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터인가 우리의 일상에서 수많은 미디어 기기들이 사라졌다. 카세트테이프 시디플레이어도 그들 중 하나다. LP로부터 카세트테이프를 거쳐 시디로 이어져 온 음악재생 미디어 기기의 쓰임은 수명을 다한 지 오래. 디지털 스트리밍으로 음악을 듣게 되면서 이제 자동차나 노트북에서조차 시디플레이어를 만나기 어렵다. 그나마 시디는 간신히 명맥을 유지하면서 ‘굿즈’란 새로운 쓰임을 얻기도 했지만, LP나 카세트테이프는 영락없이 유물 신세(?)가 됐다.
그런데 일상에서 사라졌던 그들 음악재생 미디어 기기들이 다시 젊은 세대들의 관심을 받고 있다. 케이(K) 팝계에서 불기 시작한 복고 감성, 레트로 바람 덕분이다. 시디플레이어를 포함한 굿즈를 묶어 음반이 나오는가 하면 카세트테이프와 미니어처 LP까지도 등장했다. 어떤 통로로든 버려지고 잊혀진 것들이 다시 돌아오는 이 순환의 풍경을 마주하며 떠오른 공간이 있다.
독일 서남부에 있는 중소도시 칼스루에의 미디어아트센터 ZKM(Zentrum fuer Kunst und Medientechnologie)다. 지상 5층, 길이 500m에 폭이 100m나 되는 이 거대한 건물에는 현대적 미술관과 음악스튜디오, 미디어 뮤지엄, 미디어 도서관과 미디어극장 등 다양한 기능을 가진 공간이 들어서 있다.
ZKM의 전신은 탄약공장이다. 전쟁의 상흔을 고스란히 안고 있는 이곳에서는 2차 세계대전까지 탄약과 화약을 생산했다. 전쟁이 끝나자 기능을 바꾸어 제철소로 활용했다. 그러나 80년대 이후 중공업 제조업체들이 서비스 업종에 진출하면서 제철소의 기능도 중단됐다. 빈 건물로 방치된 지 20여 년. 시는 공간의 쓰임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칼스루에시는 정보과학에 일찍 눈을 떴다. 칼스루에 대학 출신 하인리 헤르츠 박사(‘헤르츠'라는 단위를 만들어낸 과학자)의 영향이 컸다. 새로운 미디어를 주목하고 있던 시는 이곳을 정보 통신, 방송시설, 문화예술 등 3가지 영역을 집적하는 미디어아트센터를 만들기로 했다. 탄약공장을 미디어와 관련된 모든 영역을 통합하는 미디어아트센터로 바꾸는 일은 시민들에게도 큰 환영을 받았다.
시간적으로 소통하고 공간적으로 교류하는 기능을 공간의 가치로 삼은 ZKM은 특별한 공간을 만들었다. 오래전 쓸모가 없어진 낡은 TV나 녹음기 전축 등 다양한 매체기기와 원형을 훼손당한 음반과 비디오테이프를 수집하고 연구하는 공간이다. ZKM은 그동안 세계 곳곳에서 수집한 오래된 음반과 비디오테이프로부터 수만 장의 음향 영상물을 복원해냈다. 밀려오는 새로운 것에만 눈을 돌리지 않고 버려지는 비디오테이프로 미래를 만들어내는 ZKM의 선택은 빛난다. 우리도 얻고 싶은 지혜다./김은정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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