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즈음 사극들은 옛 역사에서 소재를 찾아내, 과거 사실과는 다른 지금의 이야기를 하는 팩션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이에 비추어 ‘정도전’ 드라마를 정통사극의 부활이라고 치켜세울 수는 있다. 하지만 사극이라고 하더라도 역사관을 왜곡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드라마도 역사관 왜곡 안돼
지난 주말에 위화도 회군 후 조민수에 의해 창왕이 세워지자 이성계가 사직을 하는 장면이 방영되었다. 이성계가 나라를 살리겠다는 일심으로 회군한 후 정치현실에 염증을 느끼고 동북면으로 돌아가고자 사직소를 올렸으며, 정도전과 정몽주가 이를 극구 말려서 조정에 다시 복귀한다는 식이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이성계는 새왕조 개창에 뜻이 없었고, 조선은 정도전이 세운 나라라는 이야기가 맞을 것이다. 과연 그럴까? 회군은 곧 역모인데 역모의 주도자가 아무런 대책도 없이 군권을 내놓고 사직을 한다는 것은 지나치게 무리한 설정이다.
요동정벌을 단행할 때 팔도도통사는 최영이고, 좌도도통사가 조민수이다. 이성계는 서열 세 번째인 우도도통사이다. 요동출정에 조민수와 이성계가 같이 했고, 회군 단행은 조민수가 참여해 가능했다. 회군후 주도권은 조민수에게 돌아갔고, 조민수에 의해 우왕의 아들 창왕이 옹립되었다.
얼마안가 조민수는 이성계세력에 의해 내쳐졌다. 회군후 이성계의 사직과 복직 등 일련의 정치적 과정은 치밀한 전략하에 이루어진 것이다. 이성계의 사직소는 창왕을 압박하는 정략일 수는 있어도, 정치를 떠나겠다는 의미는 적어도 아니다. 극의 전개상 회군후 사직 장면이 이성계의 속생각을 감추고 있는 것으로 설정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이성계에게 위화도회군과 역성혁명에 대한 면죄부를 주고 구국의 일념만을 부각시키려 한 것이라면 지나치다.
필자가 창왕 옹위 후 이성계의 사직건에 대해 조금은 장황하게 언급하는 것은 이 논조가 정도전 드라마의 기본 시각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이성계는 정치적 욕심이나 새왕조 개창에 뜻이 없고, 정도전은 오직 백성을 위해서 개혁을 외쳤다는 논조가 앞으로는 어떻게 변모될지 알 수 없지만, 지금까지 방영된 것으로 보아 바꿔지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
정도전에 대한 이해도 좀 더 넓어질 필요가 있다. 그가 새질서 구축에 앞장선 데에는 개인적인 아픔이 있었다. 정도전 집안은 본래 향리였다. 그의 고조부는 경상도 봉화현의 호장이었고, 그의 아버지 정운경 때 과거에 급제해 중앙에 진출하였다. 정도전도 태조처럼 권문세족과는 기반을 달리하는 신진세력이었다.
거기다가 정도전은 노비의 피가 흐른다고 하여 과거 급제후에 벼슬에 나가는데 어려움이 있었다. 그의 외할머니가 노비의 자식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정도전을 조선 3노가(三奴家)의 하나라고도 한다. 또 《차문절공유사(車文節公遺事)》에 정도전의 부인을 최습의 첩 소생이라고 하였다. 정도전에게 고려는 자신의 뜻을 펼치기에 어려운 세상이었다.
고려와 조선의 지배세력은 달라
벼슬에 나온 후에도 시련은 이어졌다. 정도전은 친원정책에 반대하다가 나주목 회진 거평부곡으로 유배되었다. 3년간 유배생활을 한 후 삼각산 아래 서실을 열어 생활하는 등, 이성계를 함주막사로 찾아갈 때까지 10여년간 유배와 유랑생활을 하였다. 이 때 가난과 외로움 등으로 큰 고통을 겪었다.
정도전이 새왕조 창업이라는 대업에 나선 것은 그의 이런 형편과도 무관하지 않다. 필자는 고려와 조선의 지배세력이 같다는 설에 동의하지 않는다. 고려의 구세력들이 조선건국에 참여한 것은 사실이지만 주역은 바로 이들 신진세력들이었고, 거기에는 이런 그들의 형편도 적지 않게 작용했다. 이런 점들을 같이 살펴야 정도전과 이성계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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