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기 영화, 매력적인 소재
20세기에는 크고 작은 전쟁이 일어났고, 그와 함께 유명세를 치른 영웅들이 있었다. 영화를 중심으로 하는 엔터테인먼트 산업으로 인해 스타라는 새 신분이 생겼고, 온갖 정보의 네트워크는 넓어졌다. 하지만 그의 진짜 사생활을 들여다보기는 쉽지 않다는 점에서 ‘전기 영화’는 매력적인 이야기의 소재처럼 비춰진다.
그러나, 전기영화를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공적인 삶 뒤에 있는 이면, 즉 사적인 삶에 있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이미지 예술이 지닌 본질과 깊은 관련을 맺는다. 발터 벤야민 식으로 말하자면 ‘기술적으로 복제가 가능해진 시대의 예술작품’들의 속성과 관련을 맺는다. 벤야민은 사진에서 제의가치(종교적 가치)가 완전히 추방당한다는 것을 지적하면서도, 제의가치가 순순히 물러나는 것이 아니라 최후의 요새에 들어가서 저항한다고 강조한다. 이 최후의 요새가 바로 ‘인간의 얼굴’이다. 초창기 사진의 역사에서 초상화가 유행을 했던 것도 예술의 제의가치가 물러나 전시가치로 전환되는 과정 중에 저항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얼굴의 아우라를 강조하는 것은 신비가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는 제의가치의 저항과 맞물린다.
그런데, 이 얼굴의 영역은 쉽게 조작이 가능해진 디지털화된 시대에 차원이 다른 갈등을 일으킨다. 카카오톡의 대문 사진이나 페이스북의 초입에서 누군가의 얼굴을 보게 된다. 그 얼굴은 저항을 할 것 같은 아우라의 압도감보다는 인위적으로 조작되어 있거나 포토샵으로 처리되어 있는 방부제가 가미된 이미지로 받아들일 때가 많다. 우리는 카카오톡에 실린 사진을 쉽게 믿지 않는 단계로 이미 진입하고 있는 것이다.
‘전기영화’의 유행도 이러한 태도를 대변한다. 더 이상 한 인간의 이면이나 사생활의 진실을 드러내 보여주기 보다는 저 이미지가 과연 진실일까 하는 의구심과 그 사람을 좀 더 들여다보고 싶다는 열망의 뒤엉킴 속에 한 편의 전기 영화가 완성된다. 한국영화 〈변호인〉 역시 그러한 이미지의 대표작일 것이다. 그의 진짜 얼굴을 보고 싶다는 열망과 그것이 정말 진짜일까 하는 저항을 오고 간다. 진실은 어디에도 위치하지 않는다. 적당한 사실과 적절한 허구를 가미했을 뿐이다. 이 미묘함 속에 흥행의 추구와 정치적 가치들이 뒤엉킨다.
진실은 저 안 깊숙이 있는 것
지금 시대는 더 이상 맨얼굴이 불가능해진 시대다. 흔히 연예인들이 민낯이라고 공개하는 사진도 대부분 자연스럽게 화장된 얼굴들이다. 그 한꺼풀의 양해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촌스러워지는 시대다. 그러므로, 수많은 전기영화는 사실에 복무하는 것이 아니라 재미와 촌스럽지 않은 얼굴을 구현해야 하는 상황에 복무하는 것이다. 그 속에 인간은 맨 얼굴은 은막 뒤에 깊숙이 숨어 버린다. 진실은 저 너머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저 안 깊숙이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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