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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품제에 신음하는 6두품

서울 소재 대학 학생들이 이처럼 박탈감을 느낄 때 / 지역 무력감 얼마나 클까

▲ 문화사업국장 겸 논설위원

정읍 태인면에 있는 피향정(披香亭·보물 제289호)은 한창 여름철에 가면 연꽃이 만발한 연못이 장관을 이룬다.

 

통일신라 말기 최치원이 정읍 태산군수(칠보·태인·산내면 일대 관할)를 하면서 피향정 주변을 거닐며 풍월을 읊었다고 한다. 최치원은 최승우와 더불어 신라말기 문장의 대가인 소위 ‘3최’인데 정읍 칠보에 있는 무성서원 역시 태산군수로 재임하던 그가 쌓은 공적을 기리는 곳이다.

 

어릴 때 당나라에 국비유학생으로 다녀오고 그곳에서 장원급제까지 한 그가 신라에 돌아와 큰 족적을 남길 것 같았으나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그는 태인, 함양, 서산 등지에서 고을수령을 하는 것으로 공직을 마감했다. 바로 신라의 뿌리깊은 신분제도인 골품제 때문이었다.

 

성골, 진골도 아닌 데다 겨우 6두품에 불과했기에 그가 출세할 수 있는 한계는 너무 뚜렸했다.

 

그는 진성왕에게 시무책(時務策)을 올렸으나 진골귀족의 미움만 받았고, 결국 관직은 6두품이 오를 수 있는 최고 관등인 아찬(阿飡)에 그쳤다.

 

통일신라가 망한 이유를 여러가지로 꼽지만 그 중 하나가 바로 기존 질서에 염증을 느낀 6두품들의 변심을 꼽는다.

 

풍부한 식견과 개혁성향, 미래에 대한 비전을 가지고 있었으나 제대로 가치를 인정받지 못한 채 진골귀족들의 잔심부름꾼 노릇을 하던 6두품들의 민심이반은 결국 후삼국의 분열과 고려창건으로 이어진다.

 

최치원이 골품제의 폐해를 타개하기 위해 올린 시무10조 중 하나를 보자.

 

“천하를 다스리려면 먼저 부정 출세를 막아야 하고, 어진 선비의 진출 길을 막아서는 안 된다.”

 

당시 사회는 그랬다. 부정 출세가 있었고, 어진 선비의 진출이 막혔던 것이다.

 

그로부터 무려 1000년이 지났다.

 

역사와 사회는 발전하고 사람들의 삶은 풍요로워 졌으며, 신분제는 타파된 지 오래다. 하지만 최치원이 시무10조를 올리던 당시와 크게 변하지 않은 게 너무나 많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타고난 배경에 의해 인생이 좌우되는 경우가 너무나 많은 것이다.

 

어떤 이는 “나는 수저를 입에 물고 나오지 않은 무수저였다”며 자신의 치열한 노력과 행운에 의해 성공했다고 자랑하기도 하지만 이는 극단적인 사례일 뿐이다.

 

오늘날에도 버젓이 금수저, 은수저, 흙수저가 거론된다.

 

요즘 젊은이들 사이에 유행하는 말이 “문송합니다(문과라서 죄송합니다)”라는 것이다.

 

취직에서 번번히 미끄러지는 문과생들의 자조섞인 표현이다.

 

이를 패러디한 기사 하나가 눈길을 끈다.

 

‘건국대라 죄송합니다’

 

지난 4일 건국대 학보사 ‘건대신문’ 온라인판에 게재된 기사 제목이다.

 

KEB하나은행이 2016년 신입 행원 공개채용에서 임원면접 점수를 SKY(서울대·고려대·연세대)와 외국 대학 출신에게는 높게 줘 합격시키고, 이들을 제외한 다른 대학 출신에는 낮게 줘 탈락시켰다는 점을 풍자한 표현이다.

 

금감원은 하나·국민·대구·부산·광주은행 등 5개 은행의 채용 비리 의심 사례 22건을 적발해 검찰에 수사를 의뢰했고 곧바로 수사가 시작됐다.

 

일부 은행에서 일어난 일을 가지고 골품제 운운하는 게 과장된 것처럼 보일 것이다.

 

하지만 내 눈에 바퀴 한마리가 발견된 것은 곧 우리주위에 수십, 수백마리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은행 몇 곳의 불법, 탈법은 이미 우리사회에 골품제의 폐해가 만연함을 보여준다.

 

서울소재 대학의 학생들이 이처럼 박탈감을 느낄 때 과연 지역 대학생들의 무력감은 얼마나 클 것인가.

 

최치원이 시무10조를 올린지 1000년도 넘었으나 아직도 우리사회는 눈에 보이지 않는 골품제의 폐해 속에서 신음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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