혼제에서 작곡과 음악감독을 맡은 피아니스트 이형로 씨를 만났다. 공연 며칠 후였다. 초록바위진혼제의 내력에 대해 들었다. 그가 초록바위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건, 10년 전 한옥마을에서 서학동으로 이사를 오면서부터라고 한다. 초록바위의 사연을 접하고 초록바위가 있는 곤지산 자락을 여러 번 올라갔다고 한다. 수풀만 우거져 역사의 흔적은 사라지고 찾아볼 수 없었다. 뜻을 함께하는 지인들과 많은 의견도 나누고 행정에 찾아가 길도 정비해 달라고 했다고 한다. 그러면 진혼제도 열어보겠다고 했다는 것이다. 행정에서 길을 정비해주고 서학동 주민들과 자발적으로 참여한 진보적 예술단체의 힘이 모아져 4년 전에 초록바위진혼제를 시작했다고 한다. 첫 회 때는 초록바위 정상에서 직접 풀을 깎고, 전기를 끌어오고, 악기를 짊어지고 가서 했고, 2회 때는 장소가 여의치 않아 인근 동물병원 주차장에서 했다고 한다. 3회 때는 국립무형유산원 야외 마당에서, 4회는 풍남문 광장에서 열게 되었다. 동학농민군의 전주입성일인 음력 4월27일을 기념하여 그 인접한 날에 하고 있다고 했다. 그는 진혼제를 준비한 주민과 예술가들이 더욱 힘을 모아서 시민들의 잔치로 만들어 가면 좋겠다고 했다. 과거를 용서하는 것이 현재의 위로가 될 수 있고, 현재의 위로가 내일의 문화자산이 될 수 있을 것이라며, 초록바위진혼제가 봄에 이팝나무가 흐드러지게 피듯이 전주에 뜻있는 봄의 문화행사로 자리 잡으면 좋겠다.고 했다. 다소 엉뚱한 상상을 해본다. 1894년 동학농민혁명 당시, 통인청 대사습을 주관했던 통인들은 무엇을 했을까? 관의 역사와 민의 역사가 부딪히는 현장 어디쯤에 그들은 있었을까? 백가네 거시기처럼 역사의 넓은 스펙트럼을 유영하며 파란만장한 행보를 했을까? 전주대사습놀이와 초록바위진혼제가 필자에게 다른 결의 역사로 다가온 건 이런 모습이었다. 전주대사습놀이는 관의 역사로 다가왔고 초록바위진혼제는 민의 역사로 다가 왔다. 전주대사습놀이는 통인청 대사습 이전에도 전주대사습놀이보존회에서 유래로 소개하고 있는 숙종, 영조 대의 사습놀이, 영조 대의 지방 재인청 및 가무 대사습청 설치와 소리광대에 대한 벼슬 제수, 명창 칭호 하사 등에서도 관과 닿아 있는 역사를 볼 수 있다. 초록바위진혼제는 동학농민이나 천주교 신자와 같이 관에 맞서거나 그 뜻을 거스르다 죽어간 민초들을 위한 진혼제다. 민의 역사와 함께 할 수밖에 없다. 두 행사에는 공통점이 있다. 근간은 모두 서민, 백성이라는 점이다. 통인청 대사습의 소리판을 가득 메우고 명창의 탄생을 좌우했던 것도 결국은 서민들이었다. 초록바위의 애끓는 사연들도 백성들의 것이었다. 그것이 오늘날 전주에서 시민의 예술로 표출되고 있는 것 같다. 색깔은 달라도 서로 공감하면서 말이다. 다른 역사지만 공감의 예술을 품고 있는 곳, 전주를 말할 때 이런 점도 꼭 빠트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조세훈(문화인류학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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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06.18 16:48

[문화&공감 2019 시민기자가 뛴다] 전주부채, 전통을 이어가다

지난 7일은 우리나라 4대 명절 중 하나인 단오(端午음력 5월 5일)였다. 설날, 추석, 한식과 함께 단오는 일 년 중 양기가 가장 왕성한 날로 우리 선조들은 씨름, 탈춤, 그네뛰기 등의 놀이를 즐기며, 여자들은 창포물에 머리를 감으며 풍만한 양기를 온 몸으로 즐겼다. 단오선물은 부채요, 동지 선물은 책력이라는 속담이 있듯 단오하면 떠오르는 게 왕이 신하들에게 선물로 하사했다는 부채다. 일반 서민들도 서로 부채를 선물하며 더운 여름을 시원하게 보낼 수 있는 도구로 사랑받았다. △선조들의 예술작품에 등장하는 단오와 부채 단오날에 대한 이야기는 우리 선조들의 문학과 그림에도 등장한다. 춘향전에서 이도령과 성춘향의 만남은 단오에 이루어졌다. 단오날 광한루에 그네를 타고 있는 춘향에게 이도령이 첫 눈에 반하면서 그들의 사랑이 시작되었다. 우리가 잘 아는 조선시대 화가 신윤복, 김홍도의 풍속화에서 단오와 부채를 담은 작품을 살펴보자. 신윤복의 풍속화첩 중 하나인 단오풍정은 단오날 여인들이 그네를 타고 머리를 감고 있는 풍경을 담은 그림이다. 그와 더불어 신윤복의 풍속화첩 30점 중 5점에서 부채가 등장한다. 무녀신무, 쌍검대무, 쌍춘야흥, 청금상련, 춘색만원에 무당이 들고 있는 무선, 양반이 들고 있는 합죽선을 담은 장면이 담겨 있다. 어찌 보면 요즘 시대에 핸드폰처럼 여름에는 항상 들고 다녔던 일상용품이 부채였다는 생각이 든다. 씨름하는 풍경을 담은 단원 김홍도의 씨름도에는 단오날 씨름을 하는 풍속을 담고 있다. 흥겨운 씨름판에서 부채를 들고 관람을 하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단오 즈음 씨름판이 벌어졌음을 추측할 수 있다. 씨름도 외에 그림감상, 나들이, 담배썰기, 빨래터, 시주, 평안감사향연도, 마상청앵도 등 다수의 작품에서 부채가 등장해 부채가 일상에서 얼마나 자주 사용되었는지를 보여준다. △1970년대 후반 부채 소비량 감소 바람을 일으키는 도구였던 부채가 자리를 빼앗긴 건 전력을 사용해 바람을 만드는 선풍기와 에어컨이 큰 역할을 했다. 국내에서 1960년대까지는 선풍기는 부유층이나 가질 수 있는 물건이었다. 1970년대 후반 삼성전자에서 삼성 컴퓨터 선풍기라는 선풍기를 출시했고 당시 가격이 2만2500원인 고가의 제품이었다. 1977년 7월 5일자 경향신문 기사 생활에서 의식까지 탈바꿈 현장을 가다를 보면 부채 대신 더위를 식히는 선풍기에어컨에 대한 기사와 함께 전주에서 부채를 만드는 장인의 수가 줄어들고 있다고 이야기가 실려 있다. 아이러니 하게도 기사 속 사진에는 부채 장인이 선풍기를 틀어놓고 부채를 만드는 사진과 함께 선풍기로 아기재우고 엄마는 들로. 옛 정 물씬 합죽선은 토산품점에나라는 문구가 실려 있다. 더위를 식히기 위해 선풍기를 틀어놓고 부채를 만나는 장면과 함께 합죽선의 명성이 사라진다는 사진은 아이러니 하지만 1970년대 후반에는 선풍기가 보급화 되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자료로 부채가 일상생활용품에서 토산품으로 밀려난 현실을 보여준다. △대를 이어 부채 만드는 선자장들 부채산업의 하향세에도 부채 만들기를 멈추지 못하고 대를 이어 부채를 만드는 장인들이 있다. 전주에는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선자장 1인(김동식), 전라북도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선자장 4인(박인권, 방화선, 엄재수 조충익), 故 이기동 선자장의 아들 낙죽장 1인(이신입)과 선자장으로 지정되지는 않았지만 50년 이상 부채를 만들어온 노덕원, 유춘근, 이완생, 박상기 등 15명 이상이 부채를 만들고 있다. 김동식 선자장은 지난주 단오를 맞아 서울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다. 합죽선을 만든지 60년의 온 정성을 쏟은 전시를 준비하는 그의 집을 방문했을 때 그는 바쁜 와중에 택배로 집에 온 오래된 부채를 손보고 있었다. 10년 전에 전주에서 샀는데 종이가 낡고 부채살이 깨져서 수선을 맡겼다고 했다. 10년 전에 만든 건데 모양이 참 좋네. 이번에 고치면 10년은 더 쓸 수 있겠어라며 낡은 부채살을 빼내고 새로운 부채살을 깎고 있었다. 산업화에 의해 사라진 것들은 부채뿐만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아직도 전주에서 부채가 만들어지는 것은 10년이 지난 부채를 곱게 싸서 수선을 맡기는 사람들의 애정과 그 부채를 고치는 장인들이 아직도 남아있기 때문일 것이다. /고형숙 전주 부채문화관 기획팀장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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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06.11 16:31

[문화&공감 2019 시민기자가 뛴다] 용오정사, 우리 것의 정수를 쓸어 담아 고이 피워낸 몇 송이 꽃

걸음을 딛는 발의 감촉, 땅은 아직 마지막 봄의 기색을 머금고 촉촉하게 우리 몸의 무게를 견디어주고 있다. 하루이틀 사이 이 숲의, 들의 기운이 바뀌어 걸음은 먼지를 흩트리는 겨운 여름을 맞을 것이다. 고창 무장 용오정사(龍塢精舍) 가는 길은 100여 년 전 망국의 삶을 살았던 사람들이 머금었던 신산한 숨을 차분히 뱉어내는 길이다. 허파 깊이 닿는 투명한 공기에, 여린 초록이 무성한 길이다. △용오정사에 깃든 한 시대의 의기, 용오 정관원(鄭官源) 선생 우리 집이 무장현 사랑방이여. 용오정사를 지키는 정계석 무장향교 유림회장 이야기다. 정사(精舍)의 내력을 청하는 짧은 시간에도 그의 거처는 몇 차례 지나는 손님들 맞는다. 대를 이어 향교 일을 도맡아온 그가 지금의 행정구역을 넘는 옛 시간을 소환한다. 무장현은 현재 고창군의 무장면을 비롯해, 대산, 해리, 심원, 상하, 성송, 공음면을 포괄하는 넓은 개념이다. 그 무장현의 사랑방을 지키는 정 회장은 용오정사의 용오 정관원(鄭官源) 선생의 증손이다. 용오 선생은 1894년 37세 나이로 성균관 진사에 올랐다. 1896년에는 일본에 맞서 장성의 기삼연(寄三衍) 선생과 의병을 일으켜 항일투쟁에 나선 의병장이기도 했다. 그는 고종의 석연찮은 죽음을 두고, 마을 뒤편 바위에 단을 쌓고 곡을 이어가다가 병으로 세상을 떠난다. 64세, 1920년의 일이다. 그가 단을 쌓고 세상의 울분을 울음으로 터뜨린 자리가 지금 용오정사다. △뒤틀어지면서 균형을 이루는 곡선의 기둥, 사선으로 비껴 배치한 연기막이 용오정사는 대문으로 쓰인 외삼문을 지나, 강당으로 쓰인 경의당(敬義堂), 서재와 숙소로 쓰인 홍의재(弘毅齋)에서 내삼문 상운루(祥雲樓)를 거쳐 사당으로 용오 선생을 모신 덕림사(德林祠)까지 모두 다섯 건물을 이르는 통칭이다. 이 다섯 채 건물을 감싸고 채마다 허리께가 보일락말락 야트막한 담장을 두르고 있다. 경의당 현판은 이광사(李匡師)의 글씨로 알려져 있다. 들보와 기둥에 편액과 주련이 촘촘하다. 불가무차소(不可無此所)는 추사의 스승 옹강방의 글씨로, 구수산방(求壽山房)은 추사, 금성옥진(金聲玉振)은 고종의 다섯째 아들 이강이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글씨만으로도 용오 선생과 이 가문의 초연결을 가늠하고 남는다. 앞 다섯 칸 옆 두 칸 팔작지붕 경의당 곁에는 홍의재가 있다. 글씨를 통해 세계의 구현을 읽었다면, 홍의재는 형태다. 다섯 채 건물에 솜씨로 혼을 불어넣은 이가 누구일까? 문득 궁금이 일어날 정도다. 그만한 집의 꼴, 용오정사의 첫글자 용(龍)의 꼴을 머금고 있기 때문이다. 건물의 기둥이 그야말로 자연 그대로이다. 용틀임으로 구불구불하기 이를 데 없는 나무기둥으로도 놀라울만치 가지런한 수평이 선을 이루었다. 100년을 넘도록 들보와 서까래의 직선을 지탱해온 곡선의 구부러진 힘 앞에 탄성이 터진다. 이 홍의재에서 핵심은 연기막이예요. 광주 아시아문화의전당 전문위원을 지낸 대목 조전환의 이야기다. 한국을 넘어 아시아, 세계 어느 건축물에서도 찾을 수 없는 형태라고 한다. 사선으로 기울어져 아궁이 연기가 건물에 올라 섞이지 않게 배치한 연기막이는 뒤틀어지면서 균형을 이루는 곡선의 기둥과 어쩌면 이렇게 적절하게 어울리는지. △시대의 의기를 담고, 새로운 문화의 싹을 심은 솜씨가 만난 덕림사 용오 선생과 극재 정방규(鄭枋珪) 선생이 배향된 사당 덕림사는 용오정사를 대표하는 공간이다. 홍의재와 경의당을 지나 사당으로 가기 위해 내삼문인 상운루를 거쳐야 한다. 앞 세 칸 옆 단칸으로 솟을대문 맞배지붕 형태 건물이다. 가운데 문 양 옆으로 사다리 구조를 타고 눈을 옮기면 모정형태의 작은 누각이 있다. 드문 형태다. 누각의 난간 한편에는 오르는 거북이, 다른 한편에는 내려오는 거북이 있다. 덕림사는 용오정사를 대표하는 다포계 건축물이다. 갖가지 장식과 단청이 100년 세월을 머금고 화려를 버티어내고 있다. 사당 외벽을 둘러 절의 탱화 같은 벽화를 그려 그 화려에 점정을 보태는데, 그 안에 다른 문화의 싹을 심어두고 있다. 여느 벽화와 마찬가지 연꽃과 모란 그림 사이에서 서양 자동차며, 유럽 고풍스런 양식의 건축물 그림을 찾을 수 있다. 사당 내부 벽화에는 맥주병도 그려 넣었다. 파격이다. 홍의재를 만나며 건축가는 누구일까, 일었던 의문이 더 깊어진다. 사그라드는 시대의 한끝에서 모든 힘을 쏟아 수천 년 일궈온 문명의 일단을 담아, 꽃으로 피워낸 이는 또 누구일까? 그가 바로 대목장 유익서다. 유익서는 용오 선생과 비슷한 시기, 같은 공간을 살아낸 고창 사람이다. 1920년대 한 시대를 풍미한 정읍 입암의 보천교 십일전(十一展)을 지었던 사람이다. 그가 지은 보천교 십일전 가운데 하나는 서울 조계사에 옮겨져 대웅전이 되었고, 또 하나는 2012년 화재로 소실된 내장사 대웅전이 되었다. 유 대목의 솜씨가 용오 선생의 의기와 만나 이루어진 용오정사는 다른 건축물과 달리, 그 자리에서 같은 모양으로 100년을 버티어 의연하다. △예술로부터 건축까지 우리 문화의 정수를 읽는 한권의 책, 용오정사 망국의 한을 당하여, 의병의 이름으로 저항을 수단으로 삼기도 하고 책을 모으고 후학을 통해 시대의 정수를 내려잇도록 안간힘 쓰던 한 시대는 이렇게 용오정사에 고스란하다. 용오정사 덕림사 벽에는 보수한 흔적이 남아있다. 누군가 벽을 뜯어내고 유물을 훔쳐간 흔적이다. 그 유물 가운데 하나가 선생의 초상이다. 선생을 닮은 물건이야 삿된 욕심으로 훔쳐가더라도 그의 의연한 정신이야 어찌 도둑질할 수 있을까. 매년 음력 9월 15일 정사에 모여 지역 유림들이 선생을 기리는 제를 올리고 있다. 건축에서부터 예술, 한 선비의 곧은 정신에서 우리 문화의 정수를 더불어 읽을 수 있다. 저문 한 시대를 비추어, 우리시대를, 다음 시대를 견주어 볼 수 있으니. /이영남 버들눈도서관장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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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06.04 17:42

[문화&공감 2019 시민기자가 뛴다] 전북의 이순신 장군 백의종군로를 걷다 ③ 완주 삼례역~완주 상관면 신리

4월22일 맑음. 낮에는 삼례역 장리의 집에 가고, 저녁에는 전주 남문 밖 이의신의 집에서 묵었다. 판관 박근(朴勤)이 와서 만났고, 부윤도 후하게 대접해주었다. 판관이 유둔(기름종이)과 생강 등을 보내왔다.(난중일기중) 판관이 보내온 유둔은 비올 때 사용하는 기름먹인 두꺼운 종이이고, 생강은 약성이 좋은 식품이다. 장군이 백의종군하는 동안 건강을 잘 챙기고 요긴하게 쓰라는 마음이 은근히 느껴진다. 본래 전주시장 격인 전주부윤은 전라도관찰사(전라감사. 지금의 도지사)가 겸임을 하였고, 부윤의 업무는 판관(종5품)이 맡아서 처리하였다. 그런데 임진왜란과 같은 비상시는 물론이고, 그 이전과 이후에도 가끔 전주부윤을 별도로 임명하는 경우가 있었음이 확인된다. 이순신 장군이 백의종군하며 만난 전주부윤은 박경신(朴慶新)이다. 그는 임진왜란 강화협상기인 1595년 10월에 부임하였으며, 후일 정유재란기에 남원성이 함락되었을 때 전주성을 버리고 도망갔다는 이유로 파직을 당하게 된다. 그의 후임이 바로 충경공(忠景公) 이정란(李廷鸞)이다. 1592년 임진왜란 개전 초기의 이치(梨峙)전투 때에는 수성장이 되어 전주성을 지켰고, 1597년 8월 하순 전주성 함락 이후에는 69세의 고령의 나이에 다시 전주 부윤이 되어 민심을 수습하고 전열을 재정비한 전주의 인물이다. 그리고 장군이 하룻밤을 묵은 집의 주인인 이의신(李義臣)에 대하여는 명종실록에 1561년(명종16년) 윤5월 호조정랑으로 삼았다라는 짧은 기사가 보이는데, 기대승과 안방준 같은 유학자들과 교류를 하였다고 전해진다. 한편 백의종군 당시 전라도관찰사는 박홍로였고, 칠천량해전 직후인 1597년 7월 25일 황신으로 교체되었다. 이번 답사는 완주군 삼례역에서 출발하여 전라감영이 있었던 전주로 들어선 후, 완주군 상관면 신리로 들어서는 길을 걷게 된다. 5월의 중순이 끝날 무렵 완주군 삼례역을 찾았다. 모처럼 내린 비와 세찬 바람에 이팝나무와 아카시아도 온통 흰색 꽃비를 뿌려놓았다. 이번 답사에는 경남 하동군청의 김성채 학예사도 동참을 하여 외롭지 않은 걸음을 하게 되었다. 삼례역 옆으로 이어지는 생태탐방로에서 답사를 시작한다. 삼례 상생 나무숲 공원 옆으로 난 길을 따라 공원 조성 기념석 있는 곳에 이르면 만경강과 강 건너 멀리 전주 시가지의 모습이 보인다. 완주 8경의 하나인 비비낙안(飛飛落雁)은 한내천 백사장에 내려앉은 기러기 떼를 비비정(飛飛亭)에서 바라본 풍경을 일컫는다. 한내는 너른 강이라는 뜻으로 이곳의 만경강을 달리 부르는 이름이다. 비비정이 지척에 있지만, 백의종군로는 이곳을 들르지 않고 공원 기념석 맞은편 이정표 있는 곳에서 강변의 마을로 내려선다. 마을을 벗어나 4차선 도로인 삼례로 비비정버스정류소 앞에서 횡단보도를 건너 삼례교로 향한다. 삼례교를 지나면 왼쪽으로 방향을 틀어 만경강 제방 위의 도로 한내로로 들어선다. 차선도 없는 좁은 도로이지만, 차량 통행이 그리 많지 않고 만경강의 풍광과 싱그러운 벚나무 가로수와 함께하는 예쁜 길이다. 한내로로 들어서서 약 30분 정도 진행하니 평리라는 마을 입석이 보인다. 오른쪽에 작은 글씨로 쥐업정이라는 글과 입석 하단에는 춘향전의 이도령이 밟고 한양간 다리라는 설명도 새겨 놓았다. 어느덧 만경강의 본류와 헤어져 있는 전주천을 뒤로하고 전라선 철길과 동부대로 아래를 차례로 지나 팔복동 산업단지로 들어선다. 백의종군로는 중고차 시장 옆의 작은 하천 왼쪽으로 이어지는 좁은 도로(감수길)를 걷게 된다. 전주연탄 앞 폐선된 철길을 지나 만나는 삼거리에서는 왼쪽 신복로로 진행하고, GS충전소 있는 곳에서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어 전주시를 관통하는 기린대로에 이르며 공단지역을 벗어난다. 이제 길은 왼쪽으로 방향을 잡고 전주천을 가로지르는 추천대교로 향한다. 추천(楸川)은 전주천에 삼천이 합수되며 전주천을 달리 부르는 이름이다. 백의종군로는 추천대교를 건너 전주천 옆의 가리내로를 따라 진행하다가 터미널사거리에서 오른쪽으로 진덕교를 건너 전주천 동로에서 다시 전주천을 만난다. 이제 서신교, 진북교, 어은교, 도토리골교 앞을 차례로 지나고, 다가교 사거리에 이르러 왼쪽의 충경로로 방향을 튼다. 차이나타운과 약전거리가 있는 전라감영2길로 들어서서 일제강점기 때에 헐린 전주부성의 서문이 있었던 곳(서문지西門址)을 지나 풍남문에 닿는다. 이번 답사는 가리내로 아래 전주천을 따라 나있는 생태탐방로와 천년전주 마실길을 이용하여 다가교까지 이동하였다. 생태하천으로 잘 복원된 도심 속의 전주천은 충분히 아름다웠고, 지역의 자부심까지 느껴질 정도로 잘 관리되고 있었다. 예전 전주부성의 남문인 풍남문에 이르면 이번 답사구간의 2/3 정도를 진행한 셈이다. 풍남문 정면 방향으로 나있는 좁은 시장 길을 걸어 한옥마을 앞에서 횡단보도를 건너 싸전다리를 지난다. 이곳에서는 전주천을 남천으로 부르기도 한다. 길은 전주교대 앞의 서학로로 들어서서 국립무형유산원을 지나 17번국도인 춘향로를 만나는 오거리로 이어진다. 여기서는 차량 통행이 많고 소음이 심한 춘향로 대신에, 정면 승암교를 건너서 전주천변의 바람쐬는 길과 아름다운 순례길로 이어지는 뚝방길을 걸어 상관면 신리로 향한다. 전주천을 사이에 두고 춘향로와 나란히 걷는 길이다. 치명자산성지, 색장교, 은석교 옆을 차례로 지나 왼쪽으로 전라선 철길이 뚝방길과 나란히 이어질 즈음, 정면으로 신리의 아파트단지가 많이 가까워져 있다. 어둠이 찾아들 무렵 정여립 생가터 입구의 월암마을정류소에서 힘겨운 걸음으로 상관면행정복지센터 앞에 닿으며 답사를 마친다. 구간 거리는 약 25km이고, 식사시간 포함 8시간 정도 소요되었다. /조용섭 협동조합 지리산권 마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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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05.28 16:51

[문화&공감 2019 시민기자가 뛴다] 20세기의 농악, 21세기의 농악

지난 5월 8일에서 10일까지 남원 광한루 앞마당에서 농악 잔치가 열렸다. 올해 춘향제 기념으로 전라도, 경상도, 강원도 농악이 삼도농악한마당을 펼친 것이다. 8일에는 경상북도 무형문화재 제8호 김천금릉빗내농악이 선보였다. 경상도 농악답게 북 중심의 힘차고 남성적인 가락과 전투적인 진풀이를 볼 수 있었다. 9일에는 강원도 무형문화재 제15-2호 원주매지농악이 공연했다. 태평소 소리에서 강원도 특유의 메나리조 느낌을 깊게 느낄 수 있었고 칠채가락이 경기 지역 농악과 비슷한 듯하면서도 달라서 흥미로웠다. 삼도농악 공연 마지막 날인 10일에는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제7-4호 남원농악이 공연했다. 전라도 특유의 멋스러움과 좌도농악 고유의 상모놀음을 선보였다. 농악이 2014년 11월에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으로 선정된 지 5년이 흘렀다. 당시 많은 관심이 언론, 학계, 지자체 등으로부터 경쟁적으로 쏟아졌다. 화려한 축제가 지나가면 여전한 일상이 찾아오듯, 등재 후 몇 년이 지난 지금 농악인들의 삶은 예전과 크게 달라진 것이 없어 보인다. 농악의 오랜 역사 속에서 농악인들은 묵묵히 살아왔고 또 그렇게 묵묵하게 살아갈 것이다. 지난 세월 동안 경제적으로, 문화적으로 현실이 녹록치는 않았다. 그들이 살아온 20세기, 살아갈 21세기를 김정헌 박사와 살펴보았다. 김정헌 박사는 현재 남원시립 국악연수원 농악반 강사로 재직 중이고,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7-4호 남원농악 전수교육조교다. 농악 실기인 중에서 최초로 농악연구로 박사학위를 취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올해 삼도농악 한마당 남원농악 공연 때 상쇠이기도 했다. - 농악이 가진 총체적 성격에 대해 어떻게 생각십니까. 총체성에 대해 오히려 비판적으로 생각해 본다면 아직 분화되지 않은 미분화된 형태로 볼 수도 있어요. 원시종합예술적 성격일 수 있다는 것이죠. 총체성과 세분화, 전문화에 대해서 좀 더 냉정하게 바라 볼 필요가 있습니다. 농악은 물론 음악, 노래, 춤이 어우러진 민속악이고 종합예술입니다. 하지만 그 중심은 음악이죠. 음악이 80% 정도, 진법이나 연희, 노래 등은 20% 정도인 것이 사실이죠. 음악, 노래, 춤의 종합성은 맞되 음악의 중심성은 인정해야 한다고 봅니다. - 총체성이 원시적 성격일 수 있다는 주장에 동의하기는 힘듭니다. 하지만 여러 구성 요소 간의 관계와 역할을 살펴야한다는 지적에는 공감이 갑니다. 농악이 가진 음악성, 주된 요소로서의 음악적 요소에 대해 고민한 산물이 사물놀이입니다. 사물놀이는 농악의 대중화, 국악의 대중화에 크게 기여했죠. 사물놀이가 탄생할 당시가 20세기였는데, 사물놀이는 그렇게 그 전과 달라진 20세기 예술환경에 적응했습니다. 판소리는 창극이라는 돌파구를 통해서 20세기에 적응했죠. 20세기에 대한 적응은 전문화가 화두였고, 이는 곧 상품화될 수 있는가 였습니다. 그 이전의 왕정시기에서 자본주의 시장으로 예술환경은 바뀌었고 모든 예술은 경쟁에 직면하게 되었죠. 흥망성쇠의 국면들을 맞이한 것이죠. 신파극이 그렇게 많은 인기를 누렸지만 영화의 등장으로 쇠락하였습니다. 1940년대에서 1970년대까지 전국을 누볐던 포장걸립, 특히 여성농악단의 시대는 결국 TV의 보급으로 막을 내렸다고 볼 수 있죠. - 농악이 거쳐 온 20세기에 대한 적응기에 대해 좀 더 묻고 싶습니다. 크게 두 가지 흐름을 말할 수 있습니다. 농악은 여성농악단의 시대가 1970년대에 TV의 보급으로 막을 내리면서 한 고비를 맞이했었죠. 그러다가 1980년대 두 축의 국면을 맞이합니다. 한 축은 사물놀이의 등장이고 또 한 축은 대학생을 주축으로 대거 각 지역 농악전수관을 찾아 농악을 배우는전수관 농악시대의 시작이었죠. 전수관농악은 알다시피 민중문화운동과 연관 됩니다. 두 축을 중심으로 농악은 20세기를 지나 왔습니다. - 그렇다면 21세기의 농악은 어떨까요. 휴대폰, SNS 등 또 다른 환경에 적응하는 정제과정에 직면할 것입니다. 남원농악에는 판굿에서 뒤굿 또는 후굿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노래, 춤, 놀이, 연극 등 다양한 연희적 요소가 주를 이루는 대목이죠. 명칭은 다르지만 여러 농악에 이런 형태의 굿절차가 있습니다. 이 농악들에서 문화재로서 뒤굿은 존재할 것입니다. 하지만 공연물로서 뒤굿은 사라질 수 있다고 봅니다. 지신밟기도 사라질지 모릅니다. 지신밟기에 꼭 필요한 고사소리가 있습니다. 오늘날 고사소리를 배우고자 하는 사람을 찾아보기 힘듭니다. 21세기 예술환경에서 고사소리에 대한 수요가 없는 것이죠. 결국 음악이 더욱 세련되고 정제화된 형태로 농악은 변모할 것입니다. 음악과 연관된 발 디딤이나 진법, 웃놀음도 더불어 정제화될 것이고요. 냉정하게 바라 본 21세기 농악의 모습은 이렇습니다. 장밋빛은 아니지만 염세적이지도 않죠. 그 냉정한 전망 속에서 김 박사 자신은 어디에 위치하는 지 물었다. 농악이 맞이할 녹록치 않은 21세기에서 한 발 물러나려 하지는 않는지 궁금했다. 그는 간결하게 말했다. 뒤굿까지 지키는 마지막 사람은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라고. /조세훈 문화인류학 연구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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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05.21 17:13

[문화&공감 2019 시민기자가 뛴다] 할매가 만드는 생활 속 예술

아이가 그린 것처럼 서툴지만 꾸밈없는 그림이 그려져 있다. 나무, 새, 꽃, 나비, 사람, 그리고 집. 일상에서 항상 보고 우리와 함께 하는 것들이다. 그 속에는 어린 시절 이야기, 어제 나뭇가지에 앉아 있던 새소리, 마당에 심어 놓은 작은 꽃 등 삶의 소소한 이야기가 담겨져 있다. 그 그림 위에 한 땀 한 땀 바느질로 수를 놓아본다. 조금은 서툴고 어리숙해 보여도 순수함이 담긴 작품은 사람들 마음에 따뜻한 온기를 불어 넣어준다. 그림을 그리고 수를 놓은 주인공은 할매공방의 할머니들... 팔십이 넘은 할머니부터 가장 막내는 66세까지 14명의 할머니들의 솜씨다. 동네 할매들과 그림으로 만난 서양화가 한숙의 작업실 초록장화를 찾아갔다. △학동이 엄마 서양화가 한숙 2011년 서학동에 자리를 잡은 한숙 작가는 서학동에서 아들 도현이를 얻었다. 서학동 아이라는 뜻의 학동이는 동네에서는 도현이라는 본명보다 학동이로 더 많이 불려진다. 학동이 엄마 한숙은 서양화를 전공하고 졸업 후 개인전 및 다양한 기획전시, 문화예술교육 등에 참여하며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학동이 엄마는 2010년 문화예술교육 사업을 통해 남고사 아래 산성마을에서 만난 할머니들과의 만남을 시작으로 10년 동안 할매공방을 운영하고 있다. △초록장화, 작가 작업실이자 할머니들과 함께 하는 공유 공간 학동이 엄마의 집 초록장화는 가족들의 거주공간과 작업실, 게스트 하우스, 할매공방의 작업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초록장화는 본인의 작업 공간이자 주민들과 함께 하는 공간으로 항상 열려있다. 집 주인이 없어도 스스럼없이 문을 열고 들어가 차를 끓여서 마시고 담소를 나누는 풍경은 편안한 사랑방을 찾은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다. 할매공방 할머니들은 매주 목요일 한숙 작가의 작업실에서 모여 그림을 그리고 바느질을 한다. 개인의 작업실이지만 작가가 문을 열어 주면서 함께 정리하고 가꾸는 공유 공간으로 거듭났다. △문화예술교육 사업 대상자에서 오랜 친구로 2010년 문화예술교육 사업을 계기로 만난 산성마을 할머니들과는 어느새 10년의 시간을 함께 보냈다. 전주 남고산성 아래 산성마을 노인정에서 진행한 수업을 계기로 할매공방이라는 이름을 갖기까지 지원금의 도움을 받기도 했지만 주변 예술인들의 재능기부와 남편의 후원금도 큰 도움이 됐다. 산성마을에 거주하는 김영애(79세) 총무님은 가장 오래된 할매공방의 멤버이자 학동이 엄마의 친구다. 처음에는 무슨 미술을 가르쳐 준다고 해서 뭘 하는가 싶어서 시작했는데 어느새 10년이 됐어. 집에 혼자 있으며 뭐해. 하루 종일 말 한마디 나눌 사람이 없고 우울증이 걸릴 거 같아. 그런데 선생님이 연락이 오고 그러면 나가서 이야기도 나누고, 밥도 먹고, 그림도 그리고, 수도 놓고 그러지. 봄이 되면 같이 소풍도 가요. 찰흙으로 사람도 만들고, 접시에다 그림도 그려. 나는 선생님 만나서 카페도 처음 가봤어. 학동이 엄마 한숙은 김영애 여사님은 친구들과 나누지 못하는 속 깊은 이야기도 나눌 수 있는 자신의 10년 지기 친구라고 소개한다. △일상에서 만나는 생활 속 예술 산성마을 노인정에서 수업을 진행하다가 한숙 작가가 서학동에 터를 잡으면서 작업공간을 자신의 공방으로 옮겼다. 지원사업은 종료되고 지원금도 끝난 상태였지만 할머니들과 함께 나눈 시간이 아까웠고, 할머니들을 사업대상자로만 이용한다는 동네사람들의 이야기가 상처가 됐다. 할머니들의 손재수를 사람들에게 계속 소개하고 싶었고, 할머니들의 작품을 팔아 용돈이라도 드리고 싶은 마음에 손을 놓지 못했다. 산성마을에서 만난 할머니들 중 4명이 아직까지 함께 하고 있고, 서학동 거주 이후 서학동 주민 10명도 공방을 같이 꾸리고 있다. 서학동 주민 김남순(66) 여사는 자신이 수 놓은 커튼을 펼쳐 보이며 할매공방과 선생님 자랑을 한다. 우리 선생님 신랑이 우리 수 놓으라고 천도 사주고 밥도 사주고 그래요. 아줌마들하고 모여서 이야기를 나눠도 맨날 같은 이야기뿐인데, 우리는 모여서 그림도 그리고. 수도 놓고 또 그게 가끔 팔리기도 해서 재미가 있어요. △함께하는 삶 속에서 피어난 작품 학동이 엄마 한숙 작가는 아이들의 그림처럼 순수한 할머니들의 그림에 위안을 받는다고 한다. 사업대상자로 만나 이제는 자신의 삶의 일부분이 됐다는 할머니들과 느리지만 한땀 한땀 수를 놓는 마음으로 10년을 보냈다. 나의 삶의 공간을 내어주고 공유하는 문화 속에서 자란 할매들과 학동이 엄마가 함께 만든 서툰 작품은 어떤 예술 작품보다 값지고 아름답다. /고형숙 전주 부채문화관 기획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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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05.14 20:03

[문화&공감 2019 시민기자가 뛴다] 할매 작가 전성시대

오늘 띠풀이 파느라고 디질 번해라. 파모중 하니라고 디지는 중 알았는디, 다행 디지진 않았다. 나는 일하는디 경화가 와서 이야기 동무 햐줘서 힘든지 모르고 했다. 경화는 뒷짐지고 섰더라. 그래도 고맙다. 책마을해리 마을학교 박점순 아짐의 일기다. 띠풀 파느라고, 파모종 하느라고 죽을 만큼 힘들었는데, 동네 아짐이 와서 말동무 해줘서 힘든 줄 모르고 했다는 이야기. 그 아짐이 도와주지 않고 뒷짐지고 서 있어도 고마웠다는 이야기. 이 아짐의 나이는 여든셋이다. 하시는 말씀, 한마디 한마디가 모두 명언이다. 보는 것이 인사여, 웃는 것이 인사고. 어려서는 여자라고 못 배우고, 젊어서는 아이들 키우느라, 살림하느라, 농사짓느라 바쁘게 살다가 이제 나이 들어 살 만해지니 안 아픈 곳 없이 이쪽저쪽 다 고장 나 끽끽댄다. 그래도 날 밝으면 호미 하나 들고 밭으로 들로 나선다. 그렇게 평생 일만 하다 살아온 우리 아짐들이 글로, 그림으로 자신들의 인생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늦게 배운 글도둑 그림도둑질에 밤을 새며 날을 새며 책마을해리에는 동네 어르신들의 이야기가 빼곡하다. 생선 대굴빡만 주시던 시어머니 때문에 생선머리에 정내미 떨어진 유암 아짐은 당신의 며느리에겐 머리는 다 버리고 몸통만 구워주신다. 혼자 일하다 들어오면 수고했다 말해주는 영감의 빈자리가 그리워 그 애절한 마음을 글로 옮기는 점순 아짐. 마을학교 6년차, 아짐들과 함께한 시간 책마을 아짐들은 《마을책, 오늘은 학교 가는 날》, 《개념어 없이 잘 사는 법》, 《밭매다 딴짓거리》, 《여든 꽃》, 《마을, 숨은 이야기 찾기》 등 벌써 5권의 저자가 되었다. 김선순 어르신은 홀로 한 권의 그림책을 펴내기도 하셨다. 선순 아짐의 손은 늘 사인펜 자국투성이다. 당뇨로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시면서도 그림을 놓지 않으신다. 늦게 배운 도둑질 밤새는 줄 모른다고, 쓰고 그리는 날들이 날마다 새롭고 날마다 즐겁다. △미주 순회전시에 영화 개봉까지, 할매작가 전성시대 할매작가들의 이야기가 어디랄 것 없이 전국에서 들려오고 있다. 순천 할머니들의 인생 이야기를 담은 《우리가 글을 몰랐지, 인생을 몰랐나》 하는 책이 화제다. 지역출판사인 경남 통영의 <남해의봄날>에서 펴낸 이 책은 국민의 가슴을 울리며 판매고를 올리고 있다. 해리처럼 시골시골 할매들과 사는 곳은 달라도 마음은 한결같다. 순천이면 해리에 비하면 대도시, 그 대도시에 살아도 할매들의 삶은 매한가지다. 노동에서 소외되고, 관계 바깥으로 밀려나고, 학교에서 멀리 떨어져 살았으니, 글이든 그림이든 스스로 주인이 되어본 일이 없다. 그 관계의 역전이 일어나고 있다. 2016년부터 순천시평생학습관 한글작문교실 초등과정을 마친 어르신들이 그림작가와 함께 콜라보로 책을 펴냈다. 이분들의 이야기는 동네책방과 전국 도서관 순회전시에 이어 미국 필라델피아 등 3개 도시 순회전을 열고 있다. 미주 순회전시가 끝나면 파리에서 전시가 기다리고 있다니, 한국을 넘어 세계로 뻗어나가는 우리 할매들의 활약이 반갑다. 경북 칠곡은 또 새로운 양상이다. 칠곡 할매들은 2006년부터 마을학당에서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연극도 하며 살고 있다. 왜관읍 매봉서당, 북삼읍 해바라기학교, 기산면 한솔배움터 등 젊어 못 배운 한을 한없이 풀고 계시다. 이 할매들의 이야기는 <칠곡가시나들>이라는 다큐멘터리로 제작되어 상영되고 있다. 배 불러 죽겠고/ 배 고파도 죽게따/ 더버 죽겠고/ 추버도 죽겠다/ 조아 죽겠고/ 미버도 죽겠다/ 쓰고보이 우서버 죽겠다 <내 친구 이름은 배말남 얼구리 애뻐요>에 나오는 안윤선 아짐의 삶글이다. 우리에게 익숙한 방식, 눈으로 읽으면 이해가 쉽지 않다. 우리는 늘 정확한 표기에 훈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입술을 열고 우리 신체로 읽으면 달라진다. 이렇게 쏙쏙 귀에 박힐 수가 없다. 평생을 문자가 아닌 말의 세계에서 꿋꿋하게 살아온 할매들의 언어는, 눈으로 읽어서는 어렵다. 입으로 읽고 귀로 읽어야한다, 말로 읽어야한다. △입으로, 귀로 우리 신체의 감각으로 읽어야 제대로 읽히는 할매들의 말로 쓴 언어는 꾸밈이 없다. 그 안에 의미 맥락을 개켜 넣는 한자투성이 개념어도 없다. 그러니 말 자체로 충분하다. 조금 더 나가보면 글 너머 세계도 있다. 글이라는 형식을 깨트리고 나면, 할매들이 평생을 별러온 이야기 세계는 그림으로, 바느질로, 꼬무락 진흙 조형으로도 번진다. 훨씬 더 자유롭게 스스로를 표현한다. 하동할매들은 문화예술협동조합 <구름마>와 만나 삶의 후반부를 글꽃 그림열매로 채우고 있다. 벌써 《대금이들에 핀 애절한 사랑》 같은 여러 권 책을 냈다. 하동 가까운 곡성에서도 할매작가들의 전성시대를 알린다. 작은도서관에서다. 입면 서봉리 길작은도서관 식구들의 헌신으로다. 이 도서관 입구 벽에 벽을 가득 채우는 나무를 그리고 그 나무 가지가지에 헌 고무신을 주렁주렁 달았으니, 주인장 김선자 관장 부부는 헌신으로 사는 분들이 맞다. 이 곡성 할매들은 시인이다. 한글교실을 시작하고 우연히 쓰기 시작한 글이 시가 되고, 마음 그대로, 있는 그대로, 느낀 그대로, 그야말로 그대로 시를 써내는 할매시인들이 되었다. 시들이 모여 《시집살이 詩집살이》로 출판이 되고, 다큐로 모아, <시인할매>영롸로 개봉까지 이어졌다. 그야말로 시인할매 전성시대 극장판이 되었다. △전국 내로라하는 할매작가들을 만나자, 고창한국지역도서전 전국 할매작가들의 활약상을 한 곳에서 만날 수 있다. 오는 5월 9일부터 12일까지 책마을해리에서 열리는 2019고창한국지역도서전에서 <할매작가 전성시대>라는 제목으로 전시와 함께 작가와의 만남을 갖는다. 5월 11일 토요일 오후 1시, 솔직하고 대담한 우리 할매작가들을 만나러 책마을해리로 나들이 시간을 내어보시기 바란다. 우리나라 곳곳에서 어린이부터 할매들까지 스스로 기록자가 되는 통로, 지역출판인들의 책과 문화, 출판한마당이다. 한지만들기, 활자체험, 책만들기, 서평쓰기, 저자와 만남, 지역과 출판, 문화를 이야기하는 다양한 전시와 심포지움, 낭독회, 음악공연, 영화읽기, 투어프로그램이 기다리고 있다. /이영남 버들눈도서관 관장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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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05.07 20:20

[문화&공감 2019 시민기자가 뛴다] 전북의 이순신 장군 백의종군로를 걷다 ② 익산시 여산면 ~ 완주군 삼례읍

이순신 장군이 전북의 길을 걸어 백의종군 하며 지나간 지 채 4개월도 되지 않아 호남의 보루 남원성과 전주성이 함락됐고, 그 길을 따라 왜군의 일부 세력은 충청도로 북진하기도 했다. 그 전쟁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전북 지역의 이순신 장군 백의종군로를 걷는 일은 역사를 회고하고, 고난의 백의종군이 나라의 희망으로 승화하는 과정을 잘 느낄 수 있는 소중한 콘텐츠다. 사람들의 관심을 높이기 위해 직접 전북권 이순신 장군 백의종군로를 걷고 기사로 엮고자 한다. 길을 걸으며 현재 길이 이어지는 상황과 < 난중일기> 속 상황을 교차해 설명하고, 경유하는 지역의 이야기들을 담아내고 있다. 이번 편에서는 익산 여산면에서 완주 삼례읍까지 걸어봤다. 4월22일 맑음. 낮에는 삼례역 장리의 집에 가고, 저녁에는 전주 남문 밖 이의신의 집에서 묵었다. 판관 박근이 와서 만났고, 부윤도 후하게 대접해주었다. 판관이 유둔(기름종이)과 생강 등을 보내왔다.(난중일기) 4월 21일 여산 관아 노비의 집에서 하룻밤을 머문 이순신 장군은 다음날 삼례역을 거쳐 전주로 이동하였다. 약 40km 거리의 꽤 긴 노정이다. 장군은 전라좌수사로 임명되기 전인 1589년, 전라감사 휘하의 조방장과 정읍현감을 지내며 전북과 인연을 맺었었다. 따라서 삼례역을 거쳐 전주로 가는 통영별로나 정읍으로 가는 해남로의 길이 그리 낯설지는 않았을 것이다. 충남 논산시 연무읍과 전북 익산시 여산면의 경계를 이루는 쟁목고개에서 전북의 이순신 장군 백의종군로 답사 첫발을 내딛는다. 고개를 내려서면 호남의 첫고을 월곡마을이라는 입석과 여산중고교를 차례로 만나고, 여산 동헌이 있는 여산면 소재지 쪽으로 향한다. 여산파출소 앞에서 정면 150여m 지점의 왼쪽 길로 들어서서, 이 길의 끝에 이르러 오른쪽에 있는 삼정교 다리를 건넌다. 이제 길은 한동안 여산천과 논밭 사이로 난 뚝방길로 이어진다. 길 오른쪽에 있는 남원사라는 절집에는 831년 진감(眞鑑)이 창건하였고, 1592년 남원부사로 부임하러 가던 윤공이 이곳에서 자는데, 꿈에 석불이 나타나 그 곳을 파보니 미륵불상이 나왔고, 이에 법당을 중창하고 절 이름을 남원사라 하였다.라는 내력이 전해진다. 진감은 지리산 하동 쌍계사를 창건한 진감혜소스님인 듯하고, 윤공은 임진왜란기에 남원부사로 있으면서 많은 전투에 참전하였던 윤안성 부사를 이르는 듯한데, 길의 시작에서 뜻밖에 지리산 자락의 옛 인물들을 만난다. 뚝방길을 걸어 남산마을 앞에 이르면 왼쪽으로 다리를 건너고, 1번국도 옆의 신리교차로에서 가람로를 따라 신리로 향한다. 천호성지 방향을 알리는 이정표가 보일 즈음, 시간이 멈춘 듯 오래된 풍경을 지닌 신막마을을 지난다. 신막마을은 새로 생긴 술집, 즉 신주막(新酒幕)에서 유래한 이름이라고 한다. 한때 번성하였을 함석지붕을 이고 있는 공장은 세월의 무게를 견디지 못해 허물어지기 직전의 안쓰러운 모습을 하고 있다. 1번국도의 799번 지방도 이정표가 보일 즈음 도로 이름은 호반로로 바뀌고, 국도 건너편으로는 원수저수지가 보인다. 백의종군로는 여산삼거리에서 왼쪽으로 방향을 틀어 완만한 경사로 이어지는 799번 도로로 이어진다. 갓길이 없는 좁은 2차선 도로로 진행에 주의를 요한다. 춘향전에 나오는 숯고개(탄현)에 이르면 이제 왕궁면으로 들어선다. 양동마을 앞을 지나 전봇대가 일렬로 서있는 농로를 걸어 연정마을을 돌아 나오면, 이제 왕궁저수지가 얼마 남지 않았다. 본래 옛길은 저수지가 생기면서 수몰되었다고 한다. 저수지 옆으로 산책로를 조성하여, 호반의 정취도 느낄 수 있도록 길이 이어지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한국체육진흥회에서 제공한 트랙으로 호반로(799번 도로)를 따랐으나 매우 위험하였다. 왕궁저수지를 지나 보석테마관광지로 들어서서 왼쪽으로 올라서면 오른쪽으로 왕북초등학교가 나온다. 오늘 답사 구간의 중간 쯤 되는 곳으로, 인근에는 왕궁저수지의 풍경을 잘 감상할 수 있는 함벽정이 있다. 799번 도로 아래 통로를 거쳐 송선마을을 지나는 사이, 왼쪽으로 호남고속도로를 질주하는 차량들의 소리가 크게 들려온다. 고속도로 아래 통로를 거쳐 통정교로 이어져야 할 길은 완주테크노벨리 조성공사로 거대한 펜스가 길을 막고 있다. 백의종군로 리본과 트랙이 이끄는 대로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어 고속도로와 나란히 걷는다. 익산분기점 1km라는 고속도로의 낯익은 이정표 아래 통로를 지나면 마을 앞으로 이어지는 통정길과 만난다. 통정은 춘향전에도 나오는 통시암(桶井통정,통샘)을 말한다. 통정삼거리에서는 이순신연구소의 고증과 트랙이 안내하는 대로 오른쪽 방향 우주로로 향한다. 이 길은 삼례읍에 이르기까지 익산시 왕궁면과 완주군 봉동읍의 경계를 이루며 이어지는 듯하다. 그런데 우주로라는 이름이 특이하다. 우주로는 예전 이곳이 우주현 지역임을 알리려는 뜻이 담긴 이름이다. 우주현은 삼국사기에도 나올 정도로 유례가 오래된 고을이었으나, 고려시대 때 전주에 병합되었다. 하지만 우주현을 이루던 우북면, 우동면, 우서면은 조선시대까지 그대로 남아 있다가, 일제강점기 때에 지금의 익산시 왕궁면(우북), 완주군 봉동읍(우동), 삼례읍(우서)으로 관할 읍면의 이름이 바뀌었다. 이렇듯 옛길은 고스란히 옛 우주현의 3개 면을 이으며 나있고, 21세기의 순례자도 호반로, 통정로, 우주로라는 이름의 길을 걷고 있는 것이다. 통정삼거리를 출발해 산림항공본부 익산관리소와 왕궁육교를 차례로 통과하여 삼례로 들어선다. 백의종군로는 효행로(직진하는 길)를 만나는 삼거리에서 오른쪽 좁은 길로 이어지며, 삼례나들목 앞 횡단보도를 건너면서 우주로와 헤어지고 역참로를 걷게 된다. 삼례중앙초등학교 옆을 지나 조선시대 주요 역참의 하나인 삼례역이 있었던 삼례동부교회로 향한다. 이순신 장군은 삼례역 근무자(長吏장리)의 집에 들렀다고 하는데, 아마도 점심을 해결하려한 듯하다. 삼례역은 1892년 10월 27일과 1893년 2월 10일 두 차례에 걸쳐 동학교도들이 교조 최제우의 명예회복과 동학 탄압 금지를 요구한 집회가 열린 곳인데, 이는 전라도는 물론 충청도와도 잘 연결되는 교통의 중심지로 동학교도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교회를 지나 동학로를 만나면 왼쪽으로 방향을 틀어 완주우체국으로 향하고, 삼례시장 옆의 삼례역로를 걸어 종착지인 삼례역에서 답사를 마친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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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04.30 20:16

[문화&공감 2019 시민기자가 뛴다] 음악과 노래와 춤이 있는 민속악

대학원 시절에 우리음악의 악(樂)의 개념에 대해 토론한 기억이 있다. 서양음악과 달리 음악과 노래와 춤이 함께 어우러지는 특징이 있다고들 했다. 지금 과연 그럴까? 서민 예술로서 음악과 노래와 춤이 함께 어우러진다는 민속악. 과연 그런지 두 명의 전문가들에게 물었다. 국립민속국악원 류기형 예술감독. 50대 중반을 맞이한 그는 30년 동안 마당극패 우금치를 이끌어온 사람이기도 하다. 그리고 전 전라북도립국악원 관현악단장 조용안. 많은 이들이 그를 전라북도 판소리북의 대들보로 여긴다. 몇 해 전 쉰을 넘어선 그는 40년 가까이 판소리북을 치고 있다. 남원과 전주에서 이들을 만나며 그들이 겪고 있는 민속악의 오늘과 바라는 미래를 듣고자 했다. △류기형 국립민속국악원 예술감독 악가무 총체적으로 바라보는 열린 사고 필요 류기형 감독을 만난 건 4월 비오는 어느 날이었다. 남원에 있는 국립민속국악원 사무실에서 그를 만났다. 업무를 바삐 끝내고 온 그는 필자의 질문에 서슴없이 답했다. 필자는 이렇게 물었다. 우리 민속악은 음악, 노래, 춤이 어우러진다는 총체적인 악(樂)의 예술관을 가지고 있지요. 서민적이라는 특징도 있고요. 총체성과 서민적 성격의 관점에서 민속악을 접하고 있는 현재와 바라는 미래는 무엇인지 알고 싶습니다. 류 감독은 소통과 동시대성을 강조했다. 민속악에서 중요한 것은 대중과의 소통이죠. 대중과 소통하기 위해서 악, 가, 무를 총체적으로 바라보는 열린 사고가 필요하고요. 하지만 현재는 음악은 음악, 노래는 노래, 춤은 춤으로 가르는 장르화된 사고가 많은 듯합니다. 민속악은 시대에 살아있어야 하잖아요? 동시대성이 핵심이라고 봅니다. 명인, 명창 선생님들을 보면 장르에 한정되지 않고 음악, 노래, 춤을 두루 익히고 펼쳤잖아요? 분야별로 장르화되고 개별화 되는 현상은 일면 서구식 제도 교육의 영향으로도 보입니다. 전공을 세분하고 전공에만 집중하게 하는 현상이 있잖아요? 장르별로 개별화 되다보면 공연에서 악, 가, 무를 갖춘 공연자 10명이면 될 것이 50명도 더 필요하게 되는 상황이 되요. 오늘날 공연시장에서는 다재다능을 필요로 하는 것이 트랜드인데 우리 민속악의 흐름은 그와 반대로 가는 것 같아서 아이러니해요. 공연자들의 문제의식이 중요하지 않겠냐고 물었다. 류 감독은 겪고 있는 오늘에 대해 얘기했다. 공연현장에서는 생동감 있는 사고가 필요합니다. 내가 왜 그것까지 해야 하나? 하는 식의 경직성을 극복해야지요. 현재 여러 가지 시도를 해보고 있습니다. 주말 상설공연이 있는데 일종의 갈라쇼 형식의 공연이에요. 이 공연에 연출 개념을 도입하고 사회자를 없애고자 했죠. 크고 작음을 떠나서 공연은 관객의 마음을 담아야 하잖아요? 관객의 마음은 그릇에 담긴 물 같아서, 관객의 마음을 담은 그릇이 공연 내내 고요하게 물위에 둥둥 떠갈 수 있어야 합니다. 그 흐름을 만드는 것이 연출이고요. 그것을 시도하고자 했던 것이죠. 하지만 사회자를 없애는 등 기존과 달라진 패턴에 대한 문제제기를 좀 받았어요. 어디나 마찬가지겠죠. 여기만 그런 게 아니고요. 변화는 언제나 처음에는 낯설기 마련이고, 문제제기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소통하고 믿음이 생기면 될 것이라고 봐요. 민속악에 대한 애정을 가지고 좋은 방향으로 함께 갈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조용안 전 전라북도립국악원 관현악단장 민속악은 틀이 없어 조용안 명고. 그를 만난 건 전주 아중리에 있는 커피숍이었다. 역시 4월 어느 날에. 민속악에 대한 마찬가지 질문에 옛 선생님들께 들은 농담을 얘기해줬다. 민속악은 민간의 음악이고 서민적인 음악이죠. 궁중음악이나 무속 등 여러 분야에서 서민의 생활로 함께 옮아온 것이라고 봐요. 오늘날에는 민속악이 보편화되었죠. 예전에는 소위 잽이들만 하는 음악이었지만. 과거에는 궁중음악하는 사람들이 민속악하는 사람들을 은근히 무시하고 그랬대요. 그러면서도 몰래 민속악을 했다고 하더군요. 정악하시는 어떤 선생님께서 나도 (공연장에서) 병풍 뒤에서 산조 여러 번 불었다.는 농담을 자주 하셨거든요. 병풍 뒤에서 악기를 분 정악잽이들이 꽤 있었다고 하더군요. 몰래 했던 민속악이 지금은 모든 사람들이 고루 접하는 음악이 되었죠. 궁중음악이나 정악은 규정된 틀이 명확한 음악이죠. 반면 민속악은 틀이 없어요. 그래서 발전가능성이 많죠. 그리고 일류와 삼류의 구분도 심하고요. 민속악이 음악, 춤, 노래가 함께 했던 이유는 무엇이라 생각하는지 재삼 물었다. 조용안 명고는 명인들의 교류를 얘기해줬다. 예전에는 명인들끼리 서로 교류를 자주했대요. 소리 명인에게 춤 명인이 가서 소리 배우고, 춤 명인에게 기악 명인이 춤 배우고, 서로 그랬대요. 전국 각지의 명인들이 서로 그랬다는 거에요. 예를 들어서 진도 씻김굿의 박병천 선생과 진주 검무 김수악 선생이 자주 교류했대요. 서로 번갈아 가며 춤추고, 반주하고, 소리하고 그렇게 예술 자체가 좋아서 즐기고 교류했다는 거에요.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음악과 노래와 춤이 함께 했고요. 지금은 어떤지 물었다. 대답은 의외로 간단했다. 지금은 한 가지하기에도 버거운 상황이에요. 살기에 너무 바빠요. 중간세대인 저라도 명인 선생님들의 그 감성과 멋을 후대들에게 이어주는 매개자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에요. 사람들은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표현해 주는 예술을 찾아 왔다. 민속악은 서민들을 대변하는 예술이었고 지금은 좀 더 보편화되었다. 시민들이 주인인 오늘날, 자신들의 예술로서 시민들은 과연 민속악을 택하고 있는가? 류기형 감독과 조용안 명고는 각자의 자리에서 민속악의 오늘을 겪으며 좀 더 밝은 내일을 꿈꾸고 있었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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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04.23 17:56

[문화&공감 2019 시민기자가 뛴다] 지역 서점 생존과 도시 재생

해마다 국내 성인 연간 독서량과 도서 구입비가 꾸준히 감소한다는 기사를 종종 읽는다. 문화체육관광부에서 발표한 2017년 국민독서실태조사 결과에 따르면 성인 중 1년에 책을 1권이라도 읽는 사람의 비율은 59.9%이고, 연평균 독서량은 8.3권이다. 10년 전과 비교해 보면 독서율 76.7%, 독서량은 12.1권으로 해마다 감소하고 있다. 평균 독서율, 독서량의 감소에도 불구하고 전자책이나 온라인 독서시간은 점차 증가하고 있는데 최근 웹소설의 대중적 확산과 온라인에서 구독 가능한 웹툰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고 있다. 독서량의 감소와 온라인 서점의 강세, 대형서점의 중소도시 진출, 인터넷의 활성화 등으로 동네 책방들이 하나둘 문을 닫은 지는 오래됐다. 전주의 대표서점이었던 민중서관이 1970년 개업 후 40년 운영을 마치고 문을 닫은 게 2011년이니 그 사이에 얼마나 많은 작은 서점들이 자리를 지키지 못했을지 가늠이 된다. 대형 온라인 서점에서 운영하는 중고도서 판매로 헌책방들도 그 자리를 지키지 못하고 문을 닫고 있는 것은 민중서관의 폐업과 동일선상에 있다. 80년대 후반에는 40개 점포가 있었던 전주동문사거리에 헌책방들이 대부분 문을 닫고 현재 한가네 서점과 일신서점 두 곳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다양한 성격의 지역 내 작은 서점 하나둘 생겨나 하지만 몇 년 전부터 전국에 각자의 색깔을 갖고 있는 작은 서점들이 하나둘 생겨나 지역 명소로 하나둘 자리 잡고 있다. 전주에도 시내 곳곳에 다양한 책방들이 자리를 잡아 지역민들이 쉬어갈 수 있는 공간으로 거듭나고 있다. 전주에 있는 책방들 중 전주시 지역서점으로 인증을 받은 책방은 현재 86개소이며, 책방 주인의 취향에 맞춰 그림책이나 동화책을 소개하기도 하고, 독자의 취향에 맞춘 도서를 소개하기도 해 기존 대형 서점에서 맛 볼 수 없는 역할을 하고 있다. 전주시는 시민들의 독서생활화와 지역 출판산업 육성, 지역서점 활성화를 위해 신문광서림을 1호로 현재 86개소를 지역서점으로 인증했다. 책방놀지, 동문서점, 잘익은 언어들, 살림책방, 카프카, 유월의 서점 등 각자의 색깔을 가진 작은 책방들이 동네에서 지역민과 만나고 있다. 현재 86개소 중 마지막으로 등록을 마친 물결서사는 지난 10월 공사를 시작해 1월부터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예술서적을 소개하는 물결서사 전국에 몇 개 안 남은 성매매집결지 선미촌(전주시 완산구 물왕멀2길 9-6)에 위치한 물결서사는 7인이 예술가들이 함께 운영하는 공간이다. 물결서사의 도로명 주소는 물왕멀로 물이 좋은 마을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지명에서 풍기는 물의 이미지를 살려 물결이라는 단어와 서점을 의미하는 서적방사(書籍放肆)의 줄임말 서사를 결합해 책방 이름을 만들었다. 책방을 의미하는 서사(書肆)는 이야기를 의미하는 서사(敍事)와 동음어로 중의적 의미를 담고 있기도 하다. 물결서사 대표 임주아(시인)를 필두로 김성혁(성악), 민경박(영상), 서완호(서양화), 장근범(사진), 최은우(애니메이션) 등 다양한 장르의 7명의 예술가들이 함께 하고 있으며 시집, 소설, 미술관련도서, 그래픽노블, 사진 등 예술서적을 구비하고 있다. △전주 선미촌에서 예술을 서사(敍事)하다 물결서사는 2달에 한번씩 주제를 정하고 예술관련 서적을 소개한다. 1,2월에는 생존을 주제로 3,4월에는 여기 예술이 있어야겠는데...를 주제로 예술서적과 함께 했다. 또한 각자의 분야를 살려 향후 창간 미정기 잡지 봐라물왕멀 296을 매주 연재 하고 있다. 수묵 드로잉, 선미촌 건물 드로잉, 시, 사진, 오페라 읽기, 물결서사 일러스트, 영상 작업 등으로 온라인에서 SNS를 통해 소통하고 있다. 1월 첫 워크숍을 시작으로 3월 말에는 지역에서 활동하는 시인 김정경의 첫 시집 『골목의 날씨』 낭독회, 4월 초 신인작가 김경모의 무민 워크숍, 서울에서 활동하는 연극인 조아라 작가의 북토크 『목욕합시다』를 진행했다. 4월 말에는 김성철 시인의 첫시집 『달이 기우는 비향』 낭독회를 앞두고 있다. 동네마다 하나둘 자리를 잡은 지역 서점의 장점은 천천히 걷고, 사람을 만나고, 이야기를 나누고, 내 손으로 책을 들고 오는 따뜻한 촉감이 느껴지는 것이 아닐까? 오늘은 동네 작은 책방에서 책방 주인과 이야기를 나누며 책을 읽는 여유를 가져 보는 건 어떨까 생각해 본다. 책과 함께 문화와 예술로 만나는 지역민이 사랑하는 공간이 오래도록 사랑받기를 기대해 본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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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04.16 2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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