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의 대문호 괴테는 〈이탈리아 여행기〉에서 “시칠리아를 보지 않고서는 이탈리아를 보았다고 할 수 없다”고 했다. 시칠리아는 그 만큼 매력적인 섬이다. 영화 ‘대부’와 ‘시네마 천국’으로 유명한 이 섬은 경관의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유서 깊고 다채로운 유적으로도 유명하다.
지중해 최대의 섬이면서 지리적으로는 로마, 그리스, 아프리카 본토와 가까웠던 시칠리아는 다양한 나라의 지배를 받았다. 이 때문에 이탈리아 반도와는 구분되는 독특한 문화를 갖게 됐다. 이 섬 안에서는 그리스식 사원, 바로크 양식의 성당, 로마의 원형경기장, 아랍 양식의 건축물 등 갖가지 문명의 유적을 볼 수 있다.
대체로 보존도 잘 돼 있어 많은 유적들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됐다. 그리스 건축양식인 도리아 양식이 도드라지는 ‘아그리젠토 고고지구’, 로마인들의 저택인 ‘카살레의 빌라로마나’, 유럽 바로크 양식의 절정기를 보여주는 ‘시칠리아 남동부 발 디 노토의 후기 바로크 도시’ 등 6개다. 이들은 당대의 역사상을 온전히 전해준다.
이 중 카타니아, 라구사, 시라쿠사 주 등 8개 도시가 포함된 ‘시칠리아 남동부 발 디 노토의 후기 바로크 도시’는 문화재 재건의 바람직한 사례를 보여준다. 이들은 17세기 화산폭발과 지진으로 완전히 파괴됐었다.
또 ‘작은 천국’이라 불리는 타오르미나는 고대의 유적지가 널리 분포돼 있다. 이곳에 있는 타오르미나 원형극장은 보존 상태가 우수하며, 오늘날에도 오페라와 연극공연 등을 연다. 인근에 있는 움베르토 거리는 사시사철 관광객이 붐빈다. 이곳에서 볼 수 있는 그리스풍의 건물과 이오니아해의 전경은 사람들을 매료시킨다. 시칠리아 역시 유럽의 많은 도시들과 마찬가지로 문화유산과의 공존이 생활화된 곳이다. 빛바랜 문화재들과 낡고 스산한 골목이 주를 이루지만 주민들은 그 공간에서 자연스럽게 생활하고 있다.
시칠리아는 제주도의 14배 크기다. 본지에서는 카타니아와 타오르미나를 중심으로 소개한다.
△7전 8기의 역사도시 카타니아= 기원전 8세기에 그리스인들이 세운 도시인 카타니아는 자연재해로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다. 근처에 있는 해발 3350m의 활화산, 에트나 화산 때문이다. 이 화산은 기원전 264~241년 로마와 카르타고의 포에니 전쟁 기간 중에 폭발했으며, 그 뒤로도 200여 차례나 더 폭발했다.
특히 17세기에 일어난 화산폭발과 지진이 큰 피해를 입혔다. 1669년의 에트나 화산폭발과 24년 후인 1693년에 일어난 지진은 9만3000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17세기의 클라이막스를 장식했다’고 일컬어질 정도였다.
자연재해에 의한 비극 때문에 많은 고대 유적이 소실됐으며, 1700년대부터 1800년대까지 장기간에 걸쳐 도시 재건작업이 이뤄졌다.
100년 동안의 재건작업이 끝난 후 카타니아는 지진에 강한 구조로 설계되었으며, 넓은 거리와 새로운 건축물이 들어섰다. 17세기의 대표 건축양식인 바로크 양식으로 재건됐다. 이 양식은 기본적으로 성과 수도원들이 많은 것이 특징이다.
재건된 유적들은 주로 두오모 광장을 중심으로 둘러싸고 있다. 11세기 노르만 시대 양식을 간직한 성 아카다 대성당, 현재 시립박물관으로 사용되는 13세기의 우르시노 성, 고대 로마의 원형경기장 등 22개가 그것이다. 이 중 10개가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록돼 있다.
이들 중 가장 주의 깊게 볼 유적은 스테시코로 광장의 지하에 있는 로마 원형 야외극장이다. 중세 유적이 대다수를 차지하는 카타니아에서 보기 드문 고대 유적이다. 〈카타니아 유적 자료집〉에 따르면 2~3세기경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약 16000명의 관객을 수용할 수 있었다. 화산폭발로 오랜 세월 지하에 묻혀 있다가 18세기 초에 발견됐으며, 1906년부터 본격적인 발굴이 시작됐다. 현재 극히 일부 벽면만 발견됐고, 많은 부분이 아직도 지하에 묻혀있다. 발굴 작업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현장에서 작업을 하고 있던 스테파노 씨는 “야외극장이 묻혀있는 지하 위에도 17~18세기에 재건된 성녀 아가타가 투옥됐던 감옥, 성 아가타 성당 등 문화재가 있어 발굴에 어려움이 있다”며 “자칫 지상에 있는 유물까지 훼손될 수 있다”고 말했다.
두오모 부근에서 북쪽으로 올라가면 에트네아 거리가 있다. 카타니아에서 가장 번화한 거리로 중세 바로크 양식의 건물이 줄지어 있다. 건물은 레스토랑과 각종 상점 등으로 활용되고 있다. 시민들의 생활공간 자체가 유적지인 셈이다. 마치 중세의 어느 거리를 걷는 듯한 기분을 느낄 수 있다.
시칠리아에서 역사교사를 하고 있는 알렉산드로 씨는 “본래는 고딕양식, 로마네스크 양식이 혼재돼 있었지만 화산폭발과 지진으로 붕괴됐고, 바로크 양식으로 통일됐다”며 “이 구간은 중세도시 복원을 위한 집단적인 노력이 성공적으로 결실을 맺었던 현장이다”고 말했다.
△역사유적과 자연경관과의 조화, 타오르미나= 시칠리아섬 동쪽 기슭 해발 200m의 고지대에 있는 타오르미나는 오래된 역사를 일깨워 주는 유적이 여기저기 남아 있다. 13세기의 산 니콜로 대성당, 로마의 ‘나우마치아(고대 로마인들이 해상 전투를 재현하기 위해 물을 채웠던 건물)’, 오래된 성벽의 잔해, 타오르미나 원형 극장 등이 바로 그것이다.
이들 중 백미는 타오르미나 원형 극장이다. 기원전 3세기에 지어졌던 이 극장은 뛰어난 보존력을 자랑한다. 당대의 설계대로 지어진 벽돌이나 구조가 고스란히 남아있다. 원형극장 가이드인 로베르토 씨는 “파손된 벽돌을 복원할 때도 기존에 존재했던 모양 그대로 한다”고 말했다. 이 극장에서는 매년 여름마다 오페라와 그리스 고전극, 콘서트, 영화 축제 등이 열린다. 상당히 오래된 유적인데도 음향효과가 뛰어나다. 로베르토 씨는 “청중들의 소음과 같은 저주파 소리는 흡수하고, 공연자의 고주파 소리는 증폭시켜주는 구조다”며 “석회암 계단구조가 이 같은 영향을 주는 것으로 알려졌다”고 말했다.
유럽에서 가장 눈부시고 수려한 자연경관을 자랑하기도 한다. 극장의 관람석에서는 무대 뒤편으로 에트나 산의 정상과 이오니아해, 이탈리아 반도와 유럽대륙까지 보인다.
자연경관과 역사유적과의 조화는 관광객의 발길을 끈다. 타오르미나 원형극장 관계자에 따르면 이곳이 시칠리아에서 가장 관광객이 많은 장소다.
△시칠리아 문화유산의 이면= 고대, 중세의 다양한 유적들을 자랑하는 시칠리아지만 제대로 관리되지 않고 있는 문화재 역시 눈에 들어온다. 수백 년은 됨 직한 유적에는 잡초가 자라고 낙서로 더럽혀진 곳도 상당수였다. 17~18세기에 지어진 성 아가타 성당, 비스카리 궁전 등이 그런 경우였다. 유적들을 까맣게 덮은 때자국은 매연과 공기 중 화학작용 등으로 생기는 것인데, 제 때에 제거하지 않을 경우 대리석을 약하게 만드는 원인이 된다.
이탈리아에서 성악가로 활동하고 있는 박청용 씨는 “이탈리아 본토 역시도 경제위기 때문에 문화재 정비를 제대로 못하는 경우가 있다”며 “본토에서도 경제상황이 열악한 시칠리아도 같은 원인 때문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시민으로부터 선호받지 못하는 유적지도 있다. 바로 아그리젠토 고고지구다. 이 유적은 화려한 그리스 신전과 로마의 저택, 고대 묘지 등이 그대로 보존돼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유적지 주변에 자연경관이 좋지 않고, 다른 유적지와의 거리도 멀다. 한국 대다수의 유적과 마찬가지로 산지에 문화재 하나만 덩그러니 놓여있는 경우다. 시칠리아의 한 식당 종업원은 “정말 심심한 유적지다”고 말했다.
■ 활력 넘치는 카타니아 명물 어시장
두오모 광장을 둘러싼 유적지 사이에 관광객의 발길을 멈추게 하는 것이 있다. 카타니아의 명물, 어시장이다. 시원하게 물을 내뿜는 아메나노 분수의 뒤에 있는 공터에 펼쳐진다.
이른 아침부터 열리는 어시장은 진풍경을 연출한다. 한국의 수산시장처럼 구획을 정리해놓고 판매하는 게 아니다. 공터에 먼저 도착한 상인이 이리저리 난잡하게 판을 펼쳐놓고 어류를 판매한다. 먼저 자리 잡는 사람이 임자다.
참치와 조개, 새우 등 갖가지 싱싱한 해산물을 파는 시장에서는 바다 냄새가 물씬 느껴진다. 시칠리아 바다에서 이제 막 잡은 해산물을 팔기 때문이다.
시장은 왁자지껄하고 활력이 넘친다. 생선 값을 흥정하는 이탈리아인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재미있다. 따라서 어시장 근처에는 지나가던 발길이 멈추고 구경하는 관광객들이 많다. 가이드인 박청용 씨는 “해외 관광객뿐만 아니라 이탈리아 반도에 사는 사람들에게도 어시장은 흥밋거리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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