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순택 논설위원
12세 어린 나이에 중국 당나라로 유학을 떠나 7년 만에 당당히 빈공과에 합격한 최치원(857년~?)은 당대 천재였다. 그는 중국에서 문장가로 이름을 날리면서 명문 ‘토황소격문’을 비롯해 많은 문장과 한시를 남겼고 중국인들은 그를 ‘당송 100대 시인’의 반열에 올렸다. 귀국해서 6두품(六頭品)의 최고위직인 아찬(阿飡)에 올랐으나 진골 귀족중심의 신분체제와 국정의 문란함에 외직을 자원해 886년 태산군(지금의 정읍 태인·칠보)의 태수로 부임했다.
통일신라시대 대문장가이자 정치가인 최치원은 태산태수로 재임하면서 뛰어난 학문과 많은 덕행을 남겼고 이를 기리기 위해 후대들이 광해군 7년인 1615년 칠보면 무성리에 무성서원(武城書院·사적 제166호)을 세웠다. 당초 태산사로 불리다가 숙종 22년인 1696년 사액(賜額)을 받아 무성서원으로 개칭됐다. 흥선대원군의 대대적인 서원 철폐에도 호남에서 정읍 무성서원과 장성 필암서원, 광주 포충사 등 3곳만 헐리지 않았다.
무성서원 주벽에는 최치원의 위패와 초상이 모셔져 있는데 한 때 분실됐던 초상화는 지난 2014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장기대여 형식으로 47년만에 돌아왔다. 배향 인물로는 정극인과 신잠 송세림 정언충 김약묵 김관 등 지역 현인들을 모셨다. 특히 조선 초 문인 불우헌 정극인은 1436년 벼슬에서 물러나 처향(妻鄕)인 태인으로 낙향, 가사문학의 효시인 상춘곡을 지었고 최초의 지역자치 규약인 고현동(古縣洞)향약(1475, 보물1181호)을 만들어 권장했다.
일제 강점기인 1906년에는 을사늑약에 항거하는 병오창의(丙午倡義)가 이곳 무성서원에서 일어났다. 면암 최익현과 둔헌 임병찬 등이 주도한 이 사건은 호남 최초의 항일 의병운동이다. 이를 기려 1992년 12월 정읍지역 유림에서 무성서원 옆에 병오창의기적비를 세웠다.
선비문화와 역사의 숨결이 살아있는 무성서원이 지난 7일 전국 8개 서원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문화 유산으로 등재됐다. 전북에서는 지난 2000년 고창 고인돌과 2015년 백제역사유적지구에 이어 3번째로 세계문화유산을 보유하게 됐다.
신분 계급을 차별하지 않고 누구에게나 학문의 기회를 제공했던 무성서원은 모든 건축물의 높이가 동일하며 마을 중심부에 위치해 지역민의 구심체 역할을 해왔다. 선비정신과 애국충절, 그리고 애향애민이 서려 있는 무성서원이 앞으로 전라북도와 대한민국의 문화 자긍심을 드높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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