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세기 전만 해도 보릿고개라 불리며 끼니를 걱정해야 했던 계절, 군산항에 쌀이 무더기로 쌓였다. 농림축산식품부가 지난 17일 군산항에서 ‘FAC(식량원조협약) 쌀 10만톤 원조 출항기념식’을 열었다. 우선 1만5000톤의 쌀을 실은 화물선이 다음달 3일 군산항에서 방글라데시로 출항한다.
빛바랜 흑백사진으로 남아있는 100년 전 군산항의 모습이 오버랩된다. 군산항은 일제강점기 한반도 쌀 수탈의 본거지였다. 곡창 호남평야에서 생산된 양질의 쌀을 반출하던 통로였다. 이 항구의 야적장에 일본으로 반출될 쌀가마니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모습의 옛 사진은 수탈의 아픈 역사를 대변하는 생생한 기록물로 남아 있다. 특히 1926년 일제가 군산항 제3차 축항 기공을 기념해 쌀 800가마니로 거대하게 쌓아 올린 쌀탑 사진은 아직까지도 분노를 유발한다. 하늘 높이 치솟은 쌀탑의 높이 만큼 우리 농민들의 피눈물과 원성이 쌓였을 것이다.
그리고 100년 후, 식량 수탈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군산항에 다시 쌀포대가 쌓였다. 물론 상황은 그때와 많이 달라졌다. 수탈과 착취의 통로가 이제 나눔과 원조의 출구가 됐다. 우리나라는 지난 2018년 유엔 식량원조협약에 가입해 매년 5개국에 쌀 5만톤을 지원해왔다. 그리고 올해부터는 그 규모를 두 배로 늘려 11개국에 쌀 10만톤을 지원하기로 했다.
대형 화물선에 무더기로 실려 나가는 우리 쌀을 바라보는 농민들은 여러 갈래의 생각이 들 것이다. ‘남아도는 쌀이 너무 많아 해외 식량원조 규모를 늘렸을 것’이라는 판단에서 마음이 복잡할 수도 있다. 우리 정부가 개발도상국에 식량을 지원하기로 한 것은 ‘쌀 공급과잉’ 해소 방안의 일환이다. 실제 정부가 2017년 발표한 ‘중장기 쌀 수급안정 보완대책’에 ‘식량원조협약(FAC) 가입을 통한 쌀 해외원조’ 방안이 포함됐다. 그러니 올해 해외원조 규모를 대폭 늘린 것은 남아도는 쌀이 더 늘어난 것도 하나의 이유일 것이다.
대규모 해외 식량원조를 통해 국제사회의 일원으로서 나라의 달라진 위상을 재확인할 수 있었다. 동시에 우리 쌀과 농업의 위상 변화도 다시 확인해야 했다. 민족의 목숨줄이었던 쌀이 어느 순간 공급과잉으로 바뀌면서 가격 폭락을 불렀고, 이는 곧 농업‧농촌의 위기로 이어지고 있다. 기후위기 시대, 식량안보의 중요성이 커지고 있다. 식량이 무기가 되는 시대다. ‘농촌 없는 도시, 농업 없는 국가’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대로라면 지방소멸의 비극은 농촌에서 시작될 게 뻔하다. 이 ‘상실의 땅’에 희망의 씨앗을 뿌리기 위해 정부와 관련 기관‧단체가 쌀 소비 확대 방안을 찾고 있지만 여의치 않다. 해외 식량원조는 여러 면에서 큰 의미가 있다. 식량원조 규모를 늘렸다고 홍보하면서 은근히 국가 자부심을 기대하기보다는 농촌 소멸, 국가 소멸을 부를 수 있는 ‘쌀의 위기’ 해소 방안부터 찾아야 할 것이다.
/ 김종표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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