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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랑 아리랑 흥남동 고개를 넘자 어린 시절 고개 넘어 학교에 가고 하교 후 고개 위 산 말랭이에서 땀을 닦았지 서쪽은 시가지 전망 동쪽은 논과 밭 끝없이 이어진 곳 말랭이 초가집 한 채는 양철지붕 가난한 이웃들 골목길에 모여 살았지 마부였던 친구 아버지 말 앞세워 아리랑 고개 넘고 어머니는 학독에서 보리쌀 갈고 밀가루 수제비 만들어 나눠 먹고 엿장수 친구 아버지 팔고 남은 엿 나눠 먹던 그 시절 친구들 어디로 갔을까 보고 싶은 그 얼굴들 △ “산 말랭이에서 땀을 닦았”던 소년이 기억으로 땀을 닦는다. “흥남동 고개”처럼 등굽은 허리를 펴고 옛 추억을 더듬어 본다. 수제비 맛도 떠올려 보면 저절로 아리랑 고개를 넘어 학교에 가던 책가방이 무겁다. 어쩌랴. 달콤한 엿처럼 항상 떠오르는 친구도 이젠 혼자서 아리랑 고개를 넘고 있겠지. 지금 어디선가 친구들도 화자를 목청껏 부르고 있을지도 모른다. 너무 먼 곳에서. / 이소애 시인
무릎 꿇은 나에게 하늘은 변명할 여지 없이 회초리를 들어 엄한 말씀 뉘우치라 하신다 △ 얼마나 큰 상처이기에 “변명할 여지 없이” 무릎을 꿇게 하였을까. 용서는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그와 내가 만나는 순간 용서의 방법을 터득한다고 한다. 내 안에 그가 존재하는 숨소리가 들려올 때, 영적인 교만이 겸손한 자세로 바뀔 때, 침묵과 기다림 속에서 성장할 것이다. 종탑에서 맴도는 바람의 발자국 같은 화자의 모습이 보인다. 햇살 좋은 날엔 “소나기”도 지나갈 뿐이다./ 이소애 시인
고봉 쌀밥 한 그릇 나무 위에 걸려 있다 땔감 없어 칠십 리 변산에서 종일 걷고 걸으며 지게질 흉년들어 먹을 것 없어 소나무 생키로 개떡 쪄먹던 육이오 살육의 남북전쟁 그 시절이 쩍 벌어진 사자 이빨 보듯 흉측스러이 솟고라진다 어머니 독새기 풀때죽으로 점심 때우든 그 시절 쌀밥 한 그릇은 대접받았다 이팝나무 이팝꽃에서 옛 고통을 견디어 낸 숨소리가 들린다. 생각만 하여도 고봉밥은 가장 슬픈 눈물이 강물처럼 흐른다. 가난이 웃음꽃으로 피어난 꽃은 화자의 꿈을 슬프지만 화려하게 대접한다. 어린 시절의 아픔과 고통의 상처를 “어머니 독새기 풀대죽”이 위로하는 꽃이다. 혹독한 겨울을 경험한 꽃은 자비롭다. 고봉밥 한술 떠먹고 가라고 외로운 사람 붙잡는 꽃이다./ 이소애 시인
하늘을 담아내는 넌 누구냐 하루도 그윽할 날 없는 이 마음 티끌 없기를 쫓고 쫓건만 멀건 날은 한 손에 꼽힐 뿐인데 명지바람에는 잔물결치고 뜬구름에는 그늘 드리우고 하늘빛에는 끝 모를 쪽빛 물들이는 허물이 허물 아닌 듯 자신을 내어주는 넌 누구냐 △ 대야는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義)가 없다. 손이 없어서 움켜쥐지도 않고 발이 없어서 달아나지도 않는다. 대야는 배알도 없다. 자기만의 고집이 없고 생각조차 없는 듯하다. 그저 “하늘을 담아”낼 뿐이다. “멀건 날은 한 손에 꼽힐”정도여서 “하루도 그윽할 날 없”다. 그래도 대야는 하늘을 담아낼 뿐이다. ‘말없이 말을 건네올 뿐이다.’ 모든 기관이 얼굴 한 개뿐인 대야, ‘대야’라는 말을 입 안에 넣고 가만히 굴려보면 끝없이 너른 수평선 너머까지 마음이 펼쳐지는 듯하다. 오늘은 내가 세상에서 가장 깨끗한 손을 가진 듯하다./김제 김영 시인
흘러가는 새털구름과 같이 하늘을 찌를 듯 도열한 내소사 입구 전나무 숲길을 걷는다 한 아름 넘는 전나무 두 그루가 태풍과 맞서다가 지쳐서 다리를 쭉 뻗고 누워 있다 스님! “저 쓰러진 나무는 무엇에 쓸 건가요?” 네! “한 오백 년 비바람에 잘 말려 법당 지은 대목수 불러 잘 다듬어 부처님 이쑤시개로 쓸 겁니다” 사천왕 부릅뜬 눈이 샐쭉 웃는다 △ 눈코 없는 나뭇등걸도 “한 오백 년 비바람”을 겪어야 부처님 치아라도 친견하겠다. 아무 감정 없는 통나무도 “한 오백 년 말”라야 부처님 법당 지은 대목수의 연장 맛이라도 볼 수 있겠다. 싸움판에서 처절하게 패배하고 “다리를 쭉 뻗고” “쓰러진” 저 나무토막도 비바람 까락까락 견디고 나면, 퉁방울눈을 부라리는 사천왕도 무섭지 않겠다. 참말이지 하나도 안 무섭겠다. /김제 김영 시인
누구의 눈길도 닿지 않는 그 어두운 골목 끝 담장 구석 어름에서 고개 푹 숙인 채 끝내 피기를 멈추질 않는 내 희망이여 △ 들꽃은 누가 보아주지 않는다고 해서 꽃을 거두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양지바른 곳은 본래부터 내 자리가 아니어서 “어두운 골목 끝/담장 구석 어름”에서 고개를 떨구고 산다. 언제 한번 어깨 펴고 호탕하게 웃어본 적 없다. 환한 태양 아래를 넘본 적 없다. 그늘에 뿌리를 내리고 작은 희망을 피우고 또 피우는 “흰 풀꽃”은 봄이 늦게 찾아와도 불평하지 않는다. 그저 최선을 다해 “피기를 멈추지 않”을 뿐이다./ 김제 김영
내 인생에 당신과의 만남은 축복이었소 생사고락을 같이 한지 반백년 지금 이 시간이 귀하고 행복한 순간이라오 만남의 시간이 지나고 나면 아름다운 추억만 남아 그리움 밀려오면 종이배 접어 그립다 한마디 적어 시냇물에 띄어 보내리 △ 사는 게 별거 아니다. 지구라는 자리에서 마음 맞는 사람과 한바탕 놀다 가는 것이다. 이것을 천상병 시인은 ‘소풍’이라 말했다. 삶과 죽음이 이음 동의어가 될 때까지 서로에게 집중하는 것이다. 괴로움과 즐거움을 핑계 삼지 않을 때까지 서로에게 스며드는 것이다. 둘 중 한 사람이 먼저 길을 접어도 밀려오는 그리움조차 시냇물 따라 흐르게 두는 것이다./김제 김영시인
남녀의 결혼은 손수건 같은 만남 슬프고 힘들 땐 눈물을 닦아주고 지치고 힘들 땐 땀을 닦아주는 만남 상대를 온전한 사람이라 생각 말고 나의 장점으로 보완해주기 위한 만남 한평생을 미워도 고와도 한 이불 덮는 만남 △ 손수건의 일과는 잘 닦아주는 것이다. 일과는 의무이기도 해서 손수건은 눈물을 부드럽게 닦아주어야 하고 땀은 산뜻하게 닦아주어야 한다. 장가들고 시집가는 일을 나타내는 ‘혼인’이라는 말속에는 서로에게 의존적 존재라는 개념도 들어있다. 남편은 아내로 말미암고 아내는 남편으로 말미암는다. 그래서 “상대를 온전한 사람이라 생각 말고/나의 장점으로 보완”하는 만남이다. 지금 곁에 있는 상대를 가만히 들여다보자. 그리고 나의 장점을 그의 허물 위에 덮어주자. 손수건의 일과처럼 그의 땀과 눈물을 닦아주자. /김제 김영 시인
시리도록 아픈 눈송이 한 아름 뒤집고 복수초 노랑 꽃망울 펼치며 봄을 부르는데 찬 서리 아직 미련이 남아있다고 길 떠나지 못한다고 밤마다 쓴웃음 짓더니 꽃잎 조각 위 그리움만 한 아름 떨궈놓고 사라지셨구려 △ 봄은 어디에서 오는가. 마른 나뭇가지가 초록 옷을 입더니 뽕긋 연둣빛 새싹이 나를 건드린다. 노란 저고리를 입은 복수초꽃이 새색시처럼 얼굴을 붉히는 봄 길목에서 주춤거리는 잔설이 따스한 입깁을 길목에 내놓는다. 봄인가? 복수초의 순결한 꽃잎이 봄의 색이다. “그리움만 한 아름 떨궈놓고” 겨울은 점점 멀어지고 있다. 가슴이 아프지 않고서 어떻게 이별을 경험하리./이소애 시인
온 천지에 비단 깔고 무슨 생각을 마른 가슴에 불지르나 얼핏 내미는 속살을 보면 순정 싱그러이 울렁거리네 향기 내뱉는 풋사랑아 어쩌자고 한꺼번에 다 주려하나 못다 피면 한이 되고 끊자니 연(緣)이 너무 깊구나 아서라, 못 참겠다 너에게 빠져 죽어도 좋다 미치겠다 봄아. △ 시가 봄을 업고 왔다. 아니, 봄이 시를 훔쳐 왔다. 불타는 사랑이 꽃으로 피어나니 잠재웠던 풋사랑이 들먹이는 봄이 왔다. “싱그러이 울렁이는” 순정을 누가 알까? 미치도록 사랑의 늪에 빠져버린 시인에게 꽃분홍 편지를 쓸까. 봄이 훔칫 놀라 뒷걸음 칠까 봐 살금살금 담장 너머로 편지를 던져볼까 보다. 휘파람 불며 대문을 오락가락하는 봄을 붙잡아 놓을 거다./이소애 시인
바람난 봄바람은 못하는 것이 없다 현호색 꿈으로 별밭을 만들고 쑥쑥 자란 쑥대머리 쑥버무리도 만들고 자지러지는 벚나무 웃음 면사포도 만들고 무엇보다 잘 만드는 것은 짝없는 새들의 팔베개도 만들고 심지어- 올망졸망 도시락을 거느리고 봄나들이하는 푸른 노동도 만들어낸다 바람난 봄바람은 못하는 것이 없다 △ “바람난 봄바람은 못하는 것이 없다”라면 봄바람 한번 피워보면 어떨까? “별밭”도 만들고 “쑥버무리 떡이며” “짝없는 새들의 팔베개도” 만들어 준다니 올 봄바람은 양팔 벌려 껴안아 볼 일이다. 얼굴만 스쳐 지나가는 봄바람이어도 가슴이 울렁거리던 기억을 불러 봄을 초록으로 불러야겠다. 사랑 빛. 움츠렸던 마음을 봄나들이 가는 도시락처럼 맛과 멋을 거느리고 바람 붙잡고 꽃 피워야겠다./ 이소애 시인
저절로 갇힌 게 아니고 네가 가뒀다 사랑이라고 명명했던가 유밀하게 손가락을 걸었던가 네가 보면 결별이고 내가 보면 그리움이다 △ '섬' 은 외롭다. '섬' 은 그리움이 늘 밀물과 썰물을 없고 파도치는 소리가 섬으로 왔 다 간다. '섬'은 '네가 가뒀다' 는 사랑이 지나간 자리에 드리운 그림자와 같았을 것 이다. '손가락을 걸' 었던 사랑은 영원하리라는 꿈이 있다. 때려야 소리 나는 종소리처럼 '네가 보면 결별' 인 사랑이 아직 그리움으로 살아 있다는 심장 소리를 바다에 띄워보면 어떨까. 사랑은 삶을 윤택하게 하는 마술사와 같다. 상처가 깊으면 깊을수록 새끼손가락은 단단한 옹이가 박혔을 터이다. / 이소애 시인
배추흰나비 두 마리 날아간다 자기야 자기야 깔깔 호호 엉켰다 풀어졌다 풀어졌다 엉켰다 허공마당을 누벼 활활 타오르던 봄 내내 긴 하루였다 △짧고 아름답다. 시속으로 걸어가 보니 동심의 내가 된다. 저절로 눈 앞에 펼쳐지는 그림이 봄을 색칠하고 있다. 봄이 “엉켰다 풀어졌다” 하면서 나비 날갯짓은 “활활 타오르고” 있으니 “자기야”를 수백 번 불러서 보여주고 싶을 것이다. 겨울은 봄을 이길 수 없던가. 통증의 고통에 부대끼며 사는 사람에게 이 시를 읊어주고 싶다. 얼마나 평화로운가. 허공 마당을 누비며 춤추는 나비가 얼마나 부러울까. 마당에 꽃처럼 피어오르는 봄볕으로 얼마나 뛰어가고 싶을까. / 이소애 시인
칠흙같이 캄캄함을 가다가 돌부리에 차이기도 했고 물구덩이에 빠지기도 했으며 움푹 파인 곳에 헛짚어도 보았다 초롱불이나 촛불처럼 희미하지만 밝혀둘 일이다 한 치 앞이 안 보일 때 어렴풋이나마 발밑을 비춰준다면 한 걸음 한 걸음 살펴 걷는 길에 길이 보이지 않겠는가? 등잔박물관에서 손과 의절한 조족등을 밝히자 등이 빙그르르 돌면서 묻는다 당신은 지금 어디를 걷고 있느냐고 길은 무탈하게 잘 찾아가느냐고 △ 옛날에 길을 갈 때 발밑을 밝혀주던 조족등이 있다. 이 등은 손잡이가 윗부분에 있고 불빛을 비추는 화창이 아랫부분에 있다. 초를 꽂던 초꽂이는 회전하게 되어 있는데 덕분에 걸을 때마다 정확하게 수평을 유지하며 발밑을 비추게 된다. 사람은 죽는 날까지 길을 걷고 길을 찾는다. 어떤 상황에서든 수평을 유지하는 “등이 빙그르르 돌면서 묻는다” “길은 무탈하게 잘 찾아가느냐고” 헛짚어 살지 말라고. /김제 김영 시인
바람을 쥐어짜면 파란 나뭇잎들 사사삭 비벼댄다 덤으로 앉은뱅이 풀꽃들은 나풀거린다 잉크 색깔로 물들어버린 스폰지 짜듯 손아귀에 힘을 주어 오롯이 아그려쥔다 후두둑 때맞추어 풀섶 떨치고 작은 새 한 마리 날아간다 힘겹게 모아진 물방울이 낮게 낮은 곳으로 제 몸 구르며 방울진다 △ 바람이 불어온다. 나뭇잎들은 서로 통통한 볼을 비빌 것이고, 풀꽃들은 바람 속에 나풀거릴 것이다. 작은 새 한 마리는 제 방향으로 날아갈 것이고, 매달렸던 물방울은 낮은 곳으로 구르며 제 몸피를 늘릴 것이다. 구르는 동안 자꾸만 커져서 바다에 닿을 것이다./김제 김영 시인
오솔길로 접어들면 새 한 마리 소프라노 음계를 올려 부채든 유월의 나무 사이 톡 하고 건드리면 가슴은 유리잔이 되어 청량감을 쏟아낼 것 같아 면사포를 곱게 쓴 식장으로 청아한 그 모습이 그려지는 못다 부른 그이의 곡조 누구라도 개운한 몸뚱어리 그 곁에만 있어도 푸른 바다가 물거품 올려 수평선에 수놓은 흰 구름 같이 신경은 잔잔한 다도의 시간 △ “부채든 유월의 나무 사이”라는 구절에서 오래 마음이 머문다. “톡 하고 건드리면” 나무가 시원한 기분을 쏟아낼 것이고 마음은 저절로 시원해질 것이다. 숲속의 새는 더 높이 노래할 것이고 푸른 바다와 수평선은 면사포를 쓴 채, 유월의 식장에 들어설 것이다. 시인은 가만히 차 한 잔을 우려낼 것이다. 풍경 속의 시인은 그대로 자신도 모르는 동안 유월의 풍경을 완성할 것이다./ 김제 김영 시인
시(詩)가 자꾸만 떼를 쓰는 날 그런 날이면 그 연유를 묻느라 그곳에 오른다 흩어진 생각을 한데 모아 굳은 의지로 그곳에 오르면 구름이 잡힐까 그늘에 가려 오락가락하던 나 고덕산 덕봉암에 뜬구름 같다고 부처께 사뢰면 정상에 오른 호기로 엉킨 내 생각이 다른 새로운 헛꿈이라도 잡힐까 △ 원고지 앞에서, 또는 껌뻑거리기만 하는 죄 없는 커서 앞에서, 시인은 자꾸 궁싯거린다. 쉽게 풀어지지 않는 문장과 행간과 단어들을 이리저리 옮겨보기도 하고 잘라보기도 하고 늘여보기도 한다. 그리 만만하게 써지면 시가 아니다. 이럴 때는 훌쩍 산에 오른다. 시 속에 구름이라도 불러 앉혀보고 싶은 간절함이다. 시 속에 다른 헛꿈이라도 모셔오고 싶은 절절함이다. 시인이 한 줄 시를 모셔오는 일은 저렇게 지성스러워야 한다./김제 김영 시인
깊은 밤 고요 어둠의 껍질 발톱으로 꽂으며 제 몸 찢는 고통 매미 등을 수직으로 쪼개 내리는 별똥별 하나 우아한 날개돋이 망사 날개는 하늘의 진동으로 바르르 펴지고 몸은 이윽고 한 생을 우는 울음통 된다 오랜 기다림으로 빚는 소리의 완성 님 향한 생의 날갯짓 나도 세상 벗고 탈각脫殼할 수 있다면 그리하여 빛 부신 당신의 노래 될 수만 있다면 △선퇴 하나가 바람에 흔들린다. 다 떠난 자리에 바람과 햇볕이 번갈아 드나든다. 어떤 반응도 없다. 그저 고요할 뿐이다. “어둠의 껍질 발톱으로 꽂으며/제 몸 찢는 고통”을 느끼지만, 생은 언제고 한 번은 아프게 찢겨나가야 “우아한 날개돋이”가 시작된다. 복잡한 세상을 벗고 탈각한 마음만이 누군가에게 빛 부신 노래를 들려줄 수 있다. /김제김영 시인
파도가 어찌 한두 번만 철썩이랴 한 계절이 다 저물 때까지 가슴 복판을 수만 번 치는 파란 그리움 헤치고 부서진 듯하다가 다시 부푸는 큰 너울 바다 파도가 어찌 한두 번만 철썩이랴 어둠 속에 묻어둔 별빛 살아나듯이 초롱초롱 눈부시게 굽이치는 그리움의 물결 하여, 해변에 자꾸 눕는다 모래톱마다 하얀 사연을 얹으며 세상에 비틀거리지 않는 건 없다 바람 앞에서 바다는 그의 생애가 파랗게 멍이 들도록 출렁이거나 비틀거리고 밤 깊숙이 눈 뜨는 그리움의 바다 △<겨울 바다>의 풍경을 떠올려 본다. 밀물과 썰물에 오가는 바다는 소리로 삶의 고통을 모래 위에 오선지를 긋고 음표를 그린다. 뜨거운 연인은 하트를 모래에 남긴다. 파도는 철썩이며 사랑을 시샘하며 지우고, 옆으로 가는 농게가 오선지에 쉼표를 찍는다. 겨울 바다는 그리움이 많아 파랗게 멍이 들도록 출렁이는 걸까. 수평선을 넘나들다가 겨울 바다는 봄을 업고 올 것이다. /이소애 시인
당신을 나라고 부르지 마세요 처음부터 당신은 내가 아니었어요 당신의 마음을 사랑으로 믿고 한없이 부풀었던 내 마음이 문제죠 이전의 기억을 잊은 부드러운 속살 경계를 지우며 변해가는 당신의 모습 나는 그 매력에 푹 빠졌지요 그런 당신이 이내 스러져가는 이슬 같은 것이라고 어찌 상상이나 했겠어요 그 달콤함에 스왈스왈하다 보면 당신의 사랑은 더욱 커지고 나는 김빠진 맥주가 되어간다는 줄도 모르고 △“스러져가는 이슬” 같은 사랑에 취하고 싶다. <거품>이면 어쩌랴. 사랑은 이별을 동반할 때 내게로 온다. “김빠진 맥주가 되어간다” 한껏 부풀었던 사랑이 식어 간다는 사실이 재밌다. 경계를 지우며 변해가는 모습이 매력적이었던 과거가 이슬처럼 식어 가는 사랑의 묘미를 어찌하랴. 풍선처럼 터질 듯 부풀어가는 뜨거운 열정이 거품이라고 느꼈을 때는 이미 누군가가 사랑을 훔쳐 가지 않았을까. /이소애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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