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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행 감추려 세운 치적비

권순택 논설위원

삽화=권휘원 화백
삽화=권휘원 화백

지난 11일 동학농민혁명 127주년 기념일을 맞아 농민 봉기의 단초를 제공했던 인물들의 치적비가 관심을 끌었다. 부패한 탐관오리로서 자신의 폭정을 감추려고 지역 곳곳에 송덕비를 세웠지만 오히려 후세들에게 악행의 실상을 알게 만드는 일종의 징계비(懲戒碑)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고부군수 조병갑과 함께 갑오년 농민 봉기를 유발한 5적(敵)으로 꼽히는 균전사 김창석이 대표적 인물이다. 한말 우국지사인 황현이 기술한 매천야록에 따르면 김창석은 전주 아전 집안 출신으로, 대대로 부유하여 그의 전답에서 수확한 볏섬이 1만 석에 달했다. 그는 과거에 급제한 다음 날 고종에게 10만 냥을 상납하여 임금의 은혜에 감사를 표했다. 고종은 그에게 관직을 맡겨 상납하게 하고 누차 승지에 임명되어 수백 냥씩을 갖다 바쳤다.

호남 우도 연해 지방에 해마다 가뭄이 들어 전답이 황폐해지고 나라에 바치는 세금과 방물이 절반으로 줄어들게 되자 고종은 김창석을 균전사에 임명하고 농토를 개간하도록 했다. 하지만 그는 원결을 충당 못하면 그 세금을 자신이 떠맡아야 하므로 지역 부호들에게 이 일을 떠넘기고 남은 일손으로 수답(水沓)을 개간한 뒤 3~5년간 면세 조건으로 농민들에게 경작하도록 했다.

그러나 가을 수확 철이 되자 약속을 어기고 경작자들에게서 세금을 거둬들이고 흉년이 들어도 똑같이 세금을 징수했다. 더욱이 농사짓지 않는 묵정 밭에 세금을 매기는가 하면 농지 면적을 부풀리거나 없는 농지에도 세금을 부과해 백성들로부터 원성이 자자했다. 그러면서 가마를 타고 전라감사가 있는 선화당에 출입하고 뜰 위에 오를 땐 부축을 받아 감사와 같은 예우를 받는 등 거드름을 피웠다고 전한다. 농민 봉기 이후 그는 유배형에 처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풀려났다.

가렴주구를 통해 공포와 원망의 대상이 되었던 균전사 김창석은 자신의 악행을 숨기려고 도내 곳곳에 치적비인 영세불망비를 세웠다. 현재 확인된 것만 완주와 김제 정읍 등에 4기가 있다. 완주 구이면사무소 입구와 소양면 황운리 음식점 앞, 김제 귀신사 입구, 정읍 산외면 야정마을회관 옆에 있다. 구이면사무소에 있는 영세불망비는 애초 수몰된 구이저수지 속 원터마을에 있던 것을 마을사람들에 의해 구이농협 옆으로 옮겨졌다가 지난해 경각심을 고취하기 위해 안내문과 함께 면사무소 앞에 세웠다. 동학농민혁명 기념일을 맞아 농민 봉기를 촉발한 탐관오리들의 행적과 악행을 기억하고 반면교사로 삼기 위한 작업에 나서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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