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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古都 잠에서 깨다 ⑧ 백제역사유적지구 다시 보기] 세계유산 도시, 찬란한 백제문화 다시 꽃 피운다

▲ 공산성은 백제시대 웅진도읍기(475~538년)의 공주를 방어하기 위한 왕성으로 금강변에 자연지형을 최대한 활용하여 쌓아 천혜의 요새와 같다. 문주왕 원년에 한강유역(한성)에서 공주(운진)로 천도, 성왕 16년(538년) 부여(사비)로 천도할 때까지 5대 64년간 왕도를 지켰다. 관람객들이 지난달 21 금서루를 지나 공산성 입구로 들어서고 있다. 안봉주 기자

공주·부여·익산의 백제 유산을 묶은 ‘백제역사유적지구’가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면서 재조명 받고 있다. 이제 한국을 넘어 세계의 유산으로 그 가치를 널리 알리고 있다. 기원전 18년부터 서기 660년까지 거의 700년을 존속한 백제. 장구한 시간을 뛰어넘어 여전히 빛을 발하고 있는 백제의 역사를 만났다. 미완의 유적지구라 갈 길은 멀지만 곳곳에서 백제문화의 우수성이 돋보인다.

 

△떠오르는 백제고도(古都) ‘익산’

 

익산 백제역사유적지구는 공주·부여의 백제역사유적지구에 비해 오랫동안 주목받지 못했다. 서동과 선화공주의 설화가 담긴 삼국유사의 기록이 유일하다 할 정도로, 공주나 부여에 비해 관련 기록이 부족해서다.

 

그러다가 1971년 무왕의 지모밀지(枳慕蜜地-익산으로 추정) 천도 사실이 담긴 사료 관세음응험기(觀世音應驗記)가 일본에서 발굴되면서 조명받기 시작했다. 1989년 문화재관리국(현 문화재청)에 의해 발굴조사가 시작된 이래 26년간 진행 중이다.

 

발굴과정에서 성벽과 관련된 문지의 흔적, 명문이 새겨진 기와, 제사 관련 유적. 왕실기원사찰로 알려진 제석사터, 무왕과 그의 왕비릉으로 전해오는 쌍릉 등이 발견됐다. 고대 궁성 관련시설의 대지조성과 축조, 공간구획에 대한 새로운 자료도 확보되고 궁성의 계획적인 설계에 의한 축조양상도 확인됐다. 지난 8월21일에는 왕궁리 유적 서남편 일대(8300㎡)에서 철제솥과 토기 등의 유물 10여점과 함께 왕궁부엌으로 추정되는 건물터가 발견됐다.

 

최근 들어서는 왕궁리 유적 주변이 시가지로 기능했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도 제기됐다. 왕궁리 유적에서 동남쪽 1.3㎞정도 떨어진 곳에서 우물터가 발견됐다. 왕궁리와 제석사지 사이, 궁 남쪽의 탐리마을에서는 기와편, 건물터 등 생활유적도 발견됐다.

 

이신효 왕궁리 유적전시관 학예연구사는 “고대도시는 일반적으로 왕궁 주변에 사찰, 주택, 공방, 시장 등이 형성된다”며 “생활유적과 더불어 왕궁리 유적 인근에 도로 흔적과 조경지 흔적으로 추정되는 곳이 있는 것으로 볼 때 제대로 도시의 형태를 갖췄던 것 같다”고 말했다.

 

현재 역사학자들은 남아있는 문헌기록과 유적발굴 성과를 토대로 고대 익산의 위상에 대해 여러 해석을 한다. 우선 일본에서 발견된 관세음응험기(觀世音應驗記)에 근거해 무왕이 부여에서 익산으로 천도했다는 설이 있다. 또 무왕의 출생지이자 성장지인 익산이 수도였다기보다는 수도와 동일한 행정구역인 별부(別部)로 편성돼 수도의 일부로 여겨졌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이와 함께 별궁설(別宮說), 행궁설(行宮說) 등이 있다.

 

전주교대 김주성 교수는 “학자들마다 이견은 있지만 왕도와 직접 관련이 있었다는 사실은 공통적으로 인정한다”며 “익산은 백제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밖에 익산에는 왕궁리 유적, 미륵사지 등 유네스코 세계유산 외에도 서동생가터, 용샘, 익산토성(오금산성), 사자사지(師子寺地), 미륵산성 등 백제 관련 유적이 많다.

 

△스토리텔링의 선두주자 ‘공주’

 

백제 678년의 역사 중 64년 동안 수도로 기능했던 공주. 백제의 두 번째 수도이자, 동성왕과 무령왕 때 새로운 도약의 계기를 마련했던 곳이다.

 

세계유산으로는 공산성과 송산리 고분군이 있다. 이들은 개별적으로 따로 떨어져있지 않다. 공주지역 백제유적 분포의 특징은 왕성과 직접 관련된 유적인 송산리 고분군, 공산성 등이 공주시가지 북쪽으로 금강에 인접해 일정한 권역을 이루고 있다. 그리고 시의 북쪽 외곽에서 확인된 수촌리 유적 같은 경우 공산성 등 왕성관련 유적과 더불어 공주지역의 백제문화를 이해하는 데 주목되는 문화재다.

 

공산성은 도읍지인 공주를 방어하기 위해 축성된 산성이다. 백제 때에는 웅진성으로 불렸다. 성곽의 전체 길이는 2660m이며 석성이 1770m, 토성이 나머지다. 현재 남겨진 성곽은 석성이든 토성이든 조선시대에 수축된 것으로, 반복적으로 개·보수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다만 토성구역에서 외성부분에 백제시대의 석축 흔적이 남아있어 이 성이 본래 토성으로 조성됐고, 당시 부분적으로 석축으로 개축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 성은 1980년대 이후 10여 차례 이상 발굴조사가 이뤄졌다.

 

특히 1986년도 조사에서는 왕궁지로 추정되는 곳이 발견돼, 왕성으로 기능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학설도 제기됐다. 현재도 성 내부 곳곳에서 공주대학교 주관 하에 발굴조사가 진행 중이며, 마면주(말의 얼굴에 씌우던 투구), 옻칠마갑(말에 씌우는 방어구) 등 다양한 유물이 출토되고 있다.

 

성을 돌 때는, 서쪽에 있는 금서루를 출발해 연지와 만하루, 진남루를 거쳐 다시 금서루로 돌아오는 데 한 시간 반 정도면 충분하다. 특히 밤에는 조명이 켜지면서 백제의 역사만큼이나 화려한 야경이 펼쳐진다. 또 성 내부에 활쏘기 체험, 백제 탈 만들기 등 여러 체험 행사장이 있어 소소한 재미를 찾을 수도 있다.

 

공산성에서 금강을 끼고 서쪽방향으로 가다보면 송산리 고분군이 있다. 이 고분은 백제 웅진시대 왕과 왕족들의 무덤이 모여 있는 곳이다. 본래 17기의 무덤이 있었지만 현재는 무령왕릉을 포함해 7기만 복원돼 있다. 무령왕릉을 제외한 나머지 고분은 도굴을 당해 주인이 누구인지 알 수 없어 번호로만 불린다.

 

그러나 무령왕릉이 있어 백제문화의 진수를 유감없이 확인할 수 있다. 이 무덤은 지난 1971년 내부에 물이 스며들지 않도록 하기 위해 배수로를 정비하다가 우연히 발견됐다. 왕와 왕비의 금제관장식을 비롯해 왕릉을 수호하기 위한 석수(石獸), 중국과의 교류를 증명하는 화폐 오수전, 무덤의 주인공을 알려주는 묘지석 등 108종 2906점에 이른다. 특히 묘지석 앞면에 ‘영동대장군 백제 사마왕(斯麻王)은 계묘년(523) 5월7일 62세로 돌아가셨고 을사년(525년) 8월12일에 안장됐다’고 기록돼 있다. 일본 서기에도 무령왕의 이름이 사마(斯麻)로 쓰여 있어 기록은 일치한다.

 

아쉽게도 현재는 무령왕릉 내부를 구경할 수 없다. 문화재보존을 위해 지난 1997년 7월부터 영구적으로 공개하지 않기로 해서다. 단지 실물과 같은 모형을 송산리고분군 모형전시관에서 관람할 수 있다. 이곳에서는 무령왕릉과 송산리 고분군 5·6호분을 정밀하게 재현해 고분과 동일하게 만들어 무령왕릉 재현, 송산리고분군 발굴과정 등을 볼 수 있다. 인근에는 역사문화 콘텐츠와 IT기술을 접목해 백제문화를 재현해서 보여주는 웅진백제역사관이 있다. 또 무령왕릉 내부에 있는 유물 중 국보 12점 등은 국립 공주박물관에서 볼 수 있다. 현재 국립공주박물관에서는 세계유산 등재를 기념해 ‘백제, 세계인을 맞이하다’란 주제로 특별전시회를 12월말까지 연다. 각종 백제 유물 100여점을 구경할 수 있다.

 

△백제 마지막 역사 고스란히 ‘부여’

▲ 정림사지 5층 석탑. 단 한 번도 해체작업을 하지 않은 유일한 석탑으로 예전모습 그대로 지금까지 남아있다.

부여(사비)는 백제의 마지막 왕도다. 서기 538년 성왕은 538년 웅진(공주)시대를 마치고 사비로 천도했다. 이후 123년간 백제의 수도로 자리한 사비도성의 중심지에는 정림사지가 있었다. 현재는 절터만 남아있지만 내부의 정림사지 5층 석탑은 예전 모습대로 지금까지 남아있다. 단 한 번도 해체작업을 하지 않은 유일한 석탑이다. 고고학자들이 발굴조사를 진행한 결과, 탑 하나에 금당 하나가 일직선으로 배치된 전형적인 백제 가람이다.

 

이 탑에는 백제 패망의 이야기가 그대로 담겨있다. 일제시기까지 ‘평제탑(平濟塔)’이라 불렸는데, 1층 탑신에 당나라 장군 소정방이 백제 평정의 전공을 새겼음에 연유한다. 소정방은 탑에 ‘대당평백제국비명(大唐平百濟碑銘)’이란 문구를 새겼다. 왕도의 중심에 있던 탑에 개인의 전공을 새긴 사례는 매우 드물다. 패망한 나라의 왕족들이 가졌을 좌절을 짐작해볼 만한 흔적이다.

 

부여에 있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은 부소산성과 능산리 고분, 관북리 유적지, 나성 등 네 곳이다. 네 곳의 세계유산은 백제의 사비천도가 치밀한 계획에서 비롯됐다는 것을 증명한다. 전체가 긴밀한 상호관계를 가지고 배치돼 있다.

▲ 왕과 왕비 등 왕족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7개의 고분이 있는 능산리 고분군.

관북리 유적은 백제의 왕궁터로 추정되는 곳이다. 익산 왕궁리 유적과 동일한 대형 건물지와 정연한 도로망 흔적, 하수도 등이 발견됐기 때문이다. 현재도 조사 중이다. 능산리 고분군에는 왕과 왕비 등 왕족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7기의 고분이 있다. 나성 밖에 위치하고 있으며 왕실의 권위를 상징하기 위해 도시 한복판에 조성했던 이전 시기의 왕릉군들과는 다른 입지 여건을 보여준다. 발굴조사 이전에 대부분 도굴되었지만, 고분군 서쪽 절터에서 567년에 제작된 석제 사리감과 함께 금동대향로가 출토돼 이 고분이 왕실의 무덤이라는 사실이 확인됐다.

 

나성은 사비의 동쪽 부분을 방어하던 성곽시설이다. 북, 서, 남쪽은 금강이 천연방어막 역할을 했기 때문에 동쪽 부분만 인공적인 방어시설(나성)을 설치했다. 나성은 동아시아에서 새롭게 출현한 도시 외곽성의 가장 이른 예 중의 하나로 도시 방어의 기능을 가질 뿐만 아니라 도시의 안과 밖을 구분하는 상징적 경계로서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내부에는 왕궁을 비롯해 관아, 민가, 상가, 방위시설 등이 존재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부소산성은 동성의 방어거점으로 사용됐을 것으로 추정되며 내부에 낙화암과 고란사가 있다. 백제의 패망 직전 삼천궁녀가 투신했다는 전설이 전해 내려오는 낙화암은 백마강을 다니는 황포돛대를 타고 운치있게 바라볼 수 있다. 현재 정림사지에서 2㎞거리의 구드래나루터에서 백마강을 일주하는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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