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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을 세계복합유산으로 ⑫ 현대문학 속 지리산

민족의 수난·이념 갈등 비극 뒤범벅 '恨의 소산'

▲ 지리산 뱀사골 국립공원관리사무소 뒷편에 자리잡은 충혼탑. 빨치산 토벌에 나섰다가 유명을 달리한 군경을 추모하기 위해 세워졌다.

현대문학 속에서 지리산은 아름다움 보다는 비극적 충격이 강하게 나타났다. 화합과 동질보다는 이념적 갈등과 비극이 지리산 계곡 곳곳에 남아 있는 탓이다. 인간다운 삶을 갈구했던 사람들의 핏빛 절규가 동백꽃처럼, 진달래꽃처럼, 단풍처럼 빨갛게 타오르다 결국 맥없이 스러져간 역사 현장이기 때문이다. 지리산을 소재로 한 모든 문학작품들이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은둔과 수행, 전쟁, 투쟁의 질곡이 뒤범벅된 지리산 문학작품들은 '한'의 소산이다.

 

박경리의 '토지'를 비롯하여 이병주의 '지리산'과 조정래의 '태백산맥', 이태의 '남부군', 정지아의 '빨치산의 딸' 등 소설류는 대부분 일제시대와 해방, 6.25전쟁을 겪는 과정에서 빚어졌던 민족의 한과 비극을 다루고 있다. 소설가 이병주는 "역사는 산맥을 기록하고 나의 문학은 골짜기를 기록한다"고 했다.

▲ 박경리의 소설 토지의 공간적 배경인 경남 하동군 악양면 평사리에 있는 최참판댁 전경.

옛날 지리산을 무려 17회나 탐승한 남명 조식 선생은 '도화 뜬 맑은 물에 산영조차 잠긴'지리산을 '무릉도원'이라고 노래했다. 하지만 조식 선생은 임진왜란 발발 전에 살았던 인물이다. 그가 임란을 겪었다면, 지리산이 무릉도원으로 보였을까.

 

박경리는 소설 '토지'의 서문에서 "악양 평야는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외부에서는 넘볼 수 없는 호수의 수면같이 아름답고 광활하며 비옥한 땅이다."라고 호평했다. 하지만 정작 지리산에 대해서는 "지리산이 한과 눈물과 핏빛 수난의 역사적 현장이라면 악양은 풍요를 약속한 땅이다."라고 적었다. 박경리의 지적처럼 현대문학에서 지리산은 한과 눈물과 핏빛 수난의 역사를 간직한 공간이다. 탄압받는 민중, 힘없는 민중, 억울한 죄인, 세상에 실망한 지식인, 이념적 궁지에 몰린 지식인들이 새로운 세상, 무릉도원을 꿈꾸며 절규하던 공간이다.

 

지리산 남쪽 악양 평야는 어머니 품처럼 넉넉한 지리산과 생명의 젖줄 섬진강 사이에 있는 널찍한 '무딤이 들판'이다. 악양 평야가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산등성이에 자리잡은 평사리에서 최참판 일가가 조선말부터 일제시대를 거쳐 해방 무렵까지 겪는 애증을 그린 대하소설 토지는 서희와 길상, 조준구 등 다양한 부류의 등장인물들을 통해 인간의 존엄과 평등, 삶의 조건과 본질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보여준다.

 

조정래의 지리산은 섬짓하다. 산도 붉고 사람도 붉은 곳으로 유명한 지리산 피아골은 조정래에게 더 이상 아름다운 골짜기가 아니다. 조정래는 태백산맥 마지막 편에서 피아골의 붉은 경치를 이렇게 해석했다.

 

"골짜기마다 단풍이 흐드러지고 자지러지지 않은 데가 없었지만 피아골은 특히나 유별났다. 〈중략〉그러나 피아골의 단풍이 그리도 핏빛으로 고운 것은 그럴 만한 까닭이 있다고 했다. 먼 옛날로부터 그 골짜기에서 죽어간 원혼이 그렇게 피어나는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또 한가지 떠도는 말은, 연곡사 아래서부터 섬진강 어름까지 물줄기를 따라가며 양쪽 비탈에 일구어 낸 다랑이논 마저 바깥세상 지주들에게 빼앗기고 굶어죽은 원혼들이 그렇게 환생하는 것이라고 했다."

 

조정래의 지적처럼 약한 자 민초들의 한 서린 피눈물은 지리산 주변 800리 자락을 타고 천년 만년 흘러내리고 있는지 모를 일이다.

 

생존에 대한 희망도 없이 오리무중 지리산 속을 진군해 가다 어느 날 벌어진 전투에서 총탄에 사라져간 젊은 영혼들의 이야기는 독자들의 가슴을 짓누르며 분노케 한다.

 

이병주의 '지리산'에서 남부군 총사령관 이현상은 소백산을 따라 남진하던 중 군경과의 교전 및 전염병으로 600여명이 사망, 사기가 크게 저하된 부하들을 향해 "북으로 가는 길만이 살 길이 아니다. 남진하여 지리산까지 가면 그곳에서 살 길을 찾을 수 있다"며 독려한다.

 

"남부군은 다시 행동을 일으켜 둔철산을 넘어 서진의 길을 시작했다. 경호강이 내려다 보이는 산마루에 섰을 때이다.

 

앞서 걷던 문춘 참모가 걸음을 멈추고 한참 동안 정면을 바라보고 있더니 뒤를 돌아보고 감격어린 소리로 외쳤다.

 

'동무들! 저기가 달뜨기요. 이제 우리는 지리산에 당도했소.' 〈중략〉

 

달뜨기는 지리산의 초입이다.

 

남부군은 드디어 그 긴 여로를 겪어 목적한 곳 지리산에 들어선 것이다.

 

수백의 눈동자가 일시에 그 신비로운 웅봉(雄峰)으로 빨려 들어갔다. 〈중략〉

 

박태영으로서도 감회가 없을 까닭이 없었다. 그는 '지리산에 가면 살 길이 열린다.'라고 한 이현상의 말과 '과연 지리산에 가면 살 길이 열릴 것인가'라고 썼던 홍행기의 탄식이 뒤범벅 이 된 감정으로 넋을 읽고 지리산을 바라보았다." (이병주. 지리산)

 

어느 전투에서 빨치산의 총탄에 쓰러진 풋내기 경찰의 품에서 획득한 수첩에 "과연 지리산에 가면 살 길이 열릴 것인가"라고 적은 빨치산 홍행기도 곧 토벌대의 총탄에 사살되고 마는 비극의 현장 지리산의 단풍은 조정래의 해석처럼 핏빛일 수밖에 없었던 셈이다.

 

빨치산과 토벌대의 쫓고 쫓기는 살육전 속에서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민초들이 있었다. 경남 거창과 산청, 함양, 전북 남원, 구례, 함양 등에서 빨치산을 토벌하던 국군이 양민을 대거 학살했다.

▲ 경남 산청군 금서리에 조성된 산청 함양사건 추모공원에 서 있는 조각상.

경남 산청·함양사건추모공원에 세워진 시비에서 군산 출신의 시인 문효치는 이렇게 읊고 있다.

 

"님 앞에 서 있기가 부끄럽습니다

 

퍼부어오는 총탄이 우리의 양심을 사살할 때

 

그 양심의 갈래 끝에서 산화된 님이시여

 

〈중략〉

 

이제 저 붉은 낙조의 순간처럼

 

더 없이 평온하고 아름다운 꿈만 꾸소서

 

아픈 기억에 떨고 있는 이 땅을 지켜 주소서"

 

(문효치. 저 하늘의 별이 되신 님이시여)

 

또 시인 이원규는 '지리산 멧돼지'에서 순종을 고집하다 결국 죽어간 지리산 빨치산들의 운명을 이렇게 노래한다.

 

〈중략〉

 

"반종의 멧돼지처럼

 

길들여지는 것은 아닌가 반문해 보지만

 

순도 백의 혁명은 죽음 뿐이라는 것을

 

순결한 야인을 꿈꾸지만 그는 이미 이승 사람이 아니란 것을 (이원규. 지리산 멧돼지)

 

지리산 문학이 모두 우울한 것만은 아니다.

 

수필가 백남오는 '겨울밤 세석에서'란 수필에서 겨울밤 세석평전에 깃든 태고의 신비를 바라보는 감동을 아름답게 그려냈다.

 

'세석은 하얀 눈을 덮어 쓴 채로 바람의 폭격을 온몸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중략) 문제는 달빛입니다. 그 천지개벽 같은 혼돈의 현장을 말릴 생각도 않은 채, 달빛은 교교하고도 무심하게, 바람의 횡포를 바라만 보고 있습니다. 달빛까지 함께 어우러진 세계, 이것이 천상인지, 지옥인지 그것을 분별할 능력이 제게는 아무래도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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