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의 무한경계 보여주는 최고령 현역작가…백수(99세)전 준비도
선생의 아흔여섯해 삶은 한국미술의 역사에 온전히 놓여있다. 고향은 김천이지만 아버지가 가족들을 데리고 군산으로 이사하면서 군산사람이 됐다. 측량기사로 일했던 아버지는 그가 태어나기도 전에 세상을 떠나 유복자가 됐다.
선생은 하씨지만 오랫동안 김씨로 살았다. 어머니가 군산 양조장집 안동 김씨에게 재가했기 때문이다. 본명은 구풍(俱豊). 철이 들어 스스로 하씨 성을 다시 찾았지만 화가의 길을 가기 위해 일찌감치 예명인 반영(畔影)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아홉 살에 학교(군산 신풍초등학교)에 들어가 4학년까지 다녔지만 어린나이에 집을 나와 자유롭게(?) 살았다.
초등학교 시절 일본인 교장의 '그림 잘 그린다'는 격려가 그를 화가로 키웠다. 그림과의 인연은 극장 간판이 시작이다. 열일곱 살에 처음 군산극장 간판을 그렸으며 후에는 전주로 옮겨 극장 '간판장이'로 지내면서 영화인들은 물론, 전주의 화가, 문인들과 교류했다. 유머가 빼어나고 베풀기 좋아하는 성품으로 주변에는 늘 예술인들이 끊이지 않았다.
전라북도에서 처음 시작된 전시회며 예술단체 중심에 선생이 앞서 있는 것도 그 덕분이다. 신석정, 김해강, 서정주, 이병기 시인과 가까웠으며 금릉 김영창 선생을 첫스승이자 마지막 스승으로 모셨다. 고암 이응로, 오지호, 전혁림 선생과도 교분이 깊고 운보 김기창 박래현 부부와도 인연이 있다.
6·25전쟁으로 부산 피난시절엔 이중섭을 만나 여관생활을 하기도 했는데, 담배은박지에 그린 이중섭의 그림은 팔리지 않고 화선지에 실경을 그린 선생의 그림은 잘 팔려 함께 먹고 지냈다.
어려운 이웃을 돕는 일에는 아낌없이 그림을 내놓아 수많은 자선전을 독립적으로 열거나 참여했다. 50년대 후반, 오지호선생과 함께 시화전을 열어 한하운 시인을 도운 일을 화가로서 한 일 중 가장 아름다운 일로 꼽는다. 환갑이 된 1979년에는 파리로 건너가 8대학에서 공부하며 르 살롱전과 꽁파르죵 공모전에 참가 우수상과 금상을 받으며 주목 받았다.
시인이자 수필가인 큰 며느리 김용옥씨를 각별하게 생각하는 선생은 '내 인생에 김용옥 시인을 만난 것이 인생에 제일 잘한 일'이라며 존중하고, 김씨는 '아버지는 화공 아닌 화신(畵神)'이라며 선생의 예술혼에 외경심을 보낸다. 선생은 며느리의 환갑을 앞두고 '내가 너를 위해 100점의 그림을 그려주겠다'고 선언(?)한 후 그 약속을 지켰으며, 며느리 김씨도 시아버지의 뜻을 받아 써낸 시를 모아 지난 2010년 화시집 〈빛, 마하, 生成〉을 발간, 화제가 됐다.
국내는 물론 일본과 중국 미국과 프랑스 등 수많은 전시회를 열어 횟수를 세는 것 자체가 의미 없다.
스스로를 화공이라 부르며 '걸작은 가난 속에서 나온다'는 철학으로 남에게는 아낌없이 베풀면서도 자신은 검약하는 생활을 지켜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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